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26th. 쉽지 않은 새 살림 (2)
며칠 뒤.
우리 둘은 한국에 돌아온 선해철을 맞느라 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잘 됐어요?”
“이 삼촌을 뭘로 보고? 한 큐에 깔끔하게 정리했다, 흐흐.”
선해철은 기분 좋게 웃으며 도자기 잔에 담긴 이강주를 마셨다. 선해철이 잔을 내려놓자 박태진이 도자기 주전자를 들고 그에게 다시 술을 권했다.
“잘 풀리셨다니 다행입니다, 형님. 축하드립니다, 하하.”
“축하는 무슨. 쑥맥처럼 고백도 못하다가 요놈 덕분에 풀렸는데.”
선해철은 박태진에게 손을 내저은 뒤,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감사합니다, 오너님. 흐흐.”
“별 말씀을요. 앞으로는 미국 본사 투자위원회 위원이시고 이사회 이사이신데 편하게 하십시오, 대표님. 흐흐.”
장난스럽게 공치사를 주거니 받거니 했지만 이제부터 선해철은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의 대표이사 겸 미국 본사의 핵심 멤버가 되었다.
헨리의 측근이자 사위로서 트라이엄프 캐피털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니 우리 집안과 로이스 가문의 가교를 맡은 건 물론이었다.
그 뒤로 결혼식 일정과 절차, 뉴욕과 서울에 마련할 신혼집 이야기를 하던 우리는 깔끔하게 술을 비우고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국 쪽 상황은 어때요?”
“나쁘지 않아. 기존에 투자한 주식들도 값이 많이 올랐고 야후 상장 주관은 모건스탠리에 맡겼어. 노스 리미티드 주가도 잘 관리되고 있고, 파나마 구리광산 대비해서 정관계에 뿌릴 돈도 차곡차곡 쌓을 거다.”
일 이야기가 나오자 선해철의 눈빛에 힘이 들어갔다. 사랑 이야기는 쑥맥처럼 쭈뼛쭈뼛하던 양반이 순식간에 프로로 변하는 걸 보니 신기하기만 했다.
“영화 쪽은요?”
“‘쥬만지’는 지금 추세대로 가면 미국 내에서 1억 달러는 넘길 거라고 보고 있어. 다른 나라에서 개봉 수익까지 합쳐서 정산하면 적자는 면할 거다.”
적자만 면하기는.
내 기억대로라면 쥬만지의 흥행성적은 2억 6천만 달러다.
반절을 배급사에 나눠준 뒤, 제작비와 마케팅비, 세금을 떼고 우리가 투자한 액수에 맞춰 수익을 배분받으면 원금에 2천만 불 이상의 수익을 더해서 배당받을 것이다.
스탠더드 캐피털의 시네마 펀드, 앞으로 우리 집안사람들이 나를 포함한 4대째까지 떳떳하게 가업을 상속받을 토대가 될 것이다.
***
다음 날 아침.
“휴우, 본사 애들이 부럽다. 거긴 하루에도 수억 달러가 왔다 갔다 하는데 여긴 끽해야 5백억 원도 못 넘으니 원.”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선해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트라이엄프 캐피털의 핵심 간부 중 한 사람으로서 환투기와 주식투자로 수십, 수백억 달러를 움직였던 양반이니 5백억 원으로 간에 기별이 갈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아직은 스탠더드의 정체를 드러낼 때가 아니니까.
무엇보다 외국인 투자 한도도 오는 10월부터 20퍼센트로 늘어나고 주가도 그때부터 저점이다. 외국자본의 껍데기를 쓴 스탠더드 캐피털의 힘을 지금부터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죠. 새 살림 시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렇죠, 형?”
나와 반대편 책상에 앉아서 회사 일을 보던 박태진이 미소를 띠었다. 올해부터 이사로 승진했지만 여전히 나와 함께 일하는 게 맘에 들었는지 얼굴이 더 밝아보였다.
“그럼요, 도련님. 제로에서 시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죠. 지금은 수색대처럼 은엄폐를 유지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3년 전 1월부터 2월 내내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든 골절상으로 군 면제를 받았지만 박태진에게서 군대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다.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은 내가 있다는 걸 빼면 미국 본사의 전방 수색대나 다름없다. 때가 올 때까지 한국을 모니터링 해야 하니 지금은 스타크래프트의 ‘암흑기사단’처럼 그림자까지 숨겨야 했다.
“자식들. 내가 말이야, 트라이엄프 캐피털 본사에서 필드 뛸 때는 하루에···.”
자신과 달리 여유를 부리는 우리 둘을 선해철이 흘겨보면서 ‘라떼는 말이야’ 식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던 중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다.
“네, 이성민입니다.”
[나야, 하연이.]
목소리를 들으니 절로 몸이 곧게 펴졌다. 놀라서 그런 게 아니라 늘어진 몸이 쫙 펴질 만큼 기운을 받아서였다.
“새해 복 많이 받아, 누나.”
[너도 복 많이 받아. 그런데 너희 사무실, 어디야?]
“왜?”
[이번에 우리 호텔 베이커리에서 무화과 타르트 출시했는데 갖다 주고 싶어서. 괜찮지?]
고려호텔의 베이커리는 국내 최고의 제빵사들과 파티셰들이 모인 곳. 그런 곳에서 만든 타르트라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장하연이 나를 챙겨주는 마음이 담겼으니 꿀보다 더 달 것 같아서 침이 고였다.
“여기가 어디냐면···.”
장소를 알려주자 장하연의 질문이 들렸다.
[너희 회사 사람들, 몇 명이야?]
“응? 그건 왜?”
[같이 챙겨먹으라고. 혼자만 먹으면 눈치 보일 거 아냐?]
우리 둘 다 부족함 없이 살고 있지만 마음만큼은 손에 꼽힐 조강지처다. 자기 남자 눈치 보이지 말라고 배려해주는 마음이란!
‘뭐야? 장하연이냐?’
‘아가씨입니까, 도련님?’
책상 앞에 앉아있던 선해철과 박태진이 낮은 목소리로 던진 질문에 대답 대신 입술에 검지를 댄 뒤,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나까지 네 명이야, 누나.”
[알았어. 이따가 사무실 건물 앞에서 봐.]
수화기를 내린 나를 보고 선해철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장하연이냐?”
“네. 간식거리 갖다 준다고 회사 앞에서 보자고 하네요?”
“급할 것 같은데 얼른 다녀와라, 흐흐.”
“감사합니다, 삼촌. 아니, 대표님.”
***
1층 로비로 내려간 나는 현관 바로 앞에 서서 창 너머로 장하연이 오기만 기다렸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내 꼴을 보고도 나를 챙겨주는 그녀가 고맙고, 그런 그녀에게 또 미안했다. 자신의 애인이 이리저리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는 걸 누가 좋아하겠나?
올해, 그리고 내년이 되면 부평초처럼 보여도 부평초 같지 않음을 보여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나를 믿고 자신의 길에 집중하게 할 것이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미래를 그리며 기다리던 중 장하연의 차가 회사 앞 길가에 멈춰 섰다. 그 차를 보고 얼른 밖으로 나가 차에서 내린 그녀를 맞았다.
“여기가 너희 회사 건물이야?”
“아, 우리 회사가 산 건물은 아니고 셋방살이 하고 있어.”
손에 종이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린 장하연은 내 말을 들으면서 눈앞에 있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너무하네. 외국계 투자회사라면서 10층도 안 되는 건물에 세 들어 살다니.”
“아직은 외국인 투자 제한이 높아서 사람도 많이 필요 없거든. 대신에 할아버지나 그룹 어른들 돕는 건 허락해줬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뭐.”
“작은 데 취직한 이유가 있었구나?”
“당연하지. 그런 거 아니었으면 삼촌이 추천해준 회사라도 안 들어왔을 걸? 추운데 밖에서 이러지 말고 카페 가자. 근처에 괜찮은 데 있는데 어때?”
혹시나 회사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할까봐 말을 돌렸지만 장하연은 고개를 저었다.
“얼른 들어가야지. 눈치 보여서 어떡하려고?”
“괜찮아. 우리 회사 대표, 그 삼촌이거든. 허락받고 나왔으니까 한 시간 정도는 볼 수 있어.”
장하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여기 1층 카페 가자. 시간 아껴야지.”
직장인들 연애가 이런 건가 싶었다. 1분 1초라도 더 편안하게 보고 싶어서 장소에 신경 쓰지 않는 데이트지만 상관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각자의 마음속에 단단히 박아뒀으니까.
카페로 들어간 우리는 커피 두 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가서 테이블에 앉았다.
“베이커리에서 바로 나온 거 가져왔어. 눅눅해지지 않았을까 모르겠네.”
“아무려면 어때? 누나가 가져다 준 건데. 그리고 우리 삼촌, 안 가리고 잘 드시는 분이야, 하하.”
너스레를 떨며 타르트가 담긴 종이가방을 받은 뒤, 나는 장하연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작년 겨울에 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물론, 가릴 건 가리고 드러낼 것만 드러냈다.
“정말?”
“응. 오래 전에 우리 회사에서 투자한 데서 만든 영화인데 애들 보기 딱 좋겠더라.”
토이스토리에 대해 이야기하던 내게 장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도 좋아하겠지?”
갑자기 치고 들어온 그녀의 눈을 보니 내게 확신을 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투박한 대답은 싫어서 얼른 머리를 굴리고 대답했다.
“그럴 거야. 우리 애들 데리고 갈 때쯤이면 2부는 어려워도 3부가 나올 테니까 그때 보러가도 되지?”
“진짜지?”
“나, 누나한테 체포된 남자야. 알면서 그런다?”
손목에 채워진 불가리 뱅글 팔찌를 보여주니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현실이 될 미래에 대해 얘기하던 중 장하연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부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좋겠다. 집 밖에서 다른 일도 하고.”
“선택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그래도 우리, 백화점은 제대로 터뜨렸잖아. 안 그래?”
“준비한 재료가 좋았으니까. 강남점, 언제 오픈한다고 했지?”
“내년 1월 중에 오픈할 거야. 아마 우리가 계획한 대로 어지간한 명품 브랜드들은 다 들어올 걸?”
센트럴스퀘어, 그 중에서도 해동백화점 강남점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번에는 루이비통과 샤넬, 에르메스까지 입점하기로 했으니 우리 둘이 기획한 원안에 맞는 국내 최고의 명품백화점이 될 것이다.
마냥 내 얘기만 하는 것 같아서 나도 장하연에게 궁금한 걸 물어봤다.
“고려호텔은 어때? 잘 되고 있어?”
“우리도 그때 문 열 것 같아. 센트럴스퀘어 신 회장님 쪽하고 개장 날짜 논의 중이야.”
“잘 됐네. 나도 할아버지하고 숙부님한테 말씀드릴 테니까 동시 개장하면 되겠다. 피트니스 센터 회원권도 끊어놓을게.”
동시 개장을 하면 행사비용도 절약할 수 있고 언론의 주목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언론인 조국일보까지 부려먹을 수 있으니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우리 둘이 얽힌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누나네 회사는 요즘 뭐 없어?”
“어떤 거?”
“작년에 우리 집하고 외가, 태현, 그리고 누나네 집 전부 한몫 단단히 벌어서 회사 키우고 있잖아. 아저씨가 자동차만 매달리는 게 이상해서.”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엔고투기 이후, 우리 집안은 자원 개발과 항만물류, 태현그룹은 이라크 미수금 청산과 하동 제철소 건설, GK그룹은 GK정유 지분 인수를 비롯한 계열분리 준비 등 각 그룹의 숙원사업이나 과제를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장호건이 자동차 사업에만 매달린다는 건 뭔가 위화감이 드는 일이었다. 고베대지진 뒤에 각개전투로 벌어들인 돈이 어마어마할 텐데 무슨 꿍꿍이인지···.
나비효과가 어디로 튈지 몰라 고민에 빠져있던 나를 보며 장하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내가 미쳤지. 일 얘기만 하는 애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 간식까지 싸들고 왔는지 몰라.”
“그래도 좋으니까 온 거 아냐. 안 그래?”
뻔뻔하게 대꾸하는 나를 보며 장하연이 살풋 웃었다.
“하긴, 넌 일할 때가 가장 멋있어. 눈빛도 살아있고 잔뜩 몰입하는 모습이 좋거든.”
“아저씨처럼?”
“음··· 앞으로 네가 더 크면 달라지겠지? 후훗.”
저 말, 저 웃음소리··· 질투를 원하는 것 같았다. 원한다면 쪼끔만 보여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어 일부러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네. 아저씨 따라잡으려면 부지런히 따라가야 하는데. 아저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셔?”
“이틀에 한 번씩은 부산 다녀오고 계서. 전자는 경영진들이 잘 하고 있으니까 자동차 쪽에 집중하시나봐.”
신성전자는 이 나라 최고의 기업. 그 신성전자를 등에 업은 장호건이니 오랜 숙원이었던 자동차 사업에 집중할 것이다. 그 사업이 망할 것을 아는 나에겐 반가운 소식이었다.
“아저씨 자동차 사랑은 여전하나보네, 하하.”
“그런 것도 있지만 태현그룹이 반도체에서 쫓아오고 있으니까 아버지도 자동차로 맞불을 놓으시나봐. 무리하는 것 같긴 한데 새 공장 지으면 생산량도 늘고 괜찮겠지.”
그래도 어떻게든 장호건이 돈을 더 쓰게 만들어야 한다. 환투기로 번 돈에 기존의 여유자금까지 내년이 되기 전에 최대한 토해내게 만들어야 하는데···.
당장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조커만 세 장이다.
한고제철, 아도자동차, 영등포 쇼핑몰.
그 조커만 던져도 장호건을 비롯한 신성그룹은 무조건 판돈을 토해내고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허나 한고제철과 아도자동차를 이용해서 신성을 털어먹는 짓은 내가 키울 해동그룹으로 신성그룹을 잡아먹을 것을 생각하면 나와 우리 집안, 해동그룹에도 독이 될 일이다.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이 없을까? 장호건이 해외 자원개발 사업에 손도 못 대게 만들 방법이.
***
장하연이 차를 타고 도로로 나가는 걸 보고 사무실에 들어오자 선해철이 므훗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이야, 벌써부터 새댁 흉내 내는 거냐? 언제 결혼할지 걱정이다?”
“저도 3년 안에 결혼할 거예요, 삼촌. 하나도 안 부럽습니다, 흐흐.”
“그래. 너도 빨리 결혼해라. 새 살림 차리는 게 쉽지는 않은데 나름 재미가 쏠쏠해, 흐흐.”
한량 같던 양반이 저런 소리를 하니 적응이 안 되지만 선해철의 말이 맞았다. 내년이 와야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도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가정사든 사업이든 새살림도 잘 펼 텐데···.
책상에 앉아서 종이 한 장을 앞에 두고는 손에 쥔 펜으로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다른 일보다도 신성물산이 해동그룹의 밥그릇에 흠집을 내지 못하는 일을 찾는 게 중요했다.
고민하는 내 얼굴을 보고 선해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결혼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죽상이 되면 어떡하려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선해철, 박태진의 의견도 구해야겠다. 하나보다는 둘, 둘보다는 셋이 낫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