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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73화 (72/229)

73화. 22nd. 기브 앤 테이크 (3)

며칠 뒤.

“헨리 집에 감금당했다며? 고생했어, 흐흐.”

“헨리, 대단한 분이더군요. 배우려고 하는 의지가··· 하하.”

트라이엄프 캐피털 대표이사실 소파에 앉은 나는 선해철과 마주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서 헨리가 멋진 사람이지. 그만한 부를 지키고 불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말이야.”

“그런 것 같아요. 구찌 미팅 때문에 헨리 펜트하우스에 갔는데···.”

커피를 마시며 미국에서 있던 일들, 그 중에서도 공성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니 선해철의 눈이 커졌다.

“미행?”

“네, 황나연, 장수연 모녀 둘이서 제 다리를 붙잡고 넘어지려고 했는데 덕분에 첩자 하나 심어두게 됐어요. 잘됐죠, 뭐.”

심드렁하게 대꾸한 나를 보고 선해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게 됐네. 공성필인지 뭔지는 구워삶아놨어도 계속 따라붙으면 골 아파질 텐데.”

“그래서 말인데 새해부터는 한국에서 스탠더드 일을 봤으면 좋겠어요.”

선해철은 내 말을 듣고 눈을 껌뻑거렸다.

“한국에 법인 세우겠다고?”

“네. 할아버지도 그렇고, 누나도 그렇고 다들 걱정하는 게 걸려서요. 효율성도 떨어지고요.”

지금까지는 외인부대의 신뢰를 얻기 위해 직접 나서왔지만 신뢰관계도, 회사 기반도 굳건해진 마당에 불필요한 수고를 할 이유가 없다. 이제는 메인 스테이지에 올라야 한다.

선해철이 턱을 매만지던 손을 팔걸이에 내려놨다.

“킹이 체스판에서 말 잡고 다니는 건 그만해야지. 그리고 네 체스판은 여기잖냐? 흐흐.”

역시나였다. 선해철도 내가 싸워야 할 체스판이 이 대한민국이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선해철은 고개를 끄덕이는 날 보고는 내 옆에 있던 박태진에게 물었다.

“태진이 네 생각은 어때? 주주로서 물어보는 거다.”

“동의합니다, 형님. 그룹 내부나 한국에서의 도련님 입지를 다지려면 그 편이 좋다고 봅니다.”

선해철은 흡족한 표정을 띠고 펑 소리가 나게 손뼉을 부딪쳤다.

“오케이. 한국법인은 새해벽두에 열기로 하고··· 그때까지 국내용 이력 만들 준비 잘 해둬. 대한이동통신 투자에 백화점 컨설팅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물론입니다, 삼촌.”

해동마트 은평점 개점까지 보란 듯이 해내면 스탠더드 캐피털 코리아에 입사할 이력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

며칠 뒤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친 나와 박태진은 지하차고로 통하는 문 앞에서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야 국내 리그에 데뷔하시는군요.”

“그러게요. 시간 한 번 화살처럼 지나갔어요.”

며칠 동안 나는 할아버지에게 제출했던 보고서에 올리지 않은 내용을 토대로 해동마트 운영 전략 기획안을 만들었다. 만들고 나서 박태진과 검토를 마친 어제 오후에야 할아버지와 태재호에게 전화를 넣고 출근하게 됐다.

“그룹 상황은 어때요?”

“부회장님께는 중공업 계열사들마다 현금을 쌓아두고 계십니다. 부채비율도 줄어들고 있어서 이 추세대로면 내년 말까지 100퍼센트 밑으로 떨어질 겁니다.”

이명진은 이제 해동그룹 부회장이 되었다. 명패만 부회장인 게 아니라 중공업 계열사 4개를 총괄하는 지휘자로서 네 곳의 담장을 더 높게, 더 두껍게, 더 단단하게 고치고 있었다.

“물산하고 종금은··· 걱정 없겠네요, 후후.”

해동물산은 현재 22억 불 중 8억 불은 직접투자로, 14억 불은 해동종금 CMA를 거쳐서 트라이엄프 캐피털 등의 외국 투자회사들이 운용하는 미국 S&P 500 인덱스 펀드에 투자했다.

그것도 부족해서 해동종금은 예치된 CMA 자금의 최대치까지 인덱스 펀드에 넣고 있다. 때가 되면 투자수익에 환차익까지 쏠쏠하게 볼 것이다.

거울을 보며 목에 찬 넥타이의 윈저노트 매듭을 매만진 나는 박태진과 함께 지하차고로 내려갔다. 늘 그랬듯 우리는 아도자동차의 푸조 604를 타고 집을 나섰다.

30여 분에 걸쳐서 차를 타고 간 우리는 해동마트 은평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젠 우리 그룹 거다.’

저 매장은 해동물산이 채권단에 넘어갔을 때 장호경이 가져간 건물이었다. 하지만 내가 죽음의 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이제는 우리 그룹 간판을 달고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박태진은 주먹을 불끈 쥔 나를 백미러로 보고 미소를 띠었다.

“도련님 계획대로 된 걸 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맘에 들어요. 아주 많이요.”

입꼬리가 찢어질 것 같았다. SSK마트였다면 모퉁이가 삼각꼴로 된 저 블록만 깔고 앉은 걸로 시작했을 텐데 옆에 있는 블록까지 길어진 해동마트를 보니 일할 맛이 팍팍 났다.

“보시다시피 도련님 말씀대로 지상 4층까지만 지었습니다. 1층 높이는 해외 할인점처럼 맞췄고요.”

“증축도 가능하죠?”

“물론입니다. 원래는 백화점을 세우려고 지하 2층부터 7층까지 주차장으로 만들어둬서 어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상 9층까지 증축할 수 있으니 상권이 커지면 도련님 생각대로 층수를 늘릴 수 있습니다.”

당장이야 과대투자라고 하겠지만 한두 해 하고 접을 장사도 아닌지라 작년 초에 제출했던 보고서에도 향후 출점할 매장의 증축 가능성 확보에 힘을 줬다.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 덕이지, 흐흐.’

‘재계의 기인’이라는 별명 덕분인지 국내 할인점 선두주자인 신세기그룹은 해동마트 은평점을 비웃었고, 할인점 사업을 준비하는 다른 그룹들도 할아버지가 미쳤다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아무도 해동마트 은평점의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고, 해동건설도 조용히 자금을 비축할 수 있었다.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리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간 우리는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어가 볼까요?”

“그러시죠.”

문 앞에서 숨을 고른 나는 가볍게 노크를 하고 사무실에 들러 내부를 둘러봤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이미 입점 계약이 완료돼서 더 이상 남는 공간이 없습니다. 예, 장사 열심히 해서 건물 더 올리면 그때 꼭 모시겠습니다, 예.”

“벽면에 놓을 냉장 진열대, 잘 되고 있죠? 감사합니다, 사장님. 다음 점포요? 그거야 윗분들께서 결정하시는 거죠. 예, 예. 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예.”

“아, 조 과장? 마장동 간 거 어떻게 됐어? 그거 가지고 되겠어? 소고기만 1톤에 돼지고기가 5톤이야. 거기에 육계는···.”

나와 박태진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분주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심장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신입사원 같군요, 도련님.”

“우리 회사 사람들하고 처음 일하잖아요.”

들뜬 내 기분을 알아챈 박태진을 보며 빙긋 미소를 띤 나는 다시 한 번 노크를 했다. 똑똑 소리가 울려 퍼지자 직원들이 우리 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시죠?”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전생에 부속실로 귀양 가기 전에 회사 식구들과 울고 웃던 그 시절의 기분으로 신입사원 흉내를 내며 90도 인사를 하자 직원들이 수군거렸다.

“이성민?”

“누구야? 신입사원이야?”

“본사 인사팀 미친 거 아냐? 지금 일도 바쁜데 신입을 보내면 어떡해?”

나를 신입사원으로 알고 투덜거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걸 보니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 태재호, 깜짝쇼마냥 오늘부터 알려주려는 건가?

쿵!

“이런!”

문에 엉덩이가 부딪치면서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지려는 찰나, 박태진이 잽싸게 자신의 팔로 내 가슴팍을 받쳐줬다.

“괜찮으십니까?”

“고마워요.”

십년감수했다. 쪽팔리는 건 둘째 치고 그대로 고꾸라졌으면 바닥과 키스할 뻔했다.

“누구 다쳤어요?”

웬 젊은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나와 박태진을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혹시, 부딪치셨어요?”

“아··· 괜찮습니다. 크게 안 다쳤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오늘 회장님 손자 분 오신다고 준비하느라 그만···.”

말끝을 흐리는 그녀를 보니 두 팔로에 서류뭉치를 껴안고 있었다.

“무슨 서류인가요?”

“새로 오픈할 매장 때문에 준비한 기획안이에요. 대표님께서 준비하라고 하셔서 정리했어요.”

“기획안이면 누가 만든 건가요?”

“제가 만들었어요. 그런데··· 누구시죠?”

밝은 미소를 띤 그녀의 얼굴에는 뿌듯하면서도 부끄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할인점사업팀 팀장님, 어디 계시죠? 드릴 말씀이 있는데.”

“본사 회의에 참석하셨는데 금방 오실 거예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40대 남자가 들어왔다.

“이 분이 팀장님이세요. 팀장님, 여기 있는 분들이 팀장님 뵈러 왔다고 합니다.”

“누구십니까?”

내 얼굴을 모를 만했다. 작년 뉴스를 끝으로 한 번도 내 얼굴이 안 나왔을 테니 정식으로 소개해야겠다.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회장님 지시로 오늘부터 해동마트 은평점 개점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식으로 소개를 하자 팀장과 그 여자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얼어붙었다.

***

회의실에 들어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해동물산 사원 이성민입니다. 모두들 힘내서 대박내길 바랍니다.”

“네···.”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한 내 귀에 어색한 대답이 들렸다. 이런 분위기 안 좋은데···.

몸을 반듯하게 세운 뒤, 팀원들을 보며 말했다.

“앞으로는 저를 이성민 사원으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아직은 사원이니 친구처럼, 동생처럼 편히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자 나창석이 황급히 일어났다.

“그러시면 저희가 불편합니다,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회장님 장손이고 돌아가신 큰 사장님 하나뿐인 아드님이신데 어떻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팀장님.”

나창석의 말을 끊으며 거절한 나는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삼국시대도, 고려시대도, 조선시대도 아닙니다. 오너 집안의 사람이라도 직급으로, 능력으로 대접받아야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후광을 쓰는 건 나중이다. 경제개발이 한창인 시기였다고 해도 능력으로, 실력으로, 품행으로 정점에 오른 두 분의 이름을 더럽힐 수도 없지만 내 실력을, 진정성을 보여주고 나면 더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흔들림 없는 태도에 팀원들 모두 나창석의 눈치를 봤다. 잠시 말이 없던 나창석이 자신의 얼굴에서 망설임을 지웠다.

“알겠습니다, 이성민 사원.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뒤로 나창석을 비롯한 팀원들이 차례차례 자신을 소개했다.

“해동물산 할인점사업부 유현정 과장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지막을 장식한 건 방금 전 그 여자였다. 눈도 못 마주치고 자기소개만 하고 얼른 자리에 앉았는데··· 박태진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뭐지?

“개점 전략 발표는 유현정 과장이 하겠습니다. 시작해.”

“네, 팀장님.”

나창석의 지시에 유현정은 미리 준비해 온 기획안 자료들을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다들 손을 가만히 두고 있었지만 신사다운 맛이 있는 박태진답게 손을 뻗어 기획서를 받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손이 닿아버렸다.

“어머··· 죄송합니다, 차장님.”

“미안합니다, 유 과장님.”

두 사람이 눈도 못 마주치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자 테이블 앞에 앉은 사람들이 야릇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던 팀장이 가볍게 테이블을 두들겼다.

“자자, 집중. 유 과장, 얼른 나눠주고 브리핑 시작해.”

“네, 팀장님.”

유현정은 황급히 나머지 서류들을 나눠주고 화이트보드 앞으로 가서 지도를 떼어냈다. 조신하게 목청을 가다듬은 그녀는 눈빛을 바로잡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은평점 경영 전략에 대한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할인점의 본질은 목 좋은 곳에서 싼 값에 좋은 물건을 많이 파는 것입니다.”

방금 전과 달리 유현정은 똑 부러지고 당당한 표정과 목소리로 사람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할인점 사업, 아니 유통산업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있다는 것과 좋다는 것 또한 알려야 합니다. 2쪽을 봐주십시오.”

그녀의 말에 따라 다음 페이지를 넘겨본 나는 깜짝 놀랐다.

“TV나 신문 등의 대중매체 광고도 중요하지만 시내버스나 전세버스를 활용한 대면 홍보도 챙겨야 합니다. 전세버스는 모든 면에 해동마트 로고를 크게 붙여서 운행하고, 아파트 단지나 주택가에서 정차한 뒤 자사 로고가 새겨진 수건이나 할인권 등을 배포하며···.”

유현정의 발표는 내가 준비한 기획서의 홍보 전략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무엇보다 아직은 국내에서 생소한 ATL과 BTL이라는 단어만 안 썼지 개념과 방법도 거의 정확했다. 나와 박태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유현정이 흠칫했지만 다시 차분하게 발표를 이어갔다.

“···앞으로 해동마트가 가장 먼저 사람들이 찾는 할인점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유현정은 마무리 멘트까지 멋지게 하고 자리에 앉았다. 선물을 받았으니 답례품을 주는 게 도리겠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저도 준비해 온 게 있는데 보여드려도 될지 모르겠네요.”

“예?”

“여러분들이 차릴 잔칫상에 숟가락만 얹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차리는 것도, 즐기는 것도 함께 해야죠.”

예전이라면 즐기는 건 독차지했겠지만 이번 생에는 바이바이다. 앞으로는 내 사람들과 차릴 잔칫상을 맘껏 즐기고 싶었다. 나는 박태진을 불렀다.

“박 차장님.”

“네, 이성민 사원.”

박태진도 오늘부터 사내에서는 나를 이성민 사원으로 부르기로 했다. 짤막하게 대답한 박태진이 옆에 뒀던 가방을 책상 위에 올리고 딸깍 소리와 함께 가방을 열었다.

“메모도 좋고 질문도 좋으니 기탄없이 평가해주세요. 휴게실에 있을 테니 1시간 뒤에 보죠.”

나는 가방에서 꺼낸 서류를 나눠준 뒤 박태진과 함께 회의실을 나갔다. 옛날처럼 회사 식구들과 일로 치고받을 생각에 손끝이 짜릿해졌다.

***

이성민과 박태진이 나가자 나창석이 핸드폰을 빼들었다.

“나창석입니다, 대표님. 방금 전에···.”

회의실에서 이성민이 보여준 기행들을 보고하자 태재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으하하하! 역시 회장님 장손답구먼. 그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 전에도 말했지만 손속에 자비를 두지 말게. 원하는 만큼 물어뜯고 열심히 부려먹어 봐, 흐흐.]

나창석은 믿을 수가 없었다. 오너가 가장 아끼는 장손을 물어뜯고 부려먹으라니?

“대표님?”

[나 이사. 회장님 핏줄들은 다른 마바리 놈들하고 달라. 머리도 좋지만 자존심은 더 세거든. 여한 없이 치고 박아봐, 허허.]

잠시 고민하던 나창석이 눈빛을 바로잡았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수고하게.]

통화를 마친 나창석이 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또 한 번 구경해볼까? 얼마나 대단한지.”

이성민-장하연의 컨설팅 덕분에 해동백화점 본점 매출은 국내 모든 백화점 점포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진입했고 순이익은 국내 최고를 찍었다. 비록 두 사람의 얼굴은 못 봤지만 그들의 컨설팅에 맞춰 실무를 지휘했던 나창석이기에 이번에도 그 실력이 나올지 궁금했다.

“그래도 백화점하고 할인점은 다릅니다, 차장님. 백화점 컨설팅이야 본인이 많이 써본 물건을 다루기도 했고 장하연 씨 도움이 있었잖습니까?”

“오, 유 과장. 모처럼 만에 칼 빼드는 건가?”

나창석의 눈웃음에도 유현정은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화점이야 상품 가격이나 객단가가 높으니 셔틀버스 운행 효과가 큽니다. 하지만 할인점은 비싸봐야 만 원 단위가 대부분입니다. 여기에 일산까지 운행범위를 넓히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유현정이 포문을 열자 옆에 있던 남직원도 입을 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푸드뱅크는 지나친 낭비라고 봅니다. 우리가 자선단체는 아니잖습니까?”

“품질 보증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불이나 교환 요청을 받아주는 건 좀···.”

그 뒤로도 신랄하게 쏟아지는 비판들은 한 단어로 압축됐다.

돈. 지. 랄.

해동마트 또한 국내 할인점 선두주자인 신세기그룹의 SSK마트처럼 지하와 지상 1층을 창고형처럼 크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벽면에는 냉장 진열대, 가운데에는 크기만 키운 슈퍼마켓 매대를 놨다. 여기에 결제는 박스단위가 아닌 낱개 단위로 해야 했다.

이 모든 게 ‘회장님 지시사항’이기에 어쩔 수 없이 따랐지만 아무도 시도한 적이 없는 시스템인지라 팀원들은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 마당에 회장님 장손이란 놈은 돈을 더 쓰자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비판이 쏟아지면서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나창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가서 두 사람 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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