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21st. 지피지기 (1)
장하연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너라. 오늘은 제법 마신 것 같구나, 허허.”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던 장호건이 신문을 내려놓으며 장하연을 반겨줬다. 그의 눈에 비친 큰딸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발그레해져있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죄송하긴. 가누지 못할 정도만 아니면 술은 원하는 만큼 마셔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하.”
껄껄 웃던 장호건은 주방을 향해 외쳤다.
“진주댁, 꿀물 한 컵만 가져와요.”
“예, 회장님.”
주방에서 대답소리를 듣고 장호건이 손을 뻗어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 보거라.”
“네···.”
장하연은 민망한 기분을 떨치지도 못하고 장호건 바로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잘 만나고 왔는지 모르겠구나.”
“아버지도 참. 우리끼리 만나는 게 그렇죠, 뭐.”
“그러겠구나. 워낙 오래 봐왔으니.”
장호건은 자신의 우문에 대한 딸의 현답에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봐왔던 두 아이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피는 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일이 아닌가?
장하연은 가정부가 가져다 준 꿀물을 마시고 잔을 내려놨다.
“그런데··· 조만간 또 뉴욕에 가봐야 한다고 하네요. 휴우···.”
“미국?”
“네. 너무 오래 자리 비워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장하연의 시무룩한 표정에 장호건까지 덩달아 얼굴이 굳었다.
“그 양반, 거 애를 그렇게 굴려대다니···.”
장호건은 이대수의 속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집이었으면 그룹 비서실이나 핵심계열사 요직에 앉히고 경험과 사내 인맥을 다지게 해줘도 부족할 아이를 왜 말단에서 굴린단 말인가? 가풍을 떠나서 경영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그보다 더한 인재 낭비도 없었다.
장하연은 괜히 자기 때문에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 같아서 얼른 입을 열었다.
“진정하세요, 아버지. 상속도 받았으니까 저 먹여 살릴 만큼은 되잖아요.”
“허허, 아직 식도 안 올렸는데 벌써부터 네 남자 편 드는 거냐?”
“명우 아저씨도 그랬잖아요. 동생 분하고 이라크 가서···.”
다급하게 변명을 이어가려던 장하연은 장호건이 든 손을 보고 입을 닫았다. 다행히도 장호건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안다. 회사 키우겠다고 형제간에 함께 이라크 가서 송유관 공사를 했었지. 그리 큰 공사는 아니었지만 해동건설 체급에는 제법 큰 공사였어.”
“그랬군요.”
“떠나기 전에 명우하고 한 잔 했는데 생전 처음으로 포장마차라는 곳에 가봤었다, 하하.”
장호건의 얼굴은 이명우가 이라크로 떠나기 전 밤에 포장마차에서 꼼장어와 고갈비를 놓고 소주 한 잔을 기울이던 추억에 젖어있었다.
“부끄럽지만 나였다면 못했을 거다. 네 고모나 숙부와 친하지도 않지만 전쟁터와 가까운 곳에서 공사를 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 말이야.”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고생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오셨죠. DDR램 투자도 잘 될 거라 믿어요.”
장호건은 딸의 응원에 얼굴이 밝아졌다. 전 세계 반도체 업계가 RD램에 매달리고 있을 때 본인만이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DDR램에 매달리고 있지 않나?
장호건은 내친 김에 RD램과 DDR램의 차이와 더불어 스택 공법과 트렌치 공법의 차이에 대해 설명한 뒤, 딸이 마시던 꿀물을 들이켰다.
“경영자라는 건 알고(知), 행동하고(行), 쓸 줄 알고(用), 가르치고(訓),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評). 이 다섯 가지를 갖춰야 네 남자한테 부족하지 않을 게야. 가 봐.”
장하연은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인 뒤, 2층으로 올라갔다. 짬짬이 경영수업을 받을 때마다 후계자로서든 자식으로서든 자신을 응원해주는 것 같았기에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밝았다.
2층에 올라서자마자 장하연의 얼굴을 밝게 만들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칙칙하게 변했다.
“뭐가 좋아서 실실 쪼개고 있어?”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장수연의 톡톡 쏘는 목소리에 장하연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참견할 거 없어.”
“하긴, 그럴 이유 따윈 없겠지. 그럴 가치도 없고. 그런데···.”
장수연은 코로 숨을 빨아들이는 소리를 내더니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너, 요새 술 많이 마신다? 누구랑 마셨어? 이성민 그 고자 새끼하고 마신 거야?”
“고자?”
장하연의 눈꼬리와 목소리가 올라갔다. 본인이 차지하지 못했다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병신 취급하다니!
“그래. 여자 하나 붙들고 질질 끄는 거 보면 고자가 아니고 뭐겠어?”
장하연은 구기던 이맛살을 풀었다. 이딴 하찮은 도발로 넘어가는 건 어렸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지 않나?
찌푸린 미간을 펼친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 고자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확인하면 되니까. 내 생각엔 네가 지금껏 후리고 다닌 놈들보다 실할 것 같은데?”
“뭐?”
“그리고 너, 아직도 맞선 보러 다니잖아. 보는 사람마다 얼마나 변변치 않으면 그러고 다니니?”
장수연의 썩어 들어가는 얼굴을 보고 장하연은 보란 듯이 어깨까지 들썩거렸다.
장수연이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이성민만큼 완벽한 남자가 없어서 반년 가까이 헛수고 중인데 속을 긁어대다니!
“너희 연놈들, 얼마나 잘 되나 두고 볼 거야. 뉴욕이고 나발이고 맘 편히 못 다니게 해주겠어.”
장수연의 서늘한 목소리에 장하연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엿들은 거야?”
그때서야 장수연의 얼굴에 후회가 스쳐지나갔다. 2층 계단에서 몰래 엿들은 정보였는데!
“알아서 뭐해? 가서 자빠져 자기나 해.”
그 말을 끝으로 장수연은 황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자기가 찜한 거 못 가졌다고 성질부리긴··· 휴우.”
장하연은 쿵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을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잠시 후.
방 안으로 들어간 장수연은 문에 귀를 댄 채 바깥소리를 들었다. 발걸음 옮기는 소리가 들리자 장수연은 조용히 문을 열어 문틈으로 장하연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는 걸 보고 장수연이 1층으로 쪼르르 내려가서 황나연을 찾았다. 지금껏 신경 끄고 있던 이성민이 장하연과 희희낙락하는 꼴을 볼 수 없어서였다.
“엄마, 부탁할 게 있어요.”
“뭔데 그러니? 다른 남자 알아봐 줄까?”
황나연은 요즘 들어 딸의 선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연 초부터 딸의 옆에 설 남자를 수십 명이 넘게 구해다줬는데도 번번이 퇴짜를 놓고 있어서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그게 아니고요, 이성민 좀 관찰해줘요.”
“이성민? 너 물 먹인 놈이잖니?”
“그러니까요. 그 자식, 뉴욕 출장 간다는데 뒷조사 좀 해봐야겠어요. 정말로 일을 하는지, 아니면 회사에 이름만 걸쳐놓고 딴 짓거리하는지요.”
딸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는 걸 보고 황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딸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고서도 남편이 바깥에서 데려온 계집과 놀아나는 것도 모자라 아무렇지도 않게 해외 근무까지 하는 놈을 놔둘 수 있겠는가!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황나연은 간절히 바라보는 장수연의 어깨를 토닥여주고는 옷 방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걸었다.
“나예요, 공 이사. 잘 지내죠?”
[예, 사모님. 배려해주신 덕분에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꿀 발라놓은 듯 착착 달라붙는 목소리에 황나연의 눈꼬리가 부드러워졌다.
“다른 게 아니고 조만간 이성민이 뉴욕 출장을 갈 거라네요.”
[이성민이면···?]
“해동그룹 장손. 요즘 뉴욕하고 한국 왔다 갔다 하는데 관찰 좀 해줘요.”
[회사일 말고 다른 짓을 하는지 말씀입니까?]
“눈치가 빠르시네, 공 이사님. 그놈 출국일 알아봐 줄 테니까 뉴욕에 있는 계좌로 그이 모르게 처리해요.”
[알겠습니다, 사모님.]
황나연은 전화를 끊고 장수연을 바라봤다. 서로를 마주보는 두 모녀의 얼굴에는 악당보다 더한 악당의 미소가 서려있었다.
***
며칠 뒤.
할아버지 선물을 미국에 보내고 국내 증시 상황과 그룹 내부 현황을 점검하다 보니 출국 날이 됐다.
지금 나는 김포공항 입국장 앞에 서 있었다. 그런 내 앞에는 장하연이 마주서서 걱정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잘 다녀와. 조심하고.”
“걱정 마. 회사하고 숙소만 열심히 다닐 테니까.”
지켜줄 이 하나 없는 이 여자를 놓고 또 다시 헤어지려니 마음이 무거웠지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기에 웃어보였다.
장하연도 그런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나를 보며 어색하게나마 웃어보였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미소를 보고 그녀의 두 어깨에 손을 얹은 뒤, 그녀의 이마에 내 입술을 가볍게 얹었다.
“야?”
“갈게. 형, 가요.”
“네··· 도련님.”
나는 딸기처럼 빨갛게 물든 장하연의 얼굴을 보며 씩 웃은 뒤, 짐을 챙겨서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10여 시간 뒤.
퍼스트 클래스의 아늑함을 즐기던 우리는 뉴욕 JFK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장 나왔어요, 클레어.”
[Welcome to USA, Johnny!]
클레어의 쾌활한 목소리가 귓전을 살포시 때렸다. 언제나 와도 뉴욕에 오면 넘치는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장소는 어디로 잡았어요?”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두 시간 뒤에 미팅할 거야.]
“월도프 아스토리아···?”
나도 아는 곳이다. 아버지 출장 때 어머니와 함께 셋이서 일반 객실에 묵었는데 뉴욕에 처음 세워진 고층빌딩 호텔이었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는데···.
[새 건물 지을 때 우리 집안에서 투자했던 곳이야. 대대로 내려오는 펜트하우스가 있는데 투자협상 장소로 좋을 것 같아서 아버지께 부탁했어.]
클레어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지만 입이 벌어졌다. 지어진 지 60년을 바라보는 유서 깊은 호텔에 대대로 내려오는 펜트하우스가 있었다니. 난 언제 존 데이비슨 리가 아닌 이성민으로 그런 사치를 누리려나?
“고마워요, 클레어.”
[고맙긴. 이따 봐.]
통화를 마친 나는 보테가 베네타 서류 가방에 핸드폰을 넣고 박태진과 함께 공항 밖으로 나가서 택시에 올라탔다. 목적지를 알려준 뒤, 앞뒤 좌석 사이에 있는 유리창을 닫고 등을 기댔다.
“클레어 덕분에 일이 잘 풀릴 것 같네요.”
“로이스 경에게 감사인사라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미처 생각 못한 곳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패션업체와의 투자협상이라서 고급 호텔 스위트룸을 잡아달라고 했는데 헨리의 펜트하우스에서 미팅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미끄러지듯 도로를 달리는 택시 안에서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던 내게 박태진이 말했다.
“도련님, 뭔가 이상합니다.”
“네?”
“방금 전부터 차 한 대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전생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팔팔한 박태진이니 군에서 벼려진 직감이 더 날카로울 터.
“돌아보지 마십시오, 도련님.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확인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박태진의 말을 듣고 뒤로 돌리려던 몸을 정자세로 고치고 뉴욕 시내의 지도를 펼쳤다. 창밖을 내다보고 우리가 있는 위치를 확인한 뒤, 칸막이를 열고 말했다.
“미안한데 오른쪽으로 가죠.”
“그럼 반대방향으로 가게 될 텐데요?”
“괜찮습니다. 모처럼 만에 뉴욕 시내를 왔더니 한 시간 정도는 드라이브 하고 싶어서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한 나는 100달러 지폐 열 장을 꺼내서 칸막이를 통해 내밀었다. 지폐를 내민 손을 본 기사의 입꼬리가 찢어질 것처럼 올라갔다.
“알겠습니다, 손님. 원하시는 만큼 보여드리죠, 하하.”
기사는 대충 눈치를 챘는지 뉴욕 시내에서 차들이 잘 안 다니는 길들만 골라서 돌아다녔다.
“계속 따라붙네요. 질긴 놈들.”
“미스 로렌스에게 연락해서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 바득바득 갈던 나는 재빨리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조니예요, 클레어. 오늘 미팅에 투입된 경호원들, 헨리 고용인들이죠?”
[응. 아버지께서 A급으로만 차출해줬어. 왜?]
“미행이 붙은 것 같아요.”
[미행?]
“네. 일단, 로비에 한 사람만 일반인처럼 위장시켜서 앉혀두세요. 그리고···.”
놈들을 역추적할 방법을 알려주자 클레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
“네. 고마워요.”
한 시간에 가까운 드라이브 끝에 호텔 앞에서 택시가 멈췄고, 차에서 내린 나는 입구에서 전화를 걸었다.
“도착했어요. 네. 지금 바로 들어갈게요.”
전화를 마친 나는 박태진과 함께 호텔 로비에 발을 딛자 르네상스 화풍으로 그려진 벽화들이 통로 위의 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미행이 붙어 긴박한 순간이었음에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절로 나오게 하는 그림이었다. 덕분에 마음이 좀 편해졌다.
“대단하네요. 천장화 그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한국에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노동과 예술의 가치를 인정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겁니다.”
박태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한테 들었는데 천장화는 보는 거리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걸 고려해서 그려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림 그리는 자세도 불편하고 구도를 살펴보는 것도 까다롭고요.”
“그럴 겁니다. 그래서 천지창조를 그리던 시절에 미켈란젤로의 건강이 많이 상했다고 했죠. 그만큼 천장화는 일반 회화보다 몇 배의 노력과 그에 합당한 대가가 필요할 겁니다.”
‘노력’과 ‘대가’라는 말에 쓴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하겠네요. 사람의 가치를 정부부터 앞장서서 후려치고 있으니··· 후후.”
한국이란 나라는 공무원들 급여부터 시작해서 전산망 구축이나 디자인 관련 용역비용처럼 사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후려치려 들지 않던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할아버지 흉내 내면서 기분 좀 바꾸려고 했는데··· 안 되는 건 안 되는가보네.’
잠시 동안 할아버지처럼 심미안과 감식안을 투영해서 그림 감상을 하며 분노를 떨쳐내려 노력했지만 돌고 돌아 무거운 이야기로 빠졌던 내게 한 백인 남성이 다가왔다.
“존 데이비슨 리, 맞으십니까?”
영화 촬영이 시작됐다. 장르는 스릴러쯤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