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19th. 뭉쳐야 산다 (1)
고승주는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방에 홀로 남아서 인삼주를 들이켰다. 정치꾼들과 있을 때 구정물을 머금은 것처럼 역겨웠던 기분이 이제야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가볍게 숨을 내쉰 그가 전화기를 들었다.
“예, 회장님. 여당 놈들은 처리했습니다.”
[그것들 상대하느라 고생했네.]
“아닙니다, 회장님. 이제 시작인데 고생이랄 게 뭐가 있습니까? 아직 팔팔합니다, 하하.”
[노인네 서럽게 만드는 재주는 뛰어나구먼, 허허.]
껄껄 웃는 고승주와 이대수.
두 사람을 비롯한 해동그룹이 정치자금을 건넬 곳은 여당만이 아니었다.
전라도를 기반으로 하는 제 1야당에 150억, 충청도의 맹주인 제 2야당에 100억을 건네야 정당 차원의 정치헌금이 끝난다. 여기에 해동그룹의 백화점, 공장, 컨테이너터미널 등이 있는 도시마다 돈을 찔러줘야 모든 작업이 마무리 된다.
정치인들이 거리낌 없이 해동그룹 돈을 받아먹을 수 있는 건 예전부터 검찰, 국세청조차도 추적이 불가능한 돈이기 때문이었다. 명동 사채시장에서 돌아다니는 현금을 던져주니 추적할 수가 있겠는가?
껄껄 웃는 두 사람 모두 선거가 어찌됐든 해동그룹의 사세 확장은 문제없을 거라 여기고 있었다.
***
며칠 뒤.
정치자금 문제를 처리한 고승주는 이대수의 지시를 처리하기 위해 아침부터 이명진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형님께서 여긴 어떻게···?”
책상 앞에 앉아서 결재판에 서명을 하던 이명진이 고개를들자 고승주가 피식 웃었다.
“못 올 데 온 것도 아닌데 뭐. 커피 한 잔 얻어 마셔도 되지? 하하.”
“예··· 여기 커피 두 잔만 갖다 줘요.”
인터폰 버튼을 손에서 뗀 이명진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여전히 의아한 눈길로 고승주를 바라봤다.
하루 종일 비서실에 틀어박혀 그룹 계열사 업무를 조율하거나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느라 10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는 고승주다. 이명진은 그런 그가 아침부터 커피 한 잔 마시러 사무실에 올 리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긴장 속의 평화랄까 두 사람은 옅은 미소를 띤 채 직원이 내 온 커피를 마셨다.
“어제부로 정치자금 전달은 전부 끝났다. 선거 끝나면 지하철 2호선 공사 입찰 넣어봐, 하하.”
“감사합니다, 형님. 저도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이명진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고승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먼저 간 형만큼 의지하는 큰형 같은 사람이 늘 아버지나 자신을 대신해서 궂은일을 하는 데 염치가 없었다.
고개를 든 그를 보며 고승주가 빙긋 웃었다.
“강남터미널, 지하철 공사까지 계산하고 설계했잖냐. 그거 본전은 뽑아야지. 언제까지 경상도에서 일 못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건 그렇습니다. 공사라고 해봐야 부산 서면점에 인천, 부산 물류창고 빼면 외부 공사는 한 번도 못했으니···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형님.”
고승주는 다시 한 번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이명진을 부드럽게 바라봤다.
냉정하게 보면 오너와 고용인의 관계지만 큰형처럼 자신을 대해주는 그의 모습을 보면 가끔은 자신이 이 집안의 장남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스스로도 주제넘은 생각이라 여겼는지 고승주는 잔을 내려놓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명진아.”
“네, 형님.”
고승주는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연말부터 그룹 지배구조를 변경할 거다.”
“···예?”
“회장님 지시사항이야. 네가 가진 종금 지분하고 성민이 중공업 계열사 지분 바꾸고, 물산에 있는 중공업 계열사 지분을 지주회사로 분리하라고 하셨다.”
그 뒤로도 해동물산과 중공업 계열 지주회사, 해동종금의 지분율 조정을 듣고 이명진의 얼굴이 굳었다.
“지배구조 개편, 막아주십시오. 형님.”
“너도 슬슬 독립할 때가 됐어. 회장님께서 너나 성민이가 스스로 가장 노릇할 기회를 줬는데 왜 거절하는 거냐? 지주회사 분리할 때 주식만 넘겨주는 것도 아닌데.”
고승주는 이명진이 조금 더 용기를 내서 홀로서길 원했다. 이명우의 그늘에 가려졌지만 해동의 후계자답게 남 부끄럽지 않은 이명진 아닌가? 독립할 밑천까지 두둑이 떼어주고 완전히 분리하는 것도 아닌데 왜 고사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명진은 안타까움과 의아함이 가득한 고승주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아버지께서 우리 어릴 때부터 들려주신 스키타이 왕의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화살 한 대는 꺾기 쉽지만 다발로 묶인 화살은 꺾기 힘들다는 거?”
“그렇습니다, 형님. 분명히 우리 해동이 이번에 돈을 많이 벌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이럴 때일수록 물산을 중심으로 단단히 뭉쳐도 부족한데 회사를 쪼개다니요?”
이명진과 달리 고승주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래도 우린 이제 그 시절의 까까머리 학생들이 아니다, 명진아. 경영자로서의 의견을 말해봐. 회장님, 네 아버지시기 전에 이 나라 경제를 이끄는 분이다.”
고승주의 말대로 이명진에게 이대수는 늘 존경하는 아버지’이면서도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역이었다. 그런 이대수를 설득하려면 그 시절의 고사보다는 경영자로서 확실한 근거가 필요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이명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 뒤에 숨겨진 금고를 열었다. 그 안에서 서류철 하나를 집어온 그는 고승주에게 그 서류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
“중공업 계열사 기획실 네 곳에서 합동으로 만든 문건입니다. 보시고 얘기했으면 합니다.”
‘중공업 부문 향후 실적 전망’이라는 제목에서 낯선 싸늘함을 느꼈는지 고승주는 굳은 표정으로 서류철을 펼쳤다.
“상황이 안 좋군.”
이명진은 서류를 보면서 침음성을 흘리는 고승주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언젠가는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도 있고요. 하지만 전망이 안 좋습니다.”
이명진은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마셨다. 식은 커피에서 신맛이 올라와서일까 이명진은 미간을 찡그렸다.
“해외공사 실적은 괜찮지만 요즘 들어 엔화 값이 떨어진 바람에 제강과 중공업 기획실에서는 제강과 중공업의 매출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겠지. 둘 다 일본하고 경쟁하고 있잖냐. 비서실에서도 환율 체크하면서 짚이긴 했는데 두 회사 기획실까지 그렇게 봤으면 더 볼 것도 없어.”
산업의 쌀인 철강재를 만지는 해동제강.
금형이나 밀링머신 등 각종 공작기계를 만드는 해동중공업.
두 회사의 실적이 안 좋다는 건 수출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 다시 말해 경제성장에 적신호가 걸렸다는 뜻이다. 고승주가 보는 문건은 그 시그널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두 회사 수금이 조금씩 삐걱거리고 있습니다. 특히 아도그룹에서 받은 어음은 은행에서도 알게 모르게 할인이 까다롭고요.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형님.”
자신이 이끄는 계열사 전망이 부정적이라는 건 경영자로서 책잡힐 일이다. 그 원인 중 하나인 아도그룹의 부실 문제는 극비사항이었기에 고승주는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명진이가 건네준 문건으로 대한민국 경제 전체를 가늠해보면 상황이 안 좋아. 지배구조 개편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군. 최악의 경우에는 폐기해야 할 수도···.’
고승주의 머리가 부지런히 굴러가는 와중에도 이명진은 가감 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동화그룹 최원철이 같은 놈도 회장 명함 뿌리는데 저라고 안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래도 회사라는 게 자존심만으로 굴리는 게 아니잖습니까? 회사 식구들하고 그 가족들은 어쩌고요?”
이명진이 지금 하는 말은 위선이 아니었다. 무책임한 포용도 안 되지만 한 번 책임지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함께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명진이기에 집안, 그룹, 임직원들과 그 가족들의 삶을 지키고자 지배구조 개편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룹 계열사들이 해동물산을 중심으로 단단히 묶여있으면 부러질 일이 없으니까.
“차라리 지배구조를 바꾸실 거면 해동종금만 정리해주십시오. 종금이야 인원도 적고 그룹에서 예금 밀어주고 있으니 한 고비는 넘기지 않겠습니까?”
자신은 분가를 거부하면서 이성민은 분가를 시키라는 말에 고승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지배구조 바꾸고, 그룹에서 성민이 밀어내려고?”
지배구조를 개편하면 주식교환은 불가피하다. 이명진의 안대로 해동종금만 정리되면 해동물산이나 다른 계열사에 있는 이성민 지분은 이명진에게 흘러들어간다.
그렇게 되면 향후 경영 승계에서 이명진이 좀 더 유리해진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고승주는 이명진이 곱게 안 보였다.
이명진은 고승주가 쏘아대는 눈빛을 받자마자 황급히 두 손을 들어 흔들었다.
“해동물산이 제 몫 아닌 거 압니다, 형님! 먼저 간 형이 물려받을 회사였는데 성민이 몫으로 남겨야죠? 형하고 제가 이라크 가기 전에 약속했던 거, 형님이 공증 서셨잖습니까?”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의 이명진을 보고 고승주가 눈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이란과 싸우던 당시의 이라크 송유관 공사 현장에서 누구 하나 잘못되면 나머지 가족들을 책임지자고 이명진, 이명우 형제가 한 약속의 공증인이 아니었나?
“성민이, 우리 집안 장손이기도 하지만 제일 똘똘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해동물산은 성민이 회사입니다, 형님.”
“정말 욕심 없는 거냐?”
고승주의 질문에 이명진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가올 위기를 넘기고 나서 분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때, 독립할 밑천만 챙겨주시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이명진은 오늘 따라 말이 길어져서인지 말라붙은 입을 커피로 적시고 말을 이었다.
“나는 나를 잘 압니다, 형님. 나도 모자라서 내 자식들까지 죄다 기술만 파고 들려고 합니다. 우리 애들, 형님도 봐서 아시잖습니까?”
“알지. 성아가 공대 가겠다고 난리쳐서 네 머리 아프게 했잖냐.”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피는 못 속인다고 이명진의 자식들은 아들이고 딸이고 죄다 서울대 공대를 목표로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고승주는 어색한 미소만 띠었다.
“그러니 물건 만들어 파는 거라면 몰라도 물산이나 종금처럼 돈으로 돈 버는 일은 자신도 없고, 적성에도 안 맞습니다. 혹여나 잘못되면 아버지하고 형 볼 낯이 없어요.”
대대로 물려받은 가업을 말아먹는 것만큼 기업가에게 수치스러운 일도 없다. 그 생각이 신념이기도 한 이명진은 해동물산과 해동종금을 맡을 생각이 단 한 점도 없었다.
“무엇보다 성민이, 타고난 재주도 좋고 뉴욕에서 돈 다루는 것도 배우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그 정도면 언제가 됐든 종금과 물산을 맡아도 될 거라 봅니다.”
이명진도 그룹 수뇌부이기에 이번 엔고 투기 때 스탠더드가 동참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배팅에도 이성민이 어느 정도 개입됐을 거라 짐작했기에, 스탠더드 캐피털 내에서도 입지가 제법 될 거라 여겼기에 안심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고승주도 이성민에 대해서는 이명진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하고 질문을 이어갔다.
“명동 사채조직은?”
“물산, 종금도 버거운데 닳고 단 그 쩐주 양반들 관리하는 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게다가 그 돈, 형님도 아시다시피 이 나라 경제를 그늘진 곳에서 받치는 뿌리입니다. 가끔 돈 막힐 때 급전만 융통받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이명진의 단호한 사양에 고승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명진이 건네준 서류철을 손에 쥔 건 물론이었다.
“알았다.”
그 말을 끝으로 이명진의 방을 나온 고승주는 해동의 나머지 후계자가 이대수의 지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졌다.
***
집에 있는 정원 의자에 앉아서 모처럼 만의 여유를 즐기던 나는 박태진이 건네준 전화기를 받고 가슴이 철렁했다.
“지분정리요? 네. 숙부님께서는···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백부님. ···당장은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말이 좋아 지배구조 개편이지, 반쯤 계열분리를 하겠다는 게 아닌가? 그나마 이명진이 결사반대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내게 들려준 스키타이 왕의 이야기처럼 화살 한 대는 쉽게 꺾여도 화살 다발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나 또한 우리 집안의 굳건한 결속력과 우리 그룹의 확고한 지배구조를 가장 큰 무기라고 믿으니 아직은 화살다발을 나눌 때가 아니었다.
전화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박태진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련님?”
“할아버지께서 지배구조를 개편하실 거래요.”
나는 고승주에게서 전해들은 내용을 하나부터 끝까지 박태진에게 들려줬다. 얘기가 끝나자 박태진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워졌다.
“로이스 경 앞에서 말씀하신 게 걸리시는 겁니까?”
“다른 놈들은 미쳤다고 하겠지만 나는 올 거라 봐요. 할아버지, 말려야 하는데···.”
다가올 파도를 헤쳐가려면 지배구조 개편을 막아야 한다.
지배구조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지출될 돈이야 그리 많이 안 깨지겠지만 내가 아는 2년 뒤가 되면 그 돈조차도 아쉬워질 테니 말이다.
오히려 우리 집안사람들이 갖고 있는 중공업 계열사 지분을 전부 해동물산으로 몰아서 장부상으로나마 자산을 늘려도 모자라다. 그런데 지배구조 개편이라니···.
한숨을 내쉬던 나는 고개를 들어 박태진을 바라봤다.
“할아버지 마음 돌리려면 백부님부터 시작해야겠죠?”
“그럴 겁니다. 그룹 자금운용이나 지배구조 관련 사항은 늘 실장님과 의논하시니까요.”
역시나였다. 고승주부터 설득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다.
“스탠더드 캐피털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겠죠?”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해야 합니다, 도련님. 해동그룹은 집안 재산이지만 스탠더드 캐피털은 도련님 재산 아닙니까? 어쩌면 마지막 동아줄이 될지도 모르니 신중하셔야 합니다.”
박태진의 단호한 비토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냉수 한 컵을 마시며 달궈진 머리를 식혔다. 소파에 앉아서 손톱을 팔걸이로 두들기던 나는 팔걸이를 내려쳤다.
“거짓말 한 번 더 해야겠네요.”
화살다발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할까. 세 치 혓바닥으로 거짓말을 해서라도 화살다발을 묶어둔다면 몇 번이라도 거짓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