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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95화 (94/229)

95화. 28th. 원 샷, 멀티 킬 (4)

30분 뒤.

팩스가 특유의 기계음을 내며 종이를 뱉어냈고, 기계음이 멈추자 앞에 있던 담당자가 깔끔하게 뜯은 종이를 1장 단위로 잘라서 서류로 묶어 장용재에게 내밀었다.

“수고했어요.”

장용재는 서류를 받아서 무슨 내용이 적혔는지 살펴봤다.

“···죽은 아버지가 필리핀 가정부와 재혼?”

너무 튀는 내용이라 장용재는 중얼거리며 읽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을 보니 가관도 아니었다. 그 계모와 제인 레온하트가 핸콕 프로스펙팅의 창업자로 고인이 된 론 핸콕의 유산을 두고 법정분쟁 중이라니?

서류를 다 보고 장용재가 손뼉을 두어 번 쳤다.

“다들 회의실로 가죠.”

장용재는 막내직원에게 복사를 맡긴 뒤, 회의실에 들어가서 상석에 앉았다. 뒤이어 들어온 직원들은 막내직원이 나눠준 서류에 적힌 망측한 내용에 눈살을 찌푸렸다.

“불미스러운 내용이지만 방금 전에 호주에서 날아온 정보입니다. 수백만 달러나 들여서 뽑아냈으니 잘 이용해봅시다.”

장용재가 스타트를 끊자 담당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연봉을 다 합쳐도 그 돈의 십분 지 일이 안 된다. 잘못하면 이 자리에 앉은 모두 목이 달아날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일까?

장용재는 바짝 긴장한 담당자들을 보며 손을 내저었다.

“긴장 풀고 좋은 방법을 생각합시다. 이 소스를 가지고 핸콕의 지분을 얻어낼 방법을요.”

장용재의 주문에 한 담당자가 손을 들었다.

“말 해봐요.”

“진주목걸이는 필수 준비품 같습니다. 당사자가 진주를 좋아한다고 하니 선물로 건네주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건 당연한 준비입니다. 더 중요한 건 제인 레온하트와 그 계모의 관계를 어떻게 잘 활용할지가 아닐까요?”

“죄송합니다, 상무님.”

장용재의 날카로운 질문에 담당자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도 여러 담당자들이 의견을 내놨지만 장용재는 성에 차지 않았다.

“여러분들은 신성물산 상사부문에서 가장 뛰어난 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새로운 접근법을 찾아보죠. 거래는 마음을 움직이는 거라고 회장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장용재가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을 때, 한 담당자의 눈이 커졌다.

“마음입니다, 상무님!”

“마음이 뭐요?”

“그 전에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상무님.”

“뭐죠?”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바짝 긴장한 담당자의 표정을 보고 장용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는 달든, 쓰든 구성원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아버지에게서 배우지 않았나?

“그러죠.”

“감사합니다, 상무님. 현재 우리가 제인 레온하트의 소송을 도와줄 방법은 없습니다. 히트맨을 써서 계모를 처리할 수도 없고요.”

과격한 발언에 장용재의 눈꼬리가 잠시 올라갔지만 그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눈매를 가다듬었다.

“계속해요.”

“예. 그러니 우리는 제인 레온하트의 정신적인 상처를 위로하는 쪽으로 접근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위로라···.”

말끝을 흐리는 장용재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지자 담당자가 눈빛을 굳히고 본론을 꺼냈다.

“예. 친구 중에 서울대 심리학과 출신이 있는데 정신적인 상처를 치료하는 데 꽃이나 그림 같은 게 좋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 말을 듣고 장용재의 눈이 번쩍거렸다. 이런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올 줄이야!

장용재의 밝아진 표정을 보고 담당자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보고를 계속했다.

“예. 심리치료 방법의 한 종류라는데 인수 제안을 할 때 상무님께서 직접 선물을 건네주시면서 위로의 말씀을 건네주시면 협상이 수월할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요?”

장용재가 높아진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담당자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상무님처럼 준수한 외모와 매너까지 더해지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흐음···.”

공치사를 걷어내면 자신을 내세워 비벼보자는 제안이었지만 장용재는 가벼운 톤의 침음성을 흘렸다.

현실적으로 이방인이 현지인들 간의 소송에 개입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그렇다면 접근해야 하는 사람을 위로해주면서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지분을 따내는 게 최선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대로 진행하죠. 단.”

장용재가 끊었던 말끝을 이어갔다.

“보안 유지 철저히 하세요. 비서실에도 알리면 안 됩니다.”

“그, 그래도 비서실 승인이 없으면···.”

당황한 담당자를 보며 장용재가 손을 내저었다.

“비서실로 넘기면 공은 그 사람들 차지가 됩니다. 우린 그저 상여금이나 받고 끝날 테고요. 돈만 받고 끝낼 겁니까?”

장용재의 말을 듣고 담당자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들을 간택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차기 총수의 측근으로서.

장용재는 그들의 상기된 얼굴을 보며 미소를 띠었다.

“난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과 오래 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내 말대로 하세요. 회장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들만 데리고 갈 것은 아니지만 장용재는 이번 일의 공을 절대 비서실, 정확히는 이수한에게 넘기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신의 탄탄대로를 위해 외가가 만들어놓은 인맥들을 모두 쳐내지 않았나?

완전히 믿는 외가는 아니지만 외가에서 만들어온 인맥이 이수한의 칼춤에 쑥대밭이 됐으니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보필할 측근들을 만들어둬야 했다. 장용재는 이번 사업을 통해 긴 호흡으로 성의원 입성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는지 모두들 크게 대답했다.

“네, 상무님.”

“지금부터 준비 철저히 하세요. 준비가 끝나는 대로 내가 직접 퍼스에 가겠습니다.”

장용재의 얼굴에는 반드시 해내겠다는 각오가 새겨져있었다.

***

며칠 뒤.

나는 장용재의 연락을 받고 곰탕집에서 그와 점심을 먹고 있었다. 각자 곰탕 뚝배기 하나를 끼고 부지런히 숟가락질을 하면서 수육과 깍두기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에 넣고 있었다.

“천천히 먹어라, 이 이사야. 아무도 안 쫓아와, 인마.”

“빨리 가서 일해야지. 지금도 증시는 계속 움직이는데, 장 상무님.”

나는 밥을 먹느라 숙였던 고개를 들고 장용재에게 대꾸한 뒤, 부지런히 곰탕 속 밥알들을 고기조각과 함께 떠먹었다.

일본증시와 달리 한국증시는 미국증시처럼 점심시간이 없다. 때문에 어지간한 증권맨들은 밥을 마시다시피 하거나 핫도그, 샌드위치, 커피, 주스 따위로 점심을 때운다.

나야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일부러 부지런히 밥을 먹었다. 저 눈치 빠른 장용재를 방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왜 사서 고생 하냐? 해동종금에 사무실 만들고 일하지.”

“이제 겨우 스물여섯인데 벌써 회사에 갇히면 답답하잖아. 젊을 때 하고 싶은 거 맘껏 해야지.”

장용재는 자신의 핀잔에 태연히 대꾸하는 나를 보며 혀를 차고는 멈췄던 수저질을 다시 했다.

그렇게 건더기를 다 건져먹은 우리는 양 손으로 잡은 곰탕 뚝배기를 입에 대고 국물까지 깨끗이 비웠다.

“후우, 잘 먹었다.”

곰탕 그릇을 내려놓자 장용재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맛있냐?”

“당연하지. 다른 집 가도 이 맛이 안 나는데.”

“하긴, 여의도 식당들은 이 맛을 못 내지. 하하.”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가서 커피를 마셨다.

“너 만나고 일이 잘 풀렸다.”

장용재가 커피를 내려놓고 툭 던진 말에 나는 모르는 체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소리야?”

“너하고 만나서 자금 조달 방법 구하고 나니까 일이 술술 풀리더라. 정보도 빨리 모였고. 이 복덩어리 같은 녀석!”

장용재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낄낄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샤프하지만 온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기는 놈인데 이런 공치사까지 날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걸 보니 장용재가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지 확신이 들었다. 나 또한 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에 만족하며 미소를 띠었다.

“진짜? 축하해, 형.”

“조금만 기다려라. 형이 곧 호주 날아가서 계약서 들고 너희 회사 찾아가마, 흐흐.”

“그런데, 비서실 이 실장님한테는 말했어?”

낄낄 웃던 장용재가 내 질문을 받자마자 인상을 팍 구겼다.

“이 이사야, 좋은 날 초칠 일 있냐? 이 실장님을 왜 꺼내?”

“아니, 형네 그룹에서 사업하려면 비서실 최종 검토 필요하잖아. 그래서···.”

일부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말끝까지 흐리자 장용재가 손을 내저었다.

“됐다. 이 실장님은 아버지 사람이지, 내 사람이 아니야. 이번 일, 내가 직접 처리할 거다.”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수한이 봤다면 망가질 계획이었는데 이놈은 역시 내 기억대로 아직 덜 망해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런 이놈을 보며 일부러 눈까지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진짜?”

“그래. 나도 이제 상무 달았으니까 제대로 해 봐야지. 아버지한테도 말씀 드리고 할 거니까 괜찮아, 흐흐.”

장용재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고, 나 또한 미소로 화답했다. 내가 짠 각본대로 충실히 해주니 커피 값은 내가 계산해줘야겠지?

***

장용재는 카페 앞에서 헤어진 이성민이 택시를 타고 여의도로 돌아가는 걸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저 자식··· 데리고 있으면 괜찮은 놈인데···.”

이성민은 백화점과 할인점 사업에서 착실히 성과를 내며 능력까지 입증했고, 지금은 ‘일본을 격침시킨 남자’ 선해철에게 스카우트돼서 특훈까지 받고 있다.

경영과 투자감각을 모두 겸비할 참모만큼 오너에게 든든한 참모도 없는 법. 차기 회장은 자신이라 확신하는 장용재지만 이성민 같은 참모를 찾는 건 자신할 수 없었다.

“병신 같은 년···.”

장용재는 이성민을 놓친 멍청한 여동생을 욕했다. 저 놈을 구워삶기만 했어도 자신의 길이 한결 더 수월해졌을 텐데 행동거지를 개판으로 해서 놓치다니!

그것도 모자라 지금은 법조계의 종마인지 발바리인지 하는 놈과 붙어먹어 매일 밤 녹초가 되어 돌아오니 한심하다 못해 역겨울 지경이었다. 숨길 건 숨겨야지, 무슨 꼴인가!

“답답한 놈이 우물 파야지 어쩌겠나, 씨발.”

장용재는 욕과 함께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걸었다.

“네, 아버지. 용재입니다.”

[무슨 일이냐, 용재야?]

장용재는 요즘 들어 성의원에 있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었다. 홍길동도 아니고 아침식사 때와 저녁식사 때를 빼면 ‘회장님’이라고 불러야 했으니 그간의 설움이 싹 씻긴 것 같았다.

“직접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

[···알았다. 5시에 시간 비워둘 테니 오도록 해.]

장용재는 회사로 돌아가서 일을 본 뒤, 시각에 맞춰서 성의원으로 들어가 장호건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너희 팀에서 처리하겠다고?”

“네, 아버지.”

장호건은 이번 호주 사업을 비서실 최종승인 없이 처리하고 싶다는 아들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왜 그러는 거냐?”

“저도···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하고 싶습니다.”

“홀로서기?”

장호건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장용재가 차분한 눈빛을 띠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도 대한반도체를 인수해서 신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을 만드셨습니다. 저도 아버지 아들답게 제 힘으로 자원개발 사업을 해내고 싶습니다.”

“흐음···.”

가타부타 말도 없이 침음성만 흘리는 장호건을 보며 장용재가 설득에 나섰다.

“호주사업팀, 아버지와 이 실장님이 공들여 꾸리신 팀입니다. 신성그룹에서도 손꼽히는 에이스들로 구성된 팀이고요. 제가 호주사업팀과 이 일을 해결하겠다는 건 아버지와 이 실장님을 믿고 가겠다는 겁니다, 아버지.”

장호건은 장남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다가올 내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겠다고 최정예로 꾸린 팀이었고, 아들이 자신과 이수한을 믿고 가겠다고 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처음으로 간절해 보이는 저 눈빛은 더더욱 뿌리칠 수 없었다. 젊은 시절의 자신이 장병호의 만류에도 사재를 털어 대한반도체를 인수했을 때와 같은 눈빛이니 말이다.

어느 새 눈을 감고 머리까지 의자에 기대고 있던 장호건이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알았다. 이번 사업, 네가 불씨를 되살렸으니 네가 마무리하는 게 좋겠지. 실패해도 책임은 묻지 않을 테니 원하는 대로 해 보거라.”

장호건은 아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자동차사업이야 자신도 책임이 있으니 성공의 과실도, 실패의 고배도 아들이 오롯이 받아낼 ‘기회’를 말이다.

“대신,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번 일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잘 새겨두고 교훈으로 삼도록 해.”

“감사합니다, 아버지.”

장호건은 화색이 돈 장용재의 얼굴을 보며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자신이 인수한 대한반도체가 부도 직전까지 몰렸을 때 신성전자에 흡수했던 장병호의 심정이 지금의 자신과 같지 않았을까?

장용재가 문을 닫고 나가자 장호건이 전화를 걸었다.

“날세, 수한이.”

[예, 회장님.]

“이번 호주 사업, 용재한테 맡겨보도록 하지.”

[회, 회장님?]

이수한의 당황한 목소리를 듣고 장호건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를 못 믿는 게 아니네. 영등포 재개발 때문에 포기했던 거, 저놈이 살려왔으니 기회를 주는 걸세. 젊은 시절의 나처럼 말이야.”

[···대한반도체 말씀이십니까?]

떨림이 가라앉은 이수한의 목소리를 듣고 장호건은 그를 앞에 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나도 그땐 의욕만 앞서서 뭐든 해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넘쳤잖나. 내가 지금 자네에게 그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를 담담히 말할 수 있는 건 그 과거라는 상처에 굳은살이 배인 덕분일세.”

[···용재도 굳은살이 배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걸세. 호주 사업, 성공하면 좋겠지만 실패해도 오롯이 그 녀석에게 굳은살을 배이게 해줄 걸세.”

장호건은 자신의 아들이 이 집무실의 다음 주인이 될 때를 대비해서 굳은살이 배어야 한다고 여겼다. 실패하더라도 접었던 사업을 다시 한 번 재도전하는 것이고 손실이 클 것도 아니니 세상 사람들이 기업을 사유물 취급한다고 손가락질하는 걸 빼면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거라 여겼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해해줘서 고맙네.”

장호건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제 남은 건 아들이 성공의 단맛을 보며 빠르게 성장할지, 실패의 고배를 마시더라도 굳은살이 배이며 천천히, 단단하게 성장할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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