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26th. 쉽지 않은 새 살림 (1)
선해철과 박태진이 밖에 나가 있는 동안 나 또한 클레어와 함께 식탁에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파나마?”
“네. 작년 8월에 백화점 가던 중에 본 UN 쪽 자료에서····.”
그 뒤로 파나마 구리광산에 대한 이야기와 신성물산의 파나마 공사현장에 박병준이 있다는 것까지 알려주자 클레어가 미간을 찌푸렸다.
“골치 아프게 됐네. 그쪽은 아버지 입김이 약한데.”
“무슨 뜻이에요?”
“그쪽 정재계 인사들도 트라이엄프에 돈 맡기거든.”
“돈이면···?”
“비자금.”
역시나였다. 돈 있고 권력 쥔 놈들 치고 돈 좋아하는 건 이 나라든 이 나라 반대편에 있는 파나마든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서 그 사람들 담당이 아버지와 각 세우는 가문이야.”
“이런···.”
낭패였다. 헨리와 각을 세우는 곳에 돈을 맡겼을 줄이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헨리 찬스는 포기해야겠다. 어차피 내년 말에 그의 힘을 빌려야 하니 그때 쓸 찬스를 아껴둔다고 생각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입술을 깨문 내 모습을 보고 클레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해, 조니. 도와주고 싶은데 도움이 안 되네.”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정 안 되면 영화 쪽에 뿌려둔 돈 거둬들일 때 비자금 만들어서 먹이면 되죠, 흐흐.”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돈은 늘 수단으로 여기는 내게 스탠더드 캐피털은 그 돈을 넉넉히 마련하고, 쉽게 쓰려고 만든 개인금고다. 그 금고의 돈으로 그놈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도배해서라도 원하는 걸 얻으면 그게 득이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마. 얼마든지 만들어놓을 테니까, 후훗.”
“부탁할게요, 후후.”
나는 클레어와 마주보며 짓궂은 웃음소리를 낸 뒤, 새 와인을 가져와서 잔을 채웠다.
“그런데 썬은 언제 오는 거야? 얘기가 너무 길어지는데?”
“나이 들수록 남자들이 더 말 많아지잖아요. 담배 한 대 태우면서 얘기하는 거 같은데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와인 한 모금을 마셨지만 클레어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와인을 단숨에 비웠다.
“휴우, 언제까지 미루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네.”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니 조바심이 나는 것 같았다. 선해철도 오십대에 접어들었고 클레어도 사십대가 얼마 안 남았으니 오죽할까 싶었다.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클레어,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
“뭐?”
“할아버지한테는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즉석에서 짜낸 아이디어였지만 클레어의 표정이 밝아졌다.
“일단, 내 남자라는 꼬리표부터 달자는 거지?”
“클레어가 괜찮다면요.”
“그래야겠어. 계속 저렇게 놔뒀다가는 내 속이 터질 것 같거든, 후훗.”
의외였다. 보통의 여자들이면 인생에 한 번뿐일 이벤트라고 온갖 기대를 다 하는데 이렇게 쉽게 결정할 줄이야?
“클레어?”
“뭘 그렇게 놀래? 아이디어는 조니가 냈잖아?”
“그래도 진짜 그렇게 하면···.”
말끝을 흐리던 나를 보며 클레어가 피식 웃었다.
“나나 썬이나 너무 많이 늦었어. 중요한 건 한다는 거 자체지, 어떻게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뉴욕에 있을 때도 내가 썬 집에 가고 썬이 내 집에 온 거, 셀 수도 없을 걸?”
“네?”
오. 마이. 갓.
두 사람이 부러웠다. 나와 장하연은 그렇게 할 수도 없는데. 젠장.
부러움에 입맛을 다시며 와인을 채우던 중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추워라. 담배 피우다 얼어 돌아가실 뻔했네.”
“오늘 따라 유난히 춥네요.”
거실 쪽에서 선해철과 박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클레어는 서로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하고 태연하게 두 사람을 맞았다.
“마침 새 병 땄는데 타이밍이 좋네요.”
“2라운드 시작인가? 흐흐.”
선해철과 박태진의 잔에 술을 채워준 나는 엔고투기 때 얘기를 했다.
“···생각해봐도 헨리, 참 대단한 분 같아요.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헨리, 가족은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이야. 기회가 안 되고 여건이 안 받쳐줘서 힘들었을 뿐이지. 그 기회와 여건을 만들려고 네 손 잡고 엔고투기했잖냐, 하하.”
“삼촌은 그런 기회와 여건을 언제 만들 거예요?”
껄껄 웃고 와인을 마시던 선해철이 내 질문에 눈을 껌뻑거렸다.
“응?”
“저번에 국고채 처리하려고 헨리 만났을 때 헨리가 저한테 부탁했잖아요. 할아버지한테 클레어 얘기 잘 해달라고. 그쵸, 형?”
박태진은 와인을 마시던 걸 멈추고 입에서 뗀 잔을 내려놨다.
“그랬죠. 형님도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신지 오래돼서 회장님께서 혼주를 서실 테니 잘 부탁한다고 로이스 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박태진의 협공에 클레어도 동참했다.
“썬. 우리 아버지, 장인어른으로 모시는 거 싫어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말끝을 흐리던 선해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클레어. 타이밍이 안 보여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너무 오래 끌었네.”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렇게 능글능글한 사람이 자기 연애는 남의 푸시를 받아야 진도를 나가다니.
“삼촌도 은근히 순수한 면이 있네요, 흐흐.”
“왜 이리 목이 타는지 모르겠다.”
선해철은 씩 웃는 나를 보며 와인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
다음 날 아침.
나와 박태진은 선해철과 클레어를 김포공항까지 데려다주고 배웅해준 뒤, 할아버지와 고승주에게 연락을 넣고 삼청동으로 들어갔다.
“너희 회사 사장이··· 그러니까 미스 로렌스가 해철이 그놈한테 먼저 고백했다고?”
할아버지도, 고승주도 모두 충격이 큰 것 같았다. 아쉬울 게 없는 집안의 딸, 월가에서 잘 나가는 여자가 오십 넘은 동양의 이방인 남자에게 먼저 고백했다니 오죽하겠나.
나는 황당한 표정의 두 사람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네, 할아버지. 그렇죠, 형?”
“예. 어제 집에서 간단히 파티를 했는데···.”
박태진이 들려준 어젯밤 이야기가 끝나자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으하하하! 그 날탱이 같던 놈이 이제 보니 쑥맥 중의 쑥맥이었구먼!”
할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책상까지 경쾌하게 내리쳤다. 얼마나 웃긴 이야기인가? 늘 유들유들한 선해철이 10여 년째 한 여자만 바라보며 속만 끓여왔다니.
“돌아오면 축하주부터 따라줘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
“돌아오는 대로 한 상 푸짐하게 내주면 딱 좋겠구먼, 흐흐.”
고승주와 함께 껄껄 웃던 할아버지의 입에서 웃음이 잦아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오냐, 허허.”
“저희 사장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뚱딴지같은 질문이라 여겼는지 할아버지가 눈을 껌뻑거렸다.
“뭘 말이냐?”
“며느릿감으로요.”
“며느릿감이라···.”
“삼촌 식 올릴 때 할아버지께서 혼주 하셔야죠. 삼촌 친부모님은 모두 고인이시니까요.”
제일 중요한 문제를 짚어줬지만 할아버지는 새삼스럽다는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더 볼 게 있겠느냐?”
“무슨 뜻인가요?”
“전번에 봤을 때 그런 처자가 해철이 안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드러내기 싫은 부분까지 말했다는 건 엄청난 용기와 강단이 필요한 일이 아니냐?”
할아버지는 찻잔을 입에 가져가서 입 안을 축인 뒤,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만한 며느릿감이면 할애비 걱정거리 하나가 줄어들 게다. 그 날탱이 같은 놈이 부평초처럼 살아가는 게 안쓰러웠는데 딱 잡아줄 처자가 아니냐?”
할아버지의 표정은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 그 자체였다. 박태진을 제외하면 비슷한 또래인 고승주, 돌아가신 아버지, 이명진 모두 가정을 꾸렸으니 마음에 많이 걸렸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그래, 식은 어떻게 할 거라던?”
“일단, 로이스 경을 찾아가서 결정할 거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이제 이 집안에서 태진이하고 너만 가면 되겠구나, 으허허. 안 그러나 고 실장?”
“명진이 아이들 시집장가 가는 거까지 보셔야지요, 하하.”
“암, 그래야지. 내 새끼들 식 올리고 증손주 낳는 것까지 다 보고 가야지, 으하하.”
호탕하게 웃는 할아버지, 고승주와 달리 나와 박태진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
삼청동에서 이대수의 흔쾌한 승낙이 떨어지고 하룻밤이 지났을 때, 선해철은 공항 입국장에 들어서자마자 클레어에게 끌려가다시피 한 끝에 헨리의 저택 응접실에 있었다.
“···사실인가, 썬?”
“예, 헨리. 올해 안에 식 올리겠습니다.”
헨리는 선해철의 대답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걸어왔다. 선해철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생각했네, 썬. 서부에 있는 와이프도 자네라면 반겨줄 걸세, 하하.”
“로렌스 여사 말씀이십니까?”
선해철의 손을 잡고 껄껄 웃던 헨리가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져 산 세월 탓인지 뉴욕에 데려오는 게 쉽지는 않지만 이제는 로이스 가의 안주인이 되어도 누가 뭐라고 하겠나. 그 사람 때문에 지난 30여 년을 기다려왔으니 말이네.”
선해철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헨리의 측근이 되고 친구가 되었을 때 왜 노총각으로 사냐고 물었던 자신에게 그가 들려준 이야기가 아닌가?
고개를 끄덕이는 선해철을 보던 헨리가 손을 놓고 클레어를 보며 말했다.
“잘 생각했다, 클레어. 하나뿐인 우리 딸, 처녀귀신 될까봐 걱정했는데 고맙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이이가 계속 미뤄서 못 참은 것뿐이에요.”
클레어는 헨리를 보며 펼쳤던 미소를 거두고 선해철을 곱게 흘겨봤다. 선해철이 그 시선을 보고 고개를 푹 숙이자 헨리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썬, 자네답지 않게 뭐하는 건가? 자기 여자 하나 감당 못해서야 일본을 격침시킨 남자라고 할 수 있겠나? 응?”
그렇게 헨리는 선해철, 클레어와 함께 코냑을 마시며 밤을 보냈고, 취기를 못 이긴 두 사람은 헨리의 저택에서 자고 나서 뉴욕의 법원으로 향했다.
“많이 늦었지?”
“알면서 왜 물어요? 아버지 말대로 처녀귀신 될 뻔했어요.”
샐쭉한 목소리와 달리 클레어는 싫지 않다는 눈빛으로 선해철을 바라봤다.
“미안해. 나 같은 놈이 너한테 어울릴 만한 사람인가 많이 고민됐거든.”
그가 털어놓은 말에는 많은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건너온 이방인이 혼외자식일지언정 유서 깊은 가문의 딸과 결혼한다는 것에 대한 압박감과
열 살이 훨씬 넘는 터울의 고랑을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감
늘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던 자신이 한 여자를 건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함 등
그의 모든 불안과 걱정, 미안함이 뒤섞여있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잔잔한 미소를 품은 얼굴을 흔들고 그에게 말했다.
“그런 거 상관없어요.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마나 되는데 그런 걱정을 해요? 당신답지 않게.”
“클레어···.”
“어서 가요. 뉴욕하고 서울에 새 살림 차리려면 바빠요, 후훗.”
클레어는 선해철의 손을 잡고 법원으로 들어갔다.
***
다음 날 오전.
나와 박태진은 여의도에 마련된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에 출근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네, 안녕하세요.”
사무실에 들어가자 데스크에 앉아있던 직원의 인사를 받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지난 3년간 돌고 돌아서 온 끝에 비로소 서울에 차린 새 살림이 아닌가? 해외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와 가슴을 쭉 펴고 개선식을 했던 로마 장군의 심정이 내 심정이 아닐까 싶었다.
막상 인사를 하고나서도 서울에 차린 새 살림을 둘러보느라 신경이 팔린 내 어깨에 박태진의 손이 올라갔다.
“가시지요, 이성민 이사님.”
“네, 박태진 이사님.”
사무실에 들어간 우리는 각자의 명패가 놓인 책상을 바라봤다.
“할아버지도 못 말리는 것 같아요, 후후.”
내 책상과 박태진의 책상에는 각각 ‘이사(理事) 이성민(李成敏)’, ‘이사(理事) 박태진(朴太進)’이라고 적힌 명패가 하나씩 놓여있었다. 둘 다 할아버지가 그룹 임원 명패를 전담하는 나전칠기 장인에게 특별히 주문한 자개박이 명패였다.
박태진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미신이긴 한데 회장님께서 첫 명패는 자개박이로 해야 길운이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의 나름의 징크스인 것 같았다. 전생의 나도 중요한 협상이 있는 날에는 헤어지기 전의 장하연이 선물해준 푸른 넥타이를 매고 나가야 일이 풀리곤 했으니 그런가보다 싶었다.
짐을 푼 뒤, 커피를 만든 나는 박태진에게 한 잔을 건네주고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다 보니 문득 두 사람이 잘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삼촌, 잘하고 있겠죠?”
“잘하고 있을 겁니다. 로이스 경이 우리 본사의 초창기 멤버들을 키운 걸 생각하면 수월하게 풀릴 거라 봅니다. 회장님께 미스 로렌스에 대해 잘 말해달라고 도련님께 부탁한 것도 있잖습니까?”
“그러겠네요.”
박태진의 말을 들으니 내 걱정이 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보탬이 될 인재라면 피부색을 안 가리고 키우려 노력했던 경영자이면서 자식의 행복을 위한 결혼을 도우려고 새파란 나에게 부탁한 가장이 아닌가? 헨리 로이스는.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박태진에게 말했다.
“삼촌 돌아올 때까지는 둘이 잘 해봐야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박태진 이사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성민 이사님.”
우리 둘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서로에게 고개를 숙인 뒤, 커피를 마시며 컴퓨터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