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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98화 (97/229)

98화. 29th. 호주에서 이삭 줍기 (2)

해동물산 사람들이 이성민과 박태진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계약서를 꾸미고 있을 때 제인 레온하트 또한 회사 사람들과 함께 협상을 앞두고 의논하고 있었다.

“어떨 것 같습니까?”

제인 레온하트의 무뚝뚝한 질문에 금발머리의 젊은 담당자 한 명이 힘겹게 입을 열었습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회장님.”

“그런 조건을 받아들일 회사는 없을 겁니다. 5억 불 투자만 해도 우리에겐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모든 개발 비용을 그쪽에 떠넘기다니···.”

갈색머리의 중년 남성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도 세금을 못 낼 만큼 회사가 어려운데 회장이 무슨 소가지로 그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단 말인가?

다른 담당자들까지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간신히 참고 있을 때 제인 레온하트가 담당자들을 쏘아보듯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나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여러분. 동양의 두 재벌이 우리 회사에 서로 러브콜을 보냈어요. 한 곳은 어설프게 접근하다가 나가떨어졌지만 다른 한 곳은 내가 원하는 조건을 내놨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만큼 로이힐과 호프다운스의 가치가 인정받고 있다는 겁니다. 해동그룹이 계약을 받아들이면 우린 손 안 대고 코 푸는 거고, 안 받아들여도 우리 이름값은 높일 수 있으니 향후 투자자 유치에 유리하겠죠.”

임원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표정이 바뀌었다. 동아시아의 재벌들은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족속들이고, 갖고 싶은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는 종자들이 아닌가?

마지막 남은 해동이 나가떨어진다고 해도 호주 금융가 등에서 핸콕 프로스펙팅의 가치를 눈여겨보게 될 테니 길게 보면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그러겠군요. 생각이 짧았습니다, 회장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임원들 모두 제인 레온하트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들 모두 제인 레온하트가 신성의 피부 노란 애송이에게 당한 치욕과 분노를 애먼 해동그룹에게 푼 건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

퍼스의 베이스캠프에서 해동물산 본사와 스탠더드 캐피털 본사 간의 협약을 조율한 우리는 약속시간에 맞춰 핸콕 프로스펙팅을 방문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세스 레온하트.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환갑이 넘었는데도 배재훈의 영어발음은 눈 감고 들으면 원어민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노년기 때보다 날씬한 제인 레온하트의 눈썹이 잠시 들썩거린 걸 보니 통역을 쓰거나 콩글리시를 생각했나본데 한 방 제대로 먹은 것 같았다.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스터 배. 그런데··· 옆에 있는 젊은 분은 누구죠?”

악수를 나눈 제인 레온하트가 나를 힐끗 보고 묻자 배재훈이 손을 놓으며 미소를 띠었다.

“이쪽은 우리 그룹 회장님의 첫째 손자인 이성민입니다. 이 이사, 인사드리게.”

배재훈의 소개에 이어 나 또한 나를 소개했다.

“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미세스 레온하트.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미스터 리. 앉아서 얘기하죠.”

소개를 마치고 손을 내밀자 제인 레온하트가 손을 잡았다.

제인 레온하트(Jane Leonhart).

원래 이름은 제이나 호프 핸콕(Jaina hope hancock)으로 핸콕 프로스펙팅의 창업자 론 핸콕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자 핸콕 프로스펙팅의 2대 오너다.

학창시절에는 수줍은 소녀였던 레온하트는 아버지가 사별한 어머니를 외면하듯 필리핀 가정부와 재혼하자 아버지의 친구인 고문변호사 케네스 레온하트와 결혼, 론 핸콕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어디 그뿐인가.

론 핸콕 사후에는 계모와 10여 년 넘게 유산 상속 소송을 벌였고, 주변 지인들에게 이 모든 가정사를 비밀에 부치게 강요했을 만큼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의 손은 거칠었고, 여자라기엔 악력이 꽤 강했다. 직접 현장에서 광맥을 탐사할 만큼 고생한다는 게 사실인 것 같았다.

그 뒤로도 양측 담당자들의 간단한 악수가 이어졌고, 분위기를 푼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서 협상을 시작했다.

“저희 측 제안, 어떠십니까?”

“기본 조건은 귀사 측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겠습니다. 핸콕 프로스펙팅 채권 1억 불, 로이힐 홀딩스와 호프다운스 홀딩스에 유상증자로 2억 불씩, 맞습니까?”

제인 레온하트는 배재훈에게서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되물음을 받고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은 꿈도 못 꿀 5억 달러, 그것도 1억 달러는 사업과 상관없는 핸콕 프로스펙팅에 싼 값으로 빌려달라는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여서일까?

핸콕 측 담당자들이 애써 표정을 관리하거나 상기된 얼굴을 식히려 물을 마시고 있을 때 제인 레온하트가 입을 열었다.

“추가 조건은 어떡하실 겁니까, 미스터 배?”

그녀의 눈에서 우리를 얕보는 게 느껴졌다. 현재 물가를 감안해도 2,30억 달러 가량 투입해야 할 사업을 니들이 감당할 수 있겠냐고 비웃는 것 같았다.

그 눈빛을 보고도 배재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제인 레온하트의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그 조건을 재조정해볼까 합니다, 미세스 레온하트. 이 이사.”

“네, 대표님.”

나는 손에 들고 온 007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 안에서 꺼낸 제안서를 제인 레온하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우리 측에서 준비한 제안서입니다. 보면서 얘기하죠, 미세스 레온하트.”

제인 레온하트는 내가 내민 제안서를 펼쳐봤다. 바위처럼 딱딱한 눈빛으로 서류를 훑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배재훈을 바라봤다.

“미스터 배?”

“어떻습니까, 미세스 레온하트? 맘에 드십니까?”

배재훈이 한쪽 입꼬리를 더 높게 끌어올려도 제인 레온하트는 화를 내기는커녕 아무 말도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입이 벌어졌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

“우리 해동물산은 조만간 노스 리미티드를 인수할 계획입니다. 노스 리미티드를 인수하면 담당자들을 파견해서 탐사를 도와드리죠.”

이어지는 배재훈의 말에 핸콕 측 담당자들이 눈을 크게 뜨거나 입을 떡 벌렸다. 1위인 BHP나 2위인 리오틴토에 비하면 보잘 것 없어도 호주 3위의 광산회사를 인수하고 탐사를 도와주겠다니 얼마나 놀랐을까?

그런 그들의 꼴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배재훈은 제안서의 핵심을 짚어주기 시작했다.

“또한 2000년도에 노스 리미티드와 스탠더드 캐피털이 합작투자해서 두 광산을 연결할 철도와 항만을 짓고, 수송열차까지 들여서 철광석을 운송할 자회사를 세울 겁니다.”

이 정도만 말해도 저쪽 또한 계산이 섰을 것이다. 올해를 포함해서 5년 뒤에야 삽을 뜨겠지만 자신들은 광산 플랜트 건설비용만 융자받으면 된다는 게 아닌가?

한참동안 말이 없던 제인 레온하트가 서류를 내려놓고 어느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철도와 항만 이용료는 얼마입니까, 미스터 배? 연매출 기준으로 잡으셨던데.”

“연매출의 3퍼센트입니다. 어떠십니까?”

3퍼센트라는 말에 제인 레온하트를 비롯한 담당자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광산의 평균 수명은 대략 20년 내지 30년.

현재 철광석 시세를 고려하면 우리가 호구로 보이겠지만 제반시설을 모두 만들고 나면 중국발 원자재 슈퍼 사이클의 초입이다.

현재 톤당 16달러인 철광석은 2005년 하반기부터 광산메이저들의 담합으로 40달러가 된다. 2011년경에는 160불까지 찍고, 그 뒤로도 60불 이상을 유지한다.

그러니 매출의 3퍼센트만 이용료로 받아도 10년 내에 원금을 회수할 수 있고, 향후 우리가 독자 개발할 철광산들과의 철도 연결까지 고려하면 이 조건은 우리가 매달려야 했다.

침묵하는 제인 레온하트에게 배재훈이 다른 조건을 짚어줬다.

“광산 플랜트 공사는 2000년도부터 추진하되 해동건설이 맡을 겁니다. 향후 해동제강이 고로(高爐, 용광로) 사업자가 되면 국제시세의 80퍼센트로 철광석을 공급하고, 해동물산에 해운 계약 우선권을 부여하며, 공사 개시 전까지 5억 불 투자 외에는 대외비를 유지해야 하고요. 이의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미스터 배. 가장 큰 부담을 떠안아주셨으니 그 정도는 양보해야죠.”

꽤나 까다로운 조건이었지만 항만과 철도 문제를 우리가 떠안은 것을 인정했는지 제인 레온하트는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만년필 뚜껑을 땄다. 만년필을 쥔 그녀의 손이 제안서에 닿았고, 괄호 안에 ‘3’이 적혔다.

그 모습을 보고 양쪽 담당자들 모두 화색이 돌았다. 핸콕 측은 비용부담을 줄이면서 광산을 만들게 됐고, 해동그룹은 향후 호주 자원개발 사업의 토대들 다지게 되지 않았나?

스탠더드 캐피털도 투자수익과 출구전략을 확보하고 투자하게 됐으니 모두가 좋은 거래였다.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그럼 자세한 검토는 담당자들에게 맡기도록 하지요.”

“그러시죠.”

이제부터는 양쪽의 법률 담당자들이 나설 차례다.

해동물산 측 담당자는 한숨을 내쉬고, 핸콕 측 담당자는 입이 찢어지겠지만 우리가 제안한 사업이니 최종 계약서는 수월하게 만들어질 것이다.

***

며칠 뒤.

세부사항들을 조율해서 핸콕 측과의 최종 계약을 체결하고 시드니로 이동한 우리는 호주법인에서 수집한 자료를 살펴봤다.

“킹스, 파이어 테일, 클라우드브레이크, 크리스마스 크릭··· 전부 품질이 낮아 방치됐지만 매장량이 좋군요.”

“예, 이사님. 회장님과 대표님께서 핸콕 프로스펙팅과 노스 리미티드에 관심을 보이셔서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준비했습니다.”

마영민 이 사람, 괜찮은 사람 같다.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해도 중간은 갈 텐데 필바라 일대의 철광 탐사 현황을 정리해둔 걸 보면 일욕심도 많고 의욕도 넘치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서 보고서를 두 부 더 복사해오라고 했다. 복사를 마치고 돌아온 담당자는 사본 두 부를 배재훈과 박태진에게 하나씩 건네줬다.

첫 장을 천천히 살펴보던 배재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호주 철광 사업 진출 때문에 관련 원서나 리포트를 수능 공부하듯 읽었던 양반이니 각 광산에서 나는 원광석을 섞어 순도를 맞추면 된다는 건 금방 알 것이다.

배재훈이 빠른 속도로 훑어보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소리치듯 물었다.

“자네, 이걸 알고 철도와 항만을 쥐려고 한 건가?”

“아닙니다, 대표님. 처음 본 자료입니다. 어떻게든 회장님과 대표님께서 사업을 따내셨으면 해서 생각해냈는데 운이 좋았네요, 하하.”

겸손한 미소를 띠며 웃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번 생의 나는 이 자료를 처음 본 사람이니.

나를 바라보던 배재훈의 표정이 놀람에서 대견함으로 바뀌었다.

“자네 같은 효손도 없을 걸세. 회장님께 효도하겠다고 애써서 초대 회장님과 이 사장 내외가 도와준 걸 게야.”

“감사합니다, 대표님.”

배재훈이 흐뭇해하는 표정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영등포 재개발 때 서먹서먹했던 감정은 이걸로 충분히 해소될 것 같았다.

박태진은 나와 배재훈을 밝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되면 그 네 개 광산 개발권도 가져와야겠군. 마 이사, 여기 적힌 대로 3억 달러면 전부 가져올 수 있겠나?”

“충분히 가능합니다, 대표님. 안 돼도 되게 하겠습니다.”

마영민의 눈이 번뜩이는 걸 보고 배재훈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그 네 개 광산 개발권도 확보해. 회장님께는 내가 말씀드리도록 하지.”

배재훈이 마영민에게 내린 지시를 듣고 박태진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렇게 되면 향후 개발을 고려해서 철도와 항만 규모도 크게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대표님. 철광석 순도를 조절할 블렌딩 시설도 필요할 것 같고요.”

“그래야겠지. 장기적으로 보면 중국이 크면서 원자재 값이 많이 뛸 테니 수익은 충분할 게야. 부회장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어, 으하하.”

배재훈이 호탕하게 웃자 마영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축배가 빠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대표님. 괜찮으시면 회식 자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거 좋지! 오늘 저녁엔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자고, 으하하!”

좋은 거래를 땄으니 회식이 빠질 수야 있나. 오늘은 취하도록 마셔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호주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는 후속 작업에 착수했다.

해동물산은 핸콕 프로스펙팅의 채권과 호프다운스 홀딩스와 로이힐 홀딩스의 지분 50퍼센트씩을 인수한 뒤, 노스 리미티드에 인수를 제안했다.

기존 임직원들은 해동물산을 침략자 취급했으나 기존 경영진 이하 임직원들의 고용 보장을 약속하자 주식공개매수 방식의 인수까지 찬성하겠다며 태도를 바꿨다.

협상을 마친 뒤, 해동물산은 호주 증시에서 노스 리미티드에 대한 주식공개매수를 선언했다. 스탠더드와 트라이엄프 양측은 페이퍼컴퍼니들을 통해 확보한 주식 중 30퍼센트씩 총 60퍼센트를 40거래일 간 순차적으로 매각했다.

호주 정치권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극소수의 정치인들만 반대를 외쳤지만 인수 당사자 양측이 호의적인 조건을 주고받은 데다 로비를 통해 돈까지 찔러줬으니 어쩌겠는가? 인수 승인은 신속하게 처리되며 종지부를 찍었다.

여기에 마영민을 비롯한 호주법인에서 킹스, 파이어 테일, 클라우드브레이크, 크리스마스 크릭 광산 지분 100퍼센트까지 3억 달러에 몽땅 가져오면서 해동물산은 호주 원자재 시장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해동물산, 대한민국 종합상사의 기치를 호주에서 높이다!

해동물산은 지난 6월부터 이번 8월에 걸쳐 호주의 핸콕 프로스펙팅의 호프다운스 철광과 로이힐 철광 개발권 확보, 노스 리미티드 인수, 그 외 4개 철광 개발권 인수를 마쳤다. 이는 자원빈국인 대한민국의 미래에 보탬이 될 사업으로···.]

“허허, 형만이 이놈이 우리 집안에 금칠을 해주는구먼.”

이대수는 동양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고 껄껄 웃은 뒤, 전화 한 통을 걸었다.

“고 사장인가? 나 이대수일세.”

[강녕하셨습니까, 어르신?]

“자네가 금칠해준 덕분에 내 피부가 숨을 못 쉬겠어! 이리 추켜 세워주면 노인네 어지러워, 으허허허!”

이대수의 너털웃음에 고형만도 껄껄 웃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이번 기사, 아버지가 신경 써서 올리라고 해서 준비했습니다.]

“허허, 고 회장이 그리 말했다고?”

[예, 어르신. 자원이 없어서 서러운 이 나라에 보탬이 될 일을 해내셨잖습니까? 아버지가 주문하지 않았어도 제가 신경 썼을 겁니다.]

과정이야 지저분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해동물산의 호주 원자재 시장 진출은 자원빈국인 대한민국의 설움을 달래줄 쾌거였다. 무엇보다 고 씨 집안의 언론사업과 교육사업을 도와준 해동물산이 해냈기에 고형만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리 생각해주니 고마우이, 고 사장. 내 회사에 일러서 이 건으로 동양일보에 한 달 간 전면광고 내라고 함세.”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한 달 간의 전면광고면 무시할 수 없는 건수다. 광고로 먹고 사는 신문사, 그것도 만년 3등인 동양일보에게는 가뭄 속 단비 같으니 고형만의 목소리가 날아갈 것처럼 높아졌다.

주고받는 웃음이 잦아들었고, 이대수가 홍차 한 모금을 마시며 미소를 띠었다.

“고 사장, 우리 둘째 어떤가?”

[이 부회장 말씀이십니까?]

“아니, 내 둘째 손주 말일세. 요즘 자네 큰딸하고 연애하고 있다고 우리 차남한테 들어서 말이야, 으하하.”

이대수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고형만도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중하면서도 위트가 있는 게 남자다워서 좋다고 합니다. 데이트 끝날 때면 늘 집에 데려다준다고 하고요.]

현재 이대수의 둘째 손자이자 이명진의 장남인 이성문과 고형만의 장녀는 연애 3개월째였다. 둘 다 서울대 재학 중인데다 외모도 준수하고, 품행도 단정해서 양 집안에서 작정하고 단체미팅 형식으로 두 남녀를 엮은 것이었다.

“호오, 고놈이 시커먼 놈들만 있는 공대생이라 걱정했는데 다행이구먼, 으허허.”

[아닙니다, 어르신. 제 큰 여식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고형만의 겸양에 이대수가 미소를 띠었다.

“웬 걸. 자네 큰딸 사진 봤는데 그런 처자가 내 둘째 손주며느리가 되면 바랄 게 없으이. 걱정 말고 두 아이 청춘사업 잘 도와주게나.”

[어여삐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대수는 고형만과의 통화를 끊은 뒤, 고승주에게 연락해서 동양일보 전면광고 계약을 지시하고 전축을 틀었다. 늘 그랬듯 그가 듣는 곡은 죽은 장남 내외가 만든 노래였다.

“성민이부터 장가보내면 애비가 바랄 게 없겠구나. 명우야, 미연아.”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은 이대수가 장남, 그리고 딸 같던 맏며느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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