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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80화 (79/229)

80화. 23rd. 가면을 벗고 (2)

가벼운 마음으로 식당을 나온 나는 택시를 타고 이태원 근처의 바에 갔다. 가는 길에 장하연에게 보자고 한 건 물론이었다.

바에 들어온 나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시실리안 키스를 주문한 뒤, 가방에서 치약과 칫솔, 향수를 챙겨서 화장실로 갔다. 몸에 배인 중화요리 냄새도 가리고 회식 중에 나왔다는 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양치질에 향수까지 뿌리고 나온 나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갈 수 없었다.

“누, 누나···.”

“그거 뭐야? 나 만나는 거 때문에 꽃단장했어?”

이런 젠장.

최대한 빨리 하고 나온다고 칫솔에 잇몸이 긁히는 것도 무시하고 이를 닦고 나왔건만 딱 걸려버렸다.

“그, 그게···.”

“나쁘지 않네. 우리 꼬맹이가 이 누나 지극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서, 후훗.”

장하연은 나를 보며 살풋 웃어준 뒤, 탁자에 놓여있는 시실리안 키스 한 모금을 들이켰다.

“이거 괜찮네? 이름이 뭐야?”

돌아버리겠다. 난 그저 입냄새 가리려고 준비한 조치들이였는데 졸지에 키스하고 싶어 환장한 놈으로 보일 것 같았다.

머뭇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장하연이 고개를 돌렸다.

“마스터, 이거 이름이 뭐죠?”

깨끗이 씻은 지거를 꼼꼼히 닦던 바텐더가 고개를 들었다.

“시실리안 키스입니다, 고객님. 시칠리아 섬의 날씨처럼 산뜻한 풍미가 일품이죠. 키스를 부르는 맛이랄까요? 하하.”

저런 망할.

껄껄 웃는 바텐더가 원망스러웠다. 나를 키스하지 못해 안달난 놈으로 몰아가다니!

“좋네요. 한 잔 더 부탁드릴게요.”

“예, 고객님.”

바텐더가 만든 똑같은 칵테일이 탁자에 놓였고, 장하연이 그때서야 입을 열었다.

“우리 꼬맹이, 누나하고 뽀뽀하고 싶었니?”

“그런 거 아냐. 오늘 쫑파티하고 왔다구.”

투덜거리는 투로 내뱉고 자리에 앉자 장하연이 눈을 입에 넣었던 체리를 반쯤 베어 물며 눈을 깜빡거렸다.

“쫑파티?”

“오늘까지 해동마트에서 근무하는 날이었어. 조만간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됐거든. 그래서 송별회 겸 회식한 거야.”

장하연의 눈이 토끼처럼 변했다.

“다른 회사? 또 해외법인 나가서 일하는 거야? 아니면··· 너희 숙부님 계열사?”

“그런 건 아니고. 그룹 밖에서 일하게 됐어.”

손을 저으며 대답했지만 장하연은 더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왜? 지금까지 열심히, 잘했잖아? 왜 사서 유배를 가?”

“유배 가는 거 아냐. 회장 자리, 크게 관심 없어.”

대답을 한 번 더 하니 장하연의 눈이 커졌다.

“회장 자리에··· 관심이 없다고?”

어지간히 충격이 큰가보다. 똑 부러지는 성격의 장하연이 말까지 멈칫할 정도라니.

아까의 장난스러운 기류는 순식간에 강풍처럼 변해서 우리 둘을 휘감았다. 적잖은 충격에 눈빛이 흔들리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난 말이지, 다른 집들이 가진 회사들도 좋은 회사가 되면 좋겠어. 그런데 회장이 되면 우리 집안에 묶이잖아. 가업 지키는 거야 할아버지 주식 물려받아도 충분하고.”

재벌의 통념을 벗어난 대답이라 그런지 장하연은 입까지 다물지 못했다. 재벌이란 다른 회사들이 어찌됐든 자기 그룹을 살찌우는 게 최우선인 존재들이 아닌가?

이런 말은 자의든 타의든 그룹 승계를 포기한 놈들이 아니면 대한민국 재벌들 중 나만이 할 수 있다. 할아버지와 이명진, 내가 90퍼센트의 주식을 가진 비상장기업 해동물산, 상속을 개시할 때 주식을 받아낼 스탠더드 캐피털이 있으니까.

장하연은 흔들리던 눈빛을 바로잡고 내게 물었다.

“혹시··· 미래를 만들고 싶은 거야?”

“응?”

“그런 말도 있잖아. 역사가는 뒤집어서 말하면 예언가다.”

장하연은 잔잔한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대학에서 역사 공부하려고 했잖아. 그런데 회사에 들어와서 일하다보니까 역사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닐까 해서.”

“누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저 그윽한 눈빛··· 전생의 장수연과 달리 지금의 장하연은 나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최우선목표는 아니지만 톰 포드와 도미니코 데 솔레를 만난 뒤로 나란 놈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꿈을 현실로 만들고 싶었다. 지금은 돌이킬 수 없지만 과거를 돌아보면서 미래를 가리키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말이다.

그 길을 걸어가게 되면 남들은 나를 악랄한 기업사냥꾼, 시체를 뜯어먹는 걸귀라고 욕하겠지만 지금의 나는 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다. 그러니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며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싶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두고 장하연이 시실리안 키스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래도 너, 이제 겨우 시작인 거 알지? 그 미래가 뭔지는 몰라도 만들고 싶으면 더 잘났다는 걸 보여줘야 해.”

“물론. 그 정도도 못 해내면 누나한테 체포된 자격도 없겠지?”

“말은 잘해요. 그럼 내가 네 위에 있는 건가? 세상을 만드는 건 남자지만 그 남자를 품어주는 건 여자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내 능력에 기억을 가져왔을 뿐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장하연은 나 못지않은 경영능력에 감식안과 심미안까지 타고난 사람이다. 나와 그녀가 함께하면 더 멋진,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미래를 상상하며 입꼬리를 올리던 나는 잔을 들었다.

“우리, 건배할까? 우리가 그려나갈 미래를 위해서.”

“좋아.”

우리는 글라스를 들고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미래를.”

“위해서.”

술을 마시고 나니 내가 쓰고 있던 겹겹의 가면 중 하나를 벗어낸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는데 우리 형은 잘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잘되고 있을까?

그때였다. 탁자 위에 올려뒀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이성민입니다.”

[곧 있으면 파할 것 같습니다, 도련님. 집에서 뵙겠습니다.]

“네, 형. 편히 즐기다 와요, 흐흐.”

[네, 도련···님.]

[박 차장, 뭐해! 2차 가야지! 자! 다들 뿜빠이하자고!]

박태진의 당황한 목소리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이 양반들, 아주 끝장을 보려고 작정했나보네. 나도 적당히 즐겨볼까? 내일부터 한 달 간 휴가인데.

***

장하연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나는 홈웨어 차림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평소와 달리 늦은 시간까지 혼자 있는 게 어색했다.

“많이 늦네···.”

손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치던 나는 뻐꾸기시계를 보고 중얼거렸다. 시침이 1, 분침이 12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걸 보니 회식이 많이 길어진 것 같았다.

빤히 쳐다보던 시계에서 뻐꾸기가 튀어나올 때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소파에 뒀던 카디건을 입고 정원으로 나갔다.

“왔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도련님.”

돌계단을 밟고 올라온 박태진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얼른 그와 함께 집으로 들어가서 녹차를 내줬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사발만한 다완 두 개에 한가득 담아버렸다.

“추울 텐데 들어요.”

“네.”

다완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나는 박태진이 다완을 내려놓는 걸 보고 입을 열었다.

“형, 유 과장 어떻게 생각해요?”

박태진이 잠시 멈칫하고는 날 보며 물었다.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도련님?”

“아뇨. 지난 4개월 간 지켜봤는데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심드렁하게 대꾸한 뒤, 나는 녹차 한 모금을 들이켜면서도 박태진을 뜛어져라 바라봤다.

출근 첫 날부터 있었던 애교 수준의 스킨십에도 눈을 부딪치지 못했던 두 사람은 실내 업무와 현장 홍보, 개점 첫 월 결산 뒤에 있었던 회식으로 넘어올수록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으면 유현정은 박태진을, 박태진도 유현정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내 눈을 응시하던 박태진이 녹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입을 열었다.

“좋은 사람이죠. 외모도 외모지만 씩씩하고, 남에게 기대려고 하지 않고··· 자기 몫은 스스로 해내려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먼저 다가오는 것도 맘에 들겠죠?”

“네··· 네?”

무심코 대답하다가 놀란 박태진의 눈을 보며 빙긋 웃었다.

“첫 날부터 쭉 지켜봤어요. 회의 할 때 손 부딪치고 눈도 못 마주친 거부터 사무실에서도, 현장 홍보 때도, 그리고··· 회식 때도 유 과장이 형 리드하는 것까지요, 흐흐.”

“도, 도련님···.”

말을 더듬은 박태진의 이마 가장자리에 식은땀이 맺혔다. 여자보기를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봤던 박태진이 순순히 끌려 다녀줬다면 유현정에게 마음이 있을 터.

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말했다.

“더 늦기 전에 유 과장 잡아요. 나도 올해 빼고 3년 안에 장가 갈 거니까요.”

“네?”

“하연 누나 서른 살 넘기 전에 식 올려야죠. 다른 재벌가면 벌써 시집가서 자식 볼 나이인데 언제까지 혼자 둘 수도 없고요.”

신성그룹 장 씨 가문의 사위‘만’ 될 뿐, 처가 사람들의 피를 말리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겠다는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박태진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고맙긴요. 형 인생은 형 인생인데.”

하지만 박태진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도련님을 두고 떠나는 게 내키지가 않더군요. 저 같은 놈에게 가족이라는 게 뭔지, 가족들과 주고받는 정이 뭔지 알려준 회장님과 사장님, 사모님인데 혼자 남은 도련님이 얼마나 쓸쓸할까 걱정됐습니다.”

항상 친형처럼 생각하고 있었지만 박태진에게서 이렇게 직접 말로 들으니 가슴이 찡해졌다.

“형···.”

“그뿐만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해동의 깃발을 세상 곳곳에 꽂을 것 같은 분 옆을 떠나려니 누가 옆에서 도련님을 돌봐줄까 걱정했는데··· 하연 아가씨가 도련님을 돌봐준다면 마음 편히 준비해도 될 것 같군요.”

소탈한 미소를 띤 박태진의 얼굴을 보니 가슴을 누르던 돌덩어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양반이 전생의 나 때문에 환갑이 넘도록 혼자서 초라하게 산 게 늘 미안했는데···.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미소 띤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형도 참. 내일부터는 우리 둘 다 백수니까 늦게까지 푹 자고 밖에서 점심 먹어요. 부모님하고 갔던 곰탕집 가고 싶은데 어때요?”

“특별히 봐드리죠. 대신, 식사하고 돌아오시면 트레이닝 시작하겠습니다, 하하.”

서로를 보며 웃은 우리는 다완을 비우며 해동마트에서의 시간을 마무리 지었다.

***

다음 날 오전 11시.

모처럼 만에 늘어지게 잠을 잔 우리는 얼굴만 대충 씻고 캡 모자, 후드 집업, 오리털 패딩 차림으로 곰탕집에 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부모님과 함께 와서 식사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랜만에 왔는데도 북적거리네요.”

“초대 회장님 때부터 이 자리를 지켜온 집이니까요.”

탁자에 앉은 우리는 식당을 둘러봤다. 아직은 주 5일제가 시작되지 않아서인지 부지런히 뚝배기를 비우는 넥타이부대가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는 언제쯤 주 5일제가 시작될까요?”

“한 10년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아직은 다들 야근이 강제되는 문화가 만연하니까요. 우리 그룹이야 공장 한정으로나마 5조 3교대를 하고 있지만···.”

말끝을 흐리던 박태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한국에서는 해동그룹만이 ‘임직원들이 건강해야 회사가 발전한다.’라는 할아버지 경영철학 때문에 비용부담을 감수하고 5조 3교대를 실시 중- 농땡이 피우면 성과급을 줄이거나 퇴사시키는 등 무시무시한 징계를 내리지만 –이다.

그런 현실을 알기에 나 또한 박태진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게요. 업무시간에 일에만 집중하면 야근도 필요 없고 가족들하고 어울리는 시간도 늘어날 텐데···.”

그 날이 빨리 와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저녁시간에 우리 백화점과 할인점, 극장에 와서 돈을 쓰지 않겠나?

무엇보다 나부터가 업무량이 많다면 몰라도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낭비 하는 걸 칠색 팔색하는 인간이다. 그룹 내에서 입지가 더 커지면 쓸데없는 야근은 무조건 없앨 것이다.

입맛을 다시던 나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박태진에게 종업원이 왔다.

“뭘로 드릴까요?”

“곰탕 두 개요.”

주문을 받은 종업원은 맑은 육수 두 컵을 우리 앞에 내려놓고 주방 쪽으로 갔다. 우리는 어제 회식으로 버린 속도 달래고 몸도 녹일 겸 육수를 마셨다.

“후우, 맛있네요.”

“모처럼 왔는데 예전 맛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하하.”

이곳에서 있었던 옛날이야기를 하며 육수를 마시던 중 쟁반에 뚝배기 두 개를 얹고 종업원이 걸어왔다.

“곰탕 두 개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모님. 잘 먹을게요.”

종업원이 우리 식탁에 뚝배기를 내려놓으려던 찰나에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줌마! 여기가 먼저잖아! 왜 거기부터 줘!”

“죄송합니다, 손님!”

크게 외친 종업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드러났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저기가 먼저인데. 미안해요, 손님들. 저 분들 먼저 갖다드리고 다른 거 갖다드릴게.”

나와 박태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한 달 간 백수인지라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세요, 이모님.”

“고마워요. 주방에 말해서 고기 더 넣어달라고 할게요.”

겸연쩍은 미소를 띤 종업원이 다른 쪽으로 갔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쨍 소리와 함께 그 괄괄한 목소리가 또 터져 나왔다.

“아줌마, 내가 우습게 보여! 어디서 남의 상에 올리려던 걸 가져와!”

“소, 손님···.”

“내가 거지새끼야? 어!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야!”

소리가 난 쪽을 보니 한 중년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중년의 여자를 향해 쌍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산산조각 난 곰탕그릇은 바닥에 엎어진 지 오래였고,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욕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점심시간인데 그냥 넘어가면 어디가 덧나나? 숟가락 담근 것도 아닌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냥 넘어갈 법도 할 텐데···.”

뒷담화를 마친 우리는 조용히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는데, 큰소리가 또 터져 나왔다.

“야! 거기! 모자 쓴 놈 둘!”

끝까지 모르는 체하고 있자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그 발걸음소리가 멈추면서 식탁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는데 팔 하나가 높게 올라갔다.

퍽! 퍽!

“너희 뭐라고 떠들었어? 어! 어린놈의 새끼들이!”

세상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싶었다. 다짜고짜 사람 뒤통수를 갈기다니? 박태진도 한 대, 나도 한 대 골고루 맞았다.

잘 걸렸다. 내 가면을 벗게 만든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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