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22nd. 기브 앤 테이크 (7)
장호건은 장하연을 고려호텔 본점에 내려준 뒤, 명동에 있는 신세기그룹 사옥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장호건 회장님.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갑시다, 조 실장.”
사옥 입구에 들어선 그는 조석한의 안내를 받으며 회장실로 향했다.
“오랜만이오, 누님.”
“무슨 일로 왔어? 우리하고 하던 거래, 해동그룹에 다 넘겼으면서.”
장호건은 장호경의 날선 인사는 듣는 체 마는 체하며 제 집 거실 소파인 양 소가죽으로 만든 1억 짜리 소파에 편하게 궁둥짝을 붙였다.
“겨우 그런 걸로 삐지셨소? 그래봐야 우리가 쓰는 명절 선물세트, 전부 제분에서 띠어다 쓰지 않소?”
“겨우 그거? 생색은.”
다리를 꼰 자신을 보며 장호경이 톡톡 쏘아붙이자 장호건이 눈을 치켜떴다. 그래도 누이라고 다른 회사보다 비싼 제일제분 명절 선물세트만 매년 수백억이나 팔아주는데!
장호건은 땅 파서 그 돈이 나오냐고 소리 지르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뭐라도 마시면서 얘기합시다. 모처럼만에 온 동생한테 물 한 컵도 안 주려는 거요?”
장호경은 볼을 씰룩거리는 걸 참아내고 인터폰을 눌렀다.
“주스 두 잔.”
장호경이 소파 상석에 걸터앉고 얼마 안 지나서 직원 한 명이 들어와 생과일주스 두 잔을 내려놨다.
장호건은 컵을 집어서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아랫입술을 살짝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장호경은 어릴 때부터 하는 짓마다 밉상인 저놈의 쌍판때기에 주스를 끼얹고 싶은 심정을 꾹꾹 눌렀다.
“목 축였으면 말해. 무슨 일로 온 거야?”
“누님 성격 급한 건 여전하시네. 방금 전에 해동마트 다녀왔소.”
“네가 왜?”
“새삼스럽게 뭘 그리 놀라는 거요? 신사협정 끝나면 나도 뛰어들 준비해야지. 당연한 거 아니오?”
“···야!”
장호건의 도발에 장호경의 눈꼬리와 목소리가 대번에 올라갔다. 와서 실컷 염장 지르고 한다는 소리가 선전포고라니!
장호건은 장호경이 팔걸이에 얹은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걸 보고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오, 농담. 서민들 푼돈 만져서 뭐하겠소? 현금이야 금융 쪽에서도 충분히 나오고 마트에 처박을 돈이면 반도체 공장이나 자동차 공장을 늘리는 게 낫지.”
실제로도 장호건은 유통에 큰 미련이 없었다. 장남으로서 모든 계열사를 삼키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지금 쥐고 있는 계열사들 키우는 것도 빠듯했다.
그나마 지난 환투기로 신성물산에 여유가 생겼기에 그는 최근 들어 호주에서 새롭게 물꼬를 트려고 했다. 해동그룹이 손대는 곳이지만 부회장 때부터 자기 말을 무시했던 임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신성전자를 지배하는 신성물산을 키우는 일이기에 값싼 죄책감은 집어던진 지 오래였다.
그런 장호건의 속사정을 모르는지 장호경은 짜증 섞인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빙빙 돌리지 말고 직진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장호건은 주스 한 모금을 입 안에 적시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은평점 둘러봤는데··· 누님이 나중에 절름발이 될 것 같았소.”
“뭐?”
“유통은 1위에서 밀려날 테니 제분 하나만 일등 지키면 절름발이가 아니고 뭐겠소?”
“너 지금 말 다했어?”
장호경의 눈에서 불똥이 튀어도 장호건은 제 할 말을 계속했다.
“말 다 안 했소. 오늘 가서 둘러보니 아주 잘 꾸며놨더이다. 가격도 저렴하고 서비스, 품질 모두 좋았소. 첫날부터 사람들이 붐볐는데 모레가 토요일이니 지켜보면 알 거요.”
차분하게 말하는 장호건과 달리 장호경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유통업을 몰라서 그러는데 그딴 식으로 장사하면 금방 거덜 나. 일본에서 벌어온 돈 다 버릴 걸?”
“글쎄요, 누님. 혹시 로스차일드 가문 아시오?”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장호경이 톡 쏘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 영국 국채로 돈 번 집?”
“그렇소. 그런데 그 집안, 자기 집안 재산은 다 까먹어도 자기들이 맡은 제후들 재산은 동전 한 닢 안 빼먹고 지켜줬답디다. 전쟁 중이라 돈 주인들이 피난 갔는데도 말이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 덕분에 제후들이 다시 그 집안에 돈을 밀어줬소. 결국, 돈놀이든 유통이든 장사는 정직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거요. 여하튼 난 유통에 손 안 대고 지켜보기만 할 거요.”
장호경은 가늘게 뜬 눈으로 장호건의 무미건조한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뭘 그리 거창한 이야기를 꺼내나 했더니 고작 그거였어?”
“무슨 말이오?”
장호경은 말끝을 살살 흐리면서 장호건의 얼굴이 점점 굳는 걸 즐기듯이 쳐다봤다.
“너, 아직도 그 애한테 미련 있니? 예전에 이명우하고 정혼서약서까지 썼잖아. 밖에서 데려온 네 딸 시집보내겠다고.”
둘도 없는 친구, 먼저 간 친구와 맹세했던 기억을 끄집어내다니··· 장호건은 날카롭게 벼린 눈으로 누이를 쏘아보며 목소리를 키웠다.
“그만 하시오. 다 끝난 일이오.”
“그 영감이 대신 지켜줄 거라 믿는 건 아니지? 둘이 자동차사업 같이 하려던 것도 반대했는데.”
더 이상 말했다가는 못 보일 꼴을 보일 것 같았는지 장호건은 장호경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던졌다.
“할 말 다 했으니 이만 가보리다. 아버지가 물려준 알짜배기, 잘 키우시오. 내가 거두지 않게 말이오.”
그 말을 끝으로 장호건은 장호경을 쳐다보며 남은 주스를 마저 비우고 방을 나갔다.
“얄미운 새끼, 잘난 척은···.”
장호경은 자신이 절대 따라잡지 못한 동생이 나간 문을 노려봤다.
***
개점 이후부터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마트를 꾸리다 보니 9월 30일이 되었다.
오늘은 월말 정산을 하는 날.
점심부터 모든 직원들이 개점 첫 날부터 오늘까지의 매출을 집계하느라 컴퓨터와 서류를 붙잡고 있었다.
“청과 쪽 매출 나왔습니다.”
“축산 실적 정리됐습니다.”
“주류/음료도 끝났습니다.”
“수산도 마무리됐습니다.”
한 명씩 담당 코너 매출을 정리해서 가져왔고, 나창석은 그 자료들을 취합했다. 해동마트의 첫 매출 정산이라고 사업부장인 본인이 직접 하겠다는 통에 팀원들은 나창석의 주변에 빙 둘러서서 그가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는 걸 지켜봤다.
“해동마트 9월 매출은···.”
모두가 침을 삼키는 가운데 나창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80억 8,214만 5,280원에 영업이익 4억 6,276만 3,120원입니다!”
“와아아!”
발표가 나오자 모두들 서류를 허공에 흩뿌리거나 얼싸안고 방방 뛰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축하드립니다, 이성민 씨!”
“네?”
“실적이요, 실적! 매출 81억에 영업이익률 5퍼센트라고요!”
팀원들이 나창석에게서 건네받은 결산서를 보여줬지만 당연한 결과였다. 이 시대의 물가를 생각하면 큰 성과지만 깔고 앉은 땅도 SSK마트 때보다 더 넓어졌고, 뉴타운이 들어서면 증축을 통해 매출 3천억도 바라볼 만한 곳이 아닌가?
그래도.
팀원들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데 초를 치거나 찬물을 끼얹을 만큼 멍청하지 않다. 나란 놈은 말이다.
쿵!
“저녁 때 옥상에서 회식합니다! 출장뷔페 비싼 걸로 화끈하게 쏘겠습니다!”
책상을 내려치고 소리치자 사람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출장뷔페요?”
“첫 달인데 기분 내야죠? 주류코너에서 마시고 싶은 거 맘껏 골라오세요!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밤 11시까지 영업을 하는 터라 내근직 사원들 중 몇 명은 사무실을 지켜야 한다.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오늘의 성과를 만끽하길 원했기에 출장뷔페를 결정한 것이었다.
“성민 씨, 멋쟁이!”
“이성민 만세!”
“이성민! 이성민!”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 출장뷔페 차량들이 하나둘씩 들어와서 옥상에 세팅을 시작했고 우리는 6시가 되자마자 붉게 물 드는 하늘을 보며 옥상으로 나왔다.
“히이? 이게 다 뷔페야?”
“아이고오, 잔치네?”
옥상에 올라온 사람들은 중식, 양식, 일식, 한식 안 가리고 골고루 차려진 뷔페에 입을 떡 벌렸다.
“뭐하세요? 어서 드세요.”
“···네!”
모두들 테이블로 가서 접시와 수저를 들고 뷔페를 돌며 먹고 싶은 걸 담았지만 나창석은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분위기 깨는 것 같은데 현장 직원들이 알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지금도 매장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그 분들도 즐겨야죠. 구내식당도 똑같은 뷔페로 쫙 깔았습니다, 흐흐.”
나창석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봤지만 나는 오히려 나창석이 직원들 간의 차별문제를 짚어내는 점에 감탄했다.
현장 직원들은 우리보다 더 고된 일을 하고 현장에서 고객을 응대한다. 그럼에도 온갖 차별로 상처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 또한 예전에는 내 삶이 급급해서 모른 체했지만 지금은 다른 삶을 살고 싶기에, 그럴 여유가 있기에 해동마트의 얼굴인 현장 직원들까지 살필 수 있었다.
나창석은 씩 웃는 나를 보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괜한 걱정을 한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하하.”
“편하게 드세요. 저도 오늘은 진탕 먹고 마셔야겠습니다, 하하.”
음식을 덜고 와서 의자에 앉아 먹는데 석양까지 구름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끝내주는 배경까지 깔렸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부장님, 한 말씀 하시죠.”
“예?”
“할인점사업부장님이시잖아요. 소감이 빠질 수 있나요?”
내가 이대수 회장의 손자라도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나창석이다. 앞으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나창석을 따라야 하니 그가 나서야 한다.
나창석은 종이컵에 맥주를 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달 동안 다들 고생했습니다! 다들 잔 채우시고!”
나창석이 호기롭게 외치자 팀원들이 얼른 종이컵에 마시고 싶은 술이나 음료를 채워서 높이 들었다.
“앞으로도 잘 팝시다! 해동마트!”
“잘 팔아보세!”
건배사를 외친 뒤 모두들 옆 사람들과 컵 끝을 부딪치고 술과 음료를 비웠다.
나창석이 자리에 앉자 팀원들은 옆에 있는 동료들과 서로를 위로하거나 격려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중에서도 내 눈에 유독 띄는 두 사람이 있었다.
“차장님, 저기 있는 거 드셔봤어요? 맛있던데.”
“아, 그렇습니까?”
“네. 접시도 다 비었는데 저랑 같이 갈래요?”
“그, 그러시죠.”
박태진과 유현정을 보니 웃음만 나왔다. 냉철하고 각 잡힌 양반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끌려가다니.
술을 마시던 나창석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박 차장 저 친구··· 큰 사장님 전속비서였을 때도 여자한테 눈길 한 번 안 줬는데 요즘 들어 많이 달라 보이네요.”
“그런 거 같아요. 친한 형님 한 분한테 눈이 너무 높아서 노총각이라고 긁혔거든요. 흐흐.”
감출 건 감추고 선해철과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나창석이 호탕하게 웃었다.
“박 차장이 좀 그런 게 있었죠. 그래도 유 과장하고 만나면 도둑놈 소리 들을까 걱정됩니다, 하하.”
그래도 멀리서 보니 꽤 잘 어울리는 커플 같았다. 선해철, 뉴욕에서 박태진에게 했던 약속 지켜야 할 것 같은데?
선해철이 박태진에게 얼마나 긁힐지 상상하던 중 나창석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아, 부장님.”
“그나저나 저쪽에 있는 분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나창석은 손을 뻗어 동남쪽을 가리켰다.
“저쪽이면···?”
“장호경 회장이요. 국내 처음으로 할인점 들였다고 콧대가 높았는데 이성민 씨한테 된통 당한 게 아닙니까? 그쪽 사람들, 지금쯤이면 욕받이 무녀 노릇 할 것 같네요, 흐흐.”
그 여편네 성질머리면 욕받이 무녀가 수십 명은 필요할 것이다. 할아버지한테 부탁해서 기사 좀 써달라고 할까? 욕받이 무녀 백 명은 데려다 쓰라고.
***
며칠 뒤.
[해동그룹 4세 이성민, 두 번째 홈런을 날리다! 연 매출 1천억을 예고한 해동마트 은평점!]
[‘재계의 신성’ 이성민, 솔선수범과 남다른 감각으로 해동의 할인점 사업 안착!]
[해동마트 은평점, 파괴적 혁신으로 한국형 할인점을 제시하다!]
신문을 쥐고 있던 장호경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이 세운 금자탑을 새파란 어린놈이 가볍게 무너뜨리다니!
“···아아악!”
장호경은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내지르더니 신문까지 반으로 쭉 찢어버렸다. 국내 할인점 업계를 선도한다는 자부심이 충만했기에 이번에 당한 패배를 더더욱 견디지 못했다.
반으로 찢은 신문을 갈가리 찢어발기던 장호경에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신세기그룹···”
[나요, 누님. 오늘 신문 보셨소?]
침착하게 전화를 받던 장호경은 귓가에 들리는 장호건의 목소리를 듣고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그 어린놈 똥구멍 빨아달라고?”
[자존심이 밥 먹여 줍디까? 배울 건 배워야지.]
“야! 장호건!”
[비서실에 시켜서 복기하라고 하시오. 다가올 아버지 기일에 제사상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말이오.]
통화가 끊기자 장호경이 인터폰에 손을 얹었다. 경영능력만큼은 알아주는 동생이 따끔하게 던져준 조언이면 따를 가치가 있기에 본능이 시키는 대로 버튼을 눌렀다.
“조 실장! 당장 해동마트 분석해!”
[···예?]
조석한의 되물음에 장호경이 수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다시 말해줘?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베껴서라도 다음 출점에 반영하라고! 아니! 지금 낸 매장들도 전부 갈아엎어. 알았어?”
[네, 네! 회장님!]
쾅!
장호경은 조석한의 대답을 듣고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놨다. 강남터미널 입점부터 신성그룹 내부거래, 해동마트 은평점 대박··· 해동그룹 때문에 물먹은 걸 생각하면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대체 나하고 무슨 웬수를 졌다고···!”
씩씩거리던 장호경은 새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장호경입···.”
[이대수외다, 장 회장. 잘 지내셨소?]
호랑이인지, 양반이 못 되는지 이대수의 느물느물한 목소리가 장호경의 귓전을 건드렸다. 그녀는 분을 못 이기고 톡 쏘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회장님 장손 때문에 잘 못 지내고 있네요.”
톡 쏘는 말에도 이대수는 허허 웃기만 했다. 장손이 이끈 해동마트의 선전으로 개차반 같은 장호경이 얼마나 열이 뻗쳤을지 뻔히 알고 있어서였다.
[허허, 뭐가 그리 서운하시오?]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은근히 속을 긁는 이대수 때문에 장호경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뭣 때문에 전화하셨죠?”
[뭐 꼭 이유가 있어야 전화를 하겠소. 내 장손이 이번에···.]
“회장님! 그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도 제일제분으로···!”
장호경이 거래를 끊겠다고 말하려던 장호경의 입을 이대수가 막았다.
[제분? 호오, 내가 지금 이리저리 묵혀둔 신세기그룹 어음이 3천억인데 만기가 다음 달이오. 그거 전부 들고 가서 현찰로 받아도 되겠소?]
이대수의 묵직한 훅에 장호경은 아무 대꾸도 못했다.
‘신성그룹 금융계열 자금 쿼터는 땅 사고, 공장 늘리고, 물류사업하고 드림웍스 투자에 써서 얼마 안 남았어. 그리고···.’
제일제분이 업계 1위의 식품회사라도, 신세기그룹의 현금흐름이 좋아도 3천억 원이나 되는 거금을 한꺼번에 내놓을 수는 없었다. 계산을 끝낸 장호경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진즉에 보고할 것이지! 왜 보고를 안 해서 개망신을 당해야 하냐고!’
임직원들을 향한 소리 없는 고성을 지르던 장호경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실언했습니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경쟁은 경쟁이고 거래는 거래요. 병호 형님께서 아낀 장 회장이니 현명하게 처신하리라 믿겠소.]
전화를 끊은 장호경이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 당한 수모를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꽉 쥔 그녀의 주먹 안쪽으로 손톱이 파고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