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22nd. 기브 앤 테이크 (6)
남은 기간 내내 현장을 돌아다니며 개점 홍보를 하다 보니 어느 새 개점 당일 아침이 되었다.
“준비, 다 됐죠?”
“네. 매장 직원들도 철저히 업무를 숙지했고 상품 진열도 깔끔하게 됐습니다. 개점 분위기를 낼 수 있도록 실외 장식부터 천장 장식, 경품으로 내걸 상품 배치도 완료됐고, 폭죽팀도 옥상에서 대기 중입니다.”
개점 준비 보고를 하는 나창석이나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팀원들도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대표님 오시고 테이프만 자르면 되겠네요. 가볼까요?”
시계를 확인한 나는 팀원들과 함께 매장 내부를 한 번 더 둘러보고 나갔다.
매장 입구 바깥으로 나가니 앞에 있는 후덕한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대표님!”
“오, 이성민 사원!”
손을 든 태재호가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
“준비는 잘 했지?”
“네, 대표님. 팀원 분들이 도와줘서 잘했습니다.”
“허허, 그랬다면 다행이구나.”
너털웃음을 흘리던 태재호가 뒤에 있던 팀원들에게 다가갔다.
“고생했어, 나 이사. 자네들도.”
“아닙니다, 대표님. 이성민 사원 덕분에 일하는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래?”
“예. 다른 그룹 분들과 달리 솔선수범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유통업에 대한 식견도 깊고 예리했습니다.”
“아직 시간도 남았으니 이 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나 들어나 보세.”
“예. 첫날부터 기획안을 준비해왔는데···.”
나창석은 한 치의 가감도 없이 있는 그대로 말했고, 태재호는 그 얘기를 듣고 껄껄 웃었다.
“허허, 회장님께서 손속에 자비를 두지 말고 부려먹으라고 하신 걸 괜히 전해줬구먼. 알아서 잘했을 텐데.”
“덕분에 저희가 수월했습니다, 대표님.”
“홍보에 쓴 예산은 이성민 사원 사재에서 까게나. 매출 잘 나와도 감가상각 더 빨리 까면 마이너스로 바뀌잖나? 앞으로 사업 키우려면 회사 돈 아껴야지? 흐흐.”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다. 숫자장난으로 고의적자를 만들어서 내 피 같은 돈을 뜯어가겠다니? 태재호는 절로 입이 벌어진 내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방금 한 말은 농담일세, 이성민 사원. 지난 번 일로 벌어온 돈에서 22억 불이나 남아있는데 자네 쌈짓돈 털어서 뭐하나? 그리고.”
나를 비롯한 팀원들을 들었다 놨다 했던 태재호. 그는 어느 새 평온한 표정으로 나창석과 팀원들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자네들이 할인점사업을 그대로 이끌어 갈 걸세.”
“대, 대표님?”
“자네들 모두 백화점사업부에서 골고루 차출된 거 알지?”
“···예.”
“회장님 지시야. 오늘부터 나 이사가 은평점 점장 겸해서 할인점사업부장 맡고 나머지도 할인점에 말뚝 박아. 사업이 커질수록 자네들 명패도 무거워질 테니 잘해봐, 허허.”
나창석을 비롯한 팀원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난 팀원들의 정보를 확인하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서울과 인천, 부산에 걸쳐 다섯 개 점포를 둔 해동백화점과 유통부문 기획실에서 꼽히는 이들만 부서마다 연차, 직급까지 고려해서 만든 팀이다. 어찌 보면 예고된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서 개점식 시각이 되었고, 태재호의 굵고 짧은 축사를 끝으로 테이프 절단식이 시작됐다.
“하나! 둘! 셋!”
태재호와 나창석, 그리고 팀원들이 손에 쥔 가위로 테이프를 자르자 은평점 옥상에서 펑펑 소리를 내며 옥상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폭죽이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동시에 종이꽃가루가 휘날리며 허공에 알록달록한 점묘화를 그렸다.
눈앞에 펼쳐지는 화려한 광경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23년 간 신성의 사냥개로 살면서 한 번도 내가 주연이 되지 못해서 억울하고 한이 맺혔는데 이제는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온전히 내 것, 우리 것이라는 확신 때문인가?
박태진과 함께 흐뭇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팀원들을 지켜보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네, 이성민입니다.”
[나야, 성민아. 어디야?]
“지금 입구 쪽에 있는데··· 왜?”
[오후 2시에 갈게. 괜찮지?]
올 것이 왔다. 외모만큼이나 능력도 따지는 장하연에게 내 실력을 오롯이 뽐낼 절호의 찬스다.
***
“알았어, 누나. 이따가 봐.”
통화를 마치자 박태진이 물었다.
“하연 아가씨입니까, 도련님?”
“네. 오후에 온다고 하네요.”
“도련님한테 푹 빠지신 것 같습니다, 하하.”
웃음소리가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질 수 없지.
“놀리지 마세요, 형. 유 과장님이 형한테 관심 보이는 것 같던데?”
“도, 도련님?”
“현장홍보 할 때마다 봤어요. 유 과장님이 손수건으로 형 이마 닦아주고 생수병도 따주고, 회식 때도 유 과장님한테 고기 챙겨주던데··· 그런 거 아니죠?”
눈썹을 들썩거리며 입꼬리를 올리자 박태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도련님, 그게 아니라···.”
“잘 해봐요, 형. 형도 불혹되기 전에는 장가가야죠, 흐흐.”
짓궂게 웃은 나는 박태진과 함께 저 멀리 있는 일행에 합류해서 태재호에게 매장 내부를 안내했다. 이어서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다 보니 약속한 시각이 슬슬 다가왔다.
“매장 좀 둘러보고 올게요.”
나창석에게 허락을 구한 나는 매장 안에서 적당한 새 옷을 사서 갈아입은 뒤, 고객용 락커에 옷을 넣고 매장 입구로 나갔다. 매장을 돌아다니며 현장을 점검하느라 얼굴이 팔린 통에 모자까지 쓴 채 시계를 보며 장하연이 오길 기다렸다.
빵빵!
자동차 경적소리를 듣고 고개를 올리니 벤츠 리무진이 매장 앞에 서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기사는 길가와 접한 쪽으로 뛰어와서 뒷문을 열기까지 했다. 설마?
그뿐만이 아니었다. 핸드폰까지 울리고 있었다.
“네, 이성민···.”
[어딨어? 매장 앞에 나와 있을 거라며?]
“나와 있는데? 누나는?”
[매장 앞이지. 벤츠 안 보여?]
이럴 수가!
얼른 손을 들어 흔들며 말했다.
“나 지금 매장 앞에서 손 흔들고 있어. 보이지?”
[누군가 했는데 너였구나?]
“응. 금방 갈게.”
전화를 끊고 얼른 자동차 앞으로 달려가니 기사가 문고리를 잡은 뒷좌석에서 헌팅캡을 쓴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갈색 점퍼 차림의 중년 남성이 먼저 내렸다.
그 뒤를 이어서 깔끔한 면바지에 셔츠, 재킷, 앞 챙이 달린 빵모자 차림의 여자가 내리자 먼저 내린 남자가 손을 잡아줬다. 젠장.
“오 기사, 근처 커피숍에서 쉬다가 두 시간 뒤에 여기로 와.”
“예, 회장님.”
인사를 마친 기사는 그대로 길가로 사라졌다.
“오랜만이구나, 성민아. 개점식은 잘 치렀고?”
“네, 회장님.”
자상하게 말하는 장호건의 모습을 보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하고 같이 장보러 왔어. 그렇죠?”
“가끔씩 이렇게 데이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허허.”
부녀지간에 쿵짝이 밀리언셀러급이었다. 반도체 공장 준공식 때도 얼굴을 잘 안 비치는 장호건이 고작 오늘 오픈한 할인점에 오다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장호건은 당황한 내 얼굴을 보고 헛기침을 했다.
“멀리까지 나가서 매장 홍보했다고 들었다. 현장 교육이 중요해도 그렇지 그 먼 데까지 갔다니··· 고생이 크구나.”
날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측은함이 보였다. 장수연과 결혼했을 때는 늘 탐탁찮은 감정을 깔고 나를 쳐다봤는데 이유가 뭘까?
“아닙니다, 회장님. 아버지도, 숙부님도 고생하면서 올라오셨으니 저도 당연히 해야죠.”
“이젠 제법 의젓해 보이는구나. 어디 가서 기력 딸린다는 소리는 안 듣겠어. 안 그러냐, 하연아?”
“아버지도 참···.”
장호건은 얼굴을 붉히며 뒤로 숨는 장하연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누님도 할인점을 하고는 있는데 여기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구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회장님.”
“그래. 그런데···.”
장호건은 잠시 흐리던 목소리를 또렷하게 냈다.
“아저씨라고 불러라. 일면식이 없는 사이도 아닌데 딱딱하게 회장님이라니, 성민아?”
갈수록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전생의 장호건은 지금처럼 날 살갑게 대하지 않았는데···.
왜일까? 우리 집안이 잘 나가서? 내가 그룹을 물려받을 것 같아서?
이유가 뭐든 애니웨이 땡큐였다. 나에 대해 방심할수록 내 운신의 폭은 더 넓어지고 내가 준비할 시간은 더 많아지니까.
계산을 끝낸 나는 자신감을 100퍼센트로 끌어올려 얼굴에 비쳤다.
“네, 아저씨. 들어가시죠.”
“그래. 남자는 자신감이지. 이제야 명우 아들답구나, 하하.”
그 웃음, 얼마나 갈지 보겠습니다. 장. 인. 어. 른.
***
입구에 들어간 장호건은 출입구 쪽에 배치된 포장대를 보고 눈이 반짝거렸다.
“이건 왜 해놓은 거냐?”
“저희 매장은 창고형이 아니라 대형 슈퍼마켓 스타일로 매장을 구성했습니다.”
“슈퍼마켓?”
“네. 낱개 단위로 다양하게 장을 볼 수 있게 해둬서 고객들이 포장하기 편하라고 준비한 겁니다.”
“호오··· 입구부터 다르니 기대가 많이 되는구나, 하하. 그래, 어디 한 번 들어가 보자.”
두 부녀와 함께 매장에 들어간 나는 지하매장부터 두 사람을 안내했다. 할인점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식품/가정용품 코너부터 보고 싶다는 장호건의 주문 때문이었다.
장호건은 매장을 꼼꼼히 살펴보며 침음성을 흘리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SSK는 물류창고에 들어온 것 같았는데 여긴 진열이 깔끔하면서도 오밀조밀하구나. 묶음포장으로 된 물건을 진열했으니 가격 장벽도 낮을 테고 재고 회전율도 좋겠어.”
장호건, 윤리적인 건 몰라도 경영만큼은 귀신이 따로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매장을 짠 이유를 정확히 알아채다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양과 달리 신선식품 위주로 식단을 구성합니다. 때문에 장보는 주기가 빨라서 묶음포장 상품 위주로 가공식품을 진열했습니다, 아저씨.”
처음 맞았을 때와 달리 당당한 태도로 매장을 안내하자 장호건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다. 유통업은 점포 위치나 가격, 품질도 중요하지만 소비자 편의도 챙겨야지. 매대 간격도 제법 넉넉하니 얼굴 붉힐 일 없이 기분 좋게 쇼핑하겠어. 나중에 또 오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하.”
장호건은 일목요연하게 내가 의도한 바를 풀어냈다. 앞에는 절친의 아들이 있고 옆에는 가장 아끼는 딸이 있으니 자신의 식견을 뽐내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여긴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구나.”
“네, 아저씨. 사람들이 오고 싶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영원히 살아갈 기업을 만들고 싶어서겠지?”
“네. 영원히 사랑받으며 살아갈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장호건은 날 보며 잔잔한 미소를 품었다.
“사랑이라··· 낯 간지럽게 하면서도 좋은 말이지.”
그 뒤로도 장호건은 지하매장을 둘러보면서 중간에 있는 간식거리를 사먹어 보기도 하고 야채나 과일, 생선, 고기가 진열된 코너들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이거 한 근만 주시오.”
“네, 고객님!”
장호건은 직원이 입에 쓴 마스크부터 손에 낀 라텍스 장갑, 간장에 재운 소불고기를 포장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시오. 잘 먹으리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밝게 인사하는 직원을 뒤로 한 채 장호건은 포장된 불고기를 카트에 담았다.
“고기가 간장양념 속에 둥둥 떠있는 것 같지는 않구나. 때깔도 좋고, 직원들 서비스에 위생상태도 훌륭해. 가격을 더 받아도 되겠어.”
“먹는 거 파는 데에 청결, 정직, 친절은 필수죠, 하하.”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써 웃어보였지만 속이 서늘해졌다.
날카로운 양반, 직원들 복장부터 불고기 담는 봉지에 고기와 간장양념이 얼마나 담기는지 다 지켜보고 있었다. 고기 85, 양념 15로 맞추자고 하길 잘했다 싶었다.
지하를 모두 둘러본 뒤, 1층으로 올라온 우리는 1층에 있는 장난감 코너를 둘러봤다.
“엄마, 이거 사줘!”
“얘가 정말 왜 이러니? 저번에도 사줬잖니?”
“그거랑 다르단 말이야! 사줘!”
장호건은 장난감 코너에서 아들에게 바짓가랑이를 붙잡힌 젊은 여성을 보며 아빠미소를 띠었다.
두 모자 앞에는 몇몇 종류의 로봇들과 레고 블록들을 조립한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아이는 다른 손으로 커다란 레고 블록을 가리키며 여자를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장보러 나온 사람들이 곤란하겠구나.”
“소비는 여기도 시키니까요.”
“그렇지. 사람은 여기로만 소비하는 게 아니거든.”
빙긋 웃으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가볍게 툭툭 두드리는 나를 보며 장호건도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유통업을 잘 알고 있구나. 해동마트가 크게 생겼으니 약속한 대로 유통은 너희 둘한테 맡기마, 하하.”
장호건은 껄껄 웃던 웃음을 거두더니 매대에서 그 아이가 사달라고 떼쓰던 레고 블록을 하나 집어왔다.
“아저씨?”
“아저씨가 주는 선물이다. 계산대가··· 오, 계산대 숫자도 넉넉하구나.”
장호건은 카트에 장난감을 넣고 계산대에 가서 장난감부터 계산하게 하고는 나에게 장난감을 건네줬다.
“적당한 이유 대고 안겨줘. 이런 것도 경영이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조금은 얼떨떨했지만 선물을 받아들고 아이에게 달려갔다.
“꼬마야, 이거 갖고 싶다고 했지?”
“···네.”
울음을 그치고 눈만 깜빡거리는 아이와 달리 여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이런 거 안 주셔도 되시는데···.”
“아닙니다, 고객님. 저희 해동마트 장난감 코너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여주셔서 드리는 이벤트 선물입니다.”
“이벤트요?”
“네, 고객님. 앞으로도 저희 해동마트 많이 사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웃는 얼굴로 장난감 상자를 카트에 넣어주자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즐겁게 쇼핑하시길. 아! 주변 분들께 저희 마트 좋다고 소문 좀 내주시고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매장 바깥에서 기다리는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아니다. 네 덕분에 모처럼 우리 딸내미하고 데이트했으니 그 값이라 생각하면 싼 거지. 이만 가보마.”
“갈게, 성민아. 나중에 봐.”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벤츠 S클래스 리무진을 타고 휭하니 큰길로 사라져갔다.
'거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다니.'
장호건이 나에게 호의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성그룹을 속에서부터 파먹는 게 쉬워질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음흉한 미소를 띠며 마트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