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29th. 호주에서 이삭 줍기 (1)
나를 보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 이사.”
“네, 회장님.”
호칭이 바뀐 걸 보니 업무지시 같았다. 설마?
“핸콕에서 광산 지분 팔겠다고 하면 배 대표하고 호주 다녀오도록 해. 박 이사도 같이 다녀와.”
“회, 회장님?”
믿을 수가 없었다. 광산 지분을 매각하겠다고 하면 계약은 사실상 성사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나까지 보내겠다니?
할아버지는 눈을 깜빡거리는 나와 박태진을 보며 껄껄 웃었다.
“배 대표하고 풀 게 있지 않느냐? 바람 쐰다 생각하고 다녀오너라.”
“회장님···.”
껄껄 웃는 할아버지를 배재훈이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저번 일로 나와 사이가 틀어질 뻔해서 부탁한 건가?
두 영감님을 번갈아 바라보던 중 배재훈이 헛기침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지난번 일은 미안하게 됐네, 이 이사.”
“아닙니다, 대표님. 이유부터 말씀드리고 본론을 말씀드려야 했는데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른이 아이에게 사과한다는 건 보통 용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할아버지 다음으로 연장자인 배재훈의 사과에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자네가 자네 스스로를 저당 잡히면서까지 집안과 그룹을 위하는 걸 보니 면목이 없더군. 앞으로는 자네 말을 경청하도록 함세.”
이러면 곤란하다. 스탠더드 캐피털이 내 회사라는 걸 알면 어떻게 나올지 걱정됐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대표님.”
이 자리에서의 예의는 지켜야 했기에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올리자 할아버지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두 사람 모두 지난번 일은 깨끗이 있도록 해. 이삭 주울 신호 떨어지면 얼른 다녀와.”
“네, 회장님.”
이번에 얻어낼 호프다운스와 로이힐 지분 50퍼센트, 호주에서 황금빛 밀밭을 만들 두 알의 이삭이 될 것이다.
***
해동그룹이 이삭줍기를 준비하고 있을 때 장용재는 생전 처음으로, 앞으로도 둘도 없을 쓴맛을 보고 힘없이 김포공항 입국장을 넘어섰다.
“고생했습니다. 회식은 다음에 하죠.”
“죄송합니다, 상무님.”
허리까지 숙인 담당자들을 뒤로 한 채 장용재는 곧바로 성의원에 찾아가서 장호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장용재는 아버지의 굳은 얼굴을 쳐다볼 엄두도, 아버지라고 부를 엄두도 못 냈다. 장남이라는 놈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버지가 앉은 의자의 주인이 되어야 할 놈이 개망신도 그런 개망신을 당하고 돌아오지 않았나?
장호건은 꿇어앉은 무릎 위에 주먹을 올리고 고개를 숙인 장남을 굳은 눈빛으로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장호건이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뭘 잘못했다고 생각하느냐?”
“네?”
“이번 사업에서 뭘 잘못했는지 되짚었냔 말이다.”
장용재는 잠시 들었던 고개를 다시 숙이고 이번 협상에서 뭘 잘못했는지 복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왔다. 대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마음이 아픈 여자를 위로해준 게 죄란 말인가?
한참이 지나도 답을 내지 못하는 아들을 향해 장호건이 답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용재야.”
“예, 회장님.”
“애비가 젊었을 때 사재 털어서 대한반도체 인수했던 거, 기억하느냐?”
“네. 그 덕분에 신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지 않았습니까?”
대답을 하던 장용재는 아버지의 쓴웃음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장호건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애비가 대한반도체를 인수한지 얼마 안 되고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것도 기억하느냐?”
“그래도 그건 시대의 숙명이 아니었습니까? 선발주자들이 있는데 처음부터 어떻게 승승장구할 수 있겠습니까?”
장용재가 당치도 않다는 듯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도 장호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 회사, 어떻게 됐지?”
“신성전자에 흡수합병···.”
말끝을 흐리던 장용재의 눈이 커졌다.
“선대 회장님께서 일부러 합병하신 겁니까? 지워버리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도전하는 것 같았지만 장용재는 자신의 생각을 모두 털어냈다. 어설프게 대답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죽은 할아버지 장병호라면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으니.
장호건은 그때서야 아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씁쓸함을 머금은 채로.
“돌아가신 네 조부님, 늘 성공만 하시던 분이었다. 내 실패가 당신 인생에 오점이라 생각해서 대한반도체를 신성전자에 흡수시킨 거다.”
“회장님···.”
장용재는 말을 잇지 못하고 참담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런 잔인한 속사정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그 뒤로 네 조부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누구든 벼락처럼 화를 내셨다. 지적이든, 위로든 말이다.”
아버지의 씁쓸한 실패담을 듣던 중 장용재의 눈이 커졌다.
“그럼, 제인 레온하트도···?”
“똑같을 거다. 그 여자의 죽은 아비와 계모의 관계, 계모와의 소송은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 아무도 알지 않기를 바라는 과거였을 것이야.”
장용재의 얼굴에 낙담이 뒤덮였다.
좀 더 생각해보면 찾을 수 있는 답이었는데 성급함에, 자신감에 취해 일을 그르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회장님.”
“애비는 대한반도체 이후로 매사에 준비와 복기를 거듭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으니 이번 일을 교훈 삼아서 여러 각도로 바라보고 움직이도록 해. 두 번은 안 될 것이야.”
무겁게 말했지만 장호건은 자신처럼 굳은살이 배이게 될 장남이 착잡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
그로부터 얼마 뒤.
나와 배재훈, 박태진, 그리고 해동물산 상사부문 담당자들과 시드니의 해동물산 호주법인 담당자들은 비행기를 타고 호주의 퍼스로 모였다.
호주.
평범한 사람들에겐 에어즈 록, 캥거루, 코알라, 호주산 청정우, 수려한 자연환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업가들에게 호주는 자원의 보고로 유명한 곳이다. 철광석, 석탄, 구리, 아연, 석유, 천연가스는 말할 것도 없고 리튬과 셰일가스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으니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런 호주에서 제인 레온하트는 호주 최대의 단일 철광산인 로이힐, 로이힐보다 작아도 수익성이 좋은 호프다운스 철광산 개발권을 소유한 핸콕 프로스펙팅의 오너다.
훗날 로이힐과 호프다운스를 두 기둥 삼아 ‘광산제국의 여제’, ‘세계 최고의 여성 갑부’로 군림할 이 여자가 협상에 응했기에 우린 지금 퍼스의 한 호텔을 베이스캠프 삼아서 협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얼마를 원하는 것 같나?”
“핸콕 측 실무진이 귀띔해줬는데 미국 달러로 5억 달러는 기본으로 맞춰야 합니다.”
회의용 테이블 상석에 앉은 배재훈은 오른쪽 바로 아래에 앉은 마영민의 보고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5억 불이면 우리가 상정한 최대치군.”
“예. 핸콕에서 호프다운스 홀딩스와 로이힐 홀딩스를 자회사로 설립하면 우리 측에서 유상증자로 2억 달러씩 납입하고 나머지 1억 달러는 핸콕 프로스펙팅에서 발행할 연이율 6퍼센트의 10년 만기 채권을 인수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마영민이 전해준 핸콕 측 조건을 듣고 나와 배재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그룹도 해동물산과 해동종금에 남이 끼어드는 걸 원치 않아서 두 회사의 증시 상장을 막지 않았나?
“그런 조건이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네. 다른 조건은 뭔가?”
“그게···.”
마영민이 말끝을 흐리자 배재훈이 푸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담 놓고 말하게, 마 이사. 이번 일은 회장님 이하 그룹 수뇌부에서 전폭적으로 밀고 있는 일일세. 나 또한 회장님께 전권을 위임받고 왔으니 걱정 말게.”
배재훈의 사람 좋은 표정에도 마영민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광산 개발에 필요한 자금조달 일체를 우리 측에서 보증하라는 것입니다.”
“뭐라고?”
배재훈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마영민을 비롯한 호주법인 담당자들이 고개를 숙였고, 박태진을 비롯한 본사 사람들도 침음성을 흘렸다. 광산 인프라 건설비용에 필요한 대출을 죄다 우리가 보증하라니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쿵!
“이런 망할!”
배재훈이 고성을 지르며 주먹 쥔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아직도 세금을 못 내서 빌빌거리는 회사가 미국 달러 기준으로 40억 달러가 넘는 현금을 쥔 해동물산에 배짱을 부리니 얼마나 분할까?
배재훈은 옆에 있던 컵을 잡고 물을 들이켰다. 얼음물을 단숨에 마신 것도 모자라 얼음까지 입에 털어 넣고 으드득 소리가 나게 씹어 먹었다. 그걸 보고 나를 비롯한 모두들 마른침만 삼키며 숨을 죽였다.
으드득 소리가 멈출 무렵 배재훈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장 끌어오라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향후 5년 내에 사업을 추진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자금조달 문제만 해결되면 광산 인프라 공사 일체를 해동건설에 맡기겠다고 했고요.”
마영민의 대답을 들으니 마냥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잘만 하면 해동물산에 돈벌이가 하나 더 생길 것 같았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나는 배재훈을 불렀다.
“대표님.”
“무슨 일인가, 이 이사?”
“선 대표님에게 연락해도 되겠습니까?”
허락을 구하자 나를 바라보는 배재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네 혹시···?”
“선 대표님 통해서 본사에 부탁하겠습니다. 박 이사님도 같이 다녀왔으면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이 사람아, 저번에도 그랬는데 또 그러면 내가 회장님 뵐 면목이···.”
배재훈이 난색을 드러냈지만 나는 그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괜찮습니다, 대표님. 스탠더드에도 충분한 이익이 될 사업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니 가능할 겁니다.”
“···다녀오게.”
머뭇거리던 배재훈의 수락을 받고 우리 둘은 복도로 나갔다.
“이번 공사, 최소한 30억 달러는 깨질 겁니다. 스탠더드 운용자산의 3할이 넘는데 괜찮으십니까?”
박태진이 우려 섞인 눈빛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과 그룹이 있어야 내가 있어요, 형. 가족들, 대표님, 담당자 분들까지 모두 우리 집안, 우리 그룹 사람들이잖아요?”
내가 벌 돈은 전부 우리 집안과 해동그룹을 일으키고 신성그룹과 장 씨 가문을 짓밟을 전쟁에 쓰려고 모으는 군수물자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쓰지 않고 모아두기만 하는 군수물자가 군수물자인가?
“5년 뒤에 써야 한다면 시간은 충분해요. 미국 증시도 수익률이 좋으니까 걱정 없어요, 형.”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굳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를 마주하며 박태진이 미소를 띠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래도 그룹을 생각하신다면 이자율을 낮게 잡아야 할 텐데···.”
나는 박태진이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는 걸 보고 해결책을 알려줬다.
“광물 운송철도에 항만까지 이번에 인수할 노스 리미티드와 스탠더드가 50퍼센트씩 합작할 자회사로 만들어서 관리하려고 해요. 자금은 전부 스탠더드에서 지원할 거고요.”
호프다운스와 로이힐을 이을 철도를 내륙으로 연장하면 10여년 뒤에 개발될 철광산들까지 닿는다.
그 광산들은 현재 원자재 시세에서 수지타산이 안 맞아 방치됐지만 중국의 경제성장에 따라 철광석 시세가 폭등하면 호주의 FMG 사가 개발할 것이다. 이번 생에는 그 광산까지 싹쓸이할 테니 철도와 항만은 우리가 틀어쥐어야 한다.
차마 이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었지만 박태진의 눈이 번쩍거렸다. 입꼬리도 슬쩍 올라가는 게 청신호가 뜬 것 같았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어때요?”
“그렇게 하시면 투자비용은 배당이나 채권으로 회수할 수 있을 겁니다. 향후 지분 매각으로 차익을 남길 수도 있고요.”
“그렇죠? 후후.”
내가 지금 짜낸 방법은 호주의 투자은행인 맥쿼리그룹이 한국에서 고속도로나 터널 등을 가지고 했던 짓과 같은 짓이었다. 돈이 없는 제인 레온하트로서는 가장 무거운 짐을 우리가 가져가는 걸로 보일 테니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형님께서도 동의하실 겁니다. 스탠더드에도 이익이 될 방법이니까요.”
나는 처음과 달리 시원시원한 표정의 박태진을 보며 씩 웃은 뒤, 선해철에게 전화를 걸어 현지 사정을 전했다.
[그거 괜찮은데?]
“삼촌?”
선해철의 입에서 대번에 오케이가 나올 줄은 몰랐다. 내 사업계획에 불안해했던 양반이 웬 일일까?
[보통 괜찮은 게 아냐. 그 모델, 공공 인프라에 도입하면 돈 좀 되겠어! 고맙다, 흐흐!]
“아닙니다, 삼촌. 대표님께서 전화하실지 모르니까 입만 맞춰주세요. 계약서도 준비해주시고요.”
역시 선해철도 꾼이었다. 인프라 펀드 사업모델을 금방 파악하다니. 남은 건 배재훈의 콜인가?
***
방에 들어간 우리는 스탠더드 캐피털의 투자를 약속받으면서 철도-항만 자회사 설립 계획을 알렸고, 배재훈 이하 담당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인가, 이 이사?”
“네, 대표님.”
담담히 말하는 나를 보며 배재훈이 탄성을 흘렸다.
“이거 번번이 이 이사한테 짐만 지우는 것 같구먼.”
이 정도 짐이야 아무 것도 아니다. 집안과 그룹 사람들 모두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만큼 가장과 오너에게 중요한 책무가 어디 있는가?
“아닙니다, 대표님. 본사에서 저를 신뢰해줘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도 자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배재훈이 나를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봤고, 이 자리에 있는 담당자들도 우려 섞인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총수의 장손이 남의 집에 저당 잡히는 걸로 보여서일까? 이들의 짐을 덜어줘야 할 것 같았다.
“이번에 미국 증시에 상장된 야후, 저와 박태진 이사, 선해철 대표의 작품입니다, 대표님.”
“야후?”
내 말이 나오자 배재훈을 담당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박태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바라봤지만 나도 머리가 없는 놈이 아니라서 필요한 만큼만 드러낼 생각이었다.
“재작년 1월이었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 선 대표님과 캘리포니아에 갔는데···.”
스탠포드 대학에 가서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를 만났고, 그들과 함께 피자를 먹으며 야후 창업을 이끌어냈다는 것만 밝히자 배재훈의 눈이 커졌다.
“사실인가, 박 이사?”
“예, 대표님. 당시에 이 이사와 선 대표님, 저, 이렇게 셋이서 두 사람에게 창업을 제안한 덕분에 지금의 야후가 탄생했습니다.”
내가 썰을 푸는 걸 보면서 박태진도 내 의도를 파악한 것 같았다. 그 또한 내 투자금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꺼냈으니 의심받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스탠더드가 이 이사를 놓치기 싫었던 게로구먼?”
“과찬이십니다, 대표님. 그래도 본사에서 저를 입도선매한 걸 고려하면 좋은 조건으로 자금조달이 가능할 겁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총수의 장손이 외국의 대형투자회사에서 인정받는 게 확인돼서일까? 배재훈뿐만 아니라 담당자들의 얼굴에 미소가 만발했다.
“그 여편네 코를 콱 찍어 누르겠구먼, 으하하!”
호탕하게 웃는 배재훈의 심정이 내 심정이었다.
기다려라, 제인 레온하트.
지금 뻗댄 대가는 수십 년 동안 우리 집안에게 토해내야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