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23rd. 가면을 벗고 (1)
나는 여전히 해동마트 은평점에 출근해서 서류작업을 하고 있었다. 할인점 사업이 자리 잡기 전까지, 폭풍이 몰아닥칠 때까지 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였다.
작업을 마친 나는 깔끔하게 정리한 서류 두 개를 들고 나창석에게 걸어갔다.
“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성민 씨. 편히 말하세요.”
“상호를 바꾸는 게 어떨까요?”
“예? 갑자기 왜···?”
“그룹 이름을 걸어놓고 장사하면 소비자들한테 안 좋을 것 같아서요.”
나창석은 대답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입니까, 성민 씨? 우리 그룹 이름값이 얼마나 큰데 상호를 바꾸자니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장님. 앞으로 사업 분야가 많아지면 사람들이 안 올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
미간을 찡그린 채 눈을 가늘게 떴던 나창석이 표정을 풀었다.
“재벌의 딜레마입니까?”
“네, 부장님.”
끝없는 확장이야말로 재벌의 존재이유지만 소상공인들과 가장 많이 충돌할 할인점에 해동의 간판이 걸리면 다른 사업에 발목이 잡힐 수 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상호는 변경하는 게 좋다. 지금까지는 나에 대한 신뢰가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미뤄뒀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지난달부터 작업한 기획안이었다.
나창석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본 이름이 있습니까?”
“하이마트(High-Mart)입니다.”
“하이마트요?”
“고객들의 품격을 높여주는 마트, 지금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는 마트라는 뜻입니다. 언어유희를 쓰면 고객들을 환영하는 마트라는 뜻도 되고요.”
발음과 표기법을 이용한 말장난이지만 High든 Hi든 한국어 발음으로는 ‘하이’가 아닌가. 나창석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마트, 하이마트··· 좋네요. 본사에 건의해보겠습니다. 서류는 준비됐죠?”
“물론입니다, 부장님.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나는 나창석에게 상호 변경에 관한 서류를 건네준 뒤, 들고 있던 다른 서류철도 건네줬다.
“노마크(No-mark)?”
“네. 해외에서는 보편화된 PB 상품 사업입니다. 상품 기획과 개발 비용은 우리가 맡고, 생산은 외부업체에 맡기는 거죠. 당장은 아니라도 규모가 커지면 이 또한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건 다가올 폭풍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가장 춥고 배고플 때 우리 상표를 붙인 가성비 갑의 상품들을 살포하면 노마크를 마크할 PB브랜드는 없을 것이다.
나창석은 서류를 쭉 훑어본 뒤, 상호변경에 관련된 서류철 위에 표지를 덮은 서류를 올려놓았다.
“알겠습니다, 성민 씨. 중장기 계획으로 잡아서 대표님 결재 받아두죠.”
“감사합니다, 부장님.”
내 의견을 선선히 받아준 게 고마워서 고개를 숙이자 나창석이 빙긋 웃었다.
“감사는요. 성민 씨 덕분에 우리가 한 수, 아니 여러 수 배웠습니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은 것 같은데 내일이 마지막인 게 아쉽네요.”
그랬다.
내일 저녁 6시가 되면 나는 해동마트에서 퇴사한다.
새해까지 남은 한 달 간 심신도 추스르고 그간 마트 일 때문에 밀려있던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완전히 헤어지는 게 아닙니다, 부장님. 바깥에서 일해도 해동그룹 사람이라는 건 바뀌지 않으니까요.”
“그럼요, 성민 씨.”
나는 나창석의 아쉬운 미소를 보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 저녁 때 회식 괜찮으시죠? 좋은 데서 하고 싶은데.”
이번 생의 처음으로 동료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눈 조직이다. 앞으로는 서로 다른 소속으로 만나겠지만 오늘까지는 해동마트 사원 이성민이니 화려한 피날레를 하고 싶었다.
***
박태진과 함께 회사에서 퇴근한 나는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삼청동 저택에 들어갔다.
저녁밥이나 먹자고 해서 갔는데 식당에 들어가니 할아버지와 세 원로 대표이사들, 고승주, 선해철, 이명진까지 온갖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할아버지?”
“네놈들 새빠지게 고생한 거 위로해주려고 다들 불렀다. 너희도 이제 비공식적이지만 어엿한 그룹 경영진 아니냐, 허허.”
할아버지의 푸근한 웃음과 격려에 그간의 피로가 싹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나와 박태진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자자, 어여 앉아. 너희들 오는 거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 으허허.”
자리에 앉은 우리는 할아버지가 수저를 드는 걸 보고 식사를 시작했다.
“네놈들이 정신 차리고 부지런히 뛰어준 덕분에 그룹이 많이 컸어. 안 그러나들?”
“이를 말씀입니까, 회장님. 상사 쪽 아이들, 요즘 들어 다른 그룹 놈들 만날 때마다 어깨에 힘이 절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하하.”
배재훈의 막을 열자 태재호가 그 뒤를 이었다.
“아이고 형님, 우리 애들도 만만치 않수. 내후년에 강남점 열면 매출이 얼마나 나올까 기대하고 있소. 신 회장도 매장 문만 열면 한 시름 덜 것 같다고 했고요, 흐흐.”
“종금도 빼면 섭하지요? 새로 낸 지점마다 계좌 만들려고 오는 고객들이 하루에도 백여 명이 넘고 CMA 수익률도 짭짤하다 못해 혓바닥이 쓸 지경입니다, 하하.”
조영찬까지 콧수염 가장자리를 만지며 껄껄 웃자 이명진도 질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저씨들, 중공업 계열도 잘 나가고 있습니다. 잠깐 경기가 안 좋아서 그렇지 건설은 수주잔고가··· 어마어마합니다, 하하.”
옆에 앉아있던 선해철이 이명진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짜식, 나하고 형님이 관리하는 비자금도 장난 없다야. 헨리한테 부탁해서 인덱스 펀드에 넣어두고 노스 리미티드 주식 샀더니 돈 쓰는 속도보다 불어나는 속도가 더 빨라. 안 그렇수?”
“그건 그렇지. 내년 6월에 비자금에서 30퍼센트, 스탠더드에서 30퍼센트 인수하면 호주 광산 사업 진출도 쉬워질 거다, 하하.”
오늘 이 자리는 우리 둘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기도 했지만 모두가 던진 한 마디가 모이니 올해의 사업을 결산하는 자리가 됐다. 해가 지날수록 그룹 안팎에서 살림이 쑥쑥 크고 있으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안 마셔도 취할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껄껄 웃으며 술이 몇 순배 돈 가운데 할아버지가 잔을 내려놨다.
“오늘 이 자리, 너희 둘 고생한 거 위로하려고 마련하기도 했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 앞에서 밝힐 게 있어서 마련한 자리다. 태진아.”
“네, 회장님.”
긴장한 박태진을 보며 할아버지가 벙긋 웃었다.
“내 대신 성민이 돌봐줘서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저놈 사람 되는 건 꿈도 못 꿨을 게야, 으허허.”
“아, 아닙니다, 회장님! 도련님은 어디까지나···.”
그 말을 듣고 박태진이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할아버지는 손을 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아니다. 네가 옆에서 지켜주고 보살펴줬으니 저놈이 훨훨 날아다니는 게지. 용이 제 스스로 날 것 같으냐? 여의주가 없으면 덩치 큰 비암하고 다를 게 없어, 으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잔을 비운 할아버지가 숨을 내쉬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뭔가 중요한 발표가 나올 것 같았다.
“태진이 넌 내년부터 해동그룹 이사다.”
“예?”
“성민이 저놈이 일군 거 반절은 네가 도와준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이사로 올라가야지.”
역시나였다. 할아버지는 박태진을 슬슬 끌어올리려 하고 있었다.
“회, 회장님···.”
“허어, 당장이라도 상무로 승진시키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아서 이사로 그친 게야. 고 실장, 내년 인사발령 때 태진이 이사 명패 내주도록 해.”
할아버지에게 말을 잘렸지만 박태진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회장님. 제가 회사에 출근하면 도련님은 누가 지켜주겠습니까? 명우 형님이나 형수님도···.”
말끝은 흐릴지언정 형의 눈에서 간절함이 타올랐다. 고마운 사람··· 앞으로 더 높은 곳까지 함께 올라가고 싶었다.
내가 감상에 빠져 있을 때 할아버지가 박태진을 보며 눈웃음을 흘렸다.
“이 노인네가 그리도 생각이 짧은 줄 알았더냐? 으하하하!”
크게 웃던 할아버지가 웃음을 그치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사 명패 줬다고 사무실서 일하라는 게 아니다, 이놈아.”
할아버지의 푸근한 목소리에 박태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앞으로 넌 그룹 비서실 소속으로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의 이성민을 담당할 게야. 다른 회사 사람을 상대하려면 이사는 달아야지?”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때서야 박태진은 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지만 할아버지는 손을 내저었다.
“죄송할 게 뭐 있누?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새 살림 꾸릴 때까진 이태원에서 같이 지내도록 해. 독립해도 성민이하고 착 붙어서 그룹 살림 열심히 불리고, 으허허.”
“감사합니다, 회장님!”
실과 바늘 같은 우리 둘을 배려해주다니··· 고마워요, 할아버지.
***
다음 날 저녁.
회사에서 퇴근한 우리는 단체로 고급 중식당을 잡고 송별회를 겸한 회식을 하고 있었다.
“야아! 고추잡채에 팔보채, 유산슬, 양장피···! 송별회라고 해서 한우 먹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더 죽이네요!”
“얌마! 불도장 흘리지 말고 먹어! 오죽하면 스님이 이거 먹고 절간에서 도망쳤다고 했겠냐! 하하!”
회사 식구들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니 이곳을 잡길 잘했다 싶었다.
“많이들 드세요! 부족한 거 있으면 더 시키시고요!”
“성민 씨, 잘 먹을게!”
“이성민 최고다!”
팀원들의 연호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창석이 고량주를 채운 조그만 유리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다들 술이든 음료수든 가득 채워! 성민 씨 떠나는 날이니까 신나게 보내주자고!”
나창석의 외침에 팀원들은 얼른 술이나 음료수를 채운 유리컵이나 잔을 들었다. 나 또한 유리잔을 들고 평소처럼 회사 구호를 외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성민!”
“화이팅!”
다들 미리 짜고 친 것 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부장님?”
“대표님한테 들었습니다, 내년부터 다른 회사에서 일할 거라고 하시던데 아닙니까?”
“네?”
태재호 이 양반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물론이고 유현정 옆에 있던 박태진도 눈이 커진 채 나창석을 바라봤다. 하지만 우리의 우려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어딘지는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앞으로도 그룹 경영에 참여할 거라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성민 씨?”
“아하하··· 네. 친한 분이 추천해준 회사인데 시간이 나면 외부활동을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해도 나창석은 섭섭해 하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그룹 경영 챙길 때 해동마트도 꼭 챙겨주면 좋겠습니다. 성민 씨 친정집 아닙니까, 하하.”
“당연한 말씀을요, 하하.”
지금 웃으며 한 말은 빈말이 아니다.
제조와 금융만큼 중요한 게 물류와 유통이다.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뭐하나? 필요한 곳에 날라서 팔아줘야 돈이지.
시야를 넓히면 지구 반대편의 네덜란드도 청어 팔아 번 돈을 해운에 올인해서 ‘바다의 마부’라는 별명과 함께 열강에 올랐었고, 지금도 손꼽히는 물류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앞으로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우리 집안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바다의 마부가 될 것이다. 그뿐인가? 마부 노릇을 하느라 필요할 ‘바다의 마차’도 우리가 만들고, 그 마차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머물 거점들도 마련할 것이다.
미래에 대한 나만의 청사진을 접어두고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던 중 전화가 왔다.
“네, 이성민입니···.”
[나야, 하연이. 뭐해?]
워낙 시끄러워서 한쪽 귀를 막고 전화를 받던 나는 눈이 커졌다.
“회식 중. 잠깐만.”
자리에서 빠져나간 나는 식당 바깥의 골목길로 들어갔다.
“어, 누나. 왜?”
[그래? 나 오늘 일찍 끝났거든. 술이나 한 잔 할까 했는데···.]
흐려지는 말끝에 서운함이 달린 것 같았다. 회사에 처음으로 만든 내 사람들 챙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하연과의 관계도 챙겨야 하기에 얼른 질렀다.
“두 시간 정도는 낼 수 있어. 괜찮아?”
[어쩔 수 없지, 뭐. 회식 중에 시간 내주는 건데. 이태원에 블루문이라고 있는데 거기서 봐. 어때?]
“알았어. 이따 봐.”
전화를 마치고 식당에 들어온 나는 식당을 가득 채우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다들 술기운이 얼큰하게 올라왔는지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나 박수소리가 들리기까지 했다.
즐겁게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며 내 자리로 돌아가려고 자리에 앉던 중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얼레? 여기서?’
유현정이 힐을 벗은 스타킹 발로 박태진의 발목을 건드리는 걸 보니 옛날에 혼자서 봤던 ‘크레이지, 스투피드, 러브’의 인트로와 똑같았다. 레스토랑이 아닌 중식당에서, 둘만의 오붓한 식사가 아닌 떠들썩한 회식 중에 하는 거 빼고.
저렇게 될 줄 알았다. 출근 첫날 회의 때 손이 닿을 때부터 눈도 못 마주쳤는데 사무실에서든, 현장 홍보든 톡톡 주고받고 회식 때도 착 달라붙어 다니더니만··· 장난 좀 쳐볼까?
“형.”
“네, 도련님!”
조심스럽게 뒤로 돌아서 간 뒤, 박태진의 어깨에 턱하고 손을 얹자 박태진은 물론이고 유현정까지 덩달아 움찔거렸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형?”
“갑자기 그러시니 그렇잖습니까?”
목소리까지 높이는 걸 보니 어지간히 뜨끔했나 보다. 나는 몸을 낮추고 그의 귀에 손을 댔다.
‘하연 누나 전화 와서 두 시간 뒤에 돌아올게요. 그 사이에 파할 것 같으면 연락 주고요.’
박태진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몸을 세운 뒤, 나창석에게 다가갔다.
“부장님, 죄송한데 잠깐만 밖에 나갔다 올게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럽니까, 성민 씨?”
“중요한 사람 호출이에요.”
나창석은 내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집중!”
모두들 손뼉을 치며 외친 나창석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성민 씨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합니다!”
“우우우! 안 돼! 안 돼!”
“주인공 빠지면 섭하죠!”
나는 두 손을 들어서 야유를 보내는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신.”
말을 멈추고 지갑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을 꺼냈다.
“여러분 회식비로 드리는 겁니다. 쓰고 남으면 나중에 회식 때 쓰세요! 사랑합니다!”
수표를 들어 보이며 외친 뒤, 두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보이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최고다!”
“이성민! 이성민!”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박태진, 유현정만 잘 되면 참 좋을 텐데···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구 신경을 쓰나. 얼른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