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22nd. 기브 앤 테이크 (2)
세 회사에 얽힌 일을 처리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나는 클레어의 집무실 옆에 있는 조그만 방에 출근했다. 출장 전에도 그랬지만 이제는 해동종금에서 파견된 인원들 때문에 더 조심해야 했다.
그 방에서 나는 영화 투자를 비롯한 회사의 모든 안건들을 검토하고 클레어나 간부들과 함께 결정했다. 그리고 오늘은 옆에 있는 대회의실에서 파라마운트 픽처스 담당자들과 투자 계약을 체결한 뒤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미스 로렌스. 정말로 큰 결정하셨습니다.”
“톰 크루즈가 나오는 영화라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죠. 제작에도 참여한다죠?”
“네. 첩보 액션 영화는 처음이라고 열의를 보였습니다. 충분히 기대하셔도 좋으실 겁니다, 하하.”
우리가 계약한 영화는 ‘미션 임파서블’.
한국 배급권은 물론이고 속편이 제작되면 제작비의 최대 50퍼센트까지 우리가 투자할 수 있는 권리까지 챙겼으니 든든한 캐시카우가 생긴 것이다.
앞으로도 시리즈물이 나올 영화들은 쌔고 쌨다. 엑스맨, 해리포터, 스파이더맨, 분노의 질주, 캐리비안의 해적,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리부트, 토이스토리, 슈퍼 배드, 데드풀··· 전부 우리 집안의 국내 재산 상속문제 해결에 보탬이 될 투자 건들이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 나를 보고 껄껄 웃던 담당자가 물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더 록’에도 투자했다는데 사실입니까?”
“네. 3천만 달러 투자했습니다.”
담담한 내 대답에 담당자의 눈이 커졌다.
“사, 삼천만 달러요?”
“니콜라스 케이지와 숀 코너리 투 톱이면 충분한 흥행보증수표니까요. 그쪽과의 계약도 동일한 조건입니다.”
지금 내민 계약서는 앞으로의 표준 계약서였다. 취사선택만큼 남들의 이목을 지나치게 받는 게 없으니 말이다.
담당자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대단하십니다. 지금껏 투자하신 것처럼 모험을 즐기시는 군요, 하하.”
“보물을 찾는 모험이니까요.”
혀를 내두르는 담당자를 보며 웃은 나와 클레어는 10여 분 가량 이야기를 이어간 뒤, 그들을 배웅해줬다. 두 영화가 내년 여름에 흥행하면 투자금이 그 배로 되돌아올 테니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휴우, 오늘 일정도 다 끝났는데 백화점이나 가볼까?”
“그럴까요? 톰이 해준 말도 있으니 가봐야겠네요.”
[조니의 삶이 앞으로 좀 더 풍요로워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말인데···.]
리셉션 때 날린 윙크로 날 닭살 돋게 만든 것과 별개로 톰 포드는 백화점 쇼핑을 진지하게 권했다.
‘물건을 사지 않고 봐두기만 해도 안목이 좋아진다니까···.’
그래서 요즘의 내겐 이따금씩 백화점을 산책하는 게 익숙했다. 클레어와 함께 사무실을 나가서 차에 올라탄 나는 가방에 챙겨 온 서류를 꺼내봤다.
“우리가 15.1퍼센트면 합이 30.2퍼센트네요.”
“그러겠지? 우리가 매입하는 만큼 트라이엄프도 매입하고 있으니까.”
클레어의 대답을 듣고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8월 중순인데도 30퍼센트를 돌파했다면 내년 6월 중에 노스 리미티드 주식을 전부 모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거. UN 개발원조 사업 내역이야.”
“고마워요, 클레어.”
클레어에게서 서류를 받은 나는 문서를 쓱쓱 훑어봤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파나마 구리광산···.’
리스트에 있는 걸 확인한 나는 서류를 가방에 넣고 클레어와 함께 패션 트렌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30여 분쯤 지나서 차가 멈춰 섰고, 나와 클레어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박태진과 함께 매장을 둘러봤다.
“공성필, 미행 안 붙이죠?”
박태진은 지금 나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공성필이 뒤통수를 칠까봐 어쩔 수 없이 내 소울메이트와 떨어져 있어야 했다. 망할.
“예, 도련님. 미행은 없습니다.”
벌써 몇 개월째 미행이 없는 걸 보니 바짝 쫀 모양이다. 하긴, 나한테 조금씩 그룹 내부 상황을 팔아먹으면서 받아 챙긴 돈만 수백만 달러이니 오죽하겠냐마는 방심은 금물이다.
우리는 매장을 둘러보던 중 가정용품 코너에 갔다. 쓸 만 한 아이템이 있다면 해동물산 뉴욕법인에 알려주고 백화점사업부에 토스해주기 위해서였다.
부자들에게 팔아먹을 최고급 식기류를 보던 나는 눈에 띄는 중저가 식기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런 건 할인점에서나 팔 법한 물건인데···.
그 순간,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형, 오늘 며칠이죠?”
“8월 1일입니다. 한국 기준으로는 2일이고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내심 궁금해졌다. 백화점 컨설팅도 성공했으니 할아버지가 그 연장선까지 그려보라고 연락할 만도 할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내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존 데이비슨···.”
[할애비다. 더운데 바깥에서 고생이 크구나.]
며칠 만에 듣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미소가 그려졌다.
늘 뉴욕 시각으로 저녁 7시에 전화를 하시는데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이런 할아버지, 세상에 둘도 없을 것이다.
“아닙니다, 할아버지. 다 저하고 집안 잘 되자고 하는 일인 걸요.”
[우리 장손이 열심히 갈고 닦고 있으니 할애비가 든든하구나. 헌데··· 이 할애비가 너한테 줄 숙제가 있어요, 허허.]
잠시간의 대화 끝에 전화를 끊은 나는 클레어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숙제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야 해요. 괜찮죠?”
미국에서의 굵직굵직한 일들은 거즌 정리했어도 내심 걱정돼서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클레어는 싱긋 미소를 띠었다.
“걱정 마, 조니. 너 없는 사이에 계획대로 잘 해놓을 테니까. 잘 다녀와, 후훗.”
클레어의 미소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미국 일은 클레어에게 맡겨두고 난 할아버지가 낸 숙제를 해결하면서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문제까지 해결해야겠다.
***
한국에 돌아온 나는 이태원 집에서 하루 정도 몸을 추스른 뒤, 박태진과 함께 삼청동으로 들어가서 큰절을 올렸다.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
“더운데 들어오느라 욕 봤다. 앉아서 한 모금 들거라.”
모시적삼을 입은 할아버지는 손에 쥐고 부치던 합죽선을 접어서 소파를 가리켰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서 미숫가루를 마셨다.
“할애비한테 줄 선물이 있다고?”
“네, 할아버지.”
나는 소파 옆에 뒀던 가방을 열어서 그 안에 있던 서류뭉치를 할아버지 책상에 올려놨다.
“이놈아, 뭘 이리 준비해 온 게야?”
“할리우드 영화 배급권 계약서, 그리고 노스 리미티드 지분 매입 현황 자료입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흡족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우리가 보라는 듯 영화 배급권 계약서를 손에 들었다.
“충무로 놈들, 이 영화들 보고 제대로 자극 받겠구나, 으허허.”
대를 잇는 취미생활 겸 사업이 번창할 게 그려졌는지 할아버지는 웃음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겁니다, 할아버지. 나중에는 제작 쪽에도 나서서 할리우드처럼 체계적으로 분업화하면 좋은 영화들을 많이 만들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알았다. 고 실장 편으로 배 대표, 태 대표한테 넘기마.”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고 미숫가루를 마시던 할아버지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발을 내려놨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태평양을 왔다 갔다 할 게냐?”
“네?”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지만 할아버지의 얼굴에서는 어느 새 웃음이 사라졌다.
“김동석이한테 얘기 들었다. 공성필인지 뭔지 하는 놈이 네 뒤를 캤다고?”
이런 젠장. 조용히 매듭 지으려고 했건만!
김동석 그 양반, 내가 할아버지 손자라는 것 때문에 제 풀에 못 이겨 실토한 모양이다. 순식간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내게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서운해 하지 말거라. 네놈이 사원 직급을 달고 있어도 내 새끼인데 그 친구 딴에는 얼마나 걱정됐겠느냐. 그 친구가 배 대표, 고 실장한테 죽여 달라고 몇 번을 말했어.”
할아버지 말을 듣고 보니 법인장도 어지간히 불안했나보다. 회사 오너의 장손이 다른 그룹에 미행당했으니 오죽했을까?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죄송할 거 없다. 앞으로도 어지간한 건 네 스스로 부딪쳐봐. 큰 사람이 되려면 뭐든 쓸모없는 게 없으니 많이 부딪치고 더 단단해져야 할 게야.”
할아버지다운 당부였다. 두들겨 맞는 만큼 맷집도 늘고 허파가 찢어지도록 뛰어봐야 폐활량도 늘어나지 않나.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삼청동 서재를 지키려면 마땅히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오냐. 이 집안사람이면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할아버지는 허허 웃고는 내가 준 서류들을 서랍에 넣고 다른 서류를 꺼냈다.
“지나간 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앞날을 위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받아라.”
소파에서 일어난 나는 할아버지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표지에는 ‘해동마트 은평점 개점 계획’이 담겨 있었다.
“네 녀석이 작년 초에 제출한 숙제를 검토하고 태 대표에게 건네준 거다. 네가 권한 대로 할인점 사업팀에서 준비하고 있으니 빼먹은 거 있으면 마저 채워봐.”
예상대로였다. 작년 초부터 준비해왔던 해동마트 은평점이 이제야 문을 열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열심히, 잘 하겠습니다.”
“태 대표한테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말고 내돌리라고 했어. 정신 바짝 차리고 해야 할 게야, 으허허.”
그런 말씀 안 하셔도 열심히 할 거예요, 할아버지. 이번 일 잘해서 여권에 도장 찍는 횟수 줄일 거니까요.
***
그 길로 나와 박태진은 삼청동을 나와서 해동물산 물류유통부문의 본사가 있는 영등포 본점 신관으로 갔다.
“대표님, 박태진 차장, 이성민 사원 들어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네, 대표님. 들어가시죠.”
집무실 앞의 인터폰에서 나온 목소리를 듣고 방으로 들어간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아있던 태재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어서오너라. 어여 앉아.”
태재호는 손을 뻗어 소파를 가리켜 자리를 권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냉장고에서 옅은 녹색의 물이 채워진 통을 꺼내 유리컵 세 개에 채운 뒤, 쟁반에 직접 얹어서 가져왔다.
“회장님 다원에서 올라온 녹차 우려둔 건데 향도 좋고 시원한 게 일품이다. 들자.”
“감사합니다, 대표님.”
태재호는 냉녹차를 시원하게 들이킨 뒤, 운을 뗐다.
“미국서 일하랴, 여기서 일하랴··· 바쁘겠구나.”
“아닙니다, 대표님. 좋아서 하는 일인 걸요.”
“젊어서 그런지 씩씩하구나. 네 아버지도 힘든 내색 한 번 안 하고 열심히 일했지. 성과도 좋았고.”
이를 시작으로 태재호는 아버지와 이명진, 고승주, 선해철, 박태진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다.
“···너희들이 간 그 집, 사장 내외가 전라도 사람들이라 그런지 음식이 참 정갈해. 김치도 깔끔하고, 그 김치 넣은 찌개도 개운하지. 회장님하고 형님, 나, 조 대표가 말이다···.”
예전에 셋이서 갔던 그 백반집이 할아버지와 세 원로 대표이사들의 단골식당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돈이든, 지위든 남 부럽지 않을 양반들이 지금도 가끔씩 양철 테이블 앞에 앉아서 백반을 안주삼아 소주를 기울인다니.
한참동안 그 백반집에 대한 예찬론을 설파하던 태재호가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이거, 나이를 먹으면 혓바닥이 길어져서 문제란 말이지.”
“아닙니다, 대표님. 즐거운 얘기였습니다.”
“그리 생각해주면 고맙고, 허허.”
태재호는 유리컵에 남은 녹차를 한 모금 축이고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 들었다. 해동마트에 합류하게 됐다고?”
“네.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애들, 네 녀석이 해동마트 뼈대 잡은 건 모르고 있다. 전부 다 회장님 지시사항이라고만 해뒀거든, 흐흐.”
낄낄 웃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서류철 하나를 가져왔다.
“그게 뭔가요?”
“할인점사업팀 구성원 명단이다. 경력사항이나 인사고과도 적혀있으니 봐둬.”
좋은 팁이었다. 팀원들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으니 말이다. 명단을 펼친 나는 첫 장에 있는 사람의 이력을 보자마자 호기심이 발동됐다.
“나창석 팀장, 특이한데요?”
나창석은 입사 당시 상고 졸업생이었다. 그 시절의 상고가 상과대학에 준한다지만 입사 뒤에 회사에서 학비를 대줘서 야간학부를 졸업했고, 마흔한 살에 이사 명패까지 받았다니.
“백화점 경리부에 입사했는데 숫자에 매몰된 친구가 아니다. 자기 일도 잘하지만 구매부나 영업부 모두 그 친구 말 듣고 득 본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의외네요.”
보통의 샐러리맨들은 회사라는 무대에 들어와서 떠날 때까지 자신의 역할에만 매몰되는 엑스트라가 되기 일쑤다.
하지만 그 엑스트라가 카메라맨, 각본가, 연출가, 그리고 배우의 관점에서 생각해고 연기할 때부터 조연, 주연급 조연으로 올라가고 주연까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창석은 대졸 공채보다 주연이 될 가능성을 보인 사람이었다.
태재호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시 명단을 살펴봤다.
나창석도 나창석이지만 다른 팀원들도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해동백화점 본점 신관 개장 때 해외 명품 브랜드들과의 입점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실무진들이니 말이다. 그런데··· 눈에 띄는 사람이 또 있었다.
“유현정 과장, 어떤 사람인가요? 입사 5년 차에 과장이라니···.”
평범한 대학 출신인데도 5년 만에 과장을 달 정도면 얼마나 능력이 좋나 싶어 물어본 내게 태재호가 그 이유를 알려줬다.
“그 친구, 대학 때 휴학하고 2년간 우리 백화점 본점에서 캐셔로 근무했었다. 입사지원서 넣을 때 본인이 근무하면서 정리한 개선사항을 같이 보냈어. 면접 때도 똑 부러졌고.”
“아···.”
나지막하게나마 탄성이 절로 나왔다. 10여 년이 훨씬 지나야 나올 입사지원 방법인데 벌써 써먹은 사람이 있었다니. 가방끈만 길게 늘여 뺀 헛똑똑이들보다 훨씬 나았다.
“대단하네요. 일처리 솜씨는 어떤가요?”
“좋지. 대인관계 좋고, 서비스 교육도 잘 시키고, 물류센터에서 본인이 직접 지게차 몰고 물건 찾을 정도야. 명절 시즌 선물세트 판촉 지도나 업무 분장(分掌)도 잘했고.”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본인의 지식과 행동력도, 그 지식과 행동력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고 사람들을 쓸 줄 아니 충분한 인재였다.
“그랬군요.”
“그 친구 뽑고부터 대졸 채용 시스템이 바뀌었어. 출신학교도 전부 가리고 일을 잘 배우고 잘 해낼 만한 친구인지만 보게 됐다, 하하.”
내게는 새롭게 다가오는 이야기였다. 할아버지와 틀어진 전생에는 신성그룹에만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해동그룹에 이런 앞선 시스템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지난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에 입술을 살짝 깨문 내게 태재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힘들 것 같냐?”
“조금요. 나중에 회사 물려받으면 어떻게 이끌어야할지 걱정되네요, 하하.”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던 태재호는 겸연쩍은 미소를 띤 내 얼굴을 보며 껄껄 웃었다.
“원 녀석도. 지금처럼만 쭉 밀고 가면 그룹 내에서 널 무시할 놈은 없을 거다. 걱정은 나중에 하고 지금 일만 열심히, 잘해봐.”
“감사합니다, 대표님.”
태재호의 격려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구질구질하게 전생에 얽매이느니 태재호 말대로 지금에 집중해야지.
***
태재호와의 미팅이 있고 나서 며칠 뒤.
나는 장하연과 함께 미사리 카페에 갔다. 운전대를 잡은 내 오른손과 조수석에 앉은 장하연의 왼손에는 불가리 뱅글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렇지? 여름 내내 미국에 있었으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항상 앉는 자리에 앉아서 냉커피를 마셨다. 빨대로 냉커피를 쪽 빨아먹던 장하연이 컵을 내려놨다.
“이번에 들어온 거, 아예 들어온 거야?”
“응?”
“아니, 혹시나 해서··· 해동마트면 국내 사업이잖아.”
장하연이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에 얹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는 걸 보니 생각을 굳히고 오길 잘했다.
나는 내 손을 장하연의 손에 얹었다. 그녀는 내 손과 자기 손에 채워진 우리만의 수갑을 보더니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 누나한테 체포된 놈이야. 누나 마음 훔쳐놓고 어딜 도망가겠어?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나도 마음이 쿡쿡 찔렸다. 눈앞에 있는 저 여자는 내게 더 다가오려고 하는데 밀쳐내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내 눈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른에 하나 더 붙기 전까지는 프러포즈하겠지. 안 그러면 내가 너 동사무소 끌고 갈 거야.”
장하연의 굳게 다져진 목소리에 나는 조금 커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동사무소?”
“혼인신고부터 하려고. 도망가지 못하게.”
“누나?”
“그러니까. 그 전에 프러포즈해. 알았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나와 장하연의 웨딩마치는 그녀가 계란 한 판을 넘기기 전에 치를 테니까.
“알았어. 아주 멋지게 해줄게.”
“그럼 됐네, 후훗.”
피식 웃은 장하연과 마주보며 웃던 나는 커피를 마시며 고민에 빠졌다. 프러포즈할 때 입을 턱시도에 웨딩드레스, 톰 포드한테 부탁해서 맞춰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