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15th. 거리를 뛰어넘은 친구 (3)
모두가 나간 응접실.
혼자 남아 있던 헨리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자신까지 5대에 걸쳐 뿌리를 내려온 미국보다 작은 나라에서 온 자식뻘 되는 청년에게 뼈를 맞은 것 때문일까, 그런 청년에게 맞을 만큼 웅크려있던 자신에 대한 자괴감 때문일까. 이유는 몰라도 헨리는 굳은 표정으로 침음성만 흘렸다.
헨리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점점 높아진 그의 시선이 가문의 휘장이 걸린 벽으로 향했다.
학과 사자가 두 마리씩 엇갈려 그려진 방패.
그리고 그 밑의 두루마리에 적힌 ‘Ich Bau Auf Gott’.
“Ich Bau Auf Gott··· 크흐흐···.”
헨리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조 섞인 미소를 띤 그의 얼굴. ‘나는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라는 저 문장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하는 회의감 때문일까? 그의 처량한 웃음소리만이 응접실을 울리고 있었다.
“내 현재가 자신의 미래라···.”
헨리는 존 데이비슨 리가 한 말을 나지막이 곱씹었다. 자신에게 미래를 보여 달라는 그 도발적인 말, 씹을수록 쓴맛이 배어나오는지 그의 얼굴에 씁쓸함이 물들었다.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헨리의 눈빛이 굳게 변했다. 그는 탁자에 놓인 서류를 들여다봤다.
“흐음···.”
이유 모를 침음성이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며 모노클 너머 그의 눈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
일주일 뒤.
나는 뉴욕의 한 골목길 안에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반드시 방법을 찾겠습니다.”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찾아 보거라. 뭣이 됐든 교훈이 될 게야, 허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그럼 끊을게요.”
[오냐.]
전화를 끊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일주일째인데도 감감무소식이니 답답하기만 했다.
“젠장.”
담배 한 모금이 간절했다. 속에 쌓인 답답함을 덜어내기엔 담배 연기만한 것도 없지만 이번 생만큼은 담배를 안 피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기에 한숨만 터져 나왔다.
골목을 나온 나는 펍으로 들어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자리에 앉아있던 선해철은 내 말에 대꾸하는 대신 위스키가 담긴 스트레이트 잔을 단숨에 비웠다.
“헨리도 자존심 세기로는 회장님하고 견줘도 부족하지가 않아. 그래도 늘 안전투자만 해왔던 사람이라 결정이 쉽지 않나봐.”
잔을 내려놓은 선해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치 술기운을 빌려 친구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는 것 같았다.
“나이··· 때문이겠죠?”
“환갑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사람, 쉽게 바뀌지 않잖아. 벌써 약속날짜보다 나흘이 넘었는데도 말 한마디 없으니···.”
선해철은 말을 멈춘 뒤 11시를 가리키는 손목시계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조니. 포기하자.”
“클레어···.”
“그날부터 트라이엄프 쪽 정보도 모두 차단됐어. 썬도, 나도. 이대로 가면 시간만 버리게 돼.”
클레어의 얼굴에는 후회가 드리워져있었다. 시간이 곧 돈인 이번 거래에서 일주일이나 되는 시간을 낭비했으니 기회손실이 점점 커지고 있지 않은가?
자기 때문에 나흘이나 더 기다려준 걸 알고 있기에 클레어는 더 이상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너무 쉽게 믿은 걸까? 위스키를 비우고 텅 빈 잔을 내려놓자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다.
“존 데이비슨 리입니다. 누구시죠?”
[날세, 조니. 밤이 늦었군. 시끄러운 걸 보니 술이라도 마시고 있는 건가?]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걸고는 한다는 소리가 이 따위라니. 짜증을 잔뜩 실어 툭 내뱉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로이스 경?”
[이런, 잔뜩 골이 났군.]
“잘 아시면서 왜 전화하셨습니까? 지금쯤이면 세팅도 다 끝내셨을 것 같은데.”
지금쯤이면 내가 넘겨준 서류에 있는 대로 엔고투기 준비를 마쳤을 터. 이를 바득바득 가는 내게 헨리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가? 오늘로 모든 준비가 다 끝났네.]
빌어먹을 인간. 온갖 고상을 다 떨어놓고는 뒤통수를 갈기다니!
숨죽이고 나를 지켜보던 세 사람은 일그러지는 내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거나 고개를 떨궜다.
세 사람을 바라본 뒤, 이를 깨문 채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더 이상 볼 일 없겠군요. 수고하십···.”
[잠깐.]
“무슨 잠깐입니까, 로이스 경? 우리 없어도 얼마든지···.”
더 말할 가치도 없어서 전화를 끊으려 하자 헨리가 내 말을 끊었다.
[궁금하면 우리 집으로 오게. 조니 자네와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얘기하면 좋겠군.]
말없이 고민하던 중 깨물고 있던 입술을 풀었다.
“알겠습니다, 로이스 경.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딱 한 번만 더 믿어보기로 했다. 트라이엄프 뒤에 우리를 숨기면 스탠더드를 더 늦게 노출시키니 밑져야 본전이다 싶었다.
[자네 있는 곳 알려주면 차를 보내줌세. 편하게 마시고 있게.]
우리가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자 선해철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헨리 전화, 맞지?”
“네. 차 보내준다고 술 마시고 있으라네요.”
선해철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자신의 모든 정보루트가 차단됐으니 알 턱이 있나.
“일단 마시고 있죠. 밑져야 본전이니까.”
술을 마시며 헨리가 보내겠다는 차를 기다리던 중 저번에 봤던 집사장이 바에 들어와서는 우리 앞에서 중절모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주인어른께서 보내셨습니다. 가시지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어보자. 속는 셈치고.
***
차를 타고 저택으로 들어간 우리는 가운을 걸친 헨리와 마주했다.
“한 잔 하면서 얘기하지.”
“여기서 얘기하시죠. 내일 바로 한국에 가야 하니까요.”
날선 목소리를 내뱉은 나를 보며 헨리가 탄성을 흘렸다.
“이런··· 술이 들어가서 본모습을 드러내는 건가?”
“그런 거 아닙니다, 로이스 경. 당신 아니어도 원하는 만큼은 벌 수 있습니다.”
현재 수준의 환율에서 포지션을 정리하면 순수익만 최소 10억 달러다.
최대 수익 기준으로 2억 달러가 아쉽지만 환투기는 시간이 돈과 직결되는 머니게임. 최악의 경우 스탠더드를 노출시킬 각오까지 했기에 나는 헨리에게 날을 잔뜩 세웠다.
“조니 자네, 꽤 매서운 친구군.”
헨리는 그런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지금 내 모습이 웃기는 건가?
“두고 보십시오, 로이스 경. 앞으로···.”
당신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갈 거라고, 학의 날갯죽지를 꺾어버리고 사자의 모가지를 따버리겠다고 쏘아붙이려던 중 뭔가가 달라졌다는 걸 이제야 느꼈다.
“로이스 경?”
“젊은 친구가 딱딱하군. 술 취한 와중에도 예의를 차리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진탕 마시게 하고 들어오게 할 걸 그랬어.”
지난번만 해도 날 ‘미스터 리’라고 불렀던 양반이 ‘조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통화할 때도 ‘조니’라고 부른 게 이제야 떠올랐다. 하지만···.
“그만하고 본론만 말씀하시죠. 정말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오밤중에 무슨 말장난인가?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기에 기대를 버리고 말하자 헨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시간이 없는가?”
“곧 있으면 거대한 태풍이 몰아칠 겁니다.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서 태풍을 조종해야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단 말입니다.”
헨리는 다그치는 날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네, 조니.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느라 시간이 걸렸다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비볐지만 그 뜻을 아는 데는 찰나의 시간만이 필요했다.
“자네가 준 계약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처리했네. 우리 집안 인간들 지분 거둬들이고 물주들까지 수배하느라 시간이 걸렸어. 일본 내에서 금융상품 팔아줄 곳도 일부 알아봐뒀네.”
“예?”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계약을 체결하고 추진하려던 작업의 밑그림을 그 짧은 시간 안에 다 그렸다니?
선해철과 클레어, 박태진마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와중에도 헨리는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결정은 자네와 만난 그날 끝났다네. 자네를 만나고 나니 내가 부끄럽더군. 자네 같은 젊은이도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머나먼 이곳에서 애쓰고 있는데 난···.”
잠시 말을 멈춘 헨리가 말을 이었다.
“자네 조부님보다도 못한 것 같더군. 아니, 자네 조부님보다 못한 사람일세, 후후.”
헨리의 웃음소리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자신의 대한 자괴감인지, 무너져가던 집안의 부와 명예와 영광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표정마저 처연해보였다.
“마냥 얹혀가기에는 염치가 없어서 준비했다네. 자네 말대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쓰러져도 딸에겐 떳떳한 아버지가 되고, 친구에게도 당당해지겠지. 이긴다면 족보도 없는 것들까지 몰아낼 수 있을 테고.”
“헨리?”
헨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선해철과 클레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정보라인 막아둔 건 미안하게 됐네, 썬. 이번 일, 얼마나 커질지 모르겠지만 청문회 소환감이야. 자네와 내 딸 이름이 더럽혀지는 게 싫어서 그랬으니 이해해주게.”
클레어, 그리고 선해철을 바라보는 헨리.
그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마음, 친구의 마음이 느껴졌다. 자신의 자식과 자신의 친구에게 한 점의 오물도 안 묻히겠다는 결연함에 내 가슴까지 먹먹해졌다.
“아빠···.”
“처음이구나, 클레어.”
헨리는 자상한 미소를 띤 채 클레어에게 다가와서 그녀의 볼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에 클레어의 눈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닿았다.
“어떤가, 조니? 이만하면 자네 미래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겠나? 좋은 가장이 되겠다는 것 말일세.”
“···물론입니다, 헨리. 당신은 정말 좋은 아버지군요.”
대답을 하니 돌아가신 부모님, 그리고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막연히 부탁만 했는데 잘 계시려나.
“당신이 좋은 판을 만들어주셨으니 한국에 돌아가겠습니다, 헨리. 본가에 알려서 물주들을 더 데려오겠습니다.”
나비효과가 두렵지만 이번 기회는 둘도 없을 기회다. 집안과 그룹의 어른들과 머리를 맞대고 준비하면 나비효과는 최소한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물주들 실탄은 충분한가?”
“그 때문에 한국에 다녀와야 합니다. 제 조부님이나 다른 물주들 재산이 얼마나 될지는 가봐야 알 것 같네요, 하하.”
멋쩍은 미소를 머금고 헨리를 바라보는 사이, 선해철이 입을 열었다.
“조니 집안도 당신 비상금만큼은 더 꺼낼 수 있을 겁니다, 헨리. 내가 보증하죠.”
“삼촌?”
내가 놀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헨리는 선해철에게 말했다.
“확실한가, 썬?”
“확실하지 않으면 말씀도 안 드렸습니다. 내일 바로 한국에 가서 연락드리죠.”
확신이 가득한 선해철의 대답을 들으니 연 초에 할아버지를 뵀을 때 일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몇 번 해봤잖나? 이리 쪼개고 저리 합쳐서 돌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나중에 알게 될 거다, 성민아. 지금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겨둬, 하하.]
할아버지와 고승주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와 닿았다. 선해철, 우리 집안 해외비자금을 관리했던 건가? 그래서 트라이엄프에 입사한 걸 할아버지가 놔둔 거였나?
그게 아니면 저 말이 나올 수 없었다. 대체 우리 집안의 숨겨진 재산이 얼마나 되기에?
예전의 의문은 풀렸지만 새롭게 똬리를 튼 의문의 실타래를 풀려고 머리를 굴리는 사이, 헨리가 입을 열었다.
“···알겠네. 그 전에···.”
헨리가 유리로 된 종을 들어 흔들자 젊은 남자가 여러 병의 와인이 실린 손수레를 밀고 왔다.
“친구가 주는 술은 마시고 가게, 조니. 앞으로 종종 이런 자리가 있으면 좋겠군. 티타임도 마찬가지일세, 하하.”
껄껄 웃는 헨리를 보니 졸지에 접대 아닌 접대를 하게 생겼지만 아무렴 어떤가. 국적이든 나이든 까마득한 거리를 뛰어넘은 친구가 원하는데 마시고 가야지.
***
다음 날 아침.
헨리의 집에 있는 손님방에서 자고 나온 우리는 JFK 공항 VIP 라운지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으, 머리야.”
선해철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나를 보며 혀를 찼다.
“적당히 마시지. 인마, 준다고 그걸 다 마셔?”
“친구가 주는 술인데 어떻게 거절해요? 접대이기도 했고요, 흐흐.”
어젯밤 술자리에서 난 술상무 노릇을 하며 헨리가 주는 빈티지 와인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기 바빴다. 술이 비면 따라주고, 안 비우면 마시라고 하고 또 채워주니 정신줄 잡기도 벅찼다.
“그러긴 하지. 헨리가 그렇게 나선 걸 보면 네가 한 말이 크긴 컸을 거다. 너하고 만나게 하길 잘했어, 흐흐.”
나와 선해철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나는 든든한 새 친구가 생겼고, 선해철은 절친을 도왔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해동물산 뉴욕법인에는 뭐라고 말해뒀냐?”
“연차 내고 왔어요. 10원 연봉에 이름만 걸쳐놨는데도 까다롭네요.”
선해철에게 대답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룹 외부에 연막을 치려고 회사에 이름을 걸어놨건만 이렇게 까다로울 줄은 몰랐다.
클레어는 날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조니 집안, 엄격하구나. 한국 재벌 오너들은 맘대로 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회장님 방식입니다, 미스 로렌스. 얘기는 비행기 타고 하시죠, 하하.”
비행기에 올라탄 우리는 퍼스트 클래스의 편안함을 즐기며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할아버지가 낸 숙제도 해결했으니 입국장을 나오는 발걸음이 홀가분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