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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94화 (93/229)

94화. 28th. 원 샷, 멀티 킬 (3)

장호건은 자신을 바라보는 장용재의 시선을 의식하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네가 어떻게 그 돈을 구해왔단 말이냐?”

“성민이와 만났습니다, 회장님.”

장용재의 대답에 장호건의 눈이 또다시 커졌다.

“성민이?”

“네. 그 녀석 만나서 살살 달래주고 대출 약속 받아왔습니다. 취직한지 얼마 안 됐는데 5억 불 투자 건을 성사시키면 회사에서의 입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얻어걸린 성과였지만 장용재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부산 자동차 공장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아버지에게 깎였을 점수를 다시 받을 기회가 아닌가?

장호건도 아들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부족한 자금을 구해온 셈이니 크게 불거트리지 않고 넘어갔다.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회장은 무슨. 아버지라고 불러라, 용재야.”

장용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룹 집무실이나 마찬가지인 이곳에서 회장님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르라니?

“아, 아버지?”

“호주 자원개발 사업, 네가 만져봐. 며칠 내로 자리 옮겨줄 테니 부산에서 시멘트 바르고 벽돌 쌓는 건 그만 하거라, 허허.”

장용재는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공장 건설이야 인부들이 한다지만 짠내 나는 바닷바람을 더 이상 안 맞아도 된다는 말이 아닌가?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번 사업, 무조건 따내겠습니다!”

장용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버지에게 허리까지 숙였다.

“그래. 열심히, 잘 해 보거라.”

장호건은 장용재를 내보내고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스탠더드 캐피털이오? 신성그룹 장호건이오.”

***

“···예, 회장님. 감사는요. 애먼 조카 앵벌이 시킨 것 같아서 미안하더군요, 하하. 아닙니다. 신성그룹 채권이야 국고채나 다름없잖습니까? 물론입니다. 계약서만 가져오시면 바로 인수하겠습니다. 예.”

나는 선해철이 넉살 좋게 받던 전화를 끊은 걸 보고 씩 웃었다.

“영화 출연해도 되겠어요, 흐흐.”

“이 정도야 기본이지, 흐흐.”

우리 둘은 서로를 보며 낄낄 웃었다. 장호건까지 몸이 달아오르지 않았나? 선해철과 마주보고 웃던 나를 보고 박태진이 미소를 띠었다.

“도련님도 싸움을 즐기시는군요.”

“안 싸운다고 싸울 줄 모르는 건 아니니까요. 저도 싸울 땐 싸우는 사람이에요, 형.”

전생의 이맘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는 물고 물어뜯기는 경제전선에서 굴러먹은 미친개다. 단순한 정면대결뿐만 아니라 뒤통수치기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교활하게 미친개였다.

검지를 펼친 손을 까딱거리던 나는 박태진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호주법인도 지금쯤이면 보안 유지 풀었겠죠?”

“시차도 얼마 안 나니 시작됐을 겁니다, 도련님.”

나는 박태진의 대답을 듣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동물산은 지금껏 신성물산이 핸콕 프로스펙팅, 정확히는 제인 레온하트의 신상정보를 얻지 못하게 돈으로 입 막고, 사람으로 감시했던 걸 오늘부터 풀게 됐다. 신성그룹은 우리가 모았던 그 정보가 독이 될 줄도 모르고 써먹을 것이다.

신성물산이 어떻게 실패할지 상상하며 입꼬리를 올리던 나는 시계를 바라봤다.

“형, 곧 있으면 아저씨 올 것 같아요.”

“예, 도련님.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박태진은 자신의 명패와 해동그룹 관련 서류를 서랍에 집어넣었다. 아직은 드러낼 수 없기에 미안하기만 했다.

“미안해요, 형.”

“아닙니다, 도련님. 속이는 재미가 있으니 그걸로 만족합니다. 이 나라에서 누가 장호건 회장님을 속이겠습니까? 흐흐.”

박태진의 짓궂은 웃음소리를 듣고 선해철이 눈을 크게 떴다.

“너도 그런 재미를 즐겨?”

“저도 사람입니다, 형님. 군에서 작전 뛸 때보다 지금이 더 짜릿합니다, 하하.”

껄껄 웃던 박태진이 웃음을 그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단, 응접실로 가서 기다리시죠.”

“그렇게 해요, 흐흐.”

우리 셋은 장호건이 오길 기다리며 여유 있게 티타임을 즐겼다.

차를 마신지 30분쯤 지나자 직원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신성그룹 장호건 회장님 오셨습니다.”

“모시도록 해요. 찻잔 전부 걷어가고.”

선해철이 직원에게 손님 접대를 준비시켰고, 우리는 소파에서 일어나 입구로 걸어갔다. 입구에 도착하니 장호건이 나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보기 좋구나, 성민아. 그런데···.”

인사를 건넨 내 어깨를 토닥이던 장호건이 박태진을 보며 말끝을 이었다.

“자네가 여긴 웬 일인가? 연 초에 이사로 승진했다면서?”

“도련님도 볼 겸 그룹 관련 일 때문에 잠시 들렀습니다, 회장님.”

“그렇군. 늦었지만 이사 승진 축하하네. 자네 같은 인재가 몇 년째 차장 자리에 있는 걸 보고 안타까웠는데 이제야 훨훨 날겠군, 하하.”

장호건이 껄껄 웃으며 손을 내밀자 박태진도 공손히 손을 내밀어 악수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열심히 하게. 그렇다고 성민이 봐주는 데 소홀하지는 말고.”

“예, 회장님.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박태진이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선해철이 장호건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장호건 회장님.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 대표 선해철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선 대표. 일본을 격침시킨 남자가 스탠더드의 한국법인 대표를 맡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장호건은 선해철과 악수를 나누고 품 안에서 꺼낸 명함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내 명함이오. 앞으로 자주 봤으면 합니다.”

그가 내민 명함은 얇은 금판으로 되어있었다. 그 명함에는 ‘신성그룹 장호건’이라는 글자와 핸드폰 번호만 적혀있었다.

“저도 드려도 되겠습니까? 앞으로 한국 시장에서 뛰려면 신성그룹만한 클라이언트도 없을 것 같아서 말이죠, 하하.”

“그럼 내 명함만 받을 생각이셨소? 하하.”

두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 친구라도 되는 것 마냥 넉살좋게 웃으며 명함을 주고받았다. 역시 비즈니스의 기본을 아는 사람들답게 가면이 흘러내리질 않았다.

장호건은 선해철의 명함을 한 번 보고 지갑에 넣은 뒤, 내게도 명함을 내밀었다.

“성민이 너도 한 장 받아 두거라. 네 또래 중에 너만 그 명함을 갖고 있을 게다.”

“네, 회장님.”

나도 에티켓을 차려야 했기에 얼른 명함을 꺼내 두 손으로 양 모서리를 잡고 공손히 내밀었다. 장호건은 내게서 건네받은 명함을 살펴봤다.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 이사 이성민이라···.”

“제가 이직할 때 성민이 데려오면서 내건 조건 때문에 그렇습니다, 장 회장님.”

선해철의 말을 듣고 장호건이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선 대표가 그렇게 할 만큼 성민이 실력이 좋은 겁니까?”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한이동통신으로 천억 넘게 벌었고 백화점에 할인점 컨설팅까지 성공시켰으니 더 볼 것도 없습니다, 하하.”

호탕하게 웃는 선해철을 보며 장호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내 친구 아들이니 잘 부탁합시다, 선 대표.”

“물론입니다. 장 회장님 친구 아들이기도 하지만 제 친구 아들이기도 하니 열심히, 잘 가르치겠습니다, 하하.”

신경전이 섞인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자 장호건이 입을 열었다.

“그럼, 선 대표와 둘이서 얘기했으면 하는데 괜찮겠소?”

“그러시죠.”

선해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

“이 이사, 가서 일 봐.”

“네, 대표님.”

나는 고개를 숙인 뒤, 사무실로 돌아갔다. 우리 삼촌, 장호건 상대로 잘 할 수 있으려나?

***

장호건은 선해철과 함께 들어온 응접실을 쓱 둘러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군요. 스탠더드 캐피털 정도의 회사면 보다 화려하게 꾸몄을 법할 텐데.”

“한국법인이 문 연지 겨우 6개월째니 간소하게 꾸밀 수밖에요. 미국 본사는 제법 화려합니다, 하하.”

선해철의 사람 좋은 표정에도 장호건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박태곤의 보고가 맞으면 엔고투기로 수백억 달러를 일본에서 털어먹은 자가 아닌가? 선해철이라는 남자는.

소파에 앉은 장호건은 직원이 가져온 홍차를 마셨다.

“향이 참 좋습니다. 맛도 좋고···.”

“골든팁스인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군요. 저희야 물처럼 마시는 거라 내드렸는데.”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장호건이 잠시 멈칫했다. 잔 당 수만 원짜리 차를 물처럼 마신다니?

“놀라실 거 없습니다, 회장님. 사람은 무엇보다 먹는 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선해철은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며 장호건의 신경을 긁었다. 앞에 있는 자는 여우인 듯 늑대 같은 장호건 회장 아닌가?

장호건도 선해철이 자신의 속을 긁는 걸 모를 리 없기에 눈매가 가늘어졌지만 차의 향과 맛을 음미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성민이가 말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측에서 핸콕의 지분 인수 계약서를 가져오면 신성물산 채권을 사주겠다는 거, 사실입니까?”

장호건이 찻잔을 내려놓고 본론을 꺼내자 선해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장 회장님. 한국법인이야 이제 겨우 걸음마 신세지만 미국 본사의 자금은 제법 넉넉하니 문제될 건 없습니다. 5년 만기에 연이율 9퍼센트인데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소.”

“좋습니다. 지분 인수 계약서만 가져오시면 바로 빌려드리죠.”

장호건은 별 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꾸하는 선해철을 보고 속이 끓어오르면서도 수억 달러의 돈을 쉽게 다루는 그 대범함에 놀랐다.

선해철은 잠시 흔들린 장호건의 눈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놀라실 거 없습니다, 장 회장님. 전화로도 말씀드렸지만 신성그룹 채권이야 대한민국 국고채와 동급 아닙니까? 신성과 딜을 하면 다른 고객들도 찾아올 것 같아서 성민이 제안을 받아들인 겁니다. 그 녀석 실적도 챙겨줄 겸해서요.”

먼저 간 친구의 친구가 맞나 싶을 만큼 선해철의 시건방진 태도가 거슬렸지만 장호건은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대한민국 정부보다 등급이 낮지만 신성그룹은 이 나라 제일의 재벌이다. 신성과 거래를 트면 다른 기업들도 찾아와서 손을 벌릴 테고, 물꼬를 튼 격이 될 이성민도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알겠소. 계약되는 대로 준비합시다.”

“그러시죠. 대신, 5억 달러는 전부 달러 표시 채권입니다.”

“물론이오.”

장호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성민이, 어떤 것 같소?”

“뭘 말씀입니까?”

“업무 능력이나 행동거지 등등 말이오.”

선해철이 침음성을 멈추고 빙긋 미소를 띠었다.

“좋은 아이죠. 조카로서도, 투자가로서도, 경영인으로서도 좋은 싹수를 보이는 재목입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데려올 이유도 없었겠죠.”

선해철의 평가를 듣고 장호건이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명우 아들이라 그런지 피는 못 속이는 것 같습니다, 하하.”

“그렇지요. 명우와 제수씨의 하나뿐인 자식이니까요.”

선해철은 장호건과 함께 각자가 형제처럼 여겼던 친구를 떠올린 뒤, 입을 열었다.

“명우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앞으로는 믿고 사시죠.”

“뭘 말이오?”

“참관인 말입니다. 장 회장님이나 나나 명우를 친구로 둔 사이 아닙니까?”

선해철은 정색한 표정으로 장호건을 보고 말했다.

“내가 아무리 돈으로 돈 벌어먹고 사는 놈이라도 줄 돈 안 주는 양아치 짓은 안 합니다, 장호건 회장님. 나도 이 바닥에서 이룰 만큼 이룬 사람입니다.”

장호건은 저 시건방진 놈의 주둥아리를 손으로 콱 잡아서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감히 누구한테 훈계를!

그럼에도 장호건은 벌개진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참관인 문제는 분명히 자신의 잘못 아닌가? 몇 배나 되는 수익을 남긴 덕분에 내전에 앞선 본거지 보강도 수월했고 개인비자금도 제법 불렸기에 할 말이 없었다.

이쯤이면 충분하다 싶었는지 선해철이 손을 내저었다.

“속만 긁으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 장 회장님. 앞으로 신성과 좋은 거래를 자주 하고 싶은데 믿어주질 않으시면 어떻게 거래를 하겠습니까? 거래의 기본은 신뢰 아니겠습니까?”

선해철은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성민을 돌봐주는 사람으로서 열 명의 아군을 만드는 것보다 한 명의 적을 안 만드는 게 이득이기에 얼른 장호건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다.

선해철의 청산유수 같은 말에 장호건도 고개를 끄덕였다. 스탠더드 캐피털 같은 투자회사를 알아두면 언제든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나쁠 건 없었다.

“알겠소. 지난번 일은 내가 사과하리다. 앞으로 잘 해봅시다, 선 대표.”

“감사합니다, 장 회장님.”

선해철은 장호건이 내민 손을 잡았다. 서로의 손을 쥔 힘이 정도를 넘었지만 두 남자는 애써 미소를 잃지 않았다.

***

얼마 뒤.

장용재는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에서 자원개발본부로 옮겨오고부터 호주 자원개발 사업 자료를 챙겨보고 있었다.

“추정치라도 매장량은 좋은데 해안에서 내륙까지 대략 300여 킬로미터··· 운송이 문제군요.”

“그렇긴 합니다만 상사부문이 광산 인프라 확충에 투자할 돈을 건설부문이 공사비로 회수하면 장기적으로는 좋은 사업입니다, 상무님.”

담당자의 말대로 해외 원자재에 투자해서 건설공사로 투자금 일부를 회수하고 원자재 판매 수익을 나눠가지면 이중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장용재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를 살펴보며 중요한 내용을 적던 중 장용재가 고개를 들어 외쳤다.

“임 부장, 호주법인에 시켜서 알아본 거 어떻게 됐어요?”

“핸콕 프로스펙팅 사장 말씀이십니까, 상무님?”

장용재가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거 말고 더 없잖아요. 아직 안 왔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대답을 마친 담당자가 잽싸게 수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오너 일가에게 찍혀서 좋을 게 없지 않은가?

“···그래? 알았어. 정리되는 대로 팩스 보내.”

수화기를 내려놓은 담당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전부 수집했다고 합니다. 30분 뒤에 정리해서 팩스로 보내준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상무님.”

“그러죠.”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장용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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