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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42화 (41/229)

42화. 13th. 떠나기 전에 해야 할 것들 (1)

한 달 뒤.

장호건은 거실 소파에 앉아 아침식사를 기다리며 손에 쥔 신문을 보고 있었다.

[해동백화점의 변신은 무죄? 전국 최고의 럭셔리 백화점으로 등극하다!]

[젊은 피, 관록을 이기다! 해동백화점 본점, 전국 백화점 점포 중 월 매출 1위 달성!]

“누님 속이 뒤집어지겠군.”

장호건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늘 먹고, 쓰고, 입는 걸 파는 것만큼은 아무도 못 따라온다던 누이가 자신이 아끼는 두 아이에게 한 방 제대로 먹지 않았는가?

그 뒤로도 신문기사를 보던 장호건의 뒤에서 황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식사하세요, 여보.”

고개를 끄덕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들어갔다. 자리에는 이미 자식들이 앉아있었다. 애써 담담한 체하는 장하연, 그녀와 달리 잔뜩 굳은 세 남매를 보니 신문을 이미 본 것 같았다.

조용히 식사를 하던 중 장수연이 반창고를 붙인 손으로 쥐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 내년부터 선 볼게요.”

“선?”

장호건은 자신이 지금 들은 소리가 사실인지 의심됐다.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둘째 딸이 선을 보겠다니?

“네. 올해까지만 조용히 쉬고 내년부터는 좋은 신랑감 알아봐주세요.”

장수연이 왜 그러는지는 장호건도 알고 있었다. 해동백화점 본점 신관에서 그 난리를 피우고, 그 망신을 당했으니 이성민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장수연 또한 자신의 자식이기에 장호건은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알았다. 네 옆에 둘 만한 놈으로 알아봐주마.”

방황하던 장수연도 마음을 잡은 것 같으니 장호건에게 남은 건 단 하나.

장하연이 이성민과 언제 백년가약을 맺느냐였다.

***

뻐꾹! 뻐꾹! 뻐꾹!

슈바르츠발트 뻐꾸기시계 소리를 듣고 고개를 올려보니 오후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휴우, 얼마 안 남았네요.”

“며칠만 고생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나와 박태진은 서로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지난해 8월부터 시작된 대한이동통신 대장정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컨설팅을 마치고부터 주식을 처분하기 시작한 우리는 며칠 뒤면 모든 주식을 처분할 예정이었다.

“대출 갚고 세금 떼면 1,200억 정도 남겠네요. 누나는 얼마죠?”

“380억쯤 남을 겁니다. 이만하면 하연 아가씨도 든든할 겁니다, 도련님.”

“이번 일 끝나면 꽤 오랫동안 못 볼 텐데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면 좋겠네요.”

컨설팅을 마친 뒤로 나와 박태진은 주식을 파는 일 외에도 선해철을 통해 스탠더드 캐피털의 투자현황을 받아보고 있었다. 열흘 뒤면 미국으로 넘어가는데 내가 없어도 장하연이 의지할 버팀목을 만들어줘서 마음이 뿌듯했다.

내 표정을 보고 박태진이 빙긋 웃었다.

“몸은 마음에, 마음은 지갑에 의지하는 법이죠, 하하.”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죠? 후후.”

싱긋 웃은 나는 박태진과 함께 소파와 테이블에 널브러진 서류들을 정리했다. 시간도 넉넉하니 약속시간 맞춰서 준비해도 안 늦을 것 같다.

서류를 담은 박스를 들고 올라가던 중 박태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도련님, 올해 초에 뉴욕에서 샀던 건 아가씨께 드렸습니까?”

“네?”

“돌아오면 하연 아가씨 드린다고 메이시스 백화점에 가서 사셨잖습니까? 오시자마자 일에 치이셔서 잊으셨군요. 올라가시죠.”

내 뒤를 따라서 2층으로 올라온 박태진은 방으로 들어와서 붙박이장을 열고 허리를 숙인 채 안을 뒤적거렸다. 뭐였지? 오자마자 일에 치여서 살다보니 그새 까먹어버렸다.

“구석에 두길 잘했군요. 여깄습니다.”

그가 내민 건 먼지가 소복이 쌓인 조그만 쇼핑백이었다. 손잡이를 넘겨받은 나는 안에 든 상자에 새겨진 로고를 보고서야 입을 벌렸다.

“아···!”

“처음 회사 일에 참여하시느라 바쁘셨군요. 도련님께서 알아서 챙길 거라 생각하고 말씀드리지 않았었는데.”

박태진이 기분 상하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23년간 배긴 워커홀릭 기질 때문에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주려고 산 것도 잊어버렸다니. 젠장.

“고마워요, 형.”

박태진 덕분에 잊고 있던 걸 이제야 챙겼다. 잠시 헤어지기 전에 나를 대신할 ‘부적’ 하나를 그녀에게 안겨줄 수 있으니 새옹지마가 따로 없었다.

겸연쩍은 미소를 띤 나를 보며 빙긋 웃던 박태진은 뭔가 떠올랐는지 내게 물었다.

“쇼핑백 안에 같은 상품이 두 개 있던 것 같던데··· 모두 드리려고 사셨습니까?”

“아뇨. 하나는 제가 갖고 있을 거예요.”

박태진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 이유가 있었다. 오늘은 선물로 산 것만 건네주고 나머지 하나는 때가 될 때 내가 쓸 거다.

***

“찾으시는 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장하연 씨 만나러 왔어요.”

“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죠.”

약속시간에 맞춰 강남의 한 와인 바에 도착한 나는 안내를 받으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한 문 앞에서 멈춘 종업원은 문을 열어주며 손으로 안을 가리켰다.

“글라스와 안주는 금방 세팅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종업원이 커튼을 내리는 걸 보고 장하연에게 사과부터 했다.

“많이 늦었지?”

“나도 금방 왔어. 어서 와.”

자리에 앉은 나는 서류가방에서 신문을 꺼내 보여줬다.

“이거 봤어? 언론사들이 우리 칭찬 엄청 하더라? 흐흐.”

“아침에 신문에서 보긴 했는데··· 회장님하고 약속한 건 어떻게 됐어?”

기대 반, 걱정 반이 실린 장하연의 질문에 씩 웃었다.

“아침에 할아버지 전화 받았는데 작년 전월보다 35퍼센트 더 나왔대.”

해동백화점 컨설팅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입점 브랜드 수는 기존보다 줄었지만 프리미엄 매장으로 변신하면서 브랜드 당 매출과 순이익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는 내부 분석이 나왔으니 손실보증 이행은 먼 세상 이야기가 돼버렸다.

“정말? 휴우-.”

장하연이 내 말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리던 중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대답이 끝나자 종업원이 커튼을 들추며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들린 쟁반에는 코냑 글라스 두 잔과 초콜릿, 치즈가 담긴 접시가 놓여있었다. 그런데··· 한 개가 비었다.

“술은?”

“오늘은 특별한 거 마셔야지. 집에서 가져온 거 있어.”

“누나, 그건 좀···.”

“이거 마시려고 오늘 특별히 룸 잡은 거야. 여기 빌리려고 돈 많이 썼다?”

술집에 와서 개인적으로 가져온 술을 마시기 민망했지만 장하연은 걱정 말라는 표정으로 날 보며 휘휘 손을 내저은 뒤 밑에 뒀던 종이가방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꾸브와제 에르떼 꼴레시옹··· 빙(Courvoisier Erte collection Vingne)?”

“왜? 맘에 안 들어?”

혹시나 실망할까봐 얼른 손을 흔들었다.

“그럴 리가? 귀한 거잖아.”

방을 잡고 마실만한 이유가 있었다. 딱 오천 병만 생산된 코냑인데 이걸 마실 줄이야.

“누나, 무리하는 거 아냐?”

“전혀. 이건 아버지한테 입학 선물로 받은 건데 나머지는 해마다 하나씩 모았어. 내년에 마지막 컬렉션 나오면 그거까지 모을 거야.”

장호건에게 선물 받은 코냑을 나하고 마시겠다니··· 시그널이 좋은데?

그래도 딴청을 피우며 다른 걸 물었다.

“병 디자인이 맘에 드나 보네?”

“디자인도 디자인인데 사람이 살아가는 걸 드러낸 것 같잖아.”

“그러겠다. 코냑의 일생을 보여주는 예술품이니까.”

꾸브와제 에르떼 꼴레시옹.

1892년부터 숙성된 오드뷔와 1930년부터 숙성된 그랑 샹파뉴를 배합한 코냑이다.

술 자체도 훌륭하지만 프랑스 디자인계의 거장 에르떼(Erté)가 코냑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형상화한 도안을 병에 입힌 명작으로 총 여덟 종류의 에디션이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마실 #1 ‘빙’은 1988년에 출시된 것으로 병 바깥에 포도나무에 누운 여자가 그려졌다. 그 모습을 보니 나와 그녀가 앞으로 포도나무처럼 엮어갈 삶의 1막 1장을 여는 것 같았다.

잠깐의 술 이야기를 마친 우리는 술을 잔에 채웠다.

“고생했어, 성민아.”

“누나도.”

인사를 주고받으며 청아한 소리를 내며 잔을 부딪친 우리는 코냑을 천천히 음미했다.

“향이 좋네. 복잡미묘한 게 철학 이야기 하면서 마셔야겠다.”

“그러게. 이 술, 인생 이야기하면서 마셔야겠어. 우리네 사는 이야기가 철학 이야기잖아? 후훗.”

“그러네, 후후.”

그녀와 함께 다시 한 번 잔을 부딪치고 술을 마셨다.

“신관 오픈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첫날부터 대형사고 터졌으면··· 끔찍해.”

장하연은 그날 일을 말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연이 누나, 그날 막 뛰어가던데··· 집에서 별 일 없었지?”

“일하는 여사님들한테 들었는데···.”

장하연을 통해 장수연이 집에서 난리친 이야기를 들으니 보통 열이 받은 게 아닌 것 같다. 나란 놈을 장하연에게 뺏기게 생겼다지만 수천만 원어치의 명품들을 폐품으로 만들어버리다니.

“그거 말고는 별 일 없지?”

장하연은 코냑 한 모금을 홀짝이고 내게 말했다.

“오늘 아침에 아버지한테 선 보겠다고 했어.”

“선?”

“내년부터 보겠다고는 했는데··· 좋아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르겠어.”

백화점을 뛰쳐나갈 때 직감했던 일이 사실이 돼버렸다. 장수연을 질질 끌고 다니려던 내 계획은 접어야 할 것 같다. 젠장.

차라리 잘됐지 싶었다. 어줍잖게 양다리를 걸치는 모양새보다야 나와 마주하며 술을 마시는 이 여자에게 올인 하는 게 훨씬 남는 일이었다. 복수는 허무함만 남기지만 사랑은 행복을 남기지 않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앞으로도 더 잘 됐으면 좋겠다. 우리.”

“어떤 거?”

“누나는 누나대로 자리 잡고, 나는 나대로 자리 잡고···.”

아주 잠깐 장하연의 눈에 실망이 스쳐지나갔지만 아직은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건 완성될 때보다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이 더 짜릿하고 즐겁다는 걸 이번 생에야 깨달았기에 때가 올 때까지는 이 즐거움을 그녀와 함께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녀 옆에 서려면 준비가 더 필요했다.

“그래야겠지. 아직 우리가···?”

장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던 중 의아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자리는 충분히 잡았잖아? 그 정도 성과면··· 뭐가 부족해서 그래?”

“미국에 다녀와야 해.”

미국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장하연의 눈이 서글프게 보였다.

“미국? 왜?”

“해동물산, 우리 그룹 뿌리잖아. 경영 참여하려면 미국 가서 상사 업무 배우고 돌아와야지.”

담담하게 말했지만 장하연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 쓸쓸하게 보였다.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느껴지는 외로움··· 그 모습을 보는 나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맘 같아서는 모든 일을 클레어와 선해철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지금은 잠시 떨어져야 했다. 미래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시무룩해진 장하연을 얼굴.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집에서 챙겨온 작은 상자 하나를 가방에서 꺼냈다.

“그거··· 뭐야?”

“늦었지만 선물.”

“선물?”

“연 초에 뉴욕 다녀올 때 누나 주려고 사뒀는데 이제야 주네. 열어봐.”

상자 안에 든 불가리 팔찌를 보는 장하연의 얼굴에서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보니 박태진이 앞에 있었으면 절이라도 넙죽 해주고 싶었다.

“내 대신이라 생각하고 차고 다녀줘.”

팔찌를 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응···.”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모습이 내 가슴을 찌릿하게 했다.

그 찌릿함에 취해버려서, 아니 취한 척이라도 해서 당장이라도 고백하고 싶었다.

내 모든 삶을 전부 바치고 싶다고.

내 모든 걸 다해 사랑하고 싶다고.

하지만.

참아야 했다.

힘이 생길 때까진.

확신이 설 때까진.

다시는 실수하고 싶지 않기에.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기에.

***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장하연은 집으로 돌아왔다. 불이 꺼진 집 안으로 들어온 그녀의 손에는 텅 빈 병이 담긴 종이가방이 들려있었다.

불도 켜지 않고 조용히 방에 들어간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쁜 자식···.”

장하연의 주먹이 침대 위에서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도 더 잘 됐으면 좋겠다. 우리.]

별 거 아닌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장하연은 그 말에서 자신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말도 자신의 심장을 달궜지만 술을 마시는 내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했었다.

그런 자신에게 미묘한 벽을 쳐서 무안을 주면서도 자기 팔에 채워진 불가리 팔찌를 준 그놈이 얄밉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싫어하는 걸 포기해주고 자신이 왜 그림을 모으는지 알아봐주는 그의 따뜻함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감싸주는 포근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꺼풀씩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옷들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찬물로 몸을 식히지 않으면 지독한 열병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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