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15th. 거리를 뛰어넘은 친구 (1)
오후 내내 호텔에서 쉰 우리는 호텔 총지배인을 불렀다.
“이, 이런···.”
“미안합니다. 우리가 워낙 지저분하게 놀아서요, 하하.”
방을 둘러본 호텔 총지배인은 겸연쩍은 미소를 띤 채 어깨를 으쓱한 나를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노려봤다. 카펫이고 벽이고 돔 페리뇽 샴페인을 터뜨리느라 호텔에서 국빈급 인사들을 대접할 때나 쓰는 로열 스위트룸이 난장판이 됐으니 곱게 보일 리가 있나.
“500만 달러는 주셔야겠습니다, 고객님.”
리모델링 비용에 공사기간 동안 손님을 못 받을 것까지 감안해도 비싸게 불렀다. 1박에 2만 달러 남짓인데 건수 잡았다고 뽕을 뽑으려는 건가?
한껏 비웃음을 머금은 나는 그에게 말했다. 검지만 펼친 왼손을 든 채로.
“Twenty million. Okay?”
“T, Twenty million··· dollar?”
말을 더듬는 지배인을 보던 나는 그에게 내가 한 말을 확인시켜주듯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씩 웃었다.
“명색이 플라자 호텔 아닙니까? 그 정도는 드려야죠. 대신에.”
잠시 말을 멈춘 나는 황당해하는 총지배인에게 말했다.
“앞으로 이 방은 호텔 소유주가 바뀌어도 우리 스탠더드 캐피털 전용으로 쓸 수 있게 분양받았으면 합니다. 관리는 총지배인님이 직접 해주시고요.”
'기왕 배려먹은 방이니 돈 좀 더 내고 우리 회사의 귀빈 응대 시설로 삼는 게 좋겠어. 지금 주인장이 정확히 누군지는 기억 못하는데 물어보기도 쪽팔리고··· 누가 됐든 우리 회사를 새겨놓는다 셈치지, 뭐. 손해 볼 일은 아니니까.'
앞으로 쭉쭉 커나갈 스탠더드 캐피털이니 만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 이 호텔의 주인장이 '미래의 미국 대통령'인지 '중동의 워렌 버핏'인지는 헷갈리지만 2천만 달러나 되는 거금을 주고 로열 스위트룸을 분양받겠다고 하면 그들의 머릿속에 스탠더드 캐피털에 대한 흔적을 제법 깊게 남길 터.
잠시 고민하던 총지배인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잠시 객실을 나갔던 총지배인이 다시 돌아왔다. 처음과 달리 만면에 미소를 띠고서.
“오너께서 제안을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명의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보란 듯이 미소를 띤 나는 가방에서 수표책과 파커 듀오폴드 만년필을 꺼냈다. 만년필을 손가락에 끼우고 몇 바퀴 돌린 나는 백지수표 두 장에 각각 $20,000,000과 $2,000,000이라고 적어서 뜯은 걸 총지배인에게 내밀었다.
“스탠더드··· 캐피털?”
미친놈 보듯 나를 쳐다보면서도 수표를 받은 총지배인은 백지 수표에 적힌 숫자와 회사이름을 보고 크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를 보며 빙긋 미소를 띠었다.
“앞으로 월가의 표준을 제시할 회사죠. 백만 불은 총지배인님 팁입니다. 앞으로 우리 객실 관리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총지배인을 보며 씩 웃던 나는 방을 나갔고 나머지 멤버들도 인사를 건네며 밖으로 나왔다.
“흐으, 속 쓰려.”
호텔을 나온 나는 배를 쓰다듬었다. 회사 식구들과 함께 마셨다지만 수십 병이나 되는 샴페인을 아침부터 들이켰더니 해장거리를 넣어달라고 속에서 욕을 퍼붓고 있었다.
“삼촌, 전에 종로에서 말했던 한인식당 어디에요?”
“해장하게? 흐흐.”
능글맞게 웃는 선해철. 발코니에서 봤던 동물적인 승부사의 모습은 사라지고 웬 동네 아저씨가 내 옆에 있었다.
나도 장단을 맞추며 미소를 띠었다.
“거기 된장찌개 맛이 어떤지 확인해볼 겸해서요, 흐흐.”
“콜. 다들 어때?”
선해철이 외치자 직원들의 눈이 번쩍거렸다. 뭐지?
“좋습니다, 썬. 모처럼만에 된장찌개 먹겠네요, 하하.”
“전 김치찌개 먹겠습니다. 생각만 해도 속이 확 풀어지네요, 흐흐.”
“찌개만 먹는 거 아니죠? 삼겹살도 구워야 합니다, 썬?”
“목살도 추가요.”
맙소사. 미국 사람들이 찌개에 삼겹살, 목살을 찾다니?
“삼촌?”
“이 친구들, 나하고 어울리면서 한식도 잘 먹게 됐다. 처음엔 오만상 다 썼는데 지금은 집에서 자기들이 만들어먹어, 흐흐.”
선해철과 다른 멤버들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음식을 얼마나 먹였으면···.
식당에 도착한 우리는 불판에 올린 고기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는 와중에 1인용 뚝배기를 하나씩 끼고 각자 시킨 찌개를 떠먹었다.
“휴우-! 이제야 살 것 같네요, 호호.”
숨을 내쉬면서도 연신 김치찌개를 떠먹는 클레어를 보니 헛웃음만 나왔다. 억지가 아니라 즐기듯이 먹다니?
“왜, 조니? 먹으면 안 돼?”
“아, 아뇨, 너무 잘 먹어서···.”
클레어는 선해철을 힐끗 보며 피식 웃고는 내게 말했다.
“썬 때문에 그래. 집에서 밥 먹을 때마다 찌개 끓여서 밥 먹었거든. 밥은 말 그대로 쌀밥이었고.”
“저희도 종종 썬 집에 가면 한국 음식을 먹곤 했습니다. 처음엔 이상했는데 먹다보니 맛있더군요, 하하.”
선해철은 어디 가도 한국 아재인 걸 숨기지 못할 것 같았다. 밥에 국물이라니, 참.
피식 웃은 나도 숟가락을 들고 된장찌개를 떠먹었다. 입 안에 퍼지는 구수하고 얼큰한 국물 맛과 몽글몽글한 두부의 식감이 입 안 곳곳에 은총을 내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고기는 다 익었고 너 나 할 것 없이 기름장을 찍은 고기를 밥과 함께 상추에 싸서 야무지게 먹었다. 먹는 모습을 보니 다들 나중에 유튜브에서 ‘미국남자’, ‘미국여자’를 찍어도 될 것 같았다.
맛있게 식사를 하던 중 쌈을 입에 넣으려던 클레어가 손을 멈췄다.
“네, 클레어 로렌스··· 잠시만요.”
행복이 넘치던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잔뜩 굳은 얼굴을 보니 안 좋은 일 같아보였다.
식당 밖으로 나가는 클레어를 보고 선해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또 시작인가보군.”
“무슨 말씀이에요, 삼촌?”
선해철이 황급히 그늘을 지우고 겸연쩍은 미소를 얼굴에 깔았다.
“별 거 아냐, 하하. 마저 먹자. 해장도 됐는데 소주나 한 잔 할까? 여기요!”
“삼촌.”
얼버무리려던 선해철은 정색한 내 표정을 보고 들었던 손을 내렸다.
“밖에 나가서 담배 한 대만 태울까?”
“그러세요.”
내 앞에서는 잘 안 피우던 담배까지 찾다니 무슨 일일까?
***
골목으로 들어간 클레어는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전화기에 대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돌아갈 생각 없어요, 헨리. 이제는 스스로 올라갈 수 있어요. 그런데 왜 트라이엄프, 아니 로이스 가문에 돌아가야 하죠? 당신도 알잖아요? 당신 집안사람들.”
[그래서 지금 나도 준비하는 게 있단다, 클레어. 그러니···.]
귓가에 헨리의 타이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클레어는 가차 없이 말을 끊었다.
“그런 분이 30년 넘게 나하고 엄마를 그렇게 놔뒀어요? 얼마나 더 기다리라고요? 천 년? 만 년?”
[클레어···.]
“회식 중이에요. 끊어요.”
전화를 끊은 클레어의 표정은 혼란 그 자체였다. 헨리의 부탁을 애써 외면하고 식당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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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의 목소리가 들리는 골목 앞에서 발걸음을 돌린 우리는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갔다. 선해철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클레어처럼 기구한 애도 없을 거다.”
“무슨 말씀이세요, 삼촌?”
담배를 내뿜던 선해철은 다시 한 번 입에 담배를 물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입을 가리듯이 담배를 피는 그의 얼굴을 보니 착잡해보였다.
길게 연기를 내뿜은 선해철은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고 말했다.
“아까 클레어가 말할 때 헨리라는 이름 들었지?”
“네. 들었긴 했는데···.”
“그 사람, 그러니까 헨리 로이스가 클레어 아버지야. 나이를 떠나서 내 친구이기도 해.”
“그랬구··· 네?”
무의식적으로 대꾸하던 중 화들짝 놀랐다. 헨리가 클레어의 아버지에 선해철의 친구라고?
“사, 삼촌, 그러면···.”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선해철이 중간에 말을 꺼냈다.
“자세한 얘기는 회식 파하고 따로 하자. 요즘 들어 헨리가 클레어를 집안에 들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서로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다.”
“네···.”
나도, 클레어도 오늘 밤은 서로에게 속 터놓고 해야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다.
***
식당에 들어간 우리는 식사를 마저 하고 자리를 파했다. 사람들과 헤어진 나는 선해철, 클레어, 박태진과 함께 뉴욕의 내 숙소에 들어가서 캔 맥주를 마셨다.
“휴우-, 다들 잘 먹네요. 한국에서 밥 먹으면 사람들이 놀라겠어요, 하하.”
너스레를 떨며 웃었지만 클레어는 여전히 고민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식당에서도 전화 받고나서부터 쭉 그랬는데···.
“클레어.”
“어? ···어. 그러게. 다들 잘 먹었어. 그렇죠, 썬?”
얼버무리듯이 웃던 클레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를 보고 당황했다.
“왜 그래, 조니?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뇨. 전화 받고부터 계속 표정이 안 좋아서요.”
“아, 그거? 아무 것도 아냐. 괜찮아.”
클레어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지만 웃는 게 아닌 얼굴로 보였다. 그런 대단한 집안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딸, 아버지와 성씨도 다른 딸이니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내 눈빛이 변하지 않자 클레어의 어깨가 점점 움츠러들었다. 옆에 있던 선해철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듯 손을 얹었다.
“그만해, 클레어. 사실대로 말해.”
“썬?”
“조니 너도 사실대로 말해. 예전에 내가 보은하라고 한 말 기억하지?”
잊을 리가 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해철이 부탁한 건데.
“그게··· 헨리?”
내 입에서 나온 불확실한 목소리에 선해철이 빙긋 미소를 띠었다.
“네가 크면 소개시켜줄 사람이었어. 농담 삼아 얘기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하하.”
미안한 미소를 머금은 그를 보니 날 이용하려던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선해철이 그런 실력가와 친분이 두터운 걸 알았다면 오히려 내가 먼저 매달렸을 것이다.
클레어는 우리 둘을 당혹한 표정으로 번갈아보던 걸 멈추고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썬?”
“조니 말부터 듣는 게 좋을 거야. 조니도 네 도움이 필요하거든. 조니 얘기 들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걸? 말해.”
“네. 당신한테 보여줄 게 있어요, 클레어. 형, 할아버지가 준 거 클레어한테 주세요.”
“네··· 도련님.”
박태진은 의아해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 하나를 가져왔다. 클레어는 박태진이 가져온 서류를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조니?”
“단순히 제 본가 일 때문만은 아니에요. 스탠더드도 엔화에 배팅할 거예요.”
“어디에 배팅할 건데?”
“엔고.”
클레어가 대번에 소리쳤다.
“Johnny, are you insane? Japan is··· god.”
클레어는 말을 맺지 못한 채 하느님을 찾으며 이마를 짚었다.
“왜요? 외환보유고 1위라서? 대외순자산 1위라서? 그런 거예요?”
“알면서 왜 물어봐? 멕시코하고 잽스는 체급이 다르잖아?”
클레어의 냉소적인 되물음이 귀에 서늘하게 들렸지만 나에게도 말할 게 있었다.
“클레어, 연준이 계속 금리를 올리겠어요? 멕시코에 묶인 미국 자금이 얼만데요?”
투기꾼들이 적당히 먹고 빠질만하면 연준은 무조건 금리를 동결할 것이다. 미국의 소비를 뒷받침할 공장인 멕시코가 심각하게 망가지는 걸 막아야 하니까.
월가로 돌아오던 돈은 또 다른 안전자산을 찾게 될 터. 그 돈은 달러에서 엔화로 바뀔 것이다. 외환보유고 1위, 대외순자산 1위인 일본의 화폐가 아닌가?
클레어는 어느 새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무슨 뜻인지 접수됐어. 야후도, 멕시코도 네 촉이 맞았으니까 믿을게.”
다행이었다.
일본은 아직도 금융시장의 문턱이 높아서 금융거래를 하려면 빨라도 석 달은 걸린다. 클레어의 수락을 들으니 트라이엄프 캐피털과 손잡고 엔고에 배팅할 가능성이 보였다.
“좋아요. 이제 당신 사정을 알려줘요. 우린 친구잖아요. 서로 도울 게 있으면 도와야지, 안 그래요?”
잠시 머뭇거리던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헨리 이야기는 들어서 알 테니 다른 걸 알려줄게. 트라이엄프 캐피털, 로이스 가(家)에서 세운 회사야.”
“알고 있어요, 클레어. 저번에 헨리가 왔을 때 다른 식구들한테 들었어요.”
이미 아는 사실이기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가 아는 건 다가 아니었다.
“그랬구나. 그런데 나, 헨리의 혼외자식이야. 헨리가 내 아버지인 건 트라이엄프 들어와서 알았어.”
이제야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그녀가 왜 회사를 나왔는지.
“로렌스라는 성을 쓰는 이유가 있었군요, 미스 로렌스.”
“내 성은 어머니 성을 따른 거예요, 태진 씨. 헨리 집안, 독일 로이스 가의 미국 분가거든요.”
뜻밖의 이유를 듣고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 박태진이 나섰다.
“···로이스 공국입니까? 독일제국의 제후국이었던···?”
“그걸 어떻게···?”
박태진은 눈을 깜빡거리는 클레어를 보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대학 다닐 때 독일제국 경제발전사 리포트 쓰느라 참고 자료 조사할 때 알게 됐습니다. 두 개의 공국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표어가··· ‘Ich Bau Auf Gott’ 아닙니까?”
“맞아요. ‘나는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 아주 오만한 말이죠. 미국 분가를 세운 분은 로이스-게라(Reuß-Gera) 공국의 서자였어요.”
놀라서 말도 안 나왔다. 독일제국의 제후국 통치가문이면 왕족이나 다름없는 집안인데 서자라도 그 집안의 후손이 트라이엄프를 세웠다니?
박태진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모순이군요, 미스 로렌스.”
“지독한 모순이죠. 자기들 조상도 서자인데 나하고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았으니. 두 분,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데···.”
클레어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천장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물기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미안해. 이런 모습 보여서.”
“괜찮아요, 클레어.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공과 사가 따로 있나요.”
“도련님 말이 맞습니다. 힘내십시오, 미스 로렌스.”
클레어의 가정사가 남일 같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장하연만 해도 황나연 배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온갖 견제와 멸시를 겪고 살지 않는가. 위로를 건네는 박태진도 클레어가 장하연처럼 보일 것이다.
“···고마워요.”
클레어의 얼굴에서 어둠이 한 꺼풀 걷혔다.
골목길에서 선해철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직감했지만 오늘은 내 여자처럼 안타까운 저 여자의 이야기로 밤이 길어질 것 같았다. 나와 클레어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