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26th. 쉽지 않은 새 살림 (3)
“연애전선은 이상 없어요. 그런데··· 신성이 걸리네요.”
선해철은 내 말을 듣고 잠시 찌푸렸던 미간을 풀었다.
“파나마 구리광산?”
“삼촌이 그걸 어떻게···?”
깜짝 놀란 나를 보고 선해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로 말했다.
“클레어한테 들었어. 나하고 태진이 밖에 나가서 얘기할 때 클레어한테 말했다며?”
1년 뒤에 한고제철을 시작으로 우리가 집어삼킬 탐스러운 메뉴들로 뷔페가 깔릴 거라는 말로 설득할 수는 없기에 선해철의 질문을 받아먹었다.
“네. 광산 투자와 운영은 해동물산이 맡고, 광산 인프라 공사는 숙부님 계열사가 맡으면 돈이 될 텐데 아깝잖아요.”
“확실히 아깝지. 해동건설이 광산 플랜트 프로젝트 경험을 쌓으면 다른 공사도 딸 수 있으니까. 생각하는 건 있고?”
“영등포 쇼핑몰이요. 예전에 센트럴스퀘어에 고려호텔 들어가는 거 도우면서 신성과 거래한 게 있는데···.”
당시에 오갔던 비밀거래를 듣고 선해철이 새삼스럽게 유난 떤다는 것처럼 나를 보며 말했다.
“영등포 쇼핑몰 사이즈 키워서 신성 여유자금 빨아먹으면 되겠네. 광산 개발이야 리스크가 큰 사업이니까 확실한 이익이 보장되면 그쪽이 더 남는다고 생각할 걸?”
“그러겠죠?”
“말이라고? 영등포 방직공장만 개발할 게 아니라 문래동 의류공장까지 개발하는 게 어때?”
선해철의 말을 듣고 머릿속이 상쾌해졌다.
원래 역사에서도 내년이면 ‘영등포 부도심권 기본정비계획’이 발표된다. 낙후된 영등포동과 문래동 일대를 재개발하는 사업인데 이걸 까먹고 있었다니!
여기에 우리 집안은 다른 회사 제분공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등포 방직공장 외에도 문래동 의류공장까지 갖고 있다. 영등포역 로엘백화점과 맞장 뜰 생각으로 방직공장 땅만 먼저 개발하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안이했다.
영등포 재개발 사업을 1년 더 앞당기면 신성물산의 곳간을 털어내는 건 일도 아니다. 삽을 뜰 때부터 테이프 커팅까지 최대 조 단위의 자금을 빨아먹을 수 있다.
선해철은 입이 벌어진 채 입꼬리가 올라간 내 얼굴을 보고 낄낄 웃었다.
“짜식, 종이장사로 수백억 달러를 돌렸으면서 이런 것도 일일이 떠먹여줘야 하냐?”
“삼촌도 참. 주식하고 부동산이 같나요? 그래도 그룹 현금은 알차게 불리고 있잖아요.”
선해철이 나를 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 우리 조카가 부동산에 약한 건 몰랐네?”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하는 겁니다, 삼촌.’
속내와 달리 겸연쩍은 미소를 띤 나를 보고 박태진이 말했다.
“그래도 3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죠. 그룹 지주회사인 해동물산만 해도 30억 달러 플러스 1조 원을 쥐고 있잖습니까?”
선해철도 박태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해동종금도 고객들에게서 유치한 CMA 자금으로 S&P 500 인덱스 펀드에 넣은 돈만 원금 기준으로 4억 달러가 넘고.”
“숙부님도 중공업 계열사들 부채 줄이면서 여유현금은 인덱스 펀드에 넣어두고 있고요.”
해동그룹은 내 계획대로 외환위기의 한파를 헤쳐나갈 ‘쩐국열차(錢國列車)’를 만드는 데 열심이었다. 한파가 시작될 때 우리는 선심 쓰듯 탑승권을 뿌리고 원하는 걸 챙기면 된다.
“그러니까. 신성이나 다른 그룹은 벌벌 떨면서 밀어 넣을 칩, 회장님이면 옜다하면서 던질 거다. 망설일 게 뭐 있어? 지를 땐 크게 질러야지.”
선해철의 말이 맞다.
해동물산에서 22억 달러를 미국 증시에 간접투자 했어도 거래처 신용장 처리를 위해 국내에 남겨둔 미화 8억 달러와 한화 1조 원이 있다.
그 돈을 해동물산 국제금융부가 굴려서 내는 수익이면 영등포 재개발을 땡빚으로 해도 이자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 신성의 해외 자원개발 사업 진출을 막기 위해서라면 할아버지는 그 금융수익을 가볍게 던질 것이다.
“삼촌 말씀이 맞네요. 오늘부터 기획서 만들고 나서 그룹 회의 요청해야겠어요. 문래동 철공소들은···.”
즉석으로 생각해낸 계획을 밝히자 선해철의 눈이 커졌다.
“문래동 땅에 영등포역 앞까지 개발하겠다고?”
“기왕 지를 거 크게 지르라면서요? 그쪽 철공소 지역까지 재개발해서 문래동 철공소 사장님들한테 깔끔한 공장 내주면 다들 좋아할 것 같은데.”
돈으로도 밀리지 않고 타이밍까지 칼처럼 잴 수 있는데다 어차피 새로 늘려야 할 영등포 재개발 사업이다. 입이 떡 벌어지게 차려야 장호건도 냉큼 들어올 것이다.
***
이성민 일당이 자신을 잡을 함정을 짜는 것도 모르고 장호건은 장하연과 함께 성의원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투자회사?”
“네. 지인이 소개해준 회사라는데 거기서 일하게 됐다고 해요. 아직은 외국인 투자 제한 때문에 투자는 크게 안 할 거라서 컨설팅 업무도 할 거라네요.”
“흐음··· 성민이다운 결정이구나. 명우 아들 아니랄까봐, 하하.”
침음성을 흘리던 장호건이 껄껄 웃고 차를 마시자 장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씀이세요?”
“명우는 원래 경영학 교수가 되고 싶어 했었다.”
“아저씨가요?”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장하연은 귀를 쫑긋 세우고 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래. 회사를 물려받는 것과는 별개로 이론과 실전을 모두 갖춘 교수가 돼서 이 나라 기업들의 체질 개선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었지. 이 회장님 때문에 포기했지만 말이다.”
“아···.”
“오늘 네 얘기를 들으니 그 피는 어디 안 가는 것 같구나.”
옛 친구에 대한 기억을 미소와 함께 머금던 그가 표정을 달리하고 장하연에게 물었다.
“헌데, 그 회사 이름이 뭐냐? 아무리 지인이 소개시켜준 회사라도 기왕이면 이름값이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게 좋을 텐데.”
장하연의 얼굴에 낭패감이 드리워졌다. 없는 시간까지 쪼개서 데이트에 집중한 나머지 자기 남자가 일하는 회사의 이름도 안 물어봤다니!
“죄송해요, 아버지. 그걸 못 물어봤네요.”
“죄송할 게 뭐가 있냐. 너도, 성민이도 없는 시간 쪼개서 만나는 거 알고 있는데.”
장호건은 고개를 숙인 장하연을 다정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래도 지인이 소개해준 회사에 들어간 걸 이 회장님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애비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장호건이 괜찮다고 말해도 장하연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신성그룹의 회장이 아닌가? 책 잡혀서 좋을 일은 없었기에 장하연이 얼른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물어볼게요. 나중에 우리 그룹하고 손잡을 수도 있으니까요.”
“허허, 괜찮대두. 이 애비,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다. 가서 일 봐.”
장호건은 넉넉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장하연을 보내자마자 웃음을 뚝 그쳤다. 그는 곧바로 책상으로 걸어가서 전화를 걸었다.
“날세, 수한이. 성민이 어디 취직했는지 알아봐. 아니, 박태진 그 친구가 옆에 있으면 금방 눈치 챌 테니까 밀착감시는 하지 말고 다른 라인으로 알아봐.”
전화를 끊은 뒤, 장호건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 녀석이라면 잘 하겠지만 기왕이면 좋은 곳이면 좋겠는데···.”
***
그날부터 우리 셋은 발품을 팔아가며 문래동 의류공장 주변 부동산 시세를 알아봤다. 소문이 돌까 봐 허름한 점퍼에 캡 모자, 운동화를 신고 복덕방을 돌아다녔다.
“이 일대 시세가 얼마나 되나요, 사장님? 삼촌이랑 형하고 중국집 차리려고 하는데.”
복덕방 주인은 내가 짚은 곳을 보더니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서류를 뒤적거렸다.
“평당 칠백에서 천이백 정도는 될 거요.”
“그렇게 비쌉니까?”
선해철 옆에서 놀란 표정을 지은 박태진을 보고 복덕방 주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럼? 이 근처에 철공소가 쫙 깔려 있잖소? 실력만 좋으면 밥장사하기에 이만한 자리도 없어. 이 옆에 문 닫은 의류공장에 길 건너 방직공장만 개발돼도 땅값이 몇 배로 뛸 거요.”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우리 셋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주인장에게 인사를 한 뒤, 복덕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리 세 사람은 복덕방 주인 앞에서 비싸다며 낙담하던 기색을 싹 지워버렸다.
“평당 칠백에서 천이백이면··· 충분하겠어.”
선해철이 흡족한 표정으로 턱을 문질렀다.
정부에서 수용한 토지를 인수한다고 해도 기본 시세가 있으니 이 사업에 끌려 들어오면 신성물산은 건설부문에 힘을 주느라 다른 사업에 자금을 투입할 여력이 없어질 터. 나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선해철에게 말했다.
“이번 사업, 부자탕이 될 것 같네요. 호건이 아저씨한테요.”
내 말을 듣고 선해철이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사약이 아니고? 흐흐.”
“그럴 수도 있고요. 공사비까지 합하면 신성물산은 절대 못 버틸 겁니다. 그렇죠, 형?”
박태진은 내 말을 듣고 빙긋 웃었다.
“그럴 겁니다, 도련님. 신성물산 건설부문이 영등포에 끌려 들어오면 상사부문이 쓸 자금이 없어질 테니까요.”
사업구성은 해동물산과 다르지만 신성물산 또한 ‘신성물산’이라는 간판 밑에서 건설과 무역, 자원개발, 자동차 사업이 공존하는 복합기업이다.
복합기업은 서로 다른 사업 간 상호보완이나 시너지가 장점이지만 회사의 재무여력을 공유하기 때문에 특정 사업에 자금을 투입하면 나머지 사업들을 자금 여력이 없어진다.
‘신성물산 자원개발 사업과 자동차 사업은 내 손으로 관짝에 집어넣고 관뚜껑에 못까지 박아준다. 앞으로는 공사판 십장 노릇으로나 돈 벌어야 할 거다.’
장호건이 알면 뒷목 잡을 생각을 정리한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아도자동차 세단에 몸을 싣고 여의도로 방향을 잡았다. 사전작업은 모두 끝냈으니 밑그림을 그릴 시간이 됐다.
***
열흘 뒤.
우리는 밤낮도 없이 쉬지 않고 일한 끝에 ‘영등포 부도심권 정비기본계획’이라는 제목의 사업계획서를 완성했다.
“이제야 다 됐네. 전화는 네가 해라?”
“네, 삼촌.”
나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네, 백부님. 성민입니다. 영등포 방직공장 재개발 건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룹 차원의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네.”
전화를 끊은 나는 선해철과 박태진을 보며 씩 웃었다.
“할아버지께 보고 올리고 시간 알려주겠다고 하시네요.”
“오케이. 쉬면서 기다리자.”
서류를 모두 정리한 우리는 몇 시간 뒤에 걸려온 고승주의 전화를 받고 삼청동으로 들어갔다.
“너희들이 짠 거라고?”
“네, 회장님.”
서류를 들어 팔랑거리던 할아버지는 우리 셋의 대답을 듣고 서류를 찬찬히 훑어봤다.
“잘 만들었구먼. 낡은 도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명분도 좋고 선거철을 노린 것도 맘에 들어.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할아버지의 질문에 우리가 나눠준 서류를 훑어보던 배재훈이 고개를 들었다.
“이 사업에 신성물산을 끌어들이면 해외 자원개발에 투여할 자금이 부족해질 겁니다. 투입 자금만 자그마치 조 단위가 아닙니까, 흐흐.”
배재훈은 입이 찢어질 것처럼 웃고 있었다. 뒤를 쫓아오는 경쟁자의 발목을 잡는 일이 아닌가? 웃는 모습을 보니 이 양반도 착하다는 말을 듣기는 그른 것 같았다.
“로엘 놈들이 배 아파 죽을 것 같습니다. 우리 본점 구관이 재개장하고부터 우리한테 밀리고 있는데 이렇게 판을 키워버리면 영등포 상권에서 우릴 따라잡는 건 포기해야 할 겁니다, 으하하.”
태재호 또한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영등포역에 똬리를 틀고 있는 로엘백화점을 완벽하게 찍어 누를 기회가 아닌가?
“자금 문제는 고 실장과 공조해서 처리하겠습니다, 회장님. 유보현금도 충분하고 그룹 차원의 미국증시 투자수익도 좋으니 금융비용 문제는 없을 겁니다.”
조영찬이 자신 있게 말하고 콧수염을 매만지는 가운데 이번 프로젝트의 야전지휘관인 이명진이 다음 바통을 이어받았다.
“중공업 계열사를 모두 동원하면 PM(Project Management, 프로젝트 관리)을 수행하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이번 기회에 건설 수익구조도 바꿔보겠습니다, 아버지.”
이번 사업은 해동건설이 턴키보다 더 높은 수익을 내는 PM 분야에 진출할 기회이기도 했다. 이명진이 빛날 기회를 남겨두려고 계획서에서 뺐던 PM을 스스로 내놓으니 믿음직스러웠다.
“영등포에 출마할 여야 후보와 접촉하는 건 제가 맡겠습니다, 회장님. 계획이 나오는 대로 이 실장과 만나서 미끼를 던지면 장호건 회장도 고민할 겁니다, 하하.”
고승주까지 자기 역할을 가져가자 할아버지가 턱 소리를 내며 책상을 내려쳤다.
“장호건이 잡으려면 이 정도 함정은 파야겠지. 재훈이 자네는 호주법인에 핸콕 쪽 협상 재개하라고 해. 뉴욕법인에도 파나마 인맥 뚫으라고 하고. 장호건 자빠지는 대로 다 쓸어 담을 준비해.”
할아버지의 지시를 끝으로 회의는 끝났다. 이번 사업만 크게 벌이면 장호건은 호주와 파나마 자원개발 사업 포기해야 할 것이다.
***
그로부터 며칠 뒤.
이수한은 국내 정보망을 돌려서 알아낸 정보를 장호건에게 전화로 보고하고 있었다.
“스탠더드 캐피털이라고 지난 엔고 투기 때 우리와 함께 작업했던 곳입니다, 회장님.”
[스탠더드 캐피털이면··· 그 회사인가? 엔고 투기 때 들어왔다는?]
“예. 작년 12월에 한국법인 설립 작업을 마치고 이번 달 초부터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알겠네. 본사 쪽 정보는 신성전자 뉴욕법인에 시켜서 알아보게. 물산 쪽 공성필이한테는 절대 알리지 마.]
지극히 당연한 지시였다. 장 씨 가문의 돈을 받아먹어 왔으면서 황 씨 일가의 개 노릇을 하는 놈이 아닌가? 일이 잘못되면 이성민과 장하연의 혼담도 틀어지고 해동그룹과 원치 않는 전면전까지 불사해야 하니 보안유지는 필수였다.
“예, 회장님. 지금 바로 박태곤 이사에게 시키겠습니다.”
[수고하게.]
통화가 끊어지자 이수한은 곧바로 새 번호를 눌러서 박태곤을 불렀다.
몇 분 안 돼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부르셨습니까, 실장님.”
이수한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인사를 건넨 박태곤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와, 박 이사. 앉아서 얘기하지.”
이수한은 박태곤과 소파에 앉아서 비서가 가져온 커피를 마셨다.
“자네, 선해철 기억하나?”
“예. 저번 작업 때 함께 일했던 사람입니다.”
“자네, 그 사람 좀 만나고 오게.”
박태곤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었나 싶었다. 선해철을 만나고 오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