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68화 (67/229)

68화. 21st. 지피지기 (3)

이성민과 클레어가 구찌와 협상하는 동안에도 로이스 가문의 경호원들은 자신들이 쫓던 두 백인 남자가 중년의 한 동양계 남성과 카페에서 마주보고 있는 걸 먼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세 놈들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며 언성을 높이는 것처럼 보였다.

“저 자식들, 구린내가 팍팍 나는데?”

대포 같은 사진기를 눈가에 댄 남자가 쉴 새 없이 사진기 버튼을 눌렀고···

“겁대가리 없는 놈들. 감히 아가씨와 주인어른 친구 분 뒤를 미행하다니··· Smith & Ronald···.”

헤드셋을 낀 남자는 총구에 원반형 안테나가 달린 권총 모양의 도청기를 세 사람에게 겨눈 채 도청내용 중 중요한 것들만 적고 있었다.

“Shin-Seong? Mr. Gong?”

도청을 하던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메모지에 두 개의 단어를 재빨리 적었다. 두 번째 단어는 몰라도 첫 번째 단어는 얼핏 들어본 것 같았는지 동그라미까지 쳐뒀다.

“전화 왔는데?”

전화벨 소리를 들은 남자가 촬영을 멈추고 도청 중인 남자의 어깨를 톡톡 치고는 그의 주머니를 가리켰다. 그 남자는 헤드셋을 벗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네, 아가씨. 필요한 정보는 모두 수집한 것 같습니다.”

###

내 부탁을 받고 전화를 건 클레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Smith & Ronald? Private Investigator? Keep going.”

클레어를 지켜보던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사설탐정?

내 볼이 씰룩거리고 옆에 있던 박태진의 눈도 도끼눈으로 변하자 우리를 본 클레어가 손을 흔들며 진정시켰다.

“신성? 미스터 공? 사진 찍었죠? 알았어요. 그 사람들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동선 체크해줘요. 고마워요.”

신성? 미스터 공?

두 단어만으로도 무슨 일인지 그림이 그려졌다. 신성물산 뉴욕법인에서 만든 환치기 계좌로 사설탐정을 썼을 것이다. 부속실에 있었을 때 그 짓거리를 지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미스터 공’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하던 내게 클레어가 물었다.

“신성그룹인 거지?”

“그럴 거예요. 그 집 둘째 딸이 저한테 원수진 게 있거든요.”

씁쓸하게 웃으며 장수연과의 악연을 들려주자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런 일 때문에 회사를 쓴다고? 브랜드 이미지 왕창 깎일 텐데?”

“그게 한국 방식이에요. 조폭하고 다를 게 없어요.”

한국 재벌들이 그러는 게 어디 하루이틀인가. 누구든 자기들한테 기어오르면 수단방법 안 가리고 밟아 뭉개는 족속들인데.

나 또한 수단방법 안 가리는 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놈이겠지만 회사 돈을 사적으로 쓰는 짓거리는 안 하는 게 유일한 차이점이랄까?

쓴웃음을 짓는 나를 보고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사진은 내일 아침에 호텔로 보내주겠다는데.”

“사진 받으면 해동물산 뉴욕법인에 가봐야겠어요. 누군지는 몰라도 코뚜레 좀 꿰어둬야 할 것 같네요.”

보나마나 장수연 모녀가 시키는 대로 했겠지만 ‘미스터 공’ 그놈은 억세게 재수가 없는 놈이었다. 내가 이마에 구멍을 뚫을 때까지 질질 끌고 다니며 부려먹을 테니 말이다.

***

다음 날 아침.

사진 자료를 넘겨받은 나는 곧바로 해동물산 뉴욕법인이 있는 건물로 갔다.

“안녕하십니까, 법인장님.”

“어서 와요, 이성민 씨.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죠.”

태연하게 나를 맞은 법인장 김동석 이사는 나와 함께 회의실에 들어가서는 냉장고에서 병 주스 세 개를 꺼내 두 개를 나와 박태진 자리에 놓아주고 자리에 앉았다. 나와 박태진도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차장님.”

“네, 도련님.”

나는 회의실 밖에서와 달리 태도를 바꾼 김동석에게 박태진에게서 건네받은 봉투를 그대로 넘겨줬다.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 한 장씩 살펴보던 김동석이 눈을 껌뻑거렸다.

“이 친구··· 어떻게 아십니까?”

사진 속 한국인을 짚으며 묻는 김동석에게 담담히 대답했다.

“그 사람이 절 미행하는 것 같습니다. 사설탐정까지 고용해서는 제가 묵는 호텔 데스크에서 제 정보를 캐내려고 했더군요.”

“예?”

김동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회사 내규에 따라 ‘해동물산 뉴욕법인 사원 이성민’이라지만 오너 집안의 장손이니 눈앞이 깜깜해졌을 것이다.

마른침까지 삼키는 그를 보며 나는 손을 저었다.

“회장님이나 실장님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십니다. 심려 끼치고 싶지 않아서 제 선에서 끝내려고 하는데··· 법인장님이 아는 분이면 알려주십시오.”

자신의 자리에 위협이 되는 일이 안 됐다는 건가,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김동석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신성물산 뉴욕법인장 공성필 이사입니다.”

“확실합니까?”

“현지에 있는 한국 기업 임직원들끼리 친목 도모 차원에서 종종 모이는데 거기서 안면을 텄습니다.”

어째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떠오르는 것 같았다. 공성필··· 누구냐, 넌?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질문을 이었다.

“이 사람, 어떤가요? 아는 대로 다 말해주세요.”

“예. 신입사원일 때 신성모직 원단 1천만 불 대미수출을 성사시켰고···.”

법인장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수면 아래에 잠겨있던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어서 나는 김동석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법인장님. 죄송한데 그 사람과 밥 한 끼 먹을 수 있게 자리 좀 마련해주시죠.”

김동석은 내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미행하려고 한 놈을 직접 보시겠다는 겁니까?”

“호랑이 미간에 구멍을 뚫으려면 정면에서 쏴야죠, 후후.”

김동석이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는 침음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그룹에서 사람을 붙였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일으킬 수도 있는 그 여파를 미리 짐작한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약속 잡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

회사에서 일을 다 본 나는 펜트하우스로 돌아가서 클레어에게 공성필의 뒷조사를 부탁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평일에는 회사에 출근해서 평범한 상사원처럼 일하면서도 펜트하우스에서는 박태진과 함께 홈 트레이닝을 하거나 스탠더드 캐피털을 돌보며 결과를 기다렸다.

“하나만 더!”

“흐읍!”

박태진에게 양 발을 맡긴 나는 토요일 아침 햇살을 맞으며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어깨까지 말아 올린 반팔 티셔츠에 트레이닝 복 바지 차림으로 내려갈 때는 천천히, 올라갈 때는 빠르게 움직였다.

“하나만 더!”

러닝머신까지 1시간이나 돌렸으면서 푸시업은 71개째부터 ‘하나만 더!’가 벌써 열 개째였다. 이 양반이 진짜!

“형! 언제까지 더 할 거예요? 팔뚝 터지겠어요.”

“예전에는 안 쉬고도 100개까지 하셨는데 확실히 운동이 부족하신 것 같군요. 매일 일만 하셨으니 어쩔 수 없겠지마는··· 하하.”

껄껄 웃던 박태진이 말을 이었다.

“틈날 때마다 해두시는 게 좋습니다, 도련님. 그래야 지지난 달에 아가씨와 조깅할 때 있었던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잘 보이고 싶은 여자 앞에서 그런 개망신을 당하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두 번 다시 장하연 앞에서 그런 꼴을 안 보이고 싶어서 이를 악물었다.

“알았어요. 100개 찍죠.”

“좋습니다. 한 개 더!”

“흐읍!”

그렇게 나는 다시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근육이 비명을 질러도 무시하고 팔굽혀펴기를 하다 보니 고지가 눈앞에 보였다.

“마지막 하나!”

“흐아아!”

100개를 찍자 박태진이 내 다리를 내려줬다. 그대로 나는 개구리처럼 바닥에 엎어져서 숨을 몰아쉬었다.

“도련님, 전화 왔습니다.”

“네.”

전화벨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박태진의 말을 듣고 튕기듯이 일어났다.

“네, 이성민입··· 네, 법인장님. 네··· 잠시만요.”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던 나는 곧바로 메모지와 펜을 꺼내 시각과 장소를 적었다.

“감사합니다, 법인장님. 절대 폐 끼치지 않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외부에 발설하지 마시고요. 네.”

통화를 마친 나는 클레어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클레어. 저예요. 그 사람 정보, 확실하죠?”

[살다 살다 그렇게 더티한 놈은 처음 봤어. 사진, 어디로 보내줄까?]

“잠시만요. 약속 시간은 저녁 7시, 위치는···.”

약속 장소와 내가 도착할 시간까지 알려주자 클레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케이. 시간 맞춰서 보내줄게. 잘 해봐.]

“고마워요.”

[아! 이 일 끝나면 아버지가 보자고 하셨어. 의논할 게 있다고 했는데 괜찮지?]

“헨리가요?”

뜬금없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펜트하우스 사용한 것 때문에 그런가? 그 양반, 그렇게 쪼잔한 사람이 아닐 텐데···.

[나쁜 일은 아니야. 사업 때문에 의논할 게 있다는데 네 일 처리하고 보자고 하셨어.]

“알았어요. 고마워요.”

전화를 끊은 내게 박태진이 다가와서 물었다.

“로이스 경께서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사업 때문에 의논할 게 있다고 하네요.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약속 시간까지 시간도 넉넉하니까 샤워나 해야겠네요.”

샤워를 해도 약속시간까지는 한참 남았다. 미국 쪽 주머니는 충분하니 한국 쪽 주머니 불릴 방법이나 연구해볼까? 사촌동생들이나 나나 떳떳하게 상속할 준비는 해야 하니까.

***

회사에서 퇴근한 공성필은 김동석과 보기로 약속한 일식집 앞에 도착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공성필은 갑작스러운 식사 제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뼛속까지 상사맨인 그라도 해동물산 상사부문의 핵심법인 중 하나인 뉴욕법인의 헤드가 만나자고 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식당에 들어선 공성필에게 종업원 한 명이 다가왔다.

“Excuse me. Seong-pil Gong?”

“Sure I am.”

고개를 끄덕인 종업원이 손을 뻗어 안쪽에 있는 귀빈실을 가리켰다.

“이 친구, 오늘 제대로 쏘려나본데?”

귀빈실 앞에 도착한 그는 종업원이 열어준 문을 넘어 방으로 들어갔다.

“여어, 김 이사! 뭘 이렇게까지···?”

평소처럼 호탕하게 인사를 건네려던 공성필은 테이블 앞에 앉은 새파란 젊은이를 보고 말을 이을 수 없었다.

###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공성필의 동공에서 리히터 7.0 뺨치는 지진이 일어나는 걸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어서 오시죠, 공성필 이사님. 그렇게 보고 싶던 제가 안 반가운 것 같네요?”

공성필은 황급히 방을 나가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문 옆에 쥐죽은 듯 붙어있던 박태진이 떡하니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자리에 앉으시죠. 안 그러면 당신이 미행했다는 걸 신성그룹 장 회장님께 직통으로 알릴 겁니다.”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이성민 씨를 미행해?”

얼마나 당황했으면 말까지 더듬을까. 공성필은 무시하고 나가려고 했지만 박태진이 그의 몸을 팔로 가로막았다.

“스미스 & 로널드, 몰라? 감히 우리 도련님을 관찰해?”

박태진이 저승사자만큼 싸늘한 목소리로 공성필의 귀를 찔렀다. 순간 움찔한 공성필을 보며 나 또한 싸늘하게 말했다.

“박태진 차장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공성필 이사님. 우리가 증거 하나 없이 이러는 것 같습니까? 사설탐정 붙인 거, 모를 줄 알았나보네요?”

“으으···.”

공성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뒤로 돌아서 식탁 앞에 앉았다. 나는 그를 보며 피식 웃고는 옆에 뒀던 서류봉투들 중 미행 관련 사진을 담은 걸 툭 던져줬다.

“보시죠.”

공성필은 마른침을 삼키며 봉투 안에 손을 넣었다. 손을 꺼낸 그는 함께 끄집어낸 사진을 보더니 눈이 커졌다. 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2단계 협박을 시작했다.

“나 관찰하느라 쓴 돈, 환치기 계좌에서 쓴 돈이던데··· 신성그룹이 법 위에 있는 줄 아나보네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 환치기라니!”

“계속 지랄하고 계시네요, 공성필 씨! 그 탐정사무소에서 계좌이체 내역 받아놨는데 발뺌할 겁니까?”

클레어는 친절하게도 스미스 & 로널드의 계좌이체 내역까지 보내줬다. 옆에 둔 봉투들 중 하나를 집어서 계좌이체 내역서를 보여주자 공성필의 눈이 커졌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그룹의 환치기. 여기에 경쟁그룹의 오너 4세 관찰··· 검찰한테 던져주면 재밌겠어요? 게다가 한국은 지금 지방선거가 한창인데··· 얼마나 남았죠?”

큰소리로 묻자 박태진이 싸늘한 미소를 띤 채 독일인처럼 엄지와 검지, 중지를 펼쳤다.

“3주 정도 남았을 겁니다. 지든, 이기든 여의도에 이만한 껀수도 없겠죠. 내년이면 총선이잖습니까? 흐흐.”

나비효과가 걸리지만 전생대로 흘러가면 여당은 3주도 안 남은 제 1회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것이다. 가뜩이나 온갖 사고가 빈발해서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데 상징성이 큰 선거까지 참패하면 청와대와 여당은 레임덕 확정.

이 자료를 찔러주면 청와대와 여당은 복날 개 패듯이 열정적으로 신성그룹을 두들겨 팰 것이다. 지방선거 악재 물타기든, 내년 총선 선거자금 수금이든 요긴하게 쓰지 않겠나.

그림이 그려졌을지는 몰라도 핏기가 싹 가신 공성필을 보며 씩 웃어 보인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간 우리 해동과 신성의 관계가 좋아졌는데 당신 때문에 파토나면 참- 재밌겠네요. 신성전자가 해동종금에서 빌린 3천억, 아버지하고 장 회장님 인연 때문에 만기 연장 고민한 거 물려야 하나? 아! 쇼핑몰 공동설립 건도 있죠, 차장님?”

“그렇습니다, 도련님. 이 일을 덮는 조건으로 쇼핑몰 공동설립은 파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장호건 회장님께서 공성필 씨를 어떻게 하실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흐흐.”

나와 박태진의 음침살벌한 듀엣에 공성필이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자기 때문에 수천억의 돈이 날아가게 된다면 장호건의 성격 상 빤스 한 장 안 남기고 탈탈 털 것이다. 어쩌면 장기밀매업자들한테 던져주고 저놈의 눈깔부터 내장을 죄 뽑아다가 부위별로 팔지도 모른다.

나는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던 박태진과 함께 공성필의 모습을 즐기듯이 보며 3단계로 강도를 높였다.

“그리고 당신, 본국에 있는 가족들 보기 안 부끄럽습니까?”

“내 식구는 왜 들먹거리는 거야?”

“의도는 안 했는데 나도 당신을 추적했더니 이런 게 나오더군요.”

바락바락 소리 지르던 공성필을 보며 싸늘한 미소를 날리던 나는 나머지 봉투 하나를 그의 앞에 던져줬다. 그는 씩씩거리며 내가 준 봉투에서 사진을 꺼냈다.

“이, 이건?”

“이름 안나 해리스. 한국 나이로 20세. 직업, 스트리퍼 겸 콜걸. 당신 큰딸하고 동갑이던데···.”

나는 빈혈이나 저혈압이 걸린 것 같은 공성필의 얼굴을 보며 악마처럼 비웃어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