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21st. 지피지기 (5)
박남준은 장수연을 보며 피식 웃고는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나, 여자 없으면 잠 못 자는 놈입니다. 졸업 파티 날에는 여자 다섯 자빠뜨렸고요. 감당, 할 수 있겠습니까?”
박남준이 탁 소리가 나게 물 컵을 내려놓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장수연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보다 약하네. 난 하루 동안 남자 여섯 쓰러뜨렸어요. 아니지, 일곱이었나? 이른 새벽부터 자정까지 갈아치웠는데.”
박남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랑 삼기에는 떳떳한 일이 아니지만 저 오만한 화냥년의 콧대를 꺾어놓으려고 했는데 보기 좋게 막혀버리지 않았나.
숨을 고르며 달궈진 속을 식힌 그가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지금껏 만난 남자들이 부실했나 보네요, 장수연 씨. 얼마나 부실하면 여자 한 명 만족시키지 못하고 고꾸라진 겁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이네요. 얼마나 비리비리한 애들이면 남자한테 자빠지나?”
박남준은 맞받아칠 수 없었다.
장수연이라는 여자는 지금껏 만난 여자들 중 가장 도발적인 여자였다. 깊게 파인 블라우스와 짝 달라붙는 가죽 스커트 때문에 도드라진 몸매는 올리비아 허시가 안 부럽고 얼굴에서는 ‘끼’가 철철 넘쳐흐르지 않나?
박남준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두 손을 들었다.
“제가 졌네요. 수연 씨 같은 여자, 솔직히 처음입니다. 외모도 성격도 화끈하네요, 하하.”
“남준 씨도 괜찮네요. 누구하고 다르게 샌님 같지 않아서 좋아요, 후훗.”
서로를 인정한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뭔지는 몰라도 아주 야릇한 기류가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박남준은 검지만 뻗은 손을 낮게 들어 위를 가리켰다.
“수연 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보고 싶네요. 여기 위에서요.”
“네?”
장수연은 이 남자가 지금 제정신인가 싶었다. 첫 만남부터 살을 맞대자니?
“초면부터 서로 볼 장 다 봤는데 이제 와서 내숭입니까? 실망인데요?”
박남준이 비아냥거리자 장수연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감히 누구 앞에서!
“가요. 얼마나 대단한지 두고 보죠.”
“좋습니다. 스태미너 충전하는 차원에서 식사부터 하고 가죠. 스테이크 어때요?”
“그러죠. 기왕이면 레어로 먹는 게 어때요? 스테이크는 육즙이 생명인데.”
지금 장수연은 이성민에 대한 관찰이 어찌 되는지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저 자식이 얼마나 ‘쓸 만 한 놈’인지 탐닉하려는 욕망만이 눈에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
공성필에게서 황나연 집안에 붙어먹은 떨거지들의 명단을 받은 나는 그를 보낸 뒤, 박태진과 함께 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수고했어요.”
나와 마주보는 박태진의 눈에 두려움이 스쳐지나갔다. 나도 착하게 살고 싶은데 세상이 나를 가만 놔두지 않으니 어쩌겠나.
전생에도, 지금도 반쯤 내 사랑, 내 복수, 내 욕망 때문에 자초한 일이지만 이 길로 들어선 이상 끝장을 봐야 한다.
날 밑 닦는 휴지처럼 부려먹은 놈들, 그렇게 굴려먹고는 죽음의 심연으로 가라앉힌 놈들··· 그놈들이 내 발가락을 정성을 다해 물고 빠는 꼴을 볼 때까지 멈출 수 없었다.
그래도 장하연과 동급의 소울메이트인 박태진 앞에서 그런 독한 모습을 보인 게 개운하지 않았다. 나는 뒤돌아서서 자기 방으로 가려는 박태진을 불렀다.
“형.”
“네, 도련님.”
“아까 저, 많이 심했죠?”
박태진은 눈을 몇 번 껌뻑거리더니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도련님. 정당방위 아닙니까?”
“정당방위라···.”
차분히 곱씹던 내게 박태진이 말했다.
“도련님은 그저 도련님의 길을 가던 것뿐입니다. 도련님이 가려는 길에 마름쇠를 뿌리고 부비트랩까지 까는 놈들인데 그런 강단도 없으면 어떻게 회장님 뒤를 이어서 해동과 명동을 이끌어 가시겠습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대한민국 재계의 볕 드는 땅이든 그늘진 땅이든 정글보다 위험하면 위험했지, 덜 위험하진 않을 테니까. 더 모질게, 더 굳게 마음먹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겠네요.”
“물론, 도련님 나이에 그러시는 걸 보고 많이 놀라긴 했습니다. 지금부터 이러시면 10년쯤 뒤에는 모두가 벌벌 떨 것 같아서 두렵더군요, 하하.”
박태진은 농담처럼 말했는지 날 보며 껄껄 웃었지만 그가 한 말은 현실이 될 것이다. 그렇게까지 두려운 존재가 되지 않으면 내 복수는 완성되지 않을 테니까.
“형 말대로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들어갈게요.”
나는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기분을 두르고 방에 들어왔다.
“흐음···.”
트레이닝 복에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갈아입은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공성필이 적어준 명단을 봤다. 내가 기억하는 명단과 맞아떨어지나 안 떨어지나 견줘보면서.
그러길 수 시간째.
스탠드만 켜놓은 탁자 앞에 앉아 턱을 괸 나는 앞에 있는 종이 두 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을 짜내고 짜냈지만 황나연 쪽 신성 임원들이 고작 20여 명밖에 될 리가 없었다. 지금부터 라인을 탄 놈들인지 나중에 라인을 탈 놈들인지는 몰라도 다른 종이에 추가로 적은 놈들만 지금 보고 있는 명단의 몇 배가 넘었다.
‘공성필 말이 사실인가.’
책상을 톡톡 치던 나는 몇 시간 전에 식당에서 했었던 취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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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더러 이걸 믿으라고? 장난해?”
공성필이 적어준 임원 명단을 받아보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이 숫자의 배가 넘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싶어 주먹으로 식탁을 쿵 쳤다.
“이게 지금 어디서 약을 팔아! 빨리 더 안 적어?”
나는 공성필에게 큰소리로 다그쳐도 화가 안 풀려서 박태진이 보든 말든 임원들 명단이 적힌 봉투를 집어서 휙 하고 집어던졌다. 내가 집어던진 봉투 모서리가 눈을 질끈 감은 공성필의 이마에 콕 부딪쳤다.
“그, 그게 전부입니다! 지금 남은 임원들, 그게 다라고요!”
이마 한가운데에 점 같은 핏방울이 맺혀서 콧등을 타고 흘러내려도 공성필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진심인지 거짓인지는 몰라도 가슴까지 두들기려던 그는 박태진의 표범 같은 눈을 마주하더니 손을 내려놓고 한숨만 내쉬었다.
고개를 푹 숙인 저놈의 정수리를 노려보던 나는 뭔가 이상한 게 짚였다.
“지금 남은 임원들?”
공성필이 번쩍 든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작년 하반기 인사발령 때 거의 모든 임원들이 좌천되거나 상담역, 고문으로 물러났습니다. 진짜로요! 도련님한테 왜 거짓말하겠습니까?”
놓치고 있었다. 일하느라 여념이 없어서 흘려들었던 신성그룹 대숙청이 사실이었다니!
입술을 살짝 깨문 나는 공성필을 향해 툭 내뱉었다.
“짚이는 거, 없어?”
“작년 비서실 특별감사 때 밀려났다고 합니다. 고덕인가 어딘가에 땅을 산 게 걸렸다고···.”
고덕이면 작년에 우리 집안과 황 씨 가문이 땅을 긁어모은 평택군, 아니 올해 통합될 평택시 고덕면이다. 우리 집안은 보란 듯이 대규모의 농장과 한우 목장을 만들어서 백화점에 납품해 돈을 벌고 있지만 황 씨 가문은 벙어리 냉가슴마냥 끙끙 앓고 있을 생각에 고소해했는데···.
생각을 가다듬고 다시 그에게 물었다.
“거긴 왜?”
“신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웬 일인지 공장부지 주변이 아니라 공장부지를 직접 매입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고 있는데?’
조국일보 황가 놈들, 미치고 팔짝 뛸 것이다. 장호건이 물러나면 신성에서 젖을 짜내려고 준비시켜둔 머슴들에 비자금까지 탈탈 털렸으니 얼마나 속이 짤까?
나는 박태진과 마주보며 실소를 터뜨린 뒤, 취조를 이어갔다.
“당신은?”
“저는 뉴욕에 있느라 정보를 못 들었습니다. 대신에 환치기 계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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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나는 공성필의 실토를 듣고 백화점 컨설팅 때 장호건과 이수한이 왜 그렇게 적극적이었는지 깨달았다. 결과론적으로는 나와 우리 집안, 그리고 장하연을 이용해서 내부의 적들을 깡그리 숙청한 것이었다.
왠지 모를 패배감에 쓴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인간으로서는 죽일 듯이 싫어해도 경영자로서, 왕좌에 앉은 자로서 배울 점이 많은 사람답게 장호건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일이 그렇게 됐으니 장호건의 사위가 되면 지들끼리 서로 치고 박고 싸우게 만들고 계열사들을 찢어 삼키려던 계획은 폐기해야겠다.
그래도 공성필의 목에 개목줄을 채우고 심장까지 뽑아서 손에 쥐었으니 장 씨 가문에 쉐도우 펀치 한 방은 날린 셈인가?
***
그렇게 이번 일을 정리한 나는 아침 일찍 클레어에게 전화를 넣고 박태진과 함께 헨리의 저택으로 향했다. 응접실로 우리를 데려간 헨리는 집사장을 시켜 차를 내오게 했다.
“자네한테 미행이 안 붙었다고 보고받았네. 이제야 자유로워졌군.”
“덕분에 로이스 가문의 보물들을 맘껏 감상했으니 감사할 뿐이죠, 하하.”
공성필은 약속대로 미행을 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속임으로 오늘만 안 붙였을 수도 있으니 돌아가기 전까지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헨리는 웃음 속에 숨겨진 내 근심을 읽었는지 모노클 너머의 눈에 측은함을 담아서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시간이 돈인데 불필요하게 쓴 것 같군. 괜찮나, 조니?”
“어쩔 수 없죠. 제 나이 겨우 스물다섯인데 이런 부를 일궜다는 게 대한민국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응접실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헨리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니 자네가 미국인이었다면 이 나라의 보물이 됐을 텐데 안타깝군.”
“현실을 탓하기보다는 현실 속에서 더 나은 길을 만들어가야겠지요. 그렇죠, 클레어?”
옆에서 차를 마시던 클레어가 미소를 띠었다.
“조니 정도라면 네가 원하는 길을 만들 수 있잖아. 그렇죠, 아버지?”
“네 말이 맞구나, 클레어. 내 생각이 짧았다. 그래, 길이 마음에 안 들면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면서 나아가야지, 하하.”
클레어가 나를 보던 고개를 돌리고 던진 질문에 헨리는 껄껄 웃으며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썬이 보내준 자네 집안 녹차, 산뜻한 향도 좋고 적당히 쌉싸름한 게 홍차와는 또 다른 묘미가 있어. 아주 좋더군.”
“보성이라는 곳에 있는 조부님 다원에서 만든 녹차입니다. 유기농으로 키운 이파리를 한 잎 한 잎 손으로 따서 덖었는데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헨리는 동그랗게 모은 입에서 탄성을 흘렸다.
“호오··· 귀한 선물을 받았군. 이리 훌륭한 차가 나온 곳이면 그 보성이라는 곳, 풍광이 수려할 것 같네. 예전에 스리랑카에 갔었는데···.”
품종별 차의 향미와 그 차를 만드는 곳과의 상관관계에 대해 심도 있게 토론하던 우리는 브런치를 먹으러 식당에 갔다.
대부호 가문임에도 독일계 혈통이라는 걸 못 속이는지 한쪽 면만 익힌 달걀프라이를 얹은 카토펠푸퍼(Kartofelpuffer, 독일식 감자전)과 베이컨, 호밀빵, 오렌지주스, 탄산수가 식탁에 놓였다.
식사를 하던 중 헨리가 양 손에 쥔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 양쪽에 걸치고 탄산수 한 모금을 들이켰다.
“자네와 사업 이야기를 하자고 한 건 지난번 일 때문이네.”
“엔고 배팅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워싱턴 청문회에 끌려갈 건 예상했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개운치가 않더군.”
헨리는 청문회 출석 전에 로비스트들을 개떼처럼 풀어 미국 의회에 돈을 뿌렸었다. 덕분에 큰 시비는 없었지만 한 의원이 ‘요카이 로이스’라고 비아냥거리자 헨리는 모노클을 깨뜨릴 것처럼 날카롭게 치켜뜬 눈으로 그를 노려봤었다.
CNN TV로 그 광경을 봤던 기억이 떠오른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에 걸쳐두고 헨리를 바라보던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헨리는 그런 내 얼굴을 살피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말인데··· 민주당 쪽에서 다른 곳에도 투자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네.”
민주당에서 오퍼를 내줬을 법한 건이면··· 그건가?
짚이는 게 있었다. 이 시기에 민주당이 우리에게 바라는 게 뭔지.
“혹시··· 문화 산업입니까?”
짐짓 조심스럽게 묻자 헨리의 모노클 주변에 부드러운 주름이 졌다.
“자네 말이 맞네. 정확히는 영화와 음악이지. 민주당과 클린턴 행정부 경제정책의 3대 축이 아닌가?”
역시.
민주당-클린턴 정권은 미국 경제라는 거대한 엔진을 더 폭발적으로 돌릴 새로운 실린더로 IT와 금융,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찍었다.
그런 민주당이니 금융을 기반으로 IT산업의 큰손 노릇을 하는 트라이엄프와 스탠더드에게 영화 산업에도 돈을 부어주길 바라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헨리에게서 내 추측을 확인받자마자 식탁 밑의 무릎 위에 뒀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재계에서 소문난 영화광이었던 나였지만 영화에 돈을 투자하고 싶었어도 클레어를 비롯한 회사 동료들과의 유대관계 때문에 지금껏 투자를 미뤄왔었다.
이제는 충분히 돈을 벌었지만 투자를 하고 싶어도 자연스러운 기회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게 헨리의 제안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그런 속마음을 숨기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헨리. 투자할 만한 곳은 생각해두셨습니까?”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거라네. 투자제안서는 식사부터 끝내고 살펴보세. 카토펠푸퍼와 베이컨에게 미안하니 말이야.”
“맞아요, 아버지. 더 식게 놔두면 미안해질 것 같아요, 후훗.”
우리 셋은 부지런히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여서 접시와 빵 바구니, 컵을 깨끗이 비운 뒤, 헨리의 서재 겸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헨리?”
“아빠?”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마음먹었는지 서재에 있는 테이블에는 세 명 분의 서류더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산더미 같은 서류가!
깜짝 놀란 나와 클레어를 보며 헨리가 빙긋 웃었다.
“전부 할리우드에서 보내준 투자제안서들이네. 며칠 정도는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게, 하하.”
“아하하하···.”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는 헨리를 보며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단칸방 대신에 로열스위트룸 뺨치는 침실, 군만두 대신에 5성급 호텔 쉐프 출신 요리사들이 만든 식사를 내주며 일을 시키겠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