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22nd. 기브 앤 테이크 (4)
휴게실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던 나와 박태진은 나창석이 보낸 팀원과 함께 회의실에 들어왔다.
“준비, 되셨습니까?”
“네, 이성민 사원. 앉아서 시작하죠.”
나창석의 입꼬리가 살짝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와 달리 팀원들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만족할 만한 토론이 될지 모르겠다.
자리에 앉자 유현정이 손을 들었다.
“유 과장, 시작해.”
“네, 팀장님.”
유현정은 숨을 고르고 침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성민 사원이 제시한 셔틀버스 운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유는요?”
“백화점이야 상품 가격과 객단가가 높으니 셔틀버스 운영비를 판관비로 빼도 충분한 이익이 보장됩니다. 하지만 할인점 마진율은 상품 가격과 객단가 당을 고려하면 많아야 10퍼센트 미만입니다. 그런데 인근 지역도 모자라서 일산까지 운행을 하면 그 이하로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타당한 지적이기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유현정을 향해 물었다.
“말씀 다하셨으면 답해드려도 될까요?”
“네.”
“분명히 백화점과 할인점은 상품 가격과 객단가에서 비교가 안 됩니다. 단위 면적당 매장에 진열되는 상품의 가격부터 적게는 열 배, 많게는 수백 배 이상 차이가 나니까요.”
준비된 물을 한 모금 축이고 설명을 이었다.
“뒤집어서 말하면 소비에 대한 고객들의 심리적 장벽이 백화점보다 할인점에 낮다는 겁니다. 박스가 아니라 낱개로 팔면 그 벽을 더 낮출 수 있고요. 회장님 지시사항 아시죠?”
“네··· 모든 상품을 낱개 단위로 판매하라는 지침이 내려오긴 했습니다.”
첫 대답이 흐릿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해외 할인점이나 SSK마트는 창고형 매장인데 우리는 덩치만 큰 슈퍼마켓을 만든 꼴이잖은가.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가보지 않은 길, 그것도 남들이 비웃을 길을 걸어가야 하니 얼마나 걱정되고 겁날까?
충분히 경험한 사람으로서 공감했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가 놓친 걸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낱개 단위가 꼭 한 개만 팔라는 법은 없습니다, 유현정 과장님.”
유현정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말씀이시죠?”
“라면, 맥주, 소주를 묶음포장으로 팔면 어떨까요? 그것도 바코드까지 새로 붙이면 새로운 낱개 단위일 텐데.”
“하지만 과자류라면 모를까 현재 국내 라면회사나 주류회사들 중 묶음포장으로 판매하는 곳은 없습니다, 이성민 사원.”
유현정의 지적은 타당했다.
할인점 매출을 견인하는 양대 가공식품인 라면과 주류.
아직까지 라면 네다섯 봉지, 맥주 여섯 캔 묶음으로 포장해서 판매하는 회사는 단 한 곳도 없으니 말이다.
우리 둘을 바라보던 나창석이 낮게 손을 들었다.
“그 문제, 해결될 수 있어. 아니, 해결될 거야. 유 과장.”
“팀장님?”
“다음 달부터 오성식품, 신농식품, 세양식품, 하이트맥주, 진로소주 등에서 새로 증설한 포장라인을 가동해 묶음상품을 출시할 거라고 합니다, 이성민 사원.”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지만 나는 새삼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예. 종금에 있는 동기가 알려줬는데 작년에 해동종금에서 제공한 할부금융으로 신형 포장 설비를 도입했다고 합니다. 이자를 깎아주면서까지 돈을 빌려줬다는데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럴 수밖에.
그 할부금융 계약 뒤에는 회사 수뇌부들 간의 이면계약이 있었다. 묶음포장으로 출고될 물량을 단품보다 더 저렴하게 해동마트가 필요한 만큼 우선납품 받는 것.
그 계약은 내후년까지 10여 개의 매장을 추가로 오픈할 해동마트가 기존 유통망과 제조업체들의 견제 속에서 안정적으로 물량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 모든 건 당연히 작년 초에 할아버지에게 준 기획서에 포함된 내용이었다. 해동종금이야 미국 인덱스 펀드로 환차익에 주가 상승 차익까지 톡톡히 볼 테니 할부금융으로 인한 기회손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전부 내가 짠 각본대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나는 영혼까지 끌어 모은 미소를 지었다.
“잘 됐네요. 그쪽하고 접촉해서 물량 확보하면 되겠어요. 우리 그룹은 현찰로 결제해주니까 가격 협상에서도 유리할 겁니다. 그리고.”
유현정이 제기한 문제점의 추가 보완책을 알려줬다.
“계산대 근처나 주차장 출입구, 매장 현관 쪽에 종이박스와 박스테이프, 노끈을 넉넉히 비치해두세요. 거기서 대량으로 포장하게 하면 객단가 문제는 해결될 것 같네요.”
나중에 가면 없는 게 이상하겠지만 팔레트째로 진열하는 창고형 매장만 있는 지금으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다. 유현정이나 다른 팀원들도 나지막이 탄성을 흘릴 정도이니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럼 다음 분 물어보시죠.”
나와 눈을 마주친 나창석이 손을 든 남자 팀원을 지목했다.
“푸드뱅크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성민 사원.”
“말씀하시죠.”
“신선도가 떨어지는 상품을 마감세일로 파는 건 품질관리, 자금회전 면에서 동의합니다. 그래도 마감세일에서 밀린 걸 푸드뱅크를 통해 기부만 하면 지출이 커질 겁니다.”
왜 안 나오나 싶었다. 아직까지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 아닌가?
“설마 기부만 하고 끝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죠?”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조금은 따지듯이 묻는 팀원의 목소리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당연히 매스컴으로 퍼뜨려야죠. 지금은 점포 숫자가 적어서 효과가 미미할 테니 나중에 규모가 커져서 우릴 공격하는 사람들이 나올 때 써먹어야 합니다. 소비는 머리만 시키는 게 아니라 가슴도 시키잖습니까?”
팀원은 내게 뭔가 말하려 했지만 내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은가? 인간의 소비는 합리와 비합리가 모두 뒤엉켜있으니.
앞으로 할인점 사업이 커질수록 재래시장 소상인들의 원성은 높아질 것이고, 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치인들은 우릴 두들겨 패려 들 것이다. 푸드뱅크는 그때 쓸 방패로 아껴둬야 한다.
“다음 질문 주시죠.”
“양념육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기 85에 양념 15, 그것도 생고기로···.”
이건 더 들을 가치도 없어서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장사의 기본은 신뢰와 정직입니다. 성수대교 건으로 그룹 이미지가 제고됐는데 고기장사로 물장사를 하자는 겁니까? 게다가 생고기가 아니면 맛이 간 고기로 만들자는 겁니까?”
전생에 기업인으로서 노조를 매수하고 뇌물을 나르는 등 온갖 더러운 짓을 했어도 먹는 걸로 장난치자는 놈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책상까지 내려치며 목소리를 높이자 깜짝 놀란 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성민 사원.”
“싼 물건을 파니까 조금이라도 아껴서 수익을 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말을 멈춘 뒤,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말했다.
“회장님께서는 늘 목전의 이익보다 더 멀리, 더 크게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해동의 얼굴이 된다는 걸 명심하세요.”
그 뒤로도 수 시간 동안 셔틀버스 운행비용 대비 수익성, 즉석 조리식품 판매, 최저가격보상제, 100퍼센트 교환 환불제, 유통기간 2분의 1 적용제 등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고 나 또한 내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서 맞받아쳤다.
“···사람들이 오고 싶은 매장을 만들면 돈은 자연히 벌게 됩니다. 당장의 손익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자신 있게 말하는 나와 달리 나창석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말했다.
“이성민 사원, 본인이 직접 차량 홍보를 나서는 건 좋습니다. 그래도 적자가 나면 사재로 메우겠다는 건 좀···.”
부담될 것이다. 실적이 부진하거나 적자가 나면 본인들의 잘못으로 돌아갈 일이 아닌가? 나는 고개를 젓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을 못 믿어서가 아닙니다. 식구들 걱정 줄이는 게 제 일이라서 약속드리는 겁니다. 제가 가진 현금, 아니 제 명의로 된 그룹 주식을 소각해서라도 적자를 메워드리죠.”
그럼에도 팀원들이 못 믿어하는 걸 보고는 나창석에게 말했다.
“대표님께 말씀드려주십시오, 팀장님. 지금 제가 한 말 그대로요.”
“이성민 사원?”
“허언이 아닙니다, 팀장님. 전 한다면 하는 놈입니다. 지금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창석은 고개를 숙인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나창석입니다, 대표님. 다름이 아니라 이성민 사원이···.”
몇 시간 동안 치고 박으며 토론한 내용을 보고하자 핸드폰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뭐랬나, 나 이사? 그 아이, 회장님 장손 맞지? 으하하.]
“그래도 이건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대표님. 잘못하면···.”
[걱정 말래도. 회장님께는 잘 말씀드릴 테니 돈을 메우든 주식을 태우든 알아서 책임지라고 해. 대신, 자네들도 그 아이 의견대로 충실히 실행해줘야 할 걸세.]
그때서야 나창석을 비롯한 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파란 오너 장손보다 수십 년째 회사에 버티고 있는 원로 대표이사의 허락이 더 믿음직하다는 건가? 계급이 깡패다, 젠장.
“알겠습니다, 대표님.”
나창석은 전화를 끊고 내게 말했다.
“이성민 사원, 방금 하신 말씀은 지켜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팀장님. 그 조항에 대한 각서부터 확실히 해두죠. 서류만큼 믿음직스러운 약속도 없으니까요.”
계약서를 꺼내서 내밀자 나창석을 비롯한 팀원들은 두 손 두 발 다 들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
이성민과 박태진이 퇴근한 뒤, 사무실에 남은 팀원들은 이성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놈이죠?”
“인간이 아니라 괴물 같습니다, 팀장님.”
팀원들은 혀를 내두르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통업에 잔뼈가 굵은 자신들보다 할인점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는 이성민의 답변과 반박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어때, 유 과장? 이성민 사원 피드백, 만족해?”
“네, 팀장님. 묶음포장이나 종이박스 재활용으로 객단가와 재고 회전을 높이면 셔틀버스 운행비용의 몇 배는 뽑아낼 겁니다.”
유현정은 처음과 달리 이성민의 제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앞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이 마트에서 카트를 밀며 온갖 물건을 담는 그림이 선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우리 유 과장, 박 차장한테만 관심 있는 줄 알았는데 일은 일대로 챙겼나 보군, 하하.”
나창석이 짓궂은 농담을 던지고 껄껄 웃자 유현정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티, 팀장님?”
“박 차장, 괜찮은 친구지. 여기 있을 때 잘 해봐. 팍팍 밀어줄 테니까, 흐흐.”
유현정은 고개를 푹 숙였고, 그녀를 바라보던 나창석이 웃음을 멈췄다.
“푸드뱅크와 연계한 마케팅은 어때?”
“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점포 숫자가 늘어나서 소상인들과 충돌할 때 오픈하면 좋을듯합니다.”
“좋아. 양념육은···.”
나창석은 말끝을 흐리면서 고개를 못 드는 다른 팀원을 보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말하지 말자고. 내가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어. 부회장님께서 작년 새해 벽두에 그 곤욕을 치르면서까지 회사 이미지 끌어올렸는데 우리가 말아먹을 수는 없잖아. 그렇지?”
나창석은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뒤로도 그들이 이성민에게 던진 질문과 이성민이 제시한 피드백에 대한 의견을 비교검증한 뒤, 이성민이 내놓은 각서를 들어보였다.
그 종이 오른쪽 끝 가운데에는 이성민의 인감 반쪽이 찍혀있었고 하단에는 나창석과 이성민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그놈은 기어이 이번일이 잘못되면 자기 돈으로 전부 메우겠다고 한 것이었다.
“보다시피 우리보다 어린놈이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했어. 게다가 우리하고 같이 현장 홍보까지 하겠다고 했고. 오너이고 부자라지만 이런 놈은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거야. 우리도 지면 안 되겠지?”
“네, 팀장님!”
나창석의 질문에 팀원들이 크게 대답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라도 일도 함께 하고, 잘못될 경우에 대한 책임까지 다 짊어지겠다는데 태업을 한다면 자존심이 용납되질 않았다. 다들 백화점사업부에서 추리고 추려낸 인재들이 아닌가?
“우리는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으니 죽지 않을 만큼만 열심히, 잘 해보자고. 이상.”
***
잠시 태엽을 뒤로 감아서.
삼청동에 있던 이대수는 태재호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뭐라? 사재를 털겠다고?”
[예, 형님. 이번에 자기가 제시한 대로 해서 장사가 망하면 손실분을 전부 메워주겠다고 했습니다, 흐흐.]
태재호는 신나 죽겠다는 듯이 방금 전 받은 전화 내용을 이대수에게 들려줬고, 이대수는 나지막이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 아주 자신만만하구먼. 주식까지 태워버리겠다고 약속했을 정도면 말이야.”
[그래도 작년부터 꾸며온 그림을 생각하면 치밀하기도 합니다, 하하.]
“치밀하다기보다는 교활하다고 해야겠지. 내 장손이지만 정말 징글징글할 정도야, 흐흐.”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사전작업을 다 마쳐놓고는 마지막 결정타를 자신이 날린다. 그것도 그 일이 실패하면 마치 죽기라도 할 것처럼 비장한 모습까지 연출한다.
이보다 더 치밀하고 교활하게 구성원들의 믿음을 이끌어내는 방법도 없기에 이대수는 매우 흡족했다. 엑스트라부터 조연, 주연, 관객, 감독, 제작자의 관점을 모두 아울러서 흥행작을 만들고 있는 1급 제작자가 자신의 장손이 아닌가?
[영찬이도 성민이 덕분에 종금이 쑥쑥 크고 있으니 할부금융 건으로 본 손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겁니다. 성민이 고 녀석, 보면 볼수록 대단합니다, 하하.]
“너무 추켜세워 줄 필요 없네. 아직도 갈 길이 먼 놈이야. 자네가 옆에서 잘 지켜보고 필요한 말 있으면 툭툭 던져줘, 으허허.”
말은 무심하게 했어도 손주가 보여주는 기깔난 재롱에 이대수는 웃음을 그치질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