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26th. 쉽지 않은 새 살림 (4)
박태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수한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실장님? 선해철 그 사람, 엔고투기로 대박내서 저 같은 놈은···?”
쳐다도 볼 수 없는 상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박태곤은 이수한이 든 손을 보고 입을 닫았다.
“나도 아네. 그 정도 공이면 트라이엄프 본사 경영진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겠지. 그런데 그 사람, 그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더군.”
“예?”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던 박태곤이 얼른 입을 닫았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아니네. 내가 자네라도 놀랐을 거야. 그런 공을 세우고도 다른 회사, 그것도 더 작을 것 같은 회사로 간 걸 보면 당최 속을 알 수가 없으니 말이야, 하하.”
이수한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선해철이라는 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꽃길을 벗어나 험한 길로 들어섰는지 알 수 없었다.
밖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 의문은 박태곤도 마찬가지였다.
“더 작은 회사라면 어딜 말씀하시는 겁니까?”
“스탠더드 캐피털. 알지?”
“예. 저번 작업 때 들어온 곳이었습니다.”
“기억하는군. 선해철, 그 회사 한국법인 대표가 됐다고 하네.”
박태곤은 또 한 번 터져 나올 뻔했던 목소리를 간신히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추태는 한 번으로 족하지 않겠나?
이수한은 그를 보고 빙긋 웃은 뒤, 입을 열었다.
“그쪽 본사를 알아보는 건 내 선에서 맡을 테니까 자네는 한국법인에 가보게. 선해철하고 만나면서 이성민이 뭐 하는지 알아봐.”
“이성민이면 해동그룹 장손 아닙니까?”
박태곤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핏줄만 믿고 깝죽거리는 종자들과는 DNA가 다른 재벌 후계자가 아닌가?
“맞네. 젊은 나이에 꽤 똘똘한 친구지. 재작년에는 장하연 상무하고도 해동백화점 컨설팅 건으로 호흡도 맞췄었고. 그 회사에 이성민도 있더군.”
박태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확실히 알았다. 고베대지진 당일에 귀국하고 나서 이수한과 함께 포장마차에서 축하주를 마실 때 주거니 받거니 했던 이야기 중에 오너 가문에 대한 이야기까지 듣지 않았나?
“선해철보다는 이성민에게 집중해야겠군요. 회장님 친구 분의 하나뿐인 아들이니까요.”
박태곤이 들었던 이야기 중에는 장하연과 이성민, 그리고 둘의 부모인 장호건과 이명우의 관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박태곤을 보며 이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오후쯤에 다녀오게.”
이수한은 품 안에서 스탠더드 캐피털의 위치를 표시한 약도를 꺼내 박태곤에게 건네줬다.
“알겠습니다, 실장님.”
박태곤은 약도를 품 안에 고이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띠던 이수한은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박태곤을 불렀다.
“그러고 보니 자네, 나하고 저번에 포장마차에서 술 마실 때 어떤 친구 덕분에 살아 돌아왔다고 하지 않았나?”
“예. 존 데이비슨이라는 친구입니다. 제 고집대로 고베에 더 머물렀다면 실장님과 축하주를 마시는 건 꿈도 못 꿨을 겁니다.”
당사자였던 박태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이수한 또한 존 데이비슨이라는 친구를 만나보고 싶었다. 투자가로서의 판단이었다고는 해도 사람을 구해낸 일이 되지 않았나? 그 정도 운이라면 보통 사람이 아닐 것 같았다.
“그 친구는 아직도 연락이 없던가? 나라면 생색이라도 내려고 전화라도 한 통 했을 텐데.”
“그날 아침에 바로 뉴욕 행 비행기를 타고 가서는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하면서 헤어지고 싶었는데···.”
박태곤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말끝을 흐리자 이수한이 입을 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 세상은 넓고도 좁은 곳이야.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
“감사합니다, 실장님.”
위로를 받은 박태곤도, 위로를 건넨 이수한도 그 ‘존 데이비슨’이 자신들과 같은 땅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여의도 스탠더드 캐피털 사무실에서 서류를 살펴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도 종합수지가 안 좋네요.”
“어쩔 수 있나. 엔-달러 환율이 빠르게 회복됐으니.”
선해철의 말이 맞았다.
대한민국의 1995년 종합수지는 마이너스 60억 달러.
내가 설계한 대로 엔고투기에 나서서 4개 그룹이 벌어온 돈에 해동그룹이 미국 증시에 투자한 돈, 해동물산에서 해외 광산 인수에 쓴 돈을 더하고 뺀 것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마이너스 100억 달러였다.
예상대로 전조가 드러났다. 이제 이 한 해만 다른 그룹들의 의심을 받지 않고 잘 넘기면 내년부터 스탠바이다.
불끈 쥔 주먹을 풀고 다음 계획을 구상하던 중 노크 소리와 함께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대, 대표님, 손님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네. 신성그룹 비서실··· 박태곤 이사라고 하면 알 거라며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우리 셋의 얼굴색이 변했다. 박태곤이 여길 어떻게 알고?
직원은 우리 셋의 굳은 얼굴이 걸렸는지 쭈뼛쭈뼛하면서도 선해철의 책상 앞으로 가서 박태곤의 명함을 내밀었다.
“응접실로 모시도록 해. 커피 두 잔 가져오고.”
나는 직원이 나가는 걸 보고 박태진에게 말했다.
“형, 얼른 그룹 자료하고 명패, 서랍에 넣고 회의실로 들어가세요.”
우리 방에서 회의실로 연결되는 문을 손으로 가리키자 박태진이 당황했다.
“예?”
“저 보러 왔을 거예요. 누나하고 데이트할 때 여기서 일하고 있다고 말한 게 아저씨 귀에 들어간 거 같아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손을 쓸 줄은 생각도 못했다. 만약에 박태진이 여기 있는 것까지 알면 이 사실이 장호건 귀에 들어갈 터. 그렇게 되면 해동그룹과 스탠더드 캐피털과의 관계를 파고들 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박태진이 재빨리 서류와 명패를 서랍 안에 넣는 걸 보고 선해철에게 말했다.
“삼촌, 커피 한 잔 더 준비하라고 하세요.”
“설마 너···?”
“저 보러 온 거 같은데 만나주는 게 예의겠죠?”
“마, 그래도 위험하잖아?”
“어차피 제가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거 알고 왔을 거예요. 지금은 저보다 태진이 형 노출시키는 거 막아야 해요.”
어쩌면 박태진도 노출됐을지 모르지만 박태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 막아도 해동그룹과 스탠더드 캐피털의 관계를 숨길 수 있다. 그러려면 내가 미끼가 되어야 한다.
잠시 고민하던 선해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네가 살려준 그 친구, 직접 만나는 것도 좋겠지.”
선해철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에 들어갔다.
“아이고, 박 이사님. 오랜만입니다, 하하.”
선해철이 넉살 좋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박태곤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근 1년 만이군요, 선해철 대표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분은 누굽니까?”
말과 달리 박태곤은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태곤 이사님. 스탠더드 캐피털의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이성민이면···?”
“작년까지는 해동그룹 소속이었지만 올해부터 신입사원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한 곳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지원했는데 받아주더군요, 하하.”
여유 있게 웃어넘기는 나와 달리 박태곤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도 잠시 박태곤은 금세 접대용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이대수 회장님 장손이라고 들었는데 참 진취적인 것 같습니다.”
“자자, 모처럼만에 역전의 용사들끼리 만나게 됐는데 차라도 한 잔 하시죠, 박 이사님. 성민이 너도 앉고.”
자리에 앉은 우리는 직원이 가져온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해철과 박태곤이 일본에서의 일을 얘기하는 걸 나만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듣고 있었다.
“그때 정말 아슬아슬했습니다, 박 이사님. 잘못했으면 고베에서 잤다가 저승에서 일어날 뻔했지 않았습니까? 하하!”
“그 일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합니다, 선 대표님. 존 데이비슨 그 친구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요.”
쓴웃음을 짓던 박태곤이 선해철에게 물었다.
“선 대표님, 혹시 그 친구 연락처 알고 계십니까?”
“무슨 일 때문입니까?”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할 기회도 안 주고 간 그 친구한테 원수를 갚아주고 싶어서요, 하하.”
박태곤의 말을 듣고 온갖 슬픈 생각을 짜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 자신과 마주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내가 ‘존 데이비슨’인데 저런 말을 들으니 어찌 안 웃기겠나? 그럼에도 때가 올 때까지는 가면을 쓸 수밖에 없었다.
선해철은 찻잔에 담긴 커피를 바라보던 박태곤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박 이사님. 그 친구, 그 프로젝트를 마치자마자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합니다.”
“네?”
“그 일로 한 몫 단단히 쥐었다고 합니다. 더 이상 미련이 없다고 하더군요.”
“이런···.”
“뭐, 그 친구 나이에 그 정도 수익을 회사에 안겨줬으니 분배금도 두둑이 받았을 테고···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하하.”
선해철은 자신의 거짓말에 박태곤의 얼굴에 실망이 번지는 걸 보고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박 이사님 인사는 제가 대신 전해드리죠. 그 친구, 흥청망청하지도 않고 욕심이 큰 친구라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겁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박 이사님과도 만날 수 있겠죠.”
“감사합니다, 대표님.”
박태곤을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이 미안한 마음을 덜어내려면 내년까지는 기다릴 수밖에.
“드릴 말씀이 있으니 이성민 씨는 밖으로 보냈으면 합니다.”
“그러시죠. 성민아, 넌 가서 일 보도록 해.”
나를 보내려는 걸 보니 나에 대해 물어보려는 것 같았다. 원한다면 기꺼이 비켜줘야겠지.
***
이성민이 응접실을 나가는 걸 보고 박태곤이 입을 열었다.
“이성민 씨, 어떻습니까?”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겁니까, 박 이사님?”
“보통 특이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최근 몇 년 간 보여준 해동그룹의 성장세에 이성민 씨의 그룹 내 입지를 생각하면··· 하하.”
박태곤의 너털웃음 속에 담긴 수많은 의미들을 이해했기에 선해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하죠. 명분에 실력까지 갖췄는데 힘든 길만 골라서 가니까요. 먼저 간 제 친구가 남긴 하나뿐인 아들이기도 하지만 다른 재벌 후계자들과 비교하면 유별나긴 합니다, 하하.”
“그렇지요. 저도 그룹 비서실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이성민 씨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하하.”
시시콜콜 말하지 않아도 선해철이 알아들을 거라고 박태곤은 믿었다.
수준을 넘어선 사람들 간의 대화에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 없는 법. 벌써 자신이 눙쳐서 던진 질문을 턱하니 받아서 원하는 대답을 되돌려주지 않았나?
선해철은 그런 박태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성민이가 똘똘한 건 박 이사님도 아실 테고··· 부지런하기까지 합니다. 아침 일찍 회사에 나와서 환율 체크에, 기업 분석 하는 걸 보면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 정도입니까?”
“예. 세상 사람들이 색안경을 쓰고 손가락질해도 아는 사람들은 성민이를 절대 무시 못 할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직할 때 미국 본사에 요청해서 함께 들어왔고요.”
지금 선해철이 하는 말의 앞부분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겨우 3년 만에, 그것도 스물여섯에 세계 부호 서열 100위 안에 들어가지 않았나? 종자돈과 인맥을 감안해도 정글 같은 세계 금융시장에서 그만한 부를 일궈낸 건 투자를 예술로 승화시킨 것 그 자체였다.
박태곤은 선해철이 이성민을 대신해서 자신을 상대로 허풍을 떠는 게 아닐까 했지만 그의 얼굴에서 단 한 올의 거짓도 찾아낼 수 없었다. 저 말이 사실이면 자신이 모시는 회장이 이성민을 사윗감으로 찍은 것을 납득할 수 있었다.
“선 대표님이 그리 말씀하실 정도면 장래가 기대될 것 같군요, 하하.”
“오랜 세월 봐온 아이인지라 사심도 들어가긴 했지만 잠재력이 충분한 아이입니다, 하하.”
박태곤은 선해철과 함께 껄껄 웃고는 남은 커피 한 모금을 말끔히 비웠다. 볼 일을 다 봤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였는지 선해철도 화답하듯 마시기 좋게 식은 커피를 쭉 비웠다.
“앞으로도 종종 뵀으면 합니다, 선 대표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박 이사님. 일본에서 찐하게 맺어진 인연잖습니까? 공적이든, 사적이든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가길 바랍니다.”
선해철은 박태곤과 함께 일어나서 악수를 나눴다. 맞잡은 손에 들어간 힘이 마음에 들었는지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
박태곤은 회사로 돌아가자마자 이수한을 찾아가서 오늘 있던 일들을 보고했다.
“그 정도란 말이지?”
“네, 실장님. 개업한지 얼마 안 돼서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지만 선해철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흐음···.”
박태곤의 말을 듣고 이수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회장님께 들은 말을 생각하면 거짓말은 아닐 걸세. 머리도 좋고, 노력도 열심인 건 사실일 텐데 왜 오지를 돌아다니는지 모르겠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정도 역량을 보여준 후계자라면 당장 그룹에 끌어들여서 힘을 실어주는 게 보통의 재벌인데 왜 그러는지 말이다.
박태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짧은 생각이긴 하지만 이대수 회장님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지배구조도 확고하니 큰 걱정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그 분,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을 분인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
이수한의 반박에 박태곤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아닐세. 우리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남의 집 사정까지 신경 쓰는 건 사치지.”
더 이상 깊이 파고들어봐야 의미가 없는 일이기에 이수한은 신경을 끄기로 했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