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20th. 말하지 않아도... (2)
이성민이 해동종금을 물려받은 뒤의 계획을 꾸미고 있을 때 선해철은 고승주와 일식집에서 만나고 있었다.
“채권 인수로 되돌려주겠다고?”
“나쁘지 않을 거라 봅니다, 형님. 사업도 좋지만 유동자금은 남겨두셔야죠. 그리고 스탠더드에도 회장님 비자금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입 안에서 회를 우물거리는 선해철과 달리 고승주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술잔을 비웠다.
매각 대금을 원리금 전액 만기에 상환할 원화 표시 채권으로 재투자 받는 것은 아주 좋은 제안이었다. 다가올 폭풍에 대비해서 회사 내부의 달러도 아끼고 스탠더드와 트라이엄프에 들어있는 비자금도 불릴 수 있으니 말이다.
허나 출처가 이대수의 비자금이라도 스탠더드에 맡겨둔 3억 불은 사실상 이성민의 돈이다.
여기에 스탠더드 캐피털을 끌어들여 한국 경제에 드리워질 폭풍을 이겨낼 것까지 생각하면 주고받는 계산에서 해동그룹이 밑지는 꼴이니 고승주는 마뜩치가 않았다.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고승주를 보며 선해철이 혀를 찼다.
“형님, 클레어한테 얘기 들었는데 성민이 덕분에 멕시코하고 일본에서 번 돈만 49억 달러입니다. 그거 하나 해준다고 빚이 다 갚아지겠습니까? 그렇다고 손해 보는 일도 아닌데.”
“사, 사십구억 불?”
심드렁한 목소리로 묻는 선해철과 달리 고승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겨우 스물다섯인 놈이 무슨 재주로 그 많은 돈을 벌어들였단 말인가?
“호, 혹시 그 돈···.”
“형님도 참. 그게 다 어떻게 성민이 돈입니까? 투자자들 돈이죠. 뭐, 성민이도 초창기에 투자한 게 있고 이번 일 최대 공로자이니 제법 챙겼을 겁니다, 흐흐.”
고승주가 말끝을 흐리는 사이에 선해철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꾸하고는 빙글빙글 웃었다. 늘 침착하고 진중한 고승주가 당황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알았다. 로렌스 대표하고 미스터 로이스한테는 잘 말해줘. 얼마나 걸릴 것 같냐?”
“페이퍼컴퍼니들로 주가를 최대한 관리하면서 물량을 전부 모으려면··· 1년 정도는 걸리겠네요. 늦어도 내년 6월까지는 끝내겠습니다, 하하.”
이렇게 되면 해동물산은 엔고 투기로 번 돈 중 사업 확대에 쓰고 남은 22억 달러가 1년이나 놀게 된다. 이대수와 세 원로 대표이사 밑에서 돈놀이에 이골이 난 고승주는 그 꼴을 볼 수 없었다.
“한국 경제, 어떻게 될 것 같냐?”
“나보다 더 잘 알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러십니까? 길게 보면 위험한 거, 형님도 알잖수?”
“그러겠지?”
“우리나라 수출품 중에 일본에 비벼볼 만한 게 몇 개나 됩니까? 반도체 빼고 자동차, 철강 할 것 없이 죄다 밀리잖소. 역 플라자 합의 약빨 받아서 엔저 시작되면 태현자동차부터 골골거릴 걸요? 아도자동차도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면서요?”
선해철의 되물음에 고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계에서 가장 신중한 이대수와 자신뿐만 아니라 월가에서 단련된 선해철까지 생각이 일치하니 향후 이 나라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워질 가능성이 높았다.
“알았다. 네가 제안한 건 회장님한테 말씀드리고 시작하자.”
선해철과 잔을 부딪친 고승주는 술을 마시면서도 그 돈을 가장 좋게 굴릴 방법을 연구하느라 술맛을 즐길 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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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해철과의 술자리를 파한 뒤, 고승주는 곧장 삼청동으로 들어가서 방금 주고받은 얘기를 보고했다.
“으하하하! 내 새끼가 그 회사 대들보가 됐구먼!”
이대수는 책상을 두들기며 호탕하게 웃었다. 남의 돈을 불려줬어도 통찰력과 결단력으로 그 많은 돈을 벌어들인 손주의 솜씨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동안 웃던 이대수가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허면, 그때까지 놀 22억 불을 굴려보자는 건가?”
“지분 매입까지 앞으로 1년입니다. 그 1년이면 은행이자만 천억 원이 훨씬 넘는데 마냥 움켜쥐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회장님.”
“역시 자네답구먼, 흐흐.”
진짜로 아까워죽겠다는 고승주의 표정을 보고 이대수가 낄낄 웃었다. 자신이라도 그리 했을 테니 말릴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방법인데··· 자네는 어찌했으면 좋겠나?”
“제 생각에는 지분정리가 끝나는 대로 성민이에게 맡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 장손이 언제까지 남의 집일지 모를 회사에만 돈을 벌어다주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고승주의 청산유수 같은 되물음에 이대수가 껄껄 웃었다.
“허허,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구먼.”
“그런 것도 있지만 지금껏 그룹 계열사들 중에서 해동종금만 현상유지를 하고 있습니다. 조 대표님이 못 했다기보다는 성민이가 워낙 아웃풋을 잘 내서입니다만··· 하하.”
“조 대표 그 친구가 많이 서운해 하겠지. 식품회사에 돈 꿔주게 한 건 돈도 안 되는 일이고 이번에 지점 늘리는 것도 내가 나섰으면 애저녁에 했을 일이 아니었나.”
고승주는 스스로도 겸연쩍었는지 어색하게 웃었지만 이대수도 공감하는 바였다. 다섯 계열사들이 부쩍부쩍 크고 있을 때 묵묵히 그룹의 금고를 관리해 온 조영찬 이하 해동종금 임직원들의 사기를 생각하면 내방쳐 둘 수도 없었다.
“지분정리 끝나면 성민이 불러다 말하지.”
“예, 회장님.”
숨을 가다듬은 이대수의 지시에 고승주가 고개를 숙였다.
***
얼마 뒤.
삼청동에 불려간 나는 응접실에서 고승주가 내민 서류철을 받았다.
“안에 있는 계약서마다 서명하고 인감 찍으면 돼.”
“네, 백부님.”
서류철을 펼친 나는 두 장씩 되어 있는 주식교환 계약서 두 부를 살펴본 뒤, 서명을 하고 인주를 묻힌 도장까지 꾹 눌렀다. 내 서명란 위에 이미 할아버지와 이명진의 서명과 인감이 찍힌 걸 보니 두 분은 이미 살펴본 모양이었다.
서명과 날인을 마치고 표지를 덮은 서류철을 넘겨주자 고승주는 미리 준비한 빈 서류철에 내가 가져가야 할 계약서 두 장을 꽂은 뒤, 박태진에게 건네줬다. 박태진이 자리에 앉아서 서류철을 가방에 넣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제부터 해동종금은 성민이 네 회사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이로써 그룹 내에서 나는 해동종금, 이명진은 중공업 계열의 실질적인 지휘자가 되었다. 오늘 교환한 주식 시세에 맞춰서 내야할 세금만 내면 계열분리는 편법 소리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될 것이다.
해동종금 주식의 50퍼센트를 맞추기 위해 내 몫의 해동물산 지분 일부가 할아버지에게 넘어갔지만 상관없었다. 엔고 투기로 해동물산의 가치가 워낙 높아진 덕분에 할아버지와의 주식교환으로 줄어든 양은 얼마 안 됐으니까.
머릿속에서 앞으로 할 일을 정리하던 내게 할아버지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종금에서 빵꾸나는 건 네 지분만큼 메우거라. 정신 바짝 차리고 꾸려야 할 게야.”
“네. 할아버지와 그룹에 누가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주문을 들으니 내가 해동종금의 오너가 됐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남들은 할아버지가 야박하다고 하겠지만 오너는 회사를 소유하는 만큼 책임지는 존재 아닌가?
내가 개처럼 굴러먹었던 신성그룹이야 내 것이 아니었기에 거리낌이 없었지만 지금 물려받은 해동종금은 내 것이다. 당연히 할아버지 말씀대로 회사를 내 몸처럼 가꿀 것이다.
시원시원한 대답에 만족했는지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인제야 우리 집 장손이 집안 살림을 제대로 늘리겠구나, 으허허.”
흐뭇해하는 할아버지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이러나저러나 내 재산 불리느라 집안 밖으로만 나돌았는데도 나를 묵묵히 지켜봐주지 않았나.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중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바로잡았다.
“해서 말인데··· 해동물산이 이번에 벌고 남은 22억 달러는 3년간 네가 관리해봐.”
“네··· 네?”
마냥 좋아서 막둥이처럼 대답하던 중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해동물산의 22억 달러를 내가 관리하라니? 고승주를 비롯한 그룹 비서실에 해동물산 국제금융부처럼 돈 굴리기를 눈덩이 불리듯 하는 인재들도 넘치는데 왜?
할아버지는 화들짝 놀란 나를 보며 소리쳤다.
“뭘 놀라는 게야? 네놈 돈 굴리는 재주면 곧 죽어도 까먹을 일은 없을 게 아니냐?”
“그, 그러긴 한데 갑작스러운 일이라···.”
“중공업 계열사도, 물산도 네놈 덕분에 쑥쑥 컸어. 1년이나마 밑천도 두둑이 챙겨줬으니 종금 살림 좀 키워봐. 조 대표라면 네놈하고 말이 오가지 않아도 잘 통할 게다, 허허.”
껄껄 웃는 할아버지를 보니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조영찬 대표, 나하고 잘 통할까?
***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마친 나는 박태진과 함께 명동에 있는 해동종금 본점으로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어서오너라. 다들 앉아.”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자 조영찬이 손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미안한데 여기 밀크 티 세 잔하고 저번에 본점에서 사온 과자 좀 부탁해요.”
[네, 대표님.]
조영찬은 인터폰에 대고 정중하게 다과를 주문한 뒤, 소파에 와서 앉았다.
“회장님 전화 받았다. 해동종금 주인이 된 소감이 어떠냐?”
“글쎄요··· 어깨가 무거워진 것 같아요, 하하.”
너스레를 떠는 나를 조영찬이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눙치는 건 네 아버지 판박이구나. 명우도 너만큼 젊을 때는 아니지만 나한테 인사하러 왔을 때 그랬지, 하하.”
포마드를 먹여 정갈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에 동그란 금테안경, 멋스럽게 손질한 콧수염, 여기에 애스콧타이까지··· 조영찬의 모습은 관록이 넘치는 금융인 그 자체였다.
껄껄 웃는 조영찬을 보며 겸손하게 미소 짓고 있을 때 직원이 노크를 하고 들어와서는 밀크 티와 쿠키를 우리 앞에 내주고 나갔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대표님.”
차를 마신 나는 희미하게나마 많이 마셔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슨 차인가요? 많이 마셔본 것 같은데.”
“본점에서 사온 골든팁스로 만들었다. 우리 같은 나이에는 우유가 안 들어가면 속이 깎이니 이해해주려무나, 하하.”
너스레를 떨며 껄껄 웃던 조영찬이 웃음을 그치고는 지그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네 녀석이 언제 올지 기다리고 있었어. 명진이도, 형님들도 전부 네 덕분에 돈벼락 맞았는데 종금에 네가 안 와서 어찌나 서운했는지 몰라요, 허허.”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표님. 그래도 22억 불과 함께 왔으니 좋게 봐주십시오, 하하.”
뒷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리며 웃자 조영찬도 껄껄 웃었다.
“그래서 서운한 게 싹 풀렸다. 죄다 종금에 예치할 수는 없겠지만 반절만 있어도 큰 힘이 되지 않겠느냐, 으하하.”
호탕하게 웃던 조영찬을 바라보던 우리는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소재 삼아 담소를 나누며 밀크 티의 부드러운 질감과 은은한 향을 찾는 재미를 즐겼다.
마지막 한 모금을 끝으로 그 재미를 끝낼 무렵, 조영찬이 표정을 가다듬고 물었다.
“회장님하고 고 실장한테 얘기 들었다. 파도가 몰아칠 거라고 했다면서?”
“네, 대표님. 뉴욕에서 일하다보니 정치와 돈은 뗄 수가 없다는 걸 깨닫고 내린 판단입니다.”
올해로 26년째 깨닫고 있는 내용을 처음 깨달은 것처럼 말했지만 조영찬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정치를 휘두르면 정치가 돈을 휘두르고··· 서로가 꼬리잡기를 하는 셈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
하지만 나는 돈에도, 정치에도 잡히고 싶지 않았다. 둘 다 잡고 휘두른다면 몰라도 두 개에 잡혀 휘둘리면 해동의 후계자 자격이 있겠는가. 그런 속마음을 숨긴 채 입을 열었다.
“새겨 듣겠습니다, 대표님.”
“그래. 뉴욕에서 실전을 겪어봤으면 우리 해동종금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얼추 알 테고···.”
조영찬이 말하는 ‘얼추’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해동종금에 돈을 벌어다 줄 자신은 있었다. 그것도 남들이 의심하지 않게.
무슨 말이 나올지 바라보던 중 조영찬의 목소리가 다시 힘을 받았다.
“자금 운용,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으냐? 난 CMA 포트폴리오를 조정해야 한다고 보는데.”
어라? 내 머릿속을 들여다봤나? 나도 가장 먼저 손을 보려고 한 게 CMA 포트폴리오였는데.
뜻이 서로 맞으니 이야기가 잘 풀릴 것 같았다.
“저도 그 부분부터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대표님.”
“호오, 그래? 네 생각부터 들어보고 싶구나.”
“종금형 CMA에서 해외 뮤추얼 펀드 비중을 자금이 견디는 최대치까지 끌어올렸으면 합니다.”
조영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콧수염을 매만졌다.
“해외 뮤추얼 펀드라···.”
종금형 CMA는 안정성 때문에 주로 정부나 1군급 기업의 채권 내지 어음에 투자한다. 허나 자신만 있다면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나 해외 뮤추얼 펀드 비중도 얼마든지 늘릴 수 있고, 예금자보호까지 되는 마법의 투자 상품 되시겠다.
조영찬이 입가에서 손을 떼고 물었다.
“해외 뮤추얼 펀드면 어디를 말하는 거냐?”
“S&P500 인덱스 펀드입니다, 대표님.”
뮤추얼 펀드 중에서도 가장 수수한 인덱스 펀드에 투자하자고 말했지만 조영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미국 증시 성장세도 있겠지만 환율 때문이겠지?”
“대, 대표님?”
조영찬의 대답에 소름이 쫙 돋았다.
S&P 500 인덱스 펀드를 찍은 건 지수상승 차익과 환율 차익까지 챙기기 위함이었다. 고객들의 CMA 예금이야 원화 기준으로 약정금리만 지급하면 그 외의 초과수익은 전부 해동종금의 몫이니 말이다.
마른침을 삼키는 나를 보며 조영찬이 미소를 띠었다.
“뿐만 아니라 재계에서의 눈치도 보일 테고?”
짓궂은 미소를 띤 조영찬의 눈길에 숨이 턱턱 막혔다.
해동종금이 특정 주식에 투자해서 말도 안 되는 수익을 내면 재계에서 배후를 캐려 들까봐 S&P 500에 편입된 모든 종목에 투자하는 인덱스 펀드를 제안했는데 내 모든 의도를 간단히 파악해버릴 줄이야···.
“별 거 아니다. 고 실장이나 네 의견도 도움이 됐지만 나도 아침마다 환율 체크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니 모를 수가 없지.”
“대, 대표님···?”
조영찬은 입이 벌어진 날 보며 피식 웃었다.
“CMA 연이율은 3년간 12퍼센트까지만 올려두마. 시중은행 금리보다는 높아도 자금흐름에는 문제없을 거다. 어떠냐?”
여유 있는 미소를 보이는 조영찬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할아버지가 조영찬과 내가 말하지 않아도 통할 거라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