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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89화 (88/229)

89화. 27th. 잡고 잡히는 발목 (2)

당신의 미소 띤 얼굴에 미소로 화답하자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자세히 풀어 보거라.”

“네, 회장님.”

나는 앞에 놓인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정리한 것들을 풀기 시작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오는 연말에 미국 대선이 있습니다.”

“알고 있다. 11월 둘째 주겠지?”

정말 해박한 분이다. 지구 반대편 나라의 선거까지 기억하니 누가 할아버지를 칠순 넘은 노인이라고 볼까? 자리가 자리인지라 나는 감탄을 숨기고 의견을 계속 펼쳐나갔다.

“예, 회장님. 지금 미국에서는 클린턴의 연임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실이냐?”

할아버지의 눈이 번뜩였다. 대외변수에 민감한 한국에서 종합상사를 중심으로 그룹을 경영하는 분답게 보통 민감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이 이사 말이 맞습니다, 회장님.”

나는 중간에 치고 들어온 선해철을 바라보며 바통을 넘겨줬다. 미국 사정은 선해철이 말하는 게 훨씬 믿음을 줄 테니 말이다.

“클린턴 임기 초에 3,300대였던 다우지수가 5천을 넘어섰고 IT 인프라 확충, 영화산업 투자 확대 등으로 양질의 일자리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공화당 텃밭인 남부나 인구가 적은 중부 농업벨트를 제외하면 전부 민주당이 우세합니다.”

“알고 있네, 선 대표. 뉴욕에서 들어온 보고와 일치하는 내용이니까.”

여기까지는 해외 네트워크만 있으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으니 할아버지가 모를 리 없었다. 선해철이 내놓을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무엇보다 월가 헤지펀드들이 미국 민주당에 줄을 대고 있습니다.”

“그놈들이 또?”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일전의 당신 말마따나 대한민국 재벌보다 더 노골적으로 돈을 탐내는 황금야차들이 아닌가?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어른들도 헤지펀드의 무자비함을 아는지 무거운 표정으로 선해철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예. 헨리에게서 받은 정보에 따르면 엔고투기 때 우리 때문에 크게 먹지 못해서 벼르고 있다고 합니다.”

벼르고 있는 건 당연히 돈놀이, 정확히는 환투기다. 이를 모를 리 없는 할아버지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럴 만하겠군. 그놈들에겐 우리가 웬수였겠어.”

헤지펀드들이 벼를 만했다. 엔고투기 때 트라이엄프와 스탠더드, 우리 집안, 그리고 신성과 태현, GK가 털어먹은 돈이 얼마인가? 살코기는 죄다 우리가 뜯어먹고 자신들은 찌꺼기 묻은 뼈다귀나 씹어야 했으니 독이 바짝 올라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 이사에게 넘기겠습니다, 회장님.”

선해철은 나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띠며 바통을 되돌려줬다. 치고 빠지는 타이밍이 절묘했다.

“말해보게, 이 이사.”

“예, 회장님. 처음에 말씀드린 종금사 문제, 그와 맞물릴 종합수지 문제, 여기에 선 대표님이 말한 미국 대선까지 겹치면 동아시아 일대는 월가 헤지펀드들의 ATM이 될 겁니다.”

할아버지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동아시아에 외환위기라도 터질 거라는 게냐?”

“네. 상상을 뛰어넘을 해일이 몰아칠 겁니다.”

할아버지는 내 대답을 듣고 흡족한 표정을 띠었다. 내가 당신에게 내놓은 대답으로 모든 그림을 본 걸까?

“허면··· 그 때문에 장호건에게 잠시 맡겨두자는 거였나? 합작법인 지분 절반을?”

“네. 외환위기가 닥칠 때 우리가 확보한 달러로 지분을 사오면 됩니다.”

당장 현찰이 없어 죽을 판국이 되면 미래를 위한 투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나는 차가운 미소를 띤 채 어른들의 마음을 돌릴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다.

“합작법인 지분, 3년 내에 되찾아오겠습니다. 해내지 못하면 제가 보유한 그룹 지분을 전부 소각시키겠습니다, 회장님.”

“그 말, 사실이냐?”

“네, 회장님. 이 서재, 허언은 없어야 하는 곳이잖습니까?”

할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뚫어져라 나를 보더니 얼굴을 풀었다.

“좋다. 부회장. 태 대표.”

“예, 회장님.”

“한 달 준다. 지금 나온 계획까지 넣어서 영등포 재개발 계획 뽑아와.”

“알겠습니다.”

할아버지답지 않은 강행군 지시였지만 두 사람 모두 재깍 대답했다. 3년 전에도 남들보다 한 발 더 먼저 움직여서 화를 피해서인지 이번에도 나와 할아버지를 믿는 것 같았다.

“고 실장 자네는 사업계획서 나오는 대로 조 대표하고 그룹 자금현황 점검하고 이수한이 만나도록 해.”

“예, 회장님.”

이어서 할아버지는 선해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스 리미티드 지분 매입, 얼마나 진행됐나?”

“총 78퍼센트입니다, 회장님. 두 회사가 동률로 매집했고요.”

예정보다 빠른 매집 때문일까, 할아버지의 눈빛이 한결 누그러졌다.

“알았네. 지금처럼만 계속 모아둬. 배 대표도 주가 체크하면서 인수 준비하고.”

“예, 회장님.”

마지막으로 남은 내게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 이사는 언제가 됐든 신성전자에서 채권 만기 늦춰달라고 하면 금리 재조정 확실히 해. 알겠느냐?”

할아버지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 집안 사위가 되어도 안 봐줄 텐데 결혼도 안 한 마당에 사정을 봐줄 이유가 있겠는가?

“네. 그간 손해 본 것까지 확실히 챙기겠습니다.”

사랑은 사랑이고 사업은 사업이다. 장하연의 고려호텔이라면 모를까 장호건의 신성전자와 신성물산은 절대 안 봐줄 것이다.

***

이대수는 이성민과 선해철, 박태진을 내보낸 뒤, 새로 들인 홍차를 다섯 사람과 마셨다.

“어떤가, 재훈이? 우리 장손 계획이?”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하하.”

배재훈은 자신의 반삭머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겸연쩍은 웃음을 흘렸다.

“성민이 녀석, 작두라도 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금융실명제 때부터 싹수가 보이긴 했는데 2년 전에 영등포 방직공장을 쇼핑몰로 개발해서 장호건이와 나눠먹자고 한 게 이걸 노리고 그린 그림이 아닌가 싶더군요.”

“예끼, 이 사람아! 멀쩡한 내 장손, 무당 만들 일 있나? 으허허.”

배재훈에게 핀잔을 주며 속내를 숨겼지만 이대수도 섬뜩했다. 미래라도 내다 본 것처럼 딱딱 들어맞고 있지 않은가?

이대수는 웃음이 잦아들자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재훈이.”

“예, 형님.”

“방금 전에 하연이 얘기 꺼낸 건 위험했네. 그냥 넘어갔길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정혼서약서 얘기까지 나올 뻔했어.”

이대수의 따끔한 목소리에 배재훈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잘 넘어갔으니 그만 하지. 카자흐스탄 구리광산에 호주 아연광산, 해외증시에 올리면 얼마나 값을 받을 것 같나?”

“예?”

배재훈은 지금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증시 상장을 질색하던 이대수가 상장을 묻다니? 호형호제하는 사람이기 전에 그룹의 총수가 묻는 것이기에 곧바로 머리를 굴렸다.

“매출과 순이익 등을 고려하면 짜게 잡아도 카자흐스탄 구리광산이 15억 불, 호주 아연광산은 6억 불쯤 될 겁니다.”

“알겠네. 1분기 결산 맞춰서 그룹 보유 자산 모두 값을 다시 매기게. 내년 1분기도 마찬가지야.”

자산 가치 재평가를 하면 그룹 전체 자산의 장부상 가치와 주가가 올라가지만 상속비용도 늘어난다. 해동그룹 비서실장으로서 가만있을 수 없었는지 고승주가 얼른 나섰다.

“그 전에 성문이, 성우, 성아에게 회장님의 해동물산 주식일부를 넘겨주시는 게 어떠십니까?”

“증여를 하란 말인가?”

“예. 주제 넘는 말이지만 자산 가치를 재평가하면 해동물산 주식의 증여세가 늘어납니다, 회장님.”

“이 늙은이가 그걸 놓칠 뻔했군.”

해동물산은 비상장기업이지만 이대수의 성격상 주식 상속은 잡음 없이 처리해야 한다. 그렇다고 불필요한 납세도 반기지 않기에 이대수가 겸연쩍은 미소를 흘렸다.

고승주가 제안한 증여는 해동그룹이 대를 이어 안정적으로 영속(永續)할 방법이었다. 허나 최대 수혜자가 될 이명진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형님. 이제 겨우 대학교 1,2학년에 고 3인 애들한테 상속이라뇨? 괜찮습니다, 아버지.”

난색을 드러내며 사양하는 아들에게 이대수가 미소를 띠었다.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해동물산이 너무 커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엔고투기 전에 넘겨줄걸 그랬어, 허허.”

“아버지···.”

“네 지분 25퍼센트에 성문이, 성우, 성아 지분까지 합쳐서 37퍼센트로 만들어주마.”

이명진은 아버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성민이야 혁혁한 공을 세웠다지만 이제 겨우 대학생이거나 대학을 앞에 두고 있는 애들에게 상속이라니?

“아버지?”

“다들 자랑스러운 내 새끼들이니 골고루 챙겨줘야지. 대학 가려고 고생한 보람은 있어야 할 게 아니냐? 으허허.”

이대수의 둘째 손자인 이성문과 셋째 손자 이성우는 각각 서울대 기계공학과와 2학년과 전기공학부 1학년에 고 3인 막내 손녀 이성아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으며 서울대 건축학과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성과를 내기 위한 노력이 기특했기에 이대수의 증여는 할아버지가 손주들을 격려해주는 선물이자 회장으로서 후계자들에게 지급하는 인센티브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이명진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성민이에게도 지분을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아버지.”

“성민이?”

“제 아이들이야 나중에 제 주식을 물려받으면 되지만 성민이 지분은 10퍼센트뿐입니다. 우리 집안 장손인데 10퍼센트만으로 되겠습니까?”

“흐음···.”

침음성을 흘리는 이대수에게 이명진이 말했다.

“창립 이래로 지키지 못했던 사훈을 성민이가 해냈습니다.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잠시 동안의 고민 끝에 이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성민이한테도 물려줄 테니 너도 더 이상 사양 말고 받아둬.”

“감사합니다, 아버지.”

“고마울 거 없다. 대신에 장호건이 밀어 넣을 함정은 제대로 만들어야 할 게야. 애비로서 자식들 몫까지 해야 하지 않겠느냐?”

자식들이 못내는 밥값은 아버지가 내야 하는 법. 이명진이 이대수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

“그래야지. 고 실장 자네는 성민이한테 내 지분에서 10퍼센트 넘겨줄 준비해. 성문이, 성우, 성아도 4퍼센트씩 넘겨주고. 자산 재평가는 그 뒤에 하게.”

“알겠습니다, 회장님. 모든 증여세는 연부연납으로 처리하겠습니다.”

모든 기업은 영속을 추구하는 법.

언제일지는 몰라도 다가올 전쟁에서 살아남아 다음 세대에도 영속하기 위해 해동그룹도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했다.

***

사무실에 돌아간 우리 셋은 커피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영등포 재개발 계획 안 짰으면 낭패 볼 뻔했어.”

선해철의 심정이 내 심정이었다. 장호건이 핸콕 프로스펙팅을 안 경위는 몰라도 불도저로 막을 뻔했던 걸 호미로 막지 않았나? 언제 터질지 모를 나비효과를 통제하고 싶어 막연히 시작한 계획이었는데 운 좋게 들어맞았다.

“그러게요, 삼촌. 아슬아슬했어요.”

“너, 혹시 내림굿 받았냐? 뭐 할 때마다 작두 탄 거 같다야.”

선해철에게 내림굿 대신에 죽음의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번 일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파나마 구리광산 사업 때문에 준비한 일로 호주 사업까지 막아냈으니 운이라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었다.

박태진은 우리 둘을 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놨다.

“이유야 어찌됐든 결과가 좋게 나왔으니 다행이죠. 일전에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도련님께 천운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하하.”

대충 얼버무린 나는 민망한 표정을 감추려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던 중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삼촌.”

“왜?”

“배 대표님께서 어떻게 제가 누나 좋아하는 거 아셨을까요?”

이상했다. 난 분명히 이 두 사람과 할아버지에게만 말했었는데···.

선해철이 날 보며 혀를 찼다.

“인마, 배 대표님께서 회장님과 호형호제하시는 분이야. 작은할아버지 같은 분이 아시는 게 이상해?”

“그런···가?”

“그런가는 반말이고, 짜식아.”

선해철은 고개를 갸웃한 내게 핀잔을 주고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하하··· 그것 참.”

잔을 내려놓은 선해철이 갑자기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어갔나?

“왜 그러세요, 삼촌?”

“너, ‘스팅’이라는 영화 아냐?”

뜬금없이 왜 고전영화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할아버지 수장고에 필름도 있고, 집에도 비디오 있어서 몇 번 봤어요.”

“그 영화 줄거리, 알지?”

“후커가 로니건에게 사기 쳐서 복수하는 거잖아요. 로니건은 끝까지 후커한테 속은 것도 모르고 FBI한테 잡혀가는 거고요, 흐흐.”

“네 예비 장인이 딱 그 로니건 꼴이야. 안 그래?”

선해철은 날 보며 껄껄 웃었고, 나와 박태진도 웃음을 터뜨렸다. 장호건은 끝까지 우리의 영등포 재개발이 자신의 호주 사업 진출을 막으려고 설계한 것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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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이 화장실에 가자 선해철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칠 뻔했네.”

영화 이야기로 말을 돌렸길 망정이지 저 똘똘한 놈이 금방 눈치 챌 뻔했다. 집안 어른들 모두 이성민과 장하연의 연애를 알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잘하셨습니다, 형님.”

박태진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배 대표님도 역린은 어쩔 수 없나보다.”

“어쩔 수 없지요. 섬유부 때부터 두 공장에서 일하시던 분들과 친하셨으니까요. 공장 문 닫았을 때는 1년 동안 삼청동에 발도 안 들이셨잖습니까?”

두 사람은 배재훈이 이성을 잃고 장하연과 이성민 이야기를 할 때 마른침을 삼켰다. 사업 현안에 집중했길 망정이지 이성민이 딴 길로 샜으면 대형사고가 날 뻔했다.

“빨리 저놈 장가보내야 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선해철은 박태진을 보며 새끼손가락만 펼친 손을 흔들어보였다.

“너, 아직도 없냐?”

“걱정 마십시오. 때 되면 알아서 보여드리겠습니다, 흐흐.”

박태진이 씩 웃는 모습을 보고 선해철은 누가 저 딱딱한 놈 옆에 있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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