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27th. 잡고 잡히는 발목 (4)
그 시각, 이수한은 고승주에게서 제안 받은 사업을 장호건에게 전화로 보고한 뒤, 곧장 성의원으로 들어갔다.
“사실인가?”
“예, 회장님. 여기.”
장호건은 이수한이 두 손으로 내민 서류철을 펼쳐봤다.
“그 양반, 그렇게 장가보내고 싶으면 그러고 싶다고 말을 하지 뭘 이렇게···.”
“곧 있으면 선거철이니 한 번에 처리하려는 것 같습니다. 우리와 해동이 손잡고 여야에 생색내면 다른 놈들이 손 쓸 틈도 없이 영등포 일대를 전부 쓸어 담을 수 있잖습니까?”
장호건은 이수한의 말을 듣고 헛웃음만 터뜨렸다.
‘그렇게 하연이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으면 말을 하지 자존심은···.’
그럼에도 두 아이의 혼사에도 좋은 일이고 두 그룹의 사업을 키우는 일이기도 했기에 장호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볍게 숨을 내쉬며 장호건이 말했다.
“나쁘진 않군.”
말과 달리 장호건이 흡족해하는 걸 알아챘지만 이수한은 자신의 생각을 철저히 숨기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회장님. 혼담도 혼담이지만 이런 대단위 개발 사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리하는 건 놓치기 아까운 기회입니다.”
“맞는 말이야. 언제까지 공사판 십장 노릇만 하는 건 신성의 이름에 부끄러운 일이지.”
고만고만한 건설회사라면 모를까 신성물산 건설부문 정도면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를 만져야 수익구조가 개선된다. 장호건과 이수한 모두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출자금이 문제군. 신성물산 가용현금, 얼마나 남았나?”
장호건의 질문에 이수한이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5천억 가량 남았습니다. 그 외의 자금은 투입이 불가능합니다.”
“금융 여신은?”
“전부 자동차에 투입해서 더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회사채도 전부 자동차에 묶여있고요.”
“아깝군. 기름진 땅이 나왔는데 뿌릴 씨가 없다니.”
침음성을 흘리는 장호건에게 이수한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자네가 죄송할 게 뭐 있나? 전부 내가 시켜서 한 건데.”
장호건은 이수한을 보며 손을 저으면서도 입맛을 다셨다. 핸콕 프로스펙팅 지분 인수 비용을 최대 5천억으로 잡아뒀는데 4천억 원을 투입하면 사실상 사업에서 철수해야 한다.
이수한은 그런 장호건을 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해결책을 내놨다.
“해동종금이 쥐고 있는 신성전자 채권 만기를 연장시키는 건 어떠십니까? 금리를 재조정하는 조건으로 만기를 연장하면···.”
현재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지만 장호건은 이수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식도 안 올린 사위한테 줄 돈을 미루라고? 합작법인만 해도 밑지고 들어가는데 말이라고 하나?”
사업가로서는 노나는 장사지만 아버지로서는 밑지고 들어가는 일이다. 딸에게 들려줄 혼수도 달랑 고려호텔뿐이잖나? 장호건은 부모로서 더 이상 이대수에게 밑질 수 없었다.
무엇보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신성물산과 선성전자는 남들이 모를 ‘현금’을 쌓아두고 있었다. 예비사위에게 돈 갚을 날짜를 미루기에는 이유가 궁색했다.
이수한은 장호건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실언했습니다.”
장호건을 이수한을 보며 화를 식혔다. 자금사정이 빡빡한 건 본인도 알고 있으니 어찌하겠나?
“답답하군. 비자금을 꺼내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끝을 흐리던 장호건이 숨을 돌리며 물었다.
“공천 끝나는 날까지 알려달라고 했다고?”
“예, 회장님.”
“해동이 많이 컸군. 우리에게 통보를 하다니.”
장호건은 자기도 모르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대 신성그룹에게 통보를 하다니···. 그래도 영등포 재개발 사업을 따면 자존심에 난 생채기는 싸게 먹히는 대가였다.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 고민해보지.”
그 말을 끝으로 장호건은 이수한을 물리고 서류를 찬찬히 살펴봤다.
할인점부터 젊음의 거리, 오피스텔 단지와 아파트 단지, 업무지구, 복합쇼핑몰 등 흠잡을 데 없는 계획이었다.
그 중에서도 영등포 복합쇼핑몰에 들어갈 최고급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아픈 손가락인 장하연에게 유일하게 물려줄 수 있는 고려호텔이 더 클 기회가 아닌가?
하지만.
영등포 재개발에 나서면 자원개발 사업을 포기해야 한다. 자신이 호주 광산 개발에서 주도권을 쥐고 해동그룹에 합작투자를 제안해서 자존심도 세우고 돈도 아끼고 혼담에서도 우위를 점할 기회가 날아가는 것이다.
모든 걸 선택하는 건 현재의 장호건에게 불가능했다. 서류를 보는 장호건의 입에서는 침음성만 하염없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
얼마 뒤.
이수한은 장호건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예, 회장님.”
[호주 사업에 쓸 돈, 영등포 재개발로 돌려.]
“회장님?”
[내년이면 내전이 코앞이네. 확실한 이익이 보장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성을 튼튼히 쌓지 않겠나?]
이수한은 장하연 때문에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장호건의 자존심을 두 번 짓밟는 짓이 아닌가? 데드라인을 통보 받은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밟혔으니.
“알겠습니다. 회장님.”
[대신에 고려호텔 임대보증금 납입은 완공 뒤로 미루게. 납입 전까진 해동종금에 맡겨둔다고 해.]
“예, 회장님. 그 부분은 고 실장과 조율하겠습니다.”
[미팅은 고려호텔 본점에서 하게. 형님한테도 말해둬야지.]
“예.”
대답을 끝으로 통화가 끊기자 이수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아쉬움이 크지만 어지간한 기업들은 한정된 자원으로 사업을 꾸려야 한다. 더군다나 신성그룹은 내년부터 피 대신 돈을 흘릴 내전을 앞두고 있다.
그렇다면 확실한 이익이 보장되는 쪽을 택해야 돈도 벌고 내전에 앞서 신성물산을 튼튼히 다질 수 있다. 여기에 장하연의 혼사까지 겹쳤으니 이수한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수한은 곧바로 고승주에게 전화를 걸어 미팅을 제안한 뒤, 고려호텔로 넘어가서 정창호를 만났다.
“영등포 재개발 사업?”
“예, 형님. 회장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정창호는 이수한이 건네준 자료를 보며 탄성을 흘렸다.
“규모가 크군. 주상복합 오피스텔과 아파트는 선분양으로 진행한다 쳐도 이걸 전부 합작법인 자산으로 묶어두겠다니.”
“이 정도 사업이면 로엘그룹이 부럽지 않을 겁니다. 수익성 면에서도 더 나을 테고요.”
정창호도 이수한의 말에 나쁘지 않다는 표정을 비쳤다. 영등포에 올릴 상업용 부동산 규모만 봐도 연간 임대수익만 100억 단위에 자산 가치도 조 단위를 찍지 않겠나?
하지만 정창호도 그룹 사정과 장호건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걸리는 게 있었다.
“그래도 이 사업에 손을 대면 호주 사업은 포기해야 할 텐데··· 괜찮겠나?”
“접겠다고 하셨습니다. 신사협정 만료시점을 고려하면 영등포 재개발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하연이 일도 있고요.”
모두 다 맞는 이야기였지만 정창호는 여전히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당장 먹기엔 곶감이 달다지만 아쉽군. 이쪽이 주도권을 쥘 기회였는데.”
정창호도 장호건이 왜 그렇게 핸콕 프로스펙팅 인수에 매달렸는지 알고 있었다.
인수가 끝나면 해동물산에 합작을 제안하면서 장하연과 이성민의 혼담까지 밀어붙일 계획이 아니었나? 장호건과 호형호제하고 장하연을 돌봐주는 그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이수한은 그런 정창호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요. 내전이 코앞이잖습니까? 그래도 합작법인의 현금 8천억 원에 고려호텔이 입주하면서 내야할 임대보증금까지 해동종금에 맡기기로 했으니 체면치레는 될 겁니다.”
“완전히 굽히고 들어가는 꼴이군. 천하의 신성그룹이 돈 없어서 우는 소리를 해야 하다니.”
정창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장병호 때만 해도 무소불위였던 신성그룹이 그 장병호 때문에 세 조각으로 갈라져서 궁색한 꼴을 보이고 있지 않나? 합작법인이 해동종금에 맡길 8천억에 비하면 고려호텔 임대보증금은 밥 한 공기에 밥 한 숟갈을 더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허나 그룹 총수의 결정을 뒤집을 수도 없기에 정창호는 한숨을 끝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이수한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식당으로 내려가겠습니다, 형님. 승주 형님하고 회 한 점 집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수고하게.”
***
“어떠십니까, 형님?”
“신성이 우리 사업 계획을 수용해줬으니 받아야지. 회장님께는 잘 말씀드리겠네.”
고승주와 해동그룹 수뇌부에겐 어차피 상정된 변수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이대수가 그깟 호텔 임대보증금 때문에 창업 이래의 사훈을 실현할 기회를 차버릴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고승주는 이수한의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자신의 제안이 먹히자 이수한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여의도 영감들과 광화문 공무원들에게 사과박스만 전달하면 되겠군요, 흐흐.”
“우리나 자네들이나 바빠지겠군, 흐흐.”
선거의 계절만 되면 바빠지는 게 두 사람을 비롯한 각 그룹의 2인자들.
해동과 신성의 2인자들은 다가올 계절에 여의도 영감들과 광화문 공무원들에게 돈을 뿌리고 상전 대접을 받을 걸 생각하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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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주는 이수한과 식사를 마치고 헤어진 뒤, 곧바로 이대수에게 전화를 넣어 방금 전 협상 내용을 보고했다.
[그렇게 해. 자잘한 실랑이로 대어를 놓칠 수는 없지, 흐흐.]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대수와의 통화가 고승주는 이수한에게 전화를 넣어서 곧바로 알려줬다.
“어떤가?”
[이렇게 빨리 이 회장님께서 승낙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엄한 놈들 끼어들기 전에 전부 쓸어 담으시려는 것 같네, 흐흐.”
[알겠습니다, 형님. 회장님께 보고 드리고 연락드리죠.]
“그러지.”
대어가 낚싯바늘을 물자 낚시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고승주와 이수한의 미팅 다음날부터 해동그룹과 신성그룹은 영등포 재개발 사업 통과를 조건으로 여당 3, 제 1야당 2, 제 2야당 1의 비율로 총 600억 원의 정치자금을 뿌렸다. 주머니가 뚱뚱해졌는지 세 당의 선거전은 기억보다 치열했다.
그럼에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1996년 4월 11일에 실시된 제 15대 총선 결과, 여당이 과반에 못 미치는 의석을 확보하면서 여소야대 국면이 시작됐다.
여당은 그래도 원내 1당을 지켰다는 것을 강조했고, 제 1야당은 지난 총선 때보다 더 많은 의석을 얻었다며 패배가 아닌 약진이라고 강변했다.
여기에 ‘핫바지론’에 이어 ‘원조보수론’을 내세워 원내 제 3당이 된 제 2야당까지 기세를 올리는 등 여의도 서쪽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3당은 영등포 재개발 사업에 한해서만큼은 일치단결해서 통과시켰다. 결과가 어찌됐든 선거를 화끈하게 치르게 해준 물주들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나?
사업 승인에 이어 입찰 공고가 발표되자 크고 작은 업체들의 로비 전쟁이 시작됐지만 해동과 신성은 서울시에도 손을 써뒀다.
서울시장부터 부시장, 국장급까지 사업 내용만 보고 공정하게 평가하겠다는 조건으로 전부 두 그룹의 ‘용돈’을 거하게 받아먹었다. 촉박한 기간을 던져주고 핵심부지와 자금 계획 등을 가져오라고 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영등포 재개발 사업, 해동물산-해동건설-신성물산 컨소시엄 유력.
정부에서 공개 입찰에 나선 영등포 재개발 사업은 해동그룹-신성그룹 컨소시엄이 시행 및 시공사업자로 선정될 것이 유력하다. 해동건설과 해동물산은 영등포 일대의 대규모 유휴 부지를 보유하고 있고 신성물산은 국내외 사업으로 역량이 축적되어···.]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기사를 더 볼 것도 없어서 신문을 곱게 접어 내려놨다.
“영등포 재개발 사업, 우리가 딸 것 같네요. 1면 기사 보셨죠?”
내 말을 듣고 선해철이 씩 웃었다.
“봤지. 회장님하고 장호건이 대놓고 으름장 놨는데 어떤 미친놈이 숟가락을 디밀겠냐? 흐흐.”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권력자 두 분을 동시에 적으로 돌릴 위인은 없으니 계획대로 될 겁니다, 하하.”
두 사람의 말도 맞지만 다른 놈들이 손대면 영등포 재개발 사업은 하나마나다. 할아버지가 핵심부지 수만 평을 안 내놓으면 땅을 금덩어리가 아닌 똥으로 바꾸는 짓이 될 테니까.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 둘은 이미 다른 곳에 힘쓰고 있었다.
태현그룹은 이라크 미수금을 손실처리한 뒤, 첫 삽을 뜬 하동 제철소 공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분위기 쇄신에 열심이었다.
GK그룹도 오는 5월 말에 칼텍스 측의 GK정유 주식 50퍼센트를 GK전자와 GK화학, GK상사가 전량 인수하기로 했다. 영등포 재개발은 해동과 신성의 잔칫상이 될 것이다.
두 사람과 기분 좋게 모닝커피를 마시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스탠더드 캐피털··· 네, 백부님. 네. 그렇게 됐군요. 아닙니다. 속이려면 제대로 속여야죠. 네. 알겠습니다. 네.”
고승주에게서 걸려온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내게 선해철이 물었다.
“승주 형님 같은데··· 뭐라시던?”
“다음 달 말에 합작법인 출범할 거라네요.”
책상을 넘어 선해철과 얘기하던 중 박태진이 입을 열었다.
“회사 이름은 어떻게 지을 거라고 하셨습니까, 도련님?’
“SH 자산개발이요.”
선해철과 박태진이 얼굴이 굳었다. 더 많은 밑천을 내놓고도 주식을 반씩 나눴는데 사호까지 신성의 S가 먼저 나오니 마음에 들 리가 있나.
아직 알려주지 않은 이유가 있어서 말을 이었다.
“완벽하게 속이려면 메소드 연기를 해야죠. 일부러 밀고 당겨서 양보해줬다고 하네요.”
“무서운 양반. 형님이긴 해도 지독해.”
선해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대수 다음으로 자존심이 센 고승주가 그 자존심을 패대기치지 않았나? 회사를 위해서.
“승주 형님이니 가능한 일이죠. 늘 포커페이스를 지키잖습니까? 형님과 다르게요.”
“뭐, 인마?”
선해철은 짓궂은 미소를 띤 박태진을 보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다음 달에 노스 리미티드 인수할 텐데 열심히 연막 쳐야지. 인수 끝나면 장호건, 난리 나겠는데? 하하.”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봐야죠, 하하.”
나는 장호건의 얼빠질 표정을 떠올리며 두 사람과 함께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