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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81화 (80/229)

81화. 24th. 염탐 (1)

“초면부터 예의가 없으시네요. 손부터 올라가는 건 어느 나라 예법입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 밑으로 쏘아보자 중년의 배불뚝이가 잠시 주춤하더니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내가 누군 줄 알아! 나, 오광석이야! 궁상맞게 생긴 놈들이··· 눈 안 깔아!”

“당신, 이 분이 누군 줄 알고···!”

박태진이 벌떡 일어나서 주먹을 들려는 걸 보고 얼른 소리쳤다.

“형, 멈춰! 할아버지가 이러라고 비싼 돈 들여서 서울대 보내고 특전사 보냈어?”

박태진에게 반말하는 게 맘에 안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가 강한 줄 알고 까부는 놈들 앞에서는 강하게 나가야 하니까. 그런데··· 오광석?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큰소리를 쳐놓고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박태진이 주먹을 멈췄다. 남자는 눈앞에 들이닥치다가 멈춘 주먹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서울대? 특전사?”

내 말에 오광석이 멈칫했다. 해외에서 적과 총알과 칼을 주고받으며 벼려진 박태진의 살기, 목덜미에 난 칼자국이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때려놓고 쪼는 꼴이라니···.’

호가호위지만 본격적으로 저놈을 밟아봐야겠다. 눈에 띄는 뱃지가 있지만 시치미 뚝 떼고 물었다.

“당신, 소속이 어디죠?”

“니가 왜 내 소속을 물어!”

“그 뱃지, 신성그룹 거 아니에요?”

차가운 목소리로 비수를 던지자 오광석의 눈이 커졌다. 그도 잠시, 오광석은 오히려 목소리를 더 높였다.

“그래서 뭐! 나, 신성물산 오광석이다, 어쩔래!”

신성물산 오광석?

기억을 더듬던 나는 이제야 이 자식이 누군지 생각났다.

오광석.

전생에 장수연과 결혼하고 구조조정본부에 배치됐을 적에 신성물산 건설부문 전무였는데, 손찌검 심하고 괄괄한 성격 때문에 맡은 현장마다 안전사고가 끊이질 않았던 놈이었다.

그래서 IMF 때 내 손으로 쳐냈는데, 상담역으로 물러나서 내 뒷담화를 엄청 깠다고 들었다. 망한 재벌 4세가 신성그룹 부마가 됐다고 눈에 뵈는 게 없었다나?

잘됐다. 사적인 일로 갑질하는 건 안 좋아하는데 이 새끼한테는 누가 갑인지 똑바로 보여줘야겠다. 박태진에게 하대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힘에는 더 큰 힘으로 맞서야 하니 별 수 없겠군.

“형, 용재 형한테 전화 좀 넣어줘.”

“네? ···네, 도련님.”

내 앞에 있는 저놈을 노려보면서 말하자 잠시 벙쪘던 박태진이 얼른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을 넘겨받은 나는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오광석을 쳐다보며 통화가 연결되길 기다렸다.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 장용재입니다.]

“용재 형, 오랜만이다. 나, 성민이야. 잘 지내지?”

지금쯤이면 내가 장수연과 틀어진 걸 알고 있겠지만 뻔뻔하게 가면을 쓰고 친근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아··· 너냐? 무슨 일이냐?]

“형 생각나서. 형네 회사 사람이 나하고 태진이 형 뒤통수 한 대씩 갈겼거든.”

[뭐?]

귀에서는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장용재의 높아진 목소리가 들렸고 눈에는 오광석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형 바쁜 거 아는데 거짓말할까봐? 오광석이라고 신성물산 사람이라는데 확인부터 해봐.”

실실 웃으며 말하자 수화기에서 장용재가 큰소리를 치는 게 들렸다. 지금쯤 신성물산 사무실이 발칵 뒤집혔을 생각을 하니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 같았다.

[너 지금 어딨어?]

“신성그룹 본관 근처에 ‘나주집’이라고 알지? 거기로 와.”

전화를 끊은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오광석을 쳐다봤다.

“뭐, 뭐야, 너?”

“나요? 이성민인데요?”

“장난해? 소속이 어디냐고?”

“서울대 경영학과요. 아, 작년 3월에 졸업했으니 경영학과‘였’네요? 흐흐.”

“이, 이···!”

어린 게 좋은 걸 이제야 알았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살살 긁으며 약을 올리니 얼마나 열이 뻗칠까? 개가 똥을 끊겠냐는 말마따나 오광석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두 번은 안 봐줍니다, 오광석 씨.”

박태진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하자 오광석은 때릴 생각도 못하고 주먹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희들, 뭐하는 새끼들이야?”

“잠깐만 지켜봐요, 아저씨. 용재 형 올 때까지요.”

“요, 용재 형이 누구야?”

“기다려보라니까요?”

“이 새끼가!”

오광석이 화를 못 참고 높이 치켜든 손을 박태진이 잡았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이성민!”

뒤를 돌아보니 훤칠하게 생긴 남자가 다급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큰처남.

***

“형!”

장용재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자식의 얼굴을 아는지 오광석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냐?”

“응. 우리 뒤통수 한 대씩 갈겼어. 나 한 대, 태진이 형 한 대. 아파죽겠네.”

인상을 찌푸리고 뒤통수를 쓰다듬자 장용재의 눈이 커졌다.

“진짜냐?”

“진짜라니까? 그렇죠, 여러분?”

식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외치자 한 후덕한 남자가 첫 타자로 나섰다.

“난리도 아니었어요. 순서 좀 틀렸다고 탕 그릇 깨부수고 욕하고··· 저기 그릇 깨진 거 보이죠?”

“점심이라 밀려서 실수할 수도 있는데 너무합디다. 저 친구들 손 안 댄 거 우리가 두 눈 뜨고 봤는데 그냥 먹으면 어디가 덧나나, 쯧쯧.”

곳곳에서 쏟아지는 증언과 증거에 장용재가 오광석을 사납게 노려봤다.

“누군지는 몰라도 용코로 꿰였네. 삼청동 이대수 회장님 댁 장손을 까다니.”

장용재가 자신을 모르는 체하고 빈정거리듯 말하자 오광석의 눈이 커졌다.

“···예? 이, 이대수 회장님이요?”

“이 친구, 해동그룹 장손에 박태진 차장은 이 회장님이 아들처럼 아끼는 사람입니다. 나 같으면 당장 무릎 꿇고 사과할 것 같은데요? 신성물산 건설부문 오. 광. 석. 상무님.”

장용재가 토막 쳐서 말한 제 이름 석 자가 가슴팍에 푹푹 꽂혔는지 오광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다리까지 오줌 마려운 강아지마냥 덜덜 떨리고 있었다.

호가호위하는 꼴이지만 아무렴 어떠리. 아직은 전면에서 나설 수 없으니 장용재 손이라도 빌려서 저 쓰레기 같은 놈을 쳐내는 게 성실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이롭지 않겠나? 아예 쐐기를 박아버려야겠다 싶어 한마디 더 보탰다.

“그리고 저 아저씨, 내가 누군지 아냐, 신성물산 오광석이다, 거지새끼인 줄 아냐고 빽빽 소리 질렀어. 그렇죠?”

내가 생각해도 밉상스럽게 말하자 모두들 맞다고 아우성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난지도에 장용재가 눈을 치켜떴다.

“이 친구 말 맞아요?”

“···예? ······.”

“밖으로 나가죠, 오 상무님.”

“사, 상무님···.”

애가 타는 목소리로 오광석이 불러도 장용재는 싸늘한 눈길을 그에게 뿌려버린 뒤, 박태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 차장님, 미안한데 오 상무님하고 같이 나가줘요.”

“예.”

박태진이 오광석을 끌고 나가자 장용재는 그 모습을 경멸 섞인 시선으로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성민아, 딴 데 가서 밥 먹자.”

장용재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자존심 세고 체면에 목숨 거는 놈이니 이런 분위기에서 반주는 고사하고 밥이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주문한 거 있는데···.”

“곰탕 못 먹고 죽은 귀신 붙었냐?”

볼멘소리를 하며 말끝을 흐리자 장용재는 내가 원했던 대로 날 어린애 대하듯 핀잔을 줬다.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고 싶으니 포커스를 내게 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계산은 형이 할 거지?”

“당연하지. 여기요!”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주자 장용재가 얼른 손을 들며 외쳤다. 그 손을 보고 후덕한 외모의 아주머니가 나왔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사장 같았다.

“예!”

“이 친구하고 다른 손님들이 시킨 거, 전부 계산하죠. 얼맙니까?”

“예? ···잠시만요.”

사장이 부지런히 두들긴 계산기를 장용재에게 보여줬다. 장용재는 곧바로 지갑에서 꺼낸 백만 원짜리 수표 두 장 뒷면에 전화번호와 서명을 적어서 건네줬다.

“잔돈은 안 줘도 됩니다. 나중에 다른 손님들 오면 더 챙겨줘요.”

“예··· 손님.”

얼떨떨해 하는 사장의 대답을 듣고 장용재가 내게 물었다.

“피해자 분, 누구냐?”

“저기 저 분.”

손으로 가리키자 장용재는 그 직원에게 걸어가서 명함 한 장과 천만 원짜리 자기 앞 수표를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신성그룹 비서실 번호입니다. 오늘 있던 일 말하시면 빠른 시일 내에 보상해드리겠습니다, 여사님.”

“이러지 않으셔도···.”

“우리 그룹 사람이 실수했는데 책임져야죠. 수표는 개인적으로 드리는 위로금입니다. 회장님 장남으로서 책임질 테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장용재가 미소를 띠자 그녀는 계산대에 있는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명함과 수표를 받았다.

“여러분 점심은 신성그룹에서 계산했습니다! 방금 있던 일은 잊으시고 편안히 드시고 가세요!”

사람 좋은 표정으로 외치는 장용재의 얼굴에서 안도의 기미가 보였다. 제 버릇 못 준다고 자존심 세고 체면 차리는 건 여전하구나.

***

장용재는 식당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와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어떠냐, 성민아? 이게 마케팅이다. 흐흐.”

“마케팅?”

“마케팅의 핵심이 ‘있다’와 ‘좋다’인 건 알지? 이런 것도 이미지 마케팅이다, 이거야.”

꼴에 한 살 더 먹었다고 내 앞에서 떠드는 거 보게? 멍석도 내가 깔아줬는데 생색은?

같지도 않았지만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난 아직 어리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하니까.

“교수님들보다 나은데?”

“그렇지? 교수들이 강단에서 백날 떠드는 거 들어봐야 현장에서 한 번 배우는 게 훨씬 나아, 흐흐.”

한껏 뻐기던 장용재는 멀리 골목 앞에 있는 박태진과 오광석을 향해 걸어갔다.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오 상무님.”

“예··· 상무님.”

우리 넷은 그대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성민아. 박 차장. 잠시 실례.”

간단히 양해를 구한 장용재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후우우-.”

불을 붙은 그는 쭉 빨아들인 연기를 오광석의 얼굴에 불었다.

“오 상무.”

“네···, 도련님.”

“당신 미쳤지? 회사 이미지 말아먹으려고 작정했어? 전자는 금강, 자동차는 태현하고 붙느라 살얼음판인데 제정신이야! 쪼개진 그룹도 다시 합쳐야하는데 돌았어!”

방금 전과 달리 그는 회 칠 것 같은 눈빛으로 오광석을 노려보며 사납게 몰아붙였다.

“죄, 죄송합니다, 상무님!”

“나이를 처먹었으면 곱게 처먹어야지. 이러라고 회장님께서 임원 자리 내준 줄 알아!”

찬바람이 쌩쌩 몰아쳤지만 장용재가 터뜨리는 분노는 식을 줄을 몰랐다.

“당신 조사 다했어. 지금껏 맡은 공사현장에서 사망자만 10여 명에 중상자가 200여 명이라고?”

치부가 까발려졌는지 오광석은 장용재의 눈을 마주하지도 못했다.

“그, 그게···.”

“죽통 날리기 전에 입 닥쳐. 당신 돌았지? 사람 다치고 죽을 때마다 늘어진 공기(工期)에 입 막는데 쓴 돈이 얼마야, 씨발!”

장용재 또한 나 못지않게 철저한 인간이었다. 그런 탓인지 오광석을 향해 있는 쌍소리, 없는 쌍소리 긁어모아서 쉴 새 없이 던져댔다.

“사, 살려주십시오, 상무님! 죄송합니다!”

“말로만? 행동으로 실천해. 어서!”

장용재가 나를 향한 눈짓을 보내자 오광석이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심지어 허리까지 땅에 닿을 것처럼 접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성민 도련님. 죽을죄를 졌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버지뻘 되는 분이 허리까지 숙이는 건 아니죠. 그만하세요.”

“오 상무, 그게 다야?”

예의상 사과를 받아주자 오광석이 허리를 폈지만 장용재는 팔을 뻗어서 나를 뒤로 물렸다. 이 자식, 설마?

“···예?”

오광석이 눈알을 굴리자 장용재가 비아냥거렸다.

“아까 내가 말한 거 기억 안 나지?”

“무, 무슨 말씀을···?”

장용재는 말을 더듬거리던 오광석의 얼굴에 담배를 꼬나 쥔 손을 갖다 댔다.

틱.

가볍게 담배 튕기는 소리와 함께 담뱃재가 그의 뺨에 부딪쳐 떨어졌다.

“나 같으면 당장 무릎 꿇고 사과하겠다고 한 거. 그 새 까먹었어?”

오광석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다. 아들뻘 되는 놈에게 담뱃재를 맞았다는 모욕감과 그놈이 자기 목을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공포가 동시에 몰아친 것 같았다.

장용재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무릎 꿇고 사과해. 어서!”

퍽 소리가 들릴 만큼 세게 무릎을 꿇은 그는 주먹까지 무릎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며 살겠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툭. 툭.

땅바닥에 그의 눈물이 떨어졌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괴감 때문일까, 분노 때문일까.

그만하면 됐다 싶어 나서려했지만 장용재는 팔을 뻗어 나를 막았다.

“고개 박아.”

“네?”

“귓구멍 막혔어? 땅바닥에 고개 박으라고!”

미친 새끼. 신성그룹에서 임원까지 달았으면 먼지부터 똥물까지 손에 다 묻힌 놈인데 아주 끝장을 볼 작정이었다.

오광석의 주먹 쥔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하지만 그는 시키는 대로 주먹을 푼 손을 땅바닥에 대고는 고개를 땅바닥에 박았다.

“죄송합니다! 제발!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오광석이 울부짖는 짐승처럼 크게 소리쳤고, 장용재가 무심한 눈길로 자기 발 앞에 머리를 처박은 오광석을 내려다봤다.

“이런 일 또 생기면 끝이야.”

싸늘한 목소리를 끝으로 장용재는 오광석의 머리 바로 앞에 떨군 담배꽁초를 구둣발로 밟아 비비고 골목 밖으로 나갔다. 지독한 새끼.

하지만.

지금의 나는 발톱만 숨겼을 뿐 지금의 저놈보다 사나운 놈이다. 지금 내 앞에서 개폼 잡아봤자 날 따라오려면 적어도 30년은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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