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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59화 (58/229)

59화. 18th. 뿌린 대로 거둔다기엔 (5)

“···장호건 첫째 딸 장하연?”

“네.”

“너 자동차에 환장했을 때 무지하게 싸웠잖아? 헤어진 거 아니었어?”

“병원에서 눈 뜨고 화해했어요, 하하.”

벙찐 표정의 선해철을 보며 웃던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들려줬다. 선해철은 이야기를 다 듣고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래서 신성하고 거래한 거였어?”

“네. 누나도, 저도 서로 주고받은 거예요. 어느 쪽이 더 이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장호건 딸내미하고 사귄다니 어째 찜찜해. 장호건 그 인간, 우리가 돈 떼먹을 줄 알고 참관인까지 보냈어. 그런 양반을 장인으로 두면 감당할 수 있겠냐?”

“해봐야죠. 우리 집안도 계속 크고 있으니까 처가살이는 못 시키지 않을까요?”

나는 장호건의 사위가 되겠다고 했지, 처가살이를 하겠다고 한 게 아니다. 우리 집안이 쑥쑥 크고 있는데 미쳤다고 처 월드 신세를 지겠나? 밟아 뭉개도 시원치 않을 족속들인데.

선해철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나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 참, 네가 한 걸 보면 허풍이 아닌 것 같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알았다. 청춘사업, 열심히 잘 해봐.”

잘해야죠.

잘해야 하고.

잘하고 싶고.

잘해낼 겁니다.

***

그날 오후에 장하연과 만난 나는 그 다음 날부터 그녀와 함께 매일 아침 7시부터 남산 근처에서 조깅을 했다.

그동안 못 봤으니 매일 아침마다 봤으면 좋겠다고 해서 콜을 불렀는데··· 십여 일이 지난 4월 28일 아침에도 이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누, 누나! 천천히 좀 뛰어!”

그녀의 뒤를 쫓아가던 나는 턱밑까지 숨이 차올라서 다리를 멈추고 헉헉거렸다. 황영조, 이봉주도 아니고 뭘 저리 잘 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장하연을 뒤돌아서서 나를 보고는 혀를 찼다.

“왜 이렇게 부실해진 거야? 선배님, 성민이 뉴욕에 있을 때 운동 안 했어요?”

“워낙 일이 많아서 장시간 조깅은 거의 못하고 웨이트만 조금씩 했습니다, 상무님.”

뒤에 있던 박태진은 대답을 한 뒤, 나를 안쓰럽다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뉴욕에 있을 때 돈 버느라 운동할 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제 외환시장은 24시간 열려 있는 전쟁터다. 쉴 틈이 언제 나겠나? 나나 박태진, 스탠더드 캐피털의 모든 직원들은 세계 각지의 외환시장에서 엔화를 사들이느라 사무실에 야전침상을 깔고 반강제로 합숙을 해야 했다.

그러면 주말은 뭐했냐는 소리가 나올 수 있지만 시차를 이용하면 뉴욕과 런던 외환시장이 주말 휴장일 때도 다른 지역 외환시장에서 거래가 가능하다.

덕분에 일요일에도 새벽부터 컴퓨터를 켜고 다른 지역 외환시장에서 엔화를 사들였으니 쉬는 날이라곤 토요일뿐이었다.

그나마 토요일조차도 주간 결산에 그 다음 주 계획을 짜는 날이었으니 올해 1분기 스케줄은 말 그대로 살인적이었다. 그러니 각 잡고 운동할 시간이 얼마나 있었겠나. 짬짬이 푸시 업에 스쿼트, 크런치 정도만 한 게 고작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숨을 고른 나는 허리를 세웠다. 그런 내 눈에는 나를 가엾게 바라보는 장하연의 눈이 보였다.

“눈 밑에 다크서클 진 거 봐. 맨날 일만 했어? 몸 좀 챙기지.”

“아침마다 브로콜리 주스 마셨는데도 그러네. 이제는 급한 일도 끝났으니까 관리 좀 할까봐, 하하.”

내 여자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웃던 중 박태진은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네, 회장님. 지금 조깅 중입··· 예? ···예. 알겠습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무거워졌다. 설마?

“무슨 일이에요?”

“회장님께서 찾으셨습니다, 도련님. 지금 바로 삼청동에 들어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하는 표정과 목소리를 보니 내 예감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박태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장하연에게 말했다.

“누나, 미안한데 오늘 조깅은 여기까지만 하자.”

“빨리 가 봐. 회장님 기다리실라.”

박태진도 장하연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상무님. 내일 뵙겠습니다.”

“아니에요, 선배님. 내일 뵐게요.”

그 길로 차에 탄 나와 박태진은 이태원 집에 들러서 빛의 속도로 샤워를 한 뒤, 삼청동으로 넘어갔다. 응접실에 들어가니 상석의 할아버지 양쪽으로 원로 대표 세 사람과 고승주, 이명진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아니다. 둘 다 앉거라.”

할아버지가 손을 내젓는 걸 보고 우리 둘은 가장 아랫자리에 마주앉았다.

“태 대표, 시작해.”

“예, 회장님. 방금 전에 대구 지하철 1호선 공사 현장에서 가스폭발 사고가 터졌다고 합니다.”

태재호의 발언을 듣고 모두들 탄식하거나 눈을 감는 등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현지에 파견했던 점포개발부 담당자가 현장을 확인하고 연락했는데 사망자만 수백 명은 될 거라고 합니다. 또한···.”

태재호의 현지상황 보고가 끝나자 할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사 새옹지마라더니 기분이 묘하구먼.”

모두들 같은 심정일 것이다. 이 자리의 사람들 모두 전라도 출신 기업이라고 영남 군사독재정권 밑에서 온갖 불이익을 당해왔던 해동그룹의 수뇌부 아닌가? 울어줘야 할 이유도 없지만 웃을 수도 없었다.

“그룹 명의로 삼백억 내. 그놈들한텐 여전히 전라도 것들이겠지만 사람 도리는 해야 하지 않겠나. 내년부터 그 동네에서 장사할 기름칠이라 생각하자고.”

할아버지는 ‘사업과 연결된 인간적인 조치’를 지시하고는 턱을 괸 채 다른 손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이제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대구경북 민심이 사나워지겠구먼. 여당 놈들, 바짝 쫄겠어.”

“그럴 겁니다, 회장님. 수도권이나 호남, 충청에서는 이명진 사장 덕분에 한 번도 안 난 시설사고가 여당 텃밭에서 터졌으니 선거판에 홀대론이 나올 겁니다.”

고승주의 전망은 정확했다. 전생에도 이 사건 때문에 여당에서 공천을 못 받은 대구경북 지역 무소속 후보들이 ‘홀대론’을 팔아먹은 덕분에 이번 지방선거에서 대거 당선되지 않았나. 역사는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당장 여의도 놈들 만나서 국채 매각 협의하고 선거자금 뿌리도록 해, 고 실장. 여당이고 야당이고 지금 엽전 쥐여 주면 이마가 땅에 닿게 절할 게야.”

이익을 얻을 기회였지만 그 기회가 비극에서 비롯됐기에 모두들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그 같잖은 양심이 내 마음을 사포처럼 비벼댔다. 빌어먹을.

***

그렇게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박태진에게 부탁해서 임수웅 신부가 있는 성당으로 갔다.

“도쿄에서의 일 때문입니까, 도련님?”

박태진은 아직도 내가 고베대지진 때문에 돈을 벌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여긴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쓴웃음만 짓고 혼자서 차를 나와 본당으로 들어갔다.

“요한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수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굳은 내 얼굴을 보고 수녀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입니다, 형제님. 어디··· 안 좋으신지요?”

“···고해소에서 신부님을 뵙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수녀님.”

이렇게라도 안 하면 그 양심의 사포질을 못 견뎌낼 것 같았다. 수녀님은 내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르코님 장손께서 부탁하신 일이니 말씀드리지요.”

수녀님이 나간 사이, 한숨을 내쉬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본당으로 들어온 임수웅 신부를 보고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부님.”

“요한 형제가 나한테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고?”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간절한 내 눈빛을 보고 임수웅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조부님이신 마르코 형제님도 예전에 날 찾아와서 고해성사를 부탁하셨었지.”

“할아버지께서요?”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며 임수웅 신부가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자네가 더 잘 알게 아닌가? 그늘진 땅과 볕 드는 땅 모두를 가꾸는 일.”

“아···.”

탄성을 흘리던 나는 할아버지 또한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볕 드는 땅에서는 재벌 총수지만 그늘진 땅에서는 이 나라 최대 사채조직의 수장이니 그 이중적인 삶에 내면의 갈등이 얼마나 심했겠나.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 나를 보며 임수웅 신부가 미소를 띠었다.

“마르코 형제님 일이 떳떳한 일은 아니지. 허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야 하지 않겠나. 늘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늘진 땅에서 나름의 선을 지키고 계시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네. 들어가세.”

고해소로 들어간 나는 칸막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기도를 올린 뒤, 내 죄를 밝혔다.

“···한 번이라도 어른들께 말씀드렸다면 이번 사고는 없었을 것입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은 죄를 고백하나이다.”

이번 참사에 대해 알리지 않은 죄는 고백했지만 회귀자로서의 원죄, 내 본모습을 숨긴 원죄는 끝끝내 밝히지 못했다. 빌어먹을.

스스로의 위선에 욕지기가 올라오는 것 같던 내게 칸막이 너머 임수웅 신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제님은 이제 겨우 스물다섯의 청년일 뿐이오.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짊어지려고 하지 마시오. 그건 곧 하느님을 흉내 내는 것, 다시 말해 교만이라는 칠죄종(七罪宗)을 저지르는 것이니 말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신부님.”

“한 가지 조언을 주자면 이 현실 속에서 형제님 나름의 선을 정하고 지키길 바라오.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형제님은 그 죄업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오.”

훈계와 보속을 끝으로 임수웅 신부는 나에게 통회기도를 올리게 했고, 기도가 끝나자마자 커튼을 걷고 사죄경을 내려줬다.

이런다고 사람이 다치고, 사람이 죽는 것을 방관한 내 죄업이 씻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내 죄를 고백했다는 것, 그리고 그 죄를 덜어낼 나름의 해법을 받았다는 점에서 작게나마 면죄부를 받은 것 같음에 위안을 얻을 뿐이었다.

***

그날 점심.

고승주는 교외의 한 가든식 식당에서 대통령의 측근인 여당의 두 중진의원과 만나고 있었다.

“사, 삼백 억이요?”

“예. 이번에 터진 참사 때문에 많이 곤혹스러우신 줄 알고 있습니다. 미약하게나마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회장님 전언이 있었습니다.”

“허허, 이거 참···.”

300억 원이면 미약한 보탬이 아니라 큰 보탬이었다. 자그마치 압구정 태현아파트 예순 채 값이 아닌가?

대구에서 그 난리가 난 통에 텃밭 민심이 사나워져서 골머리가 아픈 여당에게 300억 원은 효과 직빵의 두통약이었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인삼주를 비우거나 한우구이를 씹는 정치꾼들과 달리 고승주는 태연자약하게 술잔을 비웠다.

평소라면 몰라도 선거철은 정치인들이 을, 돈줄 틀어쥔 재벌들이 갑이 되는 시기다. 그 어느 때보다 여당이 핀치에 몰렸기에 고승주는 갑의 여유를 더더욱 만끽하고 있었다.

잔을 비운 여당 의원 중 4선의 국회의원이 숨을 내쉬었다. 넥타이까지 헐겁게 하는 게 술을 마시든, 얘기를 하든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것 같았다.

“고 실장님이나 이 회장님께서 우릴 도와주시는 게 믿기지가 않네요. 지난번 건만 해도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린 건데.”

“별 말씀을. 그건 어디까지나 기브 앤 테이크 아니었습니까? 하하.”

겉으로는 껄껄 웃어도 고승주는 속으로 이가 갈렸다.

국고채를 팔아도 억지로 분식을 메우느라 쓴 2천억은 회수할 방법이 없다. 날려먹은 2천억 이상으로 여의도 놈들에게서 뽑아먹을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우리 그룹에서 보유 중인 국고채를 해외에 매각하고자 합니다.”

고승주의 제안에 두 국회의원의 눈이 번쩍거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국고채를 해외에 매각하는 일이니 좋은 냄새가 솔솔 풍기는 일 아닌가?

“덩어리가 꽤 큰 줄 아는데··· 할 수 있겠습니까?”

“운이 좋았는지 저번에 우리 그룹과 거래를 텄던 트라이엄프 캐피털에서 관심을 보였습니다. 한국 국채 정도면 투자가치가 충분하다고 하더군요.”

“호오···.”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는 의원들을 보며 고승주는 말을 이었다.

“채권을 매각하고 나면 세후 차익이 약 1천억 원일 겁니다. 종금사 최초로 해외에 채권을 팔아서 1억 불 이상을 벌어들인 사례도 되고 세금도 두둑이 내게 될 테니 선거에 도움이 되시지 않을까 합니다.”

“아이고, 거기까지 배려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그려.”

“이거 번번이 신세만 져서 미안합니다, 허허.”

입으로는 고승주의 얼굴에 금칠을 해줘도 두 국회의원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선거자금 300억 원에 선거전에 써먹을 치적까지 제공했으니 뭘 요구할까 싶었다.

두 국회의원 중 4선 국회의원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데 해동그룹에 뭐라도 도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기탄없이 말해보시지요.”

고승주는 속으로 슬며시 웃으면서도 조금은 머뭇거리는 체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해동종금은 지금까지 그룹차원에서 예금 모집에 힘쓰면서도 배당 한 번 없이 자본 확충에 집중했습니다. 덕분에 축적된 자기자본만 수천억 원입니다.”

“알지요. 다른 종금사들의 열 배가 훨씬 넘잖습니까?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국고채 인수를 부탁드렸습니다, 하하.”

또다시 나온 국고채 인수 얘기에 고승주는 순간 울컥할 뻔했다. 저 뻔뻔한 두 놈의 면상에 불판에서 익고 있는 한우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던지고 싶었으나 겨우 참고 입을 열었다.

“예.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그런 해동종금이니 추가로 지점을 내는 걸 통과시켜주셨으면 합니다.”

“흐음···.”

얘기를 듣던 국회의원이 팔짱을 낀 채 침음성을 흘렸다.

해동종금의 자본이 탄탄한 건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고그룹 정택주에게서 정치자금을 받아먹고 국고채를 해동종금에 떠넘기자고 하지 않았나.

여기에 행정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자신의 힘이면 증권관리위원회를 비롯한 소관기관들에 입김 한 번 넣는 걸로 끝날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출점할 지점의 수였다. 10여 개라면 모를까, 수십 개의 점포를 한꺼번에 개설하게 해달라면 곤란했다.

“몇 개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다다이익선이겠지만 고양, 성남, 인천, 수원, 화성, 평택, 대전, 전주, 광주, 목포, 여수, 창원, 부산에는 지점을 내고 싶습니다.”

고승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수첩을 꺼내 자신이 말한 도시 이름들을 적은 뒤, 깔끔하게 뜯어서 국회의원에게 내밀었다. 쪽지를 살펴본 국회의원은 잠시 머리를 굴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해동종금 같은 모범기업이 클 수 있는 일이니 응당 도와드려야지요, 허허. 또 다른 건 없습니까?”

“향후 개통될 대구 지하철 2호선 공사에 해동건설도 참여했으면 합니다.”

지하철 공사라는 말에 4선 국회의원의 표정이 굳었다.

“관급공사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 실장님. 해동건설이 건실한 기업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지역에 공헌하는 업체들과 상생하는 일인 걸 알잖습니까?”

“선거자금도 후원해주시고 유세에 도움이 될 재료까지 주신 건 감사하지만 그건 어려울 듯합니다.”

옆에 있던 3선 의원도 말끝을 흐리며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건설교통위원회 소속인지라 지난 공사 입찰 때부터 이번 2호선 입찰까지 현지 건설업체들에게서 받아먹은 돈이 한두 푼이 아닌 걸 고승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두 분 노고가 얼마나 크신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두 분 트렁크에 사과박스 네 개씩 채워드렸으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두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사과박스 네 개씩이면 각자 10억 원씩 챙겨줬다는 게 아닌가?

그 어떤 건설업체들도 당에 전달하는 돈과 달리 자신들의 차 트렁크에 사과박스를 두 개 이상 채워준 적이 없기에 그들의 양쪽 입꼬리가 위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고, 이거 우리가 해동건설, 아니 해동그룹의 역량을 과소평가한 것 같습니다, 허허.”

“역량은 충분히 입증됐으니 2호선 입찰에 들어오시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하.”

“의원님들께서 그리 평가해주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대신.”

정치꾼들이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태도를 바꾸자 고승주는 말을 멈춘 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두 사람을 보며 빙긋 웃었다.

“공사는 건실하게 하겠습니다. 대통령님께서 해동에 진 얼룩을 지울 기회를 주셨으니 깨끗하게 사업하면서 신한국 창조에 보탬이 돼야지요, 하하.”

“아하하하··· 그렇지요.”

어색하게 웃으며 잔을 든 두 의원의 눈에 실망이 스쳐지나갔다. 공사에서 떨어질 떡고물은 일절 없을 거란 말이 아닌가? 고승주는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떡고물을 던져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와 별개로 해동건설이 경상도에서 좋은 공사를 딸 때마다 의원님들 차 트렁크에는 맛 좋은 사과들이 가득할 겁니다. 자! 드시지요.”

“이거, 우리 고 실장님과 이 회장님의 깊은 뜻을 잘못 짚은 것 같소이다, 허허.”

“아무렴요. 해동그룹이야 말로 바다처럼 넓고 깊은 곳이 아닙니까? 하하.”

다시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의원들은 고승주와 잔을 부딪친 뒤 고개까지 젖혀가며 호쾌하게 잔을 비웠다.

고승주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경멸하면서도 웃으며 잔을 비워야 했다. 해동그룹이 더 클 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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