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28th. 원 샷, 멀티 킬 (2)
고승주는 전화로 배재훈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알려주고 동의를 구한 뒤, 스탠더드 캐피털에 전화를 걸어 선해철과 점심약속을 잡고 일식집에서 만났다.
“···사실입니까?”
“그 편이 성민이한테 좋을 것 같아서 회장님께 말씀드렸다. 어때?”
선해철은 삼청동에서 고승주가 이대수와 의논한 얘기를 듣고 놀란 기색을 감추려 애썼다. 이유나 디테일한 방법은 다르지만 호주 광산 지분까지 인수하자는 건 똑같지 않은가?
순서가 바뀌어 돈부터 줘야하기에 이성민의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일시적인 금융비용을 부담해도 이 모든 일의 원인인 해동종금 또한 이성민이 최대주주다. 이성민의 국내재산과 미국재산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니 득이 되지 손해가 아니다.
조카의 재산관리인이자 또 다른 보호자로서 순식간에 모든 계산을 마친 선해철이 표정을 고치고 고승주에게 말했다.
“미국 본사와 얘기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형님. 클레어가 제 와이프 될 여자라도 공과 사는 다르니까요.”
“제수씨한테 잘 좀 부탁드린다고 말해줘. 이자 듬뿍 얹어주겠다고 전해주고.”
“최대한 잘 말해보겠습니다, 하하.”
고승주는 선해철의 속도 모르고 그와 마주보며 껄껄 웃었다.
***
박태진과 샌드위치와 커피로 점심을 해결한 나는 회사에 돌아온 선해철에게서 고승주가 전해준 얘기를 들었다.
“어때?”
“두 분께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을 정도예요, 후후.”
순서만 바뀌었을 뿐, 돈이 들어오는 건 똑같다. 약간의 금리부담이 있어도 집안 살림을 살찌우는 일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야후에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흐흐.”
예상보다 높은 가격에 상장된 야후 주식 덕분에 담보가 늘어나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자금계획이 단단히 꼬였을 것이다.
씩 웃는 나에게 박태진이 말했다.
“호주 광산 인수까지 끝나면 배 대표님과 도련님이 서먹서먹해진 것도 풀릴 것 같군요. 잘 된 것 같습니다, 하하.”
그 말을 들으니 지난 회의 때 일이 떠올랐다. 나 때문에 깎인 배재훈의 체면을 생각하면 더 확실히 보답해야 할 텐데···.
책상으로 돌아간 나는 애먼 종이에 펜을 끼적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지금 터뜨리면 적어도 4,5년, 많게는 10년 이상 역사를 앞당길 일이 아닌가? 핸콕 프로스펙팅의 철광산 개발은.
하지만.
내가 역사를 바꿔도 일어나야 할 일이 안 일어난 것도, 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태현그룹이 태현건설의 이라크 미수금을 털어내면서 하동 제철소 때문에 토목공사를 하는 것도, GK그룹이 GK정유 지분을 100퍼센트까지 올린 것도 전생을 돌이켜보면 각 그룹의 문제가 해결됐거나 당면과제가 실현된 것에 가까웠다.
그에 따라 나 또한 신성물산의 나비효과까지 차단했으니 내 기억에 따라 인과율을 계산하고 움직이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고민을 마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박태진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아니에요, 형. 할아버지께서 덥석덥석 믿어주셔서요, 하하.”
아무리 우리 집안이 커다란 위기를 극복하며 컸다고 해도, 내가 능력을 보여줬다고 해도 할아버지를 비롯한 그룹의 어른들은 핏덩이 같은 나를 믿고 회사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러졌을 터. 지금의 나조차도 그들의 신뢰가 과분하기만 했다.
박태진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내게 말했다.
“도련님. 도쿄에서 제가 드렸던 말씀을 떠올리십시오.”
“···그거요? 선택도, 결정도 모두 각자가 했고, 책임도 각자가 지는 거라는 거?”
고베대지진이 터지던 날 새벽까지 내가 잠 못 이루고 있을 때 들었던 말을 읊자 박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의 짐을 혼자서 지고 가려고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도련님. 짐은 나눠서 짊어질수록 더 먼 길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박태진의 말이 맞았다.
내 앞에 있는 박태진과 선해철, 삼청동에 계시는 할아버지를 비롯한 집안과 그룹의 어른들, 바다 건너의 클레어와 헨리 등 내 짐을 함께 나눠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들의 길에 들어갔고,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들어갔으며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밀어주고 끌어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따로, 또 같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각자의 목적지는 달라도 서로에게 힘이 되고 있으니까.
“고마워요, 형.”
나와 박태진이 형과 동생을 바라보는 것처럼 눈길을 주고받던 중 선해철이 산통을 깼다.
“짜식들, 무슨 드라마 찍냐?”
“삼촌.”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자 나를 바라보던 선해철이 얼굴에서 장난기를 싹 지웠다.
“밀어붙여, 이성민. 천운이 따르는 너라면 뭐든 잘 풀릴 테니까.”
천운이 따르는 게 아니라 죽음의 강을 거슬러 올라온 겁니다, 삼촌. 그래도 믿어주니 고마워요.
***
며칠 뒤.
이성민이 또 다시 역사를 앞당기기로 마음을 굳힌 무렵, 이대수는 오후의 홍차를 마시며 배재훈과 마주하고 있었다.
“성민이를 호주에 데려가고 싶다고?”
“예, 형님.”
이대수가 입에 대고 있던 찻잔을 내려놨다.
“이유가 뭔가, 재훈이?”
“전번에 진 빚을 갚아주고 싶습니다.”
“빚이라면··· 영등포 재개발 계획 바꿀 때 말인가?”
잠시 말끝을 흐리던 이대수의 질문에 배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때 제가 성민이에게 지나치게 한 것 같아서 승주 편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는데 내키지가 않더군요. 그룹 살림 늘리는 데 제일 발 벗고 나선 녀석인데···.”
배재훈은 그때 일을 생각하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 집안 장손이라도 새파랗게 어린놈이 자기 스스로를 저당 잡히면서까지 스탠더드 캐피털과의 거래를 그룹에 더 유리하게 바꿨다. 그런 이성민과 달리 자신은 고작 땅뙈기에 얽힌 낡은 기억에 매달려 그 어린놈에게 핏대를 세웠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저 또한 회사 지분보다 광산 지분 인수가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거래가 성사됐을 때 성민이에게 공을 돌리면 형님 뒤를 이을 이력은 충분히 만들지 않겠습니까?”
“그러긴 하네만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 여편네 고집이 보통이 아닐 걸세. 회사 지분은 말할 것도 없고 얼마를 주고 얼마나 넘겨받을지 짐작할 수가 없네.”
예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이대수가 지금 말한 바는 보고서에도 적힌 내용이었다. 관건은 그 욕심 많고 고집 센 제인 레온하트를 상대로 얼마나 돈을 주고 얼마나 많은 지분을 얻어내느냐였다.
“전에 보셨던 보고서에 따르면 그 여편네가 진주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하니 진주목걸이를 선물로 준비하겠습니다. 거기에 형님께서 예전에 말씀하신 게 맞으면 남모르게 숨기고 있는 상처를···.”
배재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대수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그 수는 위험하이, 재훈이. 남의 상처, 그것도 그 사람이 보여주기 싫을 상처를 가지고 장사하는 건 위험한 짓이네. 모든 게 다 망가질 걸세.”
“형님···?”
배재훈이 아쉬워하는 기색을 비쳐도 이대수는 고개를 저었다.
“사업가로서도, 사람으로서도 할 짓이 아니야. 지금은 정신을 차렸어도 성민이 그놈이 사고 치던 거 덮으려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었나?”
이대수의 목소리가 무거워져도 배재훈은 침울해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어찌 잊었겠습니까? 기억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허면, 어찌 하자는 겐가?”
이대수의 미심쩍어하는 눈빛에 배재훈이 음침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 여편네 상처, 다른 놈이 헤집게 하는 게 어떠십니까? 망수(亡手)가 될 거라면 다른 놈이 쓰게 해야지요.”
“다른 놈이면···?”
이대수가 흐린 말끝을 배재훈이 넘겨받았다.
“장호건 큰아들이 좋겠지요, 흐흐.”
“···장용재 말인가? 그 난봉꾼 자식?”
“예. 성민이가 장용재 그놈 허파에 바람 넣어주고 사고 치게 만들면 호주 사업에서 신성 놈들이 스스로 쫓겨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배재훈이 내놓은 뒤집어씌우기에 이대수의 얼굴에도 음침한 미소가 폈다.
“그 뒤에 우리가 나서자, 이건가?”
“예. 그래야 장호건도 우릴 원망 못할 게 아닙니까?”
잠시 고민하던 중 이대수가 입꼬리를 뒤틀었다.
“재밌겠구먼. 지금 바로 시작하지.”
***
삼청동에 불려간 나는 할아버지와 배재훈의 계획을 듣고 눈을 깜빡거렸다.
“용재 형을요?”
“맘에 안 드는 게냐?”
맘에 안 들 리가 있나.
내가 아는 제인 레온하트는 분명히 내면의 상처가 크고 깊은 여자다. 할아버지와 배재훈이 모를 것 같아서 정공법을 선택했는데 배재훈이 내게 건네준 보고서에 적힌 정보는 내가 기억하는 것과 거의 일치했다.
여기에 감식안이 탁월한 할아버지의 평가가 맞으면 그 상처는 건드리기만 해도 비명을 터뜨릴 역린일 것이다. 영등포 재개발 계획 변경 때 배재훈이 내게 역정을 냈던 것처럼.
“아닙니다, 할아버지. 이런 보고서가 있는 줄 알았다면 제가 먼저 하자고 했을 겁니다.”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접어서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고 말하자 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껄껄 웃었다.
“이놈, 이놈, 완전히 싸움닭이구먼, 으허허.”
“회장님 젊었을 때와 판박이입니다, 하하.”
할아버지와 배재훈이 나를 보며 껄껄 웃었다. 할아버지가 싸움닭이었다니?
눈만 멀뚱멀뚱 뜬 나를 보며 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할애비가 월남에 잠시 머물렀을 때 다른 회사 놈들하고 얼마나 치고 박았는지 모른다.”
“정말요?”
“그럼? 미군 놈들 군수물자 운송 계약 때문에 진주호 그 영감하고 멱살잡이까지 했었어, 으허허.”
진주호라면 이 나라 최대의 종합 물류재벌인 주한그룹의 창업자 겸 초대 회장이다. 일선에서 물러났다지만 여전히 드센 성격으로 유명한 그 영감과 영국 신사 같은 할아버지가 드잡이를 했었다니?
내가 놀라는 사이, 배재훈이 그 시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땐 정말 패싸움까지 할 뻔했지요. 우리나 그쪽이나 현지 주재원들에 파병부대 출신 직원들까지 데려다가 각목에 쇠파이프 들고 으르렁거렸잖습니까? 흐흐.”
“그랬지. 결국엔 나하고 그 영감이 주먹으로 한 대씩 면상에 주고받다가 막걸리 마시면서 화해했잖나, 으하하.”
입이 떡 벌어졌다. 조폭들도 아니고 그룹 총수들이 원터치 맞다이를 떴다니? 진짜 주먹다짐을 했던 할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싸움닭은커녕 병아리도 아니었다.
한창 때의 추억이라기엔 꽤 살벌한 이야기를 배재훈과 나누던 할아버지가 웃음을 그쳤다.
“여하튼, 장용재 그놈한테 적당히 흘리고 나면 호주법인에서도 작업할 게다. 지금까지 정보 막느라 쓴 돈, 그놈들 호주에서 쫓아내느라 쓴 값으로 만들 게야, 흐흐.”
할아버지다운 발상이었다. 경쟁자를 스스로 탈락하게 만드는 것만큼 효과적인 일도 없지 않겠나?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장용재 허파에 헛바람 잔뜩 넣어주겠습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
삼청동에서 나온 나는 박태진, 선해철에게 할아버지와 배재훈의 계획을 알려준 뒤, 한우구이집에서 장용재를 만났다.
“오랜만이야, 형. 잘 지냈지?”
“잘 지내긴. 부산 공장에 내려갔다가 이제야 올라와서 쉬고 있는데.”
장용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투덜거리고는 불판 위에서 익고 있는 한우 한 점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부산 공장이면 신호동 공장이지?”
“그래. 막상 아버지한테 말하고 밀어붙였는데 일이 너무 커졌어.”
“무슨 일인데 그래?”
장용재가 입 안에서 우물거리던 한우고기를 삼킨 뒤, 소주를 털어 넣었다.
“공장 하나 짓는데 더럽게 비싸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곳에 만들자고 하는 건데··· 젠장.”
한숨을 내쉬는 장용재를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장호건에게서 점수를 따려고 밀어붙였다지만 사업은 사업이다. 전봇대만한 철심 1만 7천 개를 박아서 지반을 보강해야 할 만큼 무른 땅에 자동차 공장을 짓고 자빠졌으니 싸게 먹히겠나?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헛바람을 넣으려면 분위기를 맞춰줘야 했다.
“그래도 최종결정은 아저씨가 했을 거 아냐? 지금 정권 비위 맞춰줘야 사업 키우는데 어쩔 수 없기도 했고.”
“그러긴 하지. 그나마 너희 할아버님 덕분에 숨통 트였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한 장용재를 보며 처음 듣는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말이야?”
“모른 척하기는. 작년 초에 엔고투기 한 거 말이야. 그거 덕분에 두둑하게 땡겨왔잖냐?”
“아··· 그거?”
“그래. 이번에 영등포 재개발 때문에 뭉텅이로 돈 쓰긴 했는데 어차피 공사비로 회수하면 되니까 여러모로 잘 됐지. SH자산개발 덕분에 물산 덩치도 커졌고.”
그렇게 겉도는 얘기만 하던 중 장용재가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너희 회사는 어때?”
“뭐?”
“자원개발 말이야. 우리 집에서 넘겨받은 카자흐스탄 구리광산에 너희 집이 투자한 호주 아연광산이면 벌이가 제법 될 텐데?”
은근한 목소리와 달리 눈빛이 날카로운 걸 보니 카자흐스탄 구리광산을 뺏긴 게 억울한 모양이었다. 나는 장용재의 눈빛을 무시하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거야 할아버지하고 실장님, 배 대표님이 맡으니까 알 턱이 없지. 형네 회사는 어때?”
“우리도 노력했다가 포기했어. 자원개발에 쓰려고 했던 돈, 영등포 재개발 사업으로 돌렸거든.”
왜 그런지는 이 자식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나와 우리 집안, 우리 그룹이 찍어놨던 핸콕 프로스펙팅 인수가 아닌가?
나는 탁자 밑에서 주먹을 꽉 쥐면서도 장용재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형이 아저씨한테 잘 말해봐. 호주법인에 한 번 더 알아보고 접근할 방법을 찾는 게 어때?”
“글쎄다··· 영등포 재개발 때문에 돈 다 써서 어려울 텐데···.”
“지분 인수 계약서만 가져와. 이자 두둑하게 쳐주면 대표님께 말해서 신성물산 채권 인수해줄게.”
조금 뻐기듯이 말하자 장용재의 눈에 잠시나마 날이 섰다.
“너희 회사, 돈 많냐?”
“한국법인은 몰라도 미국 본사는 꽤 될 걸?”
“조건은?”
“5년 만기에 연이율 9퍼센트. 액수는 5억 달러. 어때?”
조건을 밝히자 장용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시중은행보다 더 싸게 빌려주겠다니 안 좋아하고 배기겠나?
“진짜?”
“그렇다니까? 한국법인 대표가 아버지 친구 분인데 미국 본사 투자위원회하고 이사회에도 들어가는 분이야. 잘 말씀드려볼게.”
태도를 조금 낮추며 말하자 장용재의 입이 벌어졌다.
“진짜지? 계약서 가져오면 5억 달러 주는 거지?”
“그렇다니까? 내 목 걸게. 됐지?”
장용재는 찢어질 것 같은 입을 씰룩거리더니 소주병을 들었다.
“술 한 잔 받아라, 성민아. 아니지, 이 이사라고 해야 하나? 흐흐.”
“그럼 난 형한테 상무님이라고 해야겠네? 흐흐.”
꼴같잖은 임원 놀이였지만 이놈한테 똥물을 끼얹을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할까. 자리 끝나는 대로 할아버지한테 다음 작업 진행하자고 전화해야겠다.
***
장용재는 식사를 마친 뒤, 곧바로 성의원으로 달려갔다.
“네가 여기 무슨 일이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회장님.”
장호건은 얼굴에 살짝 홍조가 돈 장용재의 얼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낮부터 술 마신 거냐?”
“접대 하느라 마셨습니다, 회장님.”
장용재의 호쾌한 대답에 장호건이 눈을 새로 떴다.
“접대?”
“네. 신성물산 호주 사업 관련해서 접대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용재는 장호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걸 보고 자신의 입꼬리를 끌어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알았다. 뭐라도 한 잔 마시면서 얘기하자.”
장호건은 인터폰으로 꿀물을 가져오게 하고는 결재 서류를 처리하느라 썼던 안경을 벗어놓고 소파에 앉았다.
“일이 좋아도 술상무는 이번까지만 하거라. 신성그룹 후계자가 쉽게 나서면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꾸짖음과 달리 장호건은 고개를 숙이는 아들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봤다. 철없던 시절의 자신처럼 여자를 밝혀서 걱정이지만 회사 일만큼은 몸을 아끼지 않고 나서는 모습 또한 젊은 시절의 자신 같아서 미워할 수가 없었다.
직원이 가져온 꿀물을 장용재와 마시고 장호건이 입을 열었다.
“무슨 접대인지 말해봐.”
“호주 광산 인수에 필요할 자금에 관한 건입니다, 회장님.”
“자금?”
“네. 지분 인수 계약서만 가져오면 연이율 9퍼센트에 5년 만기 채권을 5억 달러까지 인수해주겠다고 했습니다.”
“9퍼센트에 5년이라고?”
장호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터무니없이 좋은 조건을 큰아들이 따오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