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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51화 (50/229)

51화. 16th. 껄끄러운 동맹 (3)

한편, 성의원에서는 장호건과 이수한이 소파에 자리한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 회장님께서 판을 짜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의외였네. 친하게 지내면 좋은 양반이긴 한데 부친께서 그 난리를 쳐놔서 껄끄럽단 말이지.”

장호건은 죽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대를 이어 왕래했던 이대수의 뒤통수를 8.3 사채동결로 후려갈긴 것 때문에 친구와 약속했던 자동차사업 합작이 물거품이 되지 않았나?

정혼 서약이야 두 아이 스스로가 잘해서 걱정이 없지만 두 사람의 꿈이었던 자동차 사업을 못한 건 여전히 미련이 남는 일이었고, 혼자 하고 있어도 벅찬 일이었다.

입술을 씹던 장호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뒤틀어진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지만 부친이 했던 짓처럼 4자 회동에서 어깃장을 놓은 이상 뒷수습을 해야 했다.

“누굴 보내면 좋을 것 같나?”

“박태곤 이사를 보냈으면 합니다.”

“박태곤, 박태곤, 박태곤···.”

이름을 되뇌던 장호건의 눈이 번쩍였다.

“전에 말한 그 친구?”

“예. 하반기 인사발령 때 데려왔는데 그룹 살림살이를 잘 챙기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견문을 넓혀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

이후로도 이수한은 박태곤이 공장마다 과잉소모 되는 자질구레한 비품을 관리하는 매뉴얼을 다듬은 것부터 각종 경비 지출에 대한 규정을 개선한 것 등을 장호건에게 보고했다.

“그만하면 우리 그룹 대들보로 쓸 만하겠군. 그 양반한테는 내가 말해둘 테니 처리해.”

이수한은 장호건의 수락에 표정이 밝아졌다. 일전에 저지른 실수를 완전히 용서받은 것 같아서일까?

“감사합니다, 회장님.”

“수고하게.”

대답을 끝으로 이수한은 신성그룹 본관으로 돌아가자마자 박태곤을 불렀다.

[실장님, 박태곤 이사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이수한이 인터폰 버튼에서 손을 떼자 문이 열리며 각진 안경을 쓴 한 남자가 들어왔다.

단정하게 손질한 머리.

눈에 쓴 사각 안경만큼 각진 턱.

사람 좋은 표정과 절도 있는 몸가짐.

이 모든 걸 다 갖춘 박태곤이 이수한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실장님.”

“차부터 한 잔 들지.”

박태곤은 자리에 앉아서 새 비서가 내온 커피를 마셨다.

“새 일터는 맘에 드나?”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저 같은 놈이 비서실에 들어올 줄은···.”

말끝을 흐리는 박태곤의 말은 진심이었다.

상고 야간부 출신에 지방대를 졸업한 자신이 신성그룹에 입사한 것만으로도 부모님이 마을잔치를 벌였는데 비서실 임원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잔치를 벌이지 않았나?

이수한은 박태곤을 보며 빙긋 웃었다.

“나도 자네처럼 상고 출신이라네. 대학은 선대 회장님께서 주신 장학금으로 들어갔고.”

고개를 끄덕이는 박태곤을 보며 이수한이 말을 이었다.

“신성은 출신 따위 안 따져. 지금껏 자네가 걸어온 길대로만 쭉 가게, 하하.”

“지금껏 제가 걸어온 길이면···?”

박태곤이 눈을 껌뻑거리자 이수한이 가볍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비서실 특성상 자네에 대해 알아봤네. 대학 때 과외 뛰면서 동생들 도시락에 학비까지 챙겨주고, 재학 중에 회계사 시험에 붙고···.”

이수한이 줄줄 읊는 자신의 개인사를 듣고 박태곤은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자기보다 더 자신의 삶을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돈 만지는 일 하다보면 떡고물이 묻기 마련인데 자네는 한 푼도 안 챙겼더군. 자네 같은 사람이 회장님과 날 도와준다면 든든할 거야, 하하.”

“감사합니다, 실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빤스 한 장 안 남기고 탈탈 털렸지만 박태곤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룹의 1인자와 2인자에게 인정받았다는 쾌감 때문일까?

박태곤은 달아오른 얼굴을 얼른 숙였고, 이수한은 그런 그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 출장 좀 다녀와야겠어.”

“출장이요?”

“도쿄일세. 정확히는 트라이엄프 캐피털 일본 법인이지.”

“트라이엄프 캐피털 일본 법인이면···?”

잠시 말을 멈춘 박태곤은 뇌리를 스치는 게 떠올랐다.

급하게 2억 달러를 조달해 트라이엄프 캐피털 본사의 전환사채를 인수한 게 얼마 전 일이 아닌가? 외부에는 오래 전부터 준비한 것처럼 보이게 꾸미느라 자신을 비롯한 비서실 사람들이 갈려나갔기에, 그 일의 무게 또한 알기에 그는 이수한을 보고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네가 다녀오게.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면서 우리 몫도 지키고 우리 같은 후배들이 걸어갈 길 닦아봐.”

“시, 실장님?”

박태곤도 눈치가 있었기에 이수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능력만 되면 누구든 들어와서 출세할 수 있는 신성그룹을 만들자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기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보며 이수한이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잘못돼도 뒤는 내가 봐주겠네. 내 자리를 걸고 약속하지.”

잠시 말이 없던 박태곤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실장님.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박태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수한이 껄껄 웃었다.

“잘 생각했네. 가기 전에 포장마차에서 닭똥집에 소주 한 잔 할까? 그거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박태곤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자신의 소소한 취미생활까지 알아냈다니.

***

자금 조달 작업이 마무리된 걸 확인한 나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과 팔짱을 낀 채 해동백화점 영등포 본점 신관을 돌아보고 있었다.

“들어오니까 너무 좋다. 누나 얼굴도 보고.”

“나도, 후훗.”

곧 있으면 다가올 크리스마스 때문인지 신관 1층 로비에는 치렁치렁한 장식이 달린 크리스마스트리가 들어서 있었다. 당연히 손님들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아빠, 이거 사주면 안 돼요? 같이 만들고 싶은데.”

“음, 그럴까?”

남자아이는 레고박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남자에게 조르고 있었고···

“난 이거. 엄마처럼 맛있는 요리 하고 싶어요.”

“얘도 참. 저기요, 이거 얼마죠?”

여자 또한 딸의 앙큼한 앙탈에 미소를 띠며 직원을 불러 부엌세트 장난감 가격을 물어봤다. 남자아이,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 샘플을 세팅한 매장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걸 보고 장하연이 싱긋 웃었다.

“우리 기획, 먹힌 거 같은데?”

기획서에 제시했던 팝업스토어가 먹히는 게 좋은 걸까, 가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걸까, 장하연의 목소리에서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녀를 보며 난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 저런 걸로 매출 올려줄지 모르겠어. 사야 할 때가 되면 매장에 있는 거 하나씩 다 사주고 싶은데.”

무심코 던진 것처럼 말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장하연의 눈에서는 꿀이 떨어지려고 했다. 엔고 배팅 준비 때문에 조금은 피곤했지만 그녀를 만나니 박카스가 필요 없었다.

그 뒤로도 매장을 쭉 둘러보던 우리는 식당가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미국생활은 어때?”

“그럭저럭. 회사 나가면 바이어들 만나서 오퍼 받고, 본사에 연락해서 오퍼 받아줄만한 거래처들 수배하고, 정보 입수하면 보고서 만들어 올리고··· 일의 연속이랄까? 먹고 살기 힘들어, 후후.”

환투기 때문에 해동물산 뉴욕법인에는 첫날만 빼고 코빼기도 안 비쳤지만 능청맞게 거짓말하며 웃자 장하연이 풋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니? 공짜 돈은 없단다, 아가야.”

“나 아가 아니거든? 남자거든?”

짐짓 발끈한 체했지만 장하연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됐어, 얘. 나보다 머리 하나 더 크면서 아직도 애처럼 구니까 그러지.”

사실, 조금이라도 더 응석부리고 싶었다.

도쿄에 가면 남들의 피눈물을 빨아들일 무자비한 돈놀이를 하게 되기에 이 순간만이라도 그 죄책감을 잊고 싶었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하연은 행복한 미소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 혼자 모든 어둠을 삼킨 채 나아가도 저 여자의 얼굴에 핀 저 미소만큼은 언제라도 사라지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그래, 성민아? 어디 안 좋아?”

“아··· 별 거 아냐. 시차 적응이 덜 됐나봐. 형은 괜찮을지 모르겠네.”

그때서야 장하연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선배님, 안 들어온 거야? 너하고 같이 뉴욕 갔잖아?”

“이번에 도쿄에 간다네? 출장이라나?”

모르는 체하고 말하자 장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선배님, 네 보호자잖아? 그래도 돼?”

“형이 내 보모하려고 회사 들어온 건 아니잖아. 나도 조금씩 자리 잡고 있으니까 슬슬 회사에 복귀해야지.”

할아버지와 고승주가 박태진을 보낸 건 좋은 일이었다. 집안 내부의 일로 보면 나를 돕는 일이지만 회사 차원에서 보면 회사에 자연스럽게 복귀하는 일이니 말이다.

내 말을 듣고서야 장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네. 벌써 4년째 차장에 머물러 계셨으니 승진도 하셔야 하고.”

듣고 보니 박태진에게 미안했다. 회사 안에서도 차기 경영진으로 주목받는 사람이 나 하나 뒤치다꺼리하느라 4년씩이나 차장을 달고 있으니. 이번 일만 잘 풀리면 형도 슬슬 위로 올라가야 할 텐데···.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누나는 언제 승진해? 벌써 부장 4년차잖아.”

“얘는? 나 입사할 때부터 부장 달아서 얼마나 부담됐는데.”

장하연은 당치도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지만 비행기는 이제 겨우 활주로를 달리고 있었다.

“아저씨 딸이라고 해도 서울대 경영학과 수석 졸업했잖아? 누나가 고른 그림도 잘 팔리고, 호텔 행사 매출도 올라갔는데 이사 명패 받아도 되지 않을까?”

“나 혼자 한 게 아니잖아. 호텔 식구들이 도와줬으니까 가능한 거지. 난 아직 젊으니까 나중에 올라가도 돼.”

장하연은 애써 부정했지만 내년 상반기면 이사로 승진할 것이다. 내가 말한 것만으로도 전생의 장호건에게 충분히 인정받아서 그때쯤에 이사 명패를 선물로 받았으니까.

추가된 게 있다면 나로 인해 해동그룹과 신성그룹 간의 거래에서 신성그룹 측의 키 맨 역할을 몇 번이나 해냈다는 거다. 서로 만족할 만한 거래였으니 이사를 건너뛰고 상무로 승진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장하연은 잠시 내 눈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성민아, 물어볼 게 있는데 괜찮아?”

“뭔데?”

“아버지가 신성전자 전환사채 사라고 했어. 가능하면 있는 돈 전부 털어서 사라고 했는데··· 어때?”

“뭐?”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신성전자 전환사채를 사라는 건 엔고 배팅에 장하연 돈을 태우겠다는 게 아닌가? 당황한 그녀를 보고 입을 열었다.

“전환 행사가가 얼마야?”

“주당 6만 원. 아버지는 개인 재산에서 400억 넣고 용재하고 수연이, 민재는 대출 받아서 100억씩 넣기로 했어.”

지독한 양반.

주당 5만 6천 원인 현재주가에 비하면 오히려 손해다. 바겐세일이 몇 년 안 남았는데 헛돈 쓸 이유가 있겠는가?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장하연에게 말했다.

“이번 거는 포기하자.”

“그래도 신성전자 주식인데···.”

“누나가 주식 갖고 있어봐. 조국일보 쪽에서 가만 놔둘까? 아저씨 입장은 또 어떻게 되겠어?”

장하연의 눈이 커졌다. 장호건과 조국일보가 내부에서 파워게임을 벌이는 게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손대지 마. 차라리 해동종금에 맡겨둬.”

장하연은 날 빤히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펀드매니저 말 믿어야지.”

헛짓거리에 장하연의 피 같은 돈을 날리게 할 수는 없었다. 당장이야 서운하겠지만 나중에는 내가 마이더스의 현신으로 보일 것이다.

그나저나 신성그룹 참관인은 누가 오려나? 기왕 오는 거면 그 사람이 오면 좋겠는데··· 지금쯤 신성코닝 경리부에서 일하고 있을 테니 불가능할 것이다.

언제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만난다면, 그래서 또 다시 친해진다면 그 사람과 함께 포장마차에서 닭똥집에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속 터놓고 얘기할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 사람을 떠올리니 닭똥집에 소주가 급 땡겼다. 오늘은 장하연하고 먹으면서 기분이나 달래야겠다.

***

출국 전날 밤.

“오, 이런 집이 있을 줄은 몰랐군.”

이수한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닭똥집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쫑쫑 썰어서 닭똥집과 함께 볶은 청양고추와 마늘까지 입에 넣으며 감탄하고 있었다.

“실장님 같은 분께서 이런 음식을 좋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마주 앉아서 이수한을 보고 있던 박태곤은 얼굴로는 웃고 있되 속은 울렁거리고 있었다. 신성그룹 비서실장씩이나 되는 양반과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닭똥집에 소주라니?

이수한은 박태곤의 어색한 미소를 보면서도 빙긋 웃었다.

“나도 초년생이었을 땐 동기들, 선후배들하고 포장마차에서 자주 마셨네. 갑갑한 윗사람들 호박씨 까고, 일 못하는 후배들 사정없이 씹고··· 안주가 필요 없었지, 하하.”

이수한은 모처럼 만에 그때 그 시절의 그 기분에 취해 있었다. 그 기분을 안고 이수한이 소주잔을 들었다.

“한 잔 하지.”

“네.”

두 사람이 가볍게 부딪친 잔을 단숨에 비웠다. 25도짜리 소주의 알싸한 맛이 혓바닥에 퍼졌고, 식도를 넘어 위장까지 짜릿한 느낌을 퍼뜨렸다.

“크으, 포장마차에서 마시는 소주도 오랜만이군. 점점 올라갈수록 같이 마실 사람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후후.”

이수한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직장생활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칠수록, 위로 올라갈수록 함께 할 사람이 줄어드는 게 샐러리맨의 숙명이 아닌가?

이수한을 보며 미소를 띤 박태곤이 술병을 들었다.

“제 술 한 잔 더 받으시지요, 실장님. 앞으로도 종종 실장님을 모셨으면 합니다.”

“그럼 좋고. 도쿄 다녀오고 여기서 다시 한 잔 했으면 좋겠군.”

주제 넘는 말일 수도 있었지만 이수한은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박태곤이 주는 소주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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