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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57화 (56/229)

57화. 18th. 뿌린 대로 거둔다기엔 (3)

그 중 가장 말문을 튼 건 선해철이었다.

“지금··· 금융위기 터질 거라는 거냐?”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민주당이 미는 게 IT하고 미디어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름을 붙인다면 아시아 금융위기가 되겠네요.”

클린턴 행정부와 민주당은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 그리고 월가를 뒷배로 두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까지 뒷받침하는 월가는 단순한 뒷배를 넘어 상전과 같은 존재다.

선해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하는 사이에 박태진이 뒤를 이었다.

“도련님, 그래도 우리나라는 곧 있으면 OECD 가입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도 1만 달러를 바라보고 있는데···.”

내 예측이 지나쳤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그 1만 달러, 외환보유고 풀어서 만든 거잖아요. 내수시장은 몰라도 무역수지는 엉망일 걸요? 며칠 전에 발표된 역 플라자 합의는 또 어떻고요?”

이명진 덕분에 건설 관련 사고가 격감했어도 온갖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서 ‘사고 공화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당연히 정부와 여당은 그런 흠집에서 국민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경제적 성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국민소득 1만 달러’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오늘도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은 원-달러 환율을 정성껏 조작하고 있을 것이다. 외화를 낭비해가면서.

여기에 한국 기업들은 일본 기업들과 대미 수출품목이 겹치면서도 품질, 브랜드가치 등 뭐 하나 나은 게 없다.

설상가상으로 며칠 전에 타결된 ‘역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낮아지면 가격경쟁력까지 떨어지니 무역적자는 불 보듯 뻔하다. 내가 겪은 미래는 안 바뀔 것이다.

원안에 비해 꽤 심각한 얘기가 튀어나왔지만 헨리는 몇 바퀴 돌린 코냑 글라스를 코에 대고 향을 음미했다.

“또 다른 문제는 없나?”

“있습니다. 종금사죠.”

“종금사? 그게 무슨 회사인가?”

미국사람인 헨리가 종금사를 알 리가 없다.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생각하다 그놈들이 저지를 짓거리에 머리가 아파서 코냑을 단숨에 비웠다. 잔을 입에서 뗀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외자 유치를 위해 세운 금융회사입니다. 증권 중개와 보험업을 뺀 모든 금융 업무를 다루는데 주 수입원은 대출 이자입니다.”

“유럽의 유니버설 뱅킹과 비슷하군. 그런 걸 하려면 자본과 노하우가 많이 필요할 텐데···.”

“그 점이 문제입니다, 헨리. 은행처럼 예금을 받아서 대출을 해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업자금은 선진국에서 끌어온 저금리 단기자금입니다.”

헨리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패였다.

“듣기만 해도 그림이 그려지는군. 남의 돈을 빌려서 돈놀이를 하다니··· 선진국에서 빌린 대출의 연장이든, 한국이나 개도국에 나간 대출의 회수든 하나라도 톱니가 안 맞으면 순식간에 고장 나겠어.”

모노클 너머로 보이는 헨리의 눈은 경멸로 가득했다. 엔고투기를 제외하면 건전하다 못해 보수적인 투자를 지향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종금사가 얼마나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지 알아채버렸다.

“그래도 초기 6개 사는 비교적 꼼꼼하게 회수 대책을 세우고 대출을 해주지만 작년에 생긴 9개 사나 내년에 생길 15개가 문제입니다.”

“얼마나 심각하기에 그리 말하는 건가? 자네 말대로 그 6개 사처럼만 운영되면 딱히 위험하진 않을 듯한데.”

헨리의 눈썹이 물결쳤다. 지금껏 종금사가 위험하다고 했는데 일반 시중은행처럼 영업을 한다니 앞뒤가 안 맞는다고 여긴 것 같았지만 핵심은 지금부터였다.

“그놈들은 제도권에 들어온 사채업자들입니다. 작년에 추가된 9개 사 모두 동남아와 러시아 정크 본드를 만지고 있죠. 내년에 추가될 15개 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똑같은 사채업자들이니까요.”

외환위기는 지금부터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다. 일본과의 수출경쟁에서 밀릴 마당에 고금리를 노리고 남의 돈을 빌려다 부실채권에 투자하는 것도 미친 짓인데 고승주가 말한 한고제철 문제까지 있으니 백 퍼센트다.

그때서야 헨리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네. 사태가 아직 촉발되지는 않았지만 위험징후가 보이니 피하고 싶다는 거군.”

“그런 셈이죠. 한국 원화가 휴지조각이 될 지도 모를 판국에 믿을 건 미국 달러와 영국 파운드, 프랑스 프랑과 독일 마르크 아니겠습니까?”

소련이 망한 이래로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미국 달러를 비롯한 선진국 화폐뿐이다. 지금처럼 원화 대비 달러가 싼 적은 앞으로 절대 없으니 내게는 더없는 호기였다.

나는 앞에 있는 물 컵으로 목을 축인 뒤 본론을 꺼냈다.

“기왕이면 당신과 적대적인 주주 가문들에게 파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직은 다들 눈치 채지 못했을 테니까요.”

헨리는 내 제안을 듣고 입꼬리를 올렸다.

“조니 자네, 악당이 따로 없군. 돈을 받고 폭탄을 팔자니.”

“친구는 귀하게 대하고 적은 물 먹이는 거, 당연한 생리잖습니까? 하하.”

헨리가 내 손을 잡지 않았다면 몰라도 나와 헨리는 한 배를 탄 동지요, 친구다. 기왕 떠넘겨야 할 폭탄이라면 내 친구의 적에게 넘기는 게 낫지 않겠나? 아주 비싸게.

헨리는 빙긋 미소를 띠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가시지 않았는지 내게 물었다.

“썬에게서 듣기로는 자네 집안도 그 종금사를 갖고 있다는데··· 자네 집안은 문제없는가?”

듣기 좋게 말해도 우리 집안 또한 똑같지 않냐고 묻고 있었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답했다.

“해동종금은 초기 6개 사 중에서도 가장 튼튼하고 건전합니다. 사무실에서 고상 떨며 대출만 하는 놈들과 달리 재래시장에 가서 잔돈도 바꿔주고 예금도 받습니다, 하하.”

출점이 까다로운 종금사는 1사 1점포 체제가 보통이다. 고객들과의 접근성에서 일반은행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할아버지와 조영찬은 경쟁사가 흉을 보든 말든 해동종금에 수백 명의 영업부 직원들을 두고 서울 시내 곳곳에서 파출수납을 돌렸다. 죽음의 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안 사실이지만 두 분은 해동종금을 시중은행처럼 키우려는 것 같았다.

헨리는 내 말을 듣고 껄껄 웃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사금고를 갖고 있으면서 왜 대한민국 국채를 해외에 매각하려는 건가? 그냥 갖고 있어도 견딜 것 같은데.”

나는 헨리를 보며 거만해보이지 않게 웃고 코냑 한 모금을 마셨다.

“오는 6월 27일에 첫 번째 지방선거가 있습니다. 종금사를 미는 여당인데 우리 집안 종금사가 인수할 그 국채를 해외에 매각해서 돈을 벌면 선전거리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 건으로 정권과 거래해서 해동종금의 영업망을 전국으로 확대하면 뽕을 뽑고도 남는다. 자세히는 알려줄 수는 없었지만 헨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썬이 왜 자네를 아끼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 매각 차익 중 일부는 세금으로 내게 되니 국익에도 도움이 되고 적당한 이권도 챙길 게 아닌가?”

헨리의 질문을 받고 흠칫했다. 거대투자회사를 움직이는 사람답게 핵심을 찔러버리지 않았나.

“당신은 못 속이겠네요, 하하.”

“조니 자네도 만만치 않네. 그 나이에 합법적인 로비를 생각하다니 말이야.”

껄껄 웃던 헨리는 코냑 한 모금을 기분 좋게 마시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폭탄 가져갈 놈들은 내가 알아봐주지. 두 가지 조건만 들어준다면.”

거래 하나에 두 가지 조건이면 조금 불공정하긴 했지만 내가 을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말씀하시죠.”

“하나는 사업에 관한 거네. 스탠더드가 IT 투자로 수익을 내는 걸 보면서 생각을 고치고 공부 중인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배우는 게 더디군. 자네 의견을 구하고 싶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끝없이 배우려는 모습이 할아버지와 판박이였다. 어렵지 않은 일이기에 숨을 고르고 말했다.

“괜찮을 거라 봅니다. 재선이 끝나고 뒤 이을 개도국 양털 깎기를 마치면 미국으로 돈이 몰릴 테니까요. 그렇게 몰릴 돈은 IT 산업에 들어갈 겁니다. 그래도 시스코나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 정도는 장기적으로 봐도 되실 겁니다.”

밑천을 다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서로서로 아쉬운 게 있어야 계속 보지 않겠나. 헨리는 모노클 테두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침음성을 흘리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다른 건 내 딸 이야기인데···.”

헨리가 코냑 글라스를 말끔히 비웠다. 잔을 입에서 뗀 그의 얼굴은 어느 새 붉게 물들어있었다. 얼굴도 자못 진지한 게 괜시리 긴장됐다.

“말씀하시죠, 헨리.”

“음··· 자네 조부님한테 우리 딸 얘기 좀 좋게 해주게나.”

생각지도 못한 부탁이었다. 왜 할아버지에게 클레어를 좋게 포장해달란 말인가? 나뿐만 아니라 선해철, 박태진, 클레어도 당황한 가운데 헨리가 헛기침을 했다.

“썬이 자네 조부님을 아버지처럼 따른다고 알고 있네. 썬의 친부모께서는 오래 전에 고인이 되셨으니 자네 조부님이 우리 딸을 잘 봐줘야 두 사람이 잘 되지 않겠나? 부탁하네, 조니.”

“···흐꾹!”

나름 비장하게 말한 헨리와 달리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다가 딸꾹질이 나와 버렸다.

***

헨리의 집에서 나온 우리는 뉴욕의 내 숙소로 돌아왔다. 클레어는 헨리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민망했는지 자기 집에서 자겠다고 했다.

“그 양반 참··· 어련히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뭔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지고는···.”

뒤통수를 벅벅 문지르며 투덜거리는 선해철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좋은 게 좋은 거죠, 흐흐. 멕시코 변동환율제 선언한 날 아침에도 두 분 분위기 묘했는데. 안 그래요, 형?”

“그러고 보니 형님 놀릴 때 미스 로렌스 목소리 톤이 꽤 높아졌었죠, 하하.”

내 옆에 앉아서 맞장구를 치던 박태진을 선해철이 째려봤다.

“얼씨구? 지금껏 그 좋은 허우대로 여자 한 명 못 사귄 놈이?”

박태진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갑자기 제 얘기가 왜 나옵니까, 형님? 제 눈에 차는 여자가 없는데 억지로 사귈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글쎄다? 내가 봤을 땐 못 사귄 거 같은데? 안 사귀는 거면 원나잇도 되잖아?”

“형님!”

박태진이 시뻘개진 얼굴로 소리쳐도 선해철은 오히려 재밌다는 듯 빙글빙글 웃었다.

“네가 애 아빠 되면 내가 선물로 강남, 아니 서울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 한 채 마련해준다.”

“그 말 진짜 지키십시오, 형님. 제일 비싼 아파트로 골라드리죠.”

“걱정 말고 제수씨부터 데려와, 흐흐.”

골이 잔뜩 난 박태진을 보며 낄낄 웃던 선해철은 서서히 웃음을 지워냈다.

“헨리 앞에서 말한 거, 확실해?”

“어떤 거요?”

“월가 놈들이 아시아 털어먹을 거라는 거.”

나를 바라보는 선해철의 눈빛은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 또한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요. 냉전 끝나고 털만한 곳들은 다 털었잖아요. 영국, 독일, 프랑스, 멕시코, 일본··· 지금껏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으니 반복될 겁니다.”

월가의 인간들은 돈이라면 악마와도 거래할 족속들.

그 중에서 조지 소로스 등의 헤지펀드들은 단단히 벼르고 있을 터. 우리 때문에 일본에서 찌꺼기만 먹었으니 반드시 동남아를 휩쓸고 홍콩을 거쳐 한국에서 끝을 볼 것이다.

“맥주, 마실래?”

“네.”

선해철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서 일어나서는 냉장고에서 기네스 세 병을 가져와서 나와 박태진에게 하나씩 나눠준 뒤 병나발을 불었다. 평소였으면 거품을 풍성하게 내서 유리컵에 채워 마시던 양반이 적잖이 속이 타는 것 같았다.

“한국은?”

“한고제철, 종금사, 환율조작. 세 개만 봐도 사이즈 나오지 않아요? 대놓고 약점을 보여주는 일인데.”

“그러겠다. 빌어먹을 새끼들, 힘들게 벌어온 달러를 그딴 데 쓰다니···.”

선해철은 거칠게 내뱉던 욕을 멈추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옆에서 맥주를 마시는 박태진을 보니 맥주 맛이 썩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선해철은 맥주를 마시던 중 눈을 깜빡거리고는 입에서 병을 뗐다. 뭔가 잊은 게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해동그룹도 위험해질 텐데 괜찮겠어? 물산이나 종금은 몰라도 명진이 계열사는 타격이 클 텐데.”

“물산이 버티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해외 원자재에 투자해도 그거 담보로 해외 은행에서 돈 빌려오면 숙부님 계열사 문제는 충분히 커버될 겁니다.”

해동그룹의 거의 모든 역량을 해외 자원개발에 집중시킨 건 모두 다가올 외환위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강남터미널 건이나 성수대교 무너뜨리기는 자원개발 투자의 물꼬를 트는 작업이었고 부수입도 짭짤했으니 아쉽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선해철은 질문을 이어갔다.

“헨리는 어떡할 거냐? 헨리도 월가를 이끄는 사람 중 한 명인데.”

“그때 가서 설득해야죠. 지금은 환경조건도 안 만들어졌으니까.”

심드렁하게 대꾸한 나는 맥주를 마셨다.

헨리가 내 말을 받아들일지는 그때 가서 봐야 알 일이다. 지금은 그저 몇 년 앞서 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기억을 남긴 것에 만족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기억이 현실이 될 때 헨리는 내 말을 절대로 무시 못 할 것이다. 야후 투자는 운으로, 두 차례의 환투기도 조금 더 발 빠르게 움직인 결과물로 치부해도 아시아 금융위기는 2년여를 내다본 일이 되지 않겠나?

선해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맥주를 들이켰다.

“알았다. 그래도 아직은 회장님한테 알리지 마. 회장님 성격, 알지?”

“물론이죠.”

할아버지에게 외환위기 가능성을 알려주면 대번에 곳간을 잠글 것이다. 잠글 때 잠그더라도 뿌릴 씨앗은 뿌려둬야 해동물산의 향후 2,30년이 안정적으로 다져질 것이다.

“형님, 그래도 우리나라가 무너지는 건···.”

조용히 맥주를 마시며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태진이 반박하려 했지만 선해철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지켜봐야겠지만 가능성 없는 건 아냐. 종금사고 재벌이고 죄다 빚으로 덩치 불리는 놈들이야.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

선해철이 말하는 수박이 해동그룹과 우리 집안, 할아버지라는 건 척 하면 척. 박태진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형님. 형님 말씀대로 아직은 회장님께 말씀드리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련님.”

“네, 형.”

그 대답을 끝으로 우리는 말없이 맥주를 비웠다. 평소에도 즐겨마시던 기네스지만 오늘 만남에서 내가 말한 파멸의 씨앗들 때문인지 유난히 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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