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15th. 거리를 뛰어넘은 친구 (2)
클레어는 타는 갈증이 풀렸는지 마시던 캔 맥주를 입에서 뗐다.
“트라이엄프와 미국 로이스 가는 백여 년 전에 시작됐어. 그때부터 독일제국 구성국의 통치가문들과 슈탄데스헤어(Standesherr)들의 물 건너 온 비자금을 관리했고.”
“유럽 귀족들도 별 수 없네요.”
내가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짓자 클레어도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치들 비자금은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전부 빠져나갔어. 미국 분가는 미국 정부에 줄을 대서 살아남았고. 그게 트라이엄프 캐피털의 진짜 시작이라고 보면 돼.”
집안의 역사를 얘기하던 클레어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래봤자 끝난 일이야. 트라이엄프에 다른 집안들이 주주로 들어오면서 로이스 가문 입지가 좁아졌거든. 최근엔 아예 지분을 털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어. 머저리들.”
그 뒤로도 로이스 가문 사람들의 지리멸렬함과 다른 주주 가문들 간의 암투를 들으니 클레어가 왜 나에게 약한 게 죄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투지가 넘치는 그녀에게 한심하게 보였던 게 아닐까? 로이스 가 사람들.
당연히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도 대략적으로 보이고 있었다.
“로이스 가문 사람들부터 전부 정리해야겠네요. 지분은 헨리가 전부 거둬들이게 하고요.”
“그래야겠지. 이대로 가면 서서히 말라죽을 거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승부를 걸 수밖에 없어.”
클레어의 눈에서 독기가 넘실거렸다. 늘 쾌활하고 당당했던 사람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옆에서 묵묵히 있던 선해철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헨리, 내 친구이기도 하지만 은인이기도 해. 아시아계인 내가 이만큼 올라온 건 헨리 덕이야.”
“그랬군요.”
“그래서 말인데··· 그 양반 설득하는 거, 네가 도와줬으면 좋겠다.”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그런데··· 내가 그 양반을 설득하는 걸 도와주면 좋겠다고?
“제가요?”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키자 선해철이 목소리를 높이며 되물었다.
“너 말고 누구? 야후를 발견하고 멕시코 환투기까지 성공시켰어. 엔고 배팅도 네가 하자고 했잖아?”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트라이엄프 캐피털의 정점에 이른 사람, 그것도 누대에 걸쳐 부와 권력을 누려온 집안의 가주를 설득하게 되다니?
“일본까지 털어먹으려는 놈이 엄살은?”
눈만 껌뻑거리자 선해철이 날 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망설이는 걸로 보였나보다.
“들켰네요, 흐흐.”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자 세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우울한 것보단 웃는 게 낫지.
분위기도 적당히 괜찮아져서 웃음을 거두고 선해철에게 물었다.
“헨리 설득하면 엔고투기는 확실한 거죠?”
“다른 주주 가문들, 유럽 쪽 환투기에 정신 팔려서 아시아는 거들떠도 안 봤어. 아시아 지역은 헨리와 내가 꽉 잡아놨으니까 그 양반만 움직이면 돼.”
선해철이 한 말이 맞으면 이 판은 우리가 다 먹어도 되는 판이다. 그렇다면···.
“좋아요. 그 대신, 이 서류에 나온 대로 한국 쪽 물주들도 끼워주기. 투자는 트라이엄프 캐피털 전환사채 인수 형식으로. 실패할 경우 스탠더드가 대신 갚죠. 어때요?”
전환사채는 주식과 같은 채권. 트라이엄프 캐피털이 엔고 투기로 대박을 치면 전환사채의 값어치도 주가만큼이나 올라가게 된다.
옆에서 우릴 보던 박태진이 자신의 손바닥에 주먹을 탁 쳤다.
“괜찮겠습니다. 헨리 쪽에서 전환사채를 다시 사줄 때 환투기 수익을 얹어주면 법적 하자는 없을 테니까요.”
그뿐만이 아니다. 헨리와 그의 파벌도 자기 지분을 늘리면서 다른 주주 가문들의 지분을 줄이니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니다. 하지만 선해철은 혀를 차며 내게 말했다.
“겨우 그거만? 헨리 비자금 10억 불, 스탠더드 거쳐서 트라이엄프에 쏘고 거기서 날 수익 나눠먹어야지?”
“삼촌?”
자기 친구를 벗겨먹으라니··· 놀라서 눈이 커진 내게 선해철이 담담히 말했다.
“헨리도 아직은 무기를 숨겨야 해. 너한테 들어간 자금으로 트라이엄프 캐피털 주식을 사들이면 서로 윈윈이잖아?”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헨리의 비자금을 스탠더드 캐피털의 운용자산으로 묶어두면서 트라이엄프에 발을 걸칠 수도 있으니 더없이 땡큐였다.
“나중에 매각할 때 차익은 제가 먹는 걸로 하죠. 담보대출 받을 권리도 받아야겠어요, 삼촌.”
“콜. 그 부분은 내가 설득할게. 어때, 클레어?”
선해철의 질문에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도 돈보다는 회사를 지키고 싶어 하니까 수락할 거예요. 태진 씨 생각은 어때요?”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설계대로만 되면 모두 잘 되는 일이잖습니까? 뵙지는 않았지만 로이스 경이 우리 우군이 되면 큰 힘이 될 것 같기도 하고요.”
모두들 멕시코에서 내가 보여준 걸 믿고 오케이 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 의견은 모았으니까 내일 출근하는 대로 의견 밝히고 가도록 해요.”
“그러자. 다들 헨리가 키운 친구들이니 수락할 거다, 흐흐.”
알고 있습니다, 삼촌.
그들 모두 찬성할 겁니다.
나와 헨리, 모두를 위해서.
***
다음 날 아침.
엔고 투기 계획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원탁이 술렁였다.
“트라이엄프면··· 어느 쪽입니까, 조니?”
지금은 스탠더드 소속인 사람들인데도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트라이엄프 내부의 파벌 싸움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닌 것 같았다.
“로이스 경과 손잡을 겁니다.”
그때서야 매니저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헨리와 손잡으신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죠.”
“조니 실력에 헨리의 힘까지 더해지면 빅딜이 될 겁니다, 하하.”
그 웃음을 끝으로 우리는 곧바로 계약서를 꾸민 뒤, 헨리가 보내준 벤츠 리무진을 타고 뉴욕 시를 훨씬 벗어난 교외의 한 대저택으로 들어갔다.
“여긴···.”
“미국 분가의 선조가 이 땅에 정착해서 지은 저택이야. 5대째 가주(家主)들만 쓰고 있는 곳이고.”
푸르른 잔디가 각 잡혀 손질된, 유럽풍의 귀족적인 느낌이 물씬 배어나오는 정원 중앙을 가로질러 가던 차는 분수대를 돌고 얼마 안 돼서 저택 현관 앞에서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수고했어요.”
운전기사가 내려서 열어준 뒷문으로 나와서 중앙 현관을 열고 들어가니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복층 로비가 펼쳐졌다. 그 로비 중앙에는 헨리가 서 있었다.
“그때하고 똑같네요.”
“독일 귀족 가문이니까.”
클레어와 나지막이 주고받던 나는 그녀가 앞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봤다.
“오랜만이구나, 클레어.”
헨리는 클레어에게 다가와서 포옹을 하려고 했지만 클레어는 안기는 것 대신 고개를 숙이는 것을 선택했다.
“오랜만입니다, 헨리.”
“······.”
헨리가 펼치던 팔을 내리는 걸 보고 선해철이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저도 왔습니다, 헨리.”
그때서야 헨리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으며 선해철이 내민 손을 감싸 쥐었다.
“설득해줘서 고맙네, 썬.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구면인 것 같은데···?”
“지난여름에 뵀던 존 데이비슨 리입니다, 로이스 경. 조니라고 불러주십시오.”
“존 데이비슨 리의 비서 박태진입니다. 미스터 박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로이스 경.”
나와 박태진이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자 헨리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때와 달리 박태진이 자신을 내 비서라고 소개한 데서 공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 같았다.
선해철은 그의 팔과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안에서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헨리.”
“알겠네, 썬.”
헨리는 뒤에 있는 정장 차림의 늙수그레한 백인남성을 향해 외쳤다.
“집사장, 손님들 오셨으니 준비해주게.”
“예, 주인어른.”
“응접실로 갑시다. 따라오시오.”
커다란 방에 도착해서 소파에 앉은 우리는 집사장이 손수레로 가져온 홍차를 받았다. 어째 공간과 분위기만 다르지 삼청동 본가에 온 것 같았다.
“과일처럼 산뜻한 향이 좋군요. 부드럽게 녹아드는 맛도 좋고요.”
찻잔을 내려놓고 홍차에 대한 평을 내놓자 헨리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홍차를 꽤 마셔본 것 같군, 미스터 리.”
“자주 마시던 차라서 알고 있습니다. 골든팁스 같은데··· 맞습니까?”
헨리는 날 보며 잠시 흠칫하더니 빙긋 웃는 썬과 클레어를 보고는 날 향해 물었다.
“어느 집안의 자제인가? 이 차에 익숙한 걸 보니 보통 집안은 아닌 듯한데.”
앞으로 20년 뒤에 버킹엄 궁전 인근의 호텔에서 잔 당 20만 원이 넘는 돈을 받고 내주는 골든팁스.
한 모금 마신 것만으로도 이 돈지랄의 결정체를 정확히 짚어냈으니 내가 보통 집안 출신이 아닌 것은 알아챈 것 같았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집안입니다. 로이스 가의 트라이엄프에 비하면 작지만 벌써 70년을 바라보고 있죠.”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헨리는 날 보며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동양인들은 자신을 낮추면서 상대방을 높이곤 하지. 그게 자신들을 높이는 방법이라지만···.”
홍차 한 모금을 마신 헨리가 뚫어지게 나를 보며 말했다.
“미스터 리 자네의 본모습을 보여줘야 오늘 마시는 차가 내 집에서 마시는 마지막 차가 안 될 걸세.”
“그 전에 옆에 계신 분들을 물려주셨으면 합니다만.”
뒤에 있는 정장 차림의 고용인들을 보고 말하자 헨리는 손짓으로 그들을 물렸다.
“편하게 얘기하게. 도청장치도 없고 나 또한 자네 비밀을 지켜주겠네.”
“감사합니다, 로이스 경.”
잠시 숨을 가다듬은 나는 헨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비밀을 드러냈다.
“저는 스탠더드 캐피털의 지분 91퍼센트를 보유했고 운용 자금 대부분을 투자했습니다. 스탠더드 캐피털의 야후 주식 전량과 멕시코에서 번 돈도 모두 제 몫이고요.”
태연하게 말하고 차를 마시는 나와 달리 헨리의 얼굴이 굳었다.
“젊은 사람이 농담이 심하군. 자네 나이에 그만한 부를 이뤘다고?”
“썬과 클레어에게 물어보시죠. 당신의 친구, 당신의 따님이니 거짓말은 안 할 겁니다.”
헨리는 내 눈치를 슬쩍 보고는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두 사람이 굳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헨리의 안색이 변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그저 상황을 분석하고 아이디어를 냈을 뿐입니다. 썬과 클레어, 미스터 박, 그리고 당신이 키워준 식구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죠.”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세 사람을 둘러보자 그들도 날 보며 미소를 띠었다.
헨리는 그런 우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팀이군. 클레어가 돌아오고 싶지 않을 만큼.”
“그런 클레어의 아버지시니 제안 드릴 게 있습니다, 로이스 경.”
“제안?”
“네. 당신이 로이스 가의 영광을 재현할 방법이죠. 하늘을 나는 학처럼, 황야를 내달리는 사자처럼.”
“흐음···.”
벽에 걸린 휘장을 가리키며 내가 말하자 헨리는 침음성을 흘렸다.
이어지는 썬과 클레어의 간절한 눈빛. 두 사람의 눈빛을 보던 헨리가 입을 열었다.
“말해보게.”
“이런 일은 말보단 서류가 어울릴 것 같네요. 형, 주세요.”
박태진은 소파 옆에 기대뒀던 가방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서 내게 건네줬다.
“이 파일은 제 제안이 담긴 계약서입니다. 어떠십니까, 로이스 경?”
“자신감이 넘치는 걸 보니 좋군, 미스터 리. 처음엔 마냥 공손한 줄만 알았는데.”
“첫 인사는 첫 인사였을 뿐입니다. 로마에 왔으니 로마법을 따라야죠.”
빙긋 웃고는 헨리에게 가서 서류철을 내밀었다. 모노클 너머로 서류를 보는 그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이, 이건···.”
헨리는 서류를 넘겨보던 손을 멈추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돈을 벌고, 당신은 가업을 지키는 일이잖습니까?”
“그런 뜻이 아닐세, 미스터 리. 나라도 이런 제안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자네 정도라면 일본이라는 나라를 잘 알 텐데?”
계약서에 충분히 정리된 걸 보고도 저런 말을 하니 극약처방이 필요할 것 같았다.
“패망이 두려워 웅크리면 이름마저 사라지겠지만 맞서 싸우면 죽더라도 이름은 남길 수 있죠. 이겨서 살아남을 수도 있고요. 인생은 데드 오어 얼라이브 아닙니까, 로이스 경?”
“젊은 친구가 못 하는 말이 없군. 가문의 역사라는 건 그리 가벼운 게 아닐세.”
이유는 몰라도 헨리의 목소리에서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지만 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로이스 가의 부가 얼마나 클지는 몰라도 나 또한 망할 뻔했던 우리 집안을 지켰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칠순이 넘은 내 조부님도 10억 달러를 거셨는데 뭐가 두려운 겁니까?”
차마 죽음의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할아버지를 팔았지만 헨리는 내 말을 듣고 선해철을 쳐다봤다. 선해철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헨리는 표정을 달리하고 나를 바라봤다.
“사실인가?”
“물론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현재는 제 미래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더 좋은 가장이 된다면 저 또한 제 미래에 확신을 가질 것 같군요.”
두 번밖에 안 본 주제에 뻔뻔하기 짝이 없었지만 헨리는 내 말을 듣고 클레어와 선해철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그의 우뚝한 코에서 나지막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사흘만 말미를 주게, 미스터 리. 중대한 일이니 이해해줬으면 하네.”
“계약서는 그때 찾으러 오겠습니다. 그 계약서에 당신 사인이 적혀 있으면 좋겠군요.”
선선히 대답하고 엉덩이를 떼자 헨리의 표정이 변했다.
“날 믿겠다는 건가? 내가 맘만 먹으면 자네 계획을 이용할 수도 있는데?”
“당신이기에 믿고 맡기는 겁니다, 로이스 경. 자랑스러운 아버지, 당당한 친구가 되고 싶으시면 명예를 저버리는 일 따위는 안 하실 거라 믿습니다. 아버지의 마음, 친구의 마음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닐까요?”
그 말을 끝으로 미소를 보인 나는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헨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세 사람과 함께 그의 집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