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12th. 예상대로, 예상 밖으로 (7)
방에 들어간 클레어는 헨리 앞에 김이 올라오는 머그컵 하나를 내려놓았다.
“드세요.”
“고맙다, 클레어.”
클레어는 헨리의 감사인사를 들은 체도 안 하고 자신의 자리에 머그컵을 놓은 뒤, 블라인드를 쳤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헨리?”
“일단, 커피 한 모금은 마시고 얘기를 했으면 하는구나.”
헨리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골든팁스보다는 못할 거예요. 싸구려 원두로 만든 커피니까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톡톡 쏘는 클레어의 목소리에도 헨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다들 잘 지내나 걱정돼서 왔다.”
“보시다시피 다들 잘 지내고 있어요. 투자도 잘 하고 있고요.”
“우리 회사 거쳐서 넘어온 돈으로 말이냐?”
헨리가 정곡을 찌르자 클레어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너희 회사에 대해 알아보다보니 알게 됐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돈 같던데···.”
클레어는 황급히 손을 들어 헨리의 입을 막았다.
“출자자 보호는 투자회사의 기본인 거 아시죠? 출처가 어찌됐든 이제는 우리 회사 돈이에요.”
“알고 있다. 자기 비밀을 감추고 싶은 사람들은 세상에 헤아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헨리가 한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은 비밀을 감추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오늘 이 회사에 온 것이었다.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클레어. 이런 조그만 회사에 머무는 건···.”
“아뇨. 돌아갈 마음 없어요.”
클레어의 단호한 거절에 헨리의 미간에 연한 주름이 패였다.
“왜지? 네가 돌아오면 넌 수천억 달러의 트라이엄프를···.”
“여기서 하는 일이 즐겁거든요, 헨리.”
“즐겁다고?”
“네. 윗사람들 눈치 안 보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투자할 수 있으니까요. 뭐···.”
클레어는 잠시 머뭇거리던 걸 멈추고 사실을 말했다.
“최대 투자자가 제시한 포트폴리오 중심으로 투자하고 있지만 그게 우리들 성향하고 잘 맞아요.”
헨리도 대충은 스탠더드 캐피털의 포트폴리오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게 자신과는 안 맞지만 이 회사에 있는 자신의 옛 식구들과 맞는 걸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급하게 몰아치면 대사를 그르치는 법. 오늘의 헨리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면서 커피를 마셨다.
입에 퍼지는 씁쓸한 맛. 절대 싸구려 원두로 만든 것 때문이 아님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커피를 다 비우고서야 헨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기 전 그가 손을 멈추고 뒤도 안 돌아보고 물었다.
“그런데 네 옆에 있던 그 동양인 친구는 누구냐? 설마 썬 대신에 구한 남자친구냐?”
잠시 움찔했던 클레어가 얼른 입을 열었다.
“아뇨. 제 남자는 썬 하나뿐이에요.”
“그러면 무슨 이유로 그리 친하게 지내는 거냐?”
“우리 회사에 취직한 친구인데 꽤 재밌는 친구예요. 나이를 뛰어넘는 뭔가가 있는 친구죠.”
클레어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지자 헨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 친구가 꽤 맘에 드는가보구나.”
“나쁘지 않아요. 친구로서. 동료로서.”
“알았다. 다음에 보자.”
그 말을 끝으로 헨리는 문을 열었다. 마지막까지 그를 외면하기는 껄끄러웠는지 클레어도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
두 남녀가 방에 들어가자 블라인드가 창문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직원들에게 물었다.
“저 사람, 누구예요?”
“네?”
“방금 전에 들어간 신사 분이요. 헨리라고요?”
잠시 머뭇거리던 직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헨리 로이스. 트라이엄프 캐피털 이사회 멤버 중 한 분입니다.”
“트라이엄프 캐피털··· 이사회 멤버라고요?”
내 귀를 의심했다. 한국과 달리 영미권과 유럽에서는 이사회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는데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그렇지만 내가 놀란 건 너무 일렀다. 이어지는 다른 직원의 말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조니. 헨리는 트라이엄프 캐피털을 세운 로이스 가문의 5대 가주입니다.”“로이스 가문이요?”
“예. 오랜 세월동안 다른 주주 가문들이 들어오면서 지분이 줄어들었지만 로이스 가문은 여전히 트라이엄프 캐피털 17퍼센트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럴 수가. 보통 이사회 멤버도 아니고 회사를 세우고 지배하는 창립자 가문의 대표라니?
멍하니 있던 나는 고개를 흔들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런 분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그게···.”
첫 말문을 텄던 직원이 흐리던 말끝을 또렷이 이어갔다.
“저희 모두 헨리가 후원해준 사람들입니다.”
“후원이요? 장학금 같은 건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저희가 입사해서 퇴사 전까지 트라이엄프 내에서 올라갈 수 있었던 건 모두 헨리의 덕이었습니다. 조니도 알겠지만 월가는 와스프가 아니면 올라갈 수 있는 데 한계가 있는 곳입니다.”
알고 있었다. 돈 되는 빅딜은 전부 노린내 나는 백인 상류층인 와스프(WASP) 안에서만 돌리는 월가가 아닌가? 그래서 나도 개고생을 하고 있으니 모를 리가 있나.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다른 직원이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줬다.
“그리고 우리가 스탠더드에 출자한 돈의 대부분은 헨리가 저희에게 개인적으로 챙겨준 퇴직금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네?”
깜짝 놀랐다.
이들이 창립 초기에 출자한 돈과 최근 들어 할아버지의 3억 불이 들어온 걸 확인하고 더 얹은 투자금은 총 3천만 달러. 클레어를 빼고 다섯인 이들에게 6백만 달러씩 나눠줬다는 게 아닌가? 개인 지갑에서.
내 모습을 보고 직원이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조니 회사를 잡아먹으라는 지시를 받은 게 아닙니다.”
“그런 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그 정도씩이나 챙겨준 거 자체에 놀랐으니까요.”
이유를 더 듣고 싶어서 타이르자 그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썬이 우리들에게 이직을 제안했을 때, 그러니까 스탠더드에 들어오는 걸 권했을 때 한 명씩 헨리를 찾아가서 사직서를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선해철이 예전에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걱정 마라. 그 친구들 빠진다고 안 돌아갈 트라이엄프가 아니야. 정 불안하면 나중에 보은해도 되는 거고.]
[···나한테 보은하지 말고 우리 회사에 보은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네 체급 커지면, 하하.]
“그래서 삼촌이 그렇게 말한 거였군요.”
“네? 무슨 말씀입니까, 조니?”
눈을 깜빡거리는 직원을 보며 손을 내저었다.
“여러분들 빠진다고 안 돌아갈 트라이엄프는 아니니까 걱정 말라고 했었어요. 계속하세요.”
“네. 그때 헨리는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했습니다.”
조금은 흥미로운 얘기였다. 보통의 미국계 기업들은 칼처럼 딱딱 관계를 끊는데 미안하다는 말부터 했다고?
“궁금하네요. 그렇게 높으신 분이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요.”
“자신이 부족해서 우리들을 여기까지밖에 이끌어주지 못한 것 같다고 자책했습니다. 자신이 너무 시대에 뒤쳐진 것 같다고 말이죠.”
왠지 모르게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았다. 고승주에게 듣기로는 할아버지도 금융실명제 당일 밤에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다는데···.
“늘 엄격하게 우리들을 훈육했던 분이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죄송하기도 했고요.”
이번에는 장호건을 보는 것 같았다. 벌을 주거나 부릴 때는 죽일 것처럼 했지만 상을 주거나 미안하다고 할 때는 당사자가 놀랄 만큼 했던 사람이니까.
침음성을 흘리는 나를 보며 직원은 내가 듣고 싶었던 얘기를 드디어 풀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새 직장이 어딘지 묻고는 그 회사의 오너든, 대표든 유능한 사람이면 보태라며 사재에서 퇴직금에 보태주신 거였습니다.”
이제는 이명진의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전생의 내가 집안 주식을 다 팔고 장호건에게 장가갈 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 나에게 지참금까지 건네주지 않았나.
묘한 기분이었다. 더 이상 없을 나의 과거가 다른 곳에서 현재형으로 벌어지고 있었다니···.
뭉클한 감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을 때, 응접실의 문이 열렸고 모두가 기립했다. 나 또한 그들과 함께 재빨리 일어났다.
“자네들이 눈에 밟혀서 찾아왔는데 미안하게 됐네.”
“아닙니다, 헨리.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헨리.”
헨리의 말 한마디에 직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거나 붉어진 눈시울을 훔쳤다. 나는 언제 저 남자처럼 이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헨리는 직원들에게 다가와서 어깨를 토닥여주거나 손을 잡아준 뒤, 내 앞에 다가왔다. 왠지 모르게 할아버지처럼 범접할 수 없는 기운에 어깨가 웅크려졌다.
“이름이 뭔가?”
“존··· 데이비슨 리입니다, 미스터 로이스.”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서 대답하고 고개를 숙였던 내 어깨에 헨리가 손을 얹었다. 그 손에서 묘한 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열심히 해보게, 젊은 친구. 이 나라는 능력 있는 친구라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는 곳이라네.”
헨리의 말 한 글자 한 글자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나와 이 회사의 비밀을 모르는 그를 비웃을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네··· 감사합니다, 미스터 로이스.”
나는 얼른 그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공손히 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내 손등을 헨리는 다른 손으로 두드려줬다.
“그래. 수고하게.”
그 말을 끝으로 헨리는 응접실에 들어갔을 때처럼 휘적휘적 회사를 나갔다. 뒤돌아보니 헨리가 나간 문을 바라보는 클레어의 얼굴에는 착잡함이 가득해보였다.
***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박태진과 함께 기네스 병을 손에 쥐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오늘 참 묘했어요.”
“헨리 로이스··· 말씀이십니까?”
입에서 병을 뗀 박태진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 어른들을 보는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도··· 숙부님도··· 다른 분들도요.”
차마 장호건을 얘기할 수는 없어 다른 사람이라고 얼버무렸다. 장호건은 내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장인어른이지만 경영스승이기도 했던 자가 아닌가.
그마저도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입술을 깨문 나를 보며 박태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도 멀찍이서 지켜봤는데 그런 것 같더군요. 그렇게까지 타인을 감화시키는 사람은 회장님 외엔 처음이었습니다.”
박태진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미래를 살다 돌아온 나조차도 함부로 여기지 못할 기품을 자아내는 사람이 아니었나. 헨리 로이스라는 남자는.
병을 입에 대고 맥주를 마시던 나는 박태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 나도 할아버지나 그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돈을 벌어들이는 건 자신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나 헨리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표는 느낌표로 바꿀 수 없었다.
자신이 없는 나를 보며 박태진은 빙긋 웃었다.
“욕심이 지나치시군요, 도련님.”
“그렇···죠?”
머쓱해하며 맥주를 마시던 내게 박태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세월과 관록이 쌓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도련님. 지금 하시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보다 앞서나가시는데 그것까지 해내시면 불공평할 겁니다, 하하.”
“형도 참.”
겸연쩍은 미소를 비치며 맥주를 마셨다.
그래, 켜켜이 쌓일 세월과 관록이 해결해줄 일이겠지. 나무가 나이테를 늘려가며 크는 것처럼.
***
뉴욕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대한이동통신 주식을 관리하며 다시 뉴욕에 넘어갈 준비를 했다. 그러다보니 10월 1일, 해동백화점 본점 신관 개장일이 다가왔다.
나는 지금 박태진, 장하연과 함께 개장 첫날을 맞은 해동백화점 영등포 본점 신관을 구경하고 있었다.
“와아···.”
“사람에 치여 죽겠어, 누나.”
“이렇게까지 밀릴 줄은 몰랐습니다.”
1층에 자리한 명품관은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이봐요! 새치기 하면 어떡해요?”
“새치기? 내 남편 세워놨는데 무슨 소리야!”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은 젊은 여성과 깡마른 중년의 여성이 펜디 매장 앞에서 말싸움을 하고 있었고···
“여보, 나 이거 사주면 안 돼요?”
“여기요, 이거 계산해줘요.”
구찌 매장에서는 50대 부부가 점원에게 뱀부 백을 들어 보이며 신용카드를 내밀고 있었다.
“우리 아이디어, 먹힌 거 같은데?”
“그런 거 같아.”
우리 둘이 만든 기획서에는 각 해외 브랜드 입점에 20년 간 최저 수수료율 25퍼센트라는 조건이 실려 있었다. 대신에 원하는 만큼 공간을 내주는 게 핵심이었는데 우리 생각이 먹힌 것 같았다.
나와 장하연이 멍한 표정으로 매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 박태진이 껄껄 웃었다.
“두 분 생각이 들어맞은 것 같군요. 축하드립니다, 하하.”
“장사 잘하라고 널찍하게 내줬는데 그 정도는 해야죠. 로엘, 태현, 신세기도 우리처럼 안 해줬는데.”
이 건물 1층만 해도 펜디, 구찌, 프라다가 각각 150평쯤 깔고 앉았고 부쉐론, 카르티에, 불가리, 에스테로더 같은 브랜드들도 50평 내지 100평쯤 차지하고 있었다. 에르메스, 샤넬, 루이비통도 내년부터 부산 서면점과 강남점에 들어올 테니 조급해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 2층은 여성관, 3층은 남성관, 4층은 영유아관 등 품목별 전문관으로 만들었고 딱 한 층만 구경하지 못하게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위층이나 아래층의 샘플을 배치했다. 커플이든, 가족이든 이곳에 한 번 들어오면 시간과 돈을 바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하연은 날 대단하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야?”
“쇼핑이라는 게 물건만 사는 게 아니잖아.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좋은 기억만 남아야 백화점도 살고 브랜드도 살지. 누나도 찬성했으면서 그런다?”
앞으로 백화점이든 할인점이든 물건을 파는 곳에서 경험을 파는 곳으로 변한다.
매출수수료 때문에 매장들을 빽빽이 넣은 기존 백화점들과 달리 통로 너비와 브랜드별 매장 면적을 넓게 잡았고 점원들 유니폼과 고객서비스도 개선했으니 씀씀이가 큰 고객들은 쾌적하고 고급진 쇼핑을 위해 우리 매장을 찾을 것이다.
그 미래를 떠올리며 미소를 짓던 중 박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시죠. 둘러볼 곳이 많습니다, 하하.”
그의 말이 맞았다. 이번 달이 끝나면 반 년 정도는 장하연을 못 보니 남은 한 달 동안 열심히 함께 다니면서 그녀의 얼굴을 봐둬야 했다.
발걸음을 옮기며 매장을 둘러보며 고객 응대나 매장 진열 등을 점검하던 우리는 어디선가 울려 퍼진 앙칼진 목소리를 들었다.
“가보자, 누나. 이러다 일 나겠어.”
“빨리 가자. 첫날인데 사고 터지면 안 돼. 선배님, 빨리 가요.”
“알겠습니다.”
액땜이라기엔 너무 불길했다. 빨리 가서 수습해야 한다는 걸 직감한 건 장하연, 박태진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으로 달려갈수록 귀에 굉장히 익은 그 재수 없는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신관이라지만 오픈 첫날부터 난장이라니!
“이봐! 손님은 왕이라는 말 몰라? 갖다달라면 갖다 줄 것이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장수연다운 짓이었다. 내가 짐꾼 노릇을 할 때마다 저 짓거리 때문에 고개를 못 들었는데···. 오늘은 부속실 여직원들이 따라왔나 보다. 장수연 뒤에서 쇼핑백을 들고 있으면서 고개를 못 드는 게 백퍼센트였다.
언성을 높이는 장수연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점원은 최대한 공손히 그녀를 타이르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고객님, 벌써 고객님 혼자서 피팅룸을 쓰신지 1시간이 다 됐습니다. 다른 고객님들도 계시니···.”
“그 입 안 다물어? 내가 쓰는 돈으로 먹고 사는 것들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몰라도 장수연은 내가 오는 것도 모른 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몸짓을 본 점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턱!
“뭐야! 이거 안···?”
내게 손목을 잡힌 것도 모르고 악다구니를 쓰던 장수연은 내 얼굴을 보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 성민아?”
“누나, 이런 사람이었어? 지금까지 이랬던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처음 봤다는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짓고 묻자 장수연이 말을 더듬었다. 아직 나를 잡지도 못했는데 자신의 본모습이 까발려졌으니 얼마나 쪽팔릴까?
장하연, 박태진의 무심한 시선까지 더해지자 장수연은 내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뛰어갔다. 우리 둘을 쳐다보면서도 어찌할 줄 모르고 있던 여직원들도 양 손에 든 종이백을 들고 장수연을 쫓아갔다.
“휴우, 괜찮으세요?”
“감사합니다, 고객님.”
긴장이 풀렸는지 점원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나와 박태진은 얼른 점원을 부축해줬다.
“힘내세요, 여사님.”
“···감사합니다, 고객님.”
그 말을 끝으로 우린 매장을 나와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우리 그룹 사람이 다치는 걸 볼 수 없어서 나섰는데 장수연을 질질 끌고 가는 건 글러먹은 것 같다. 젠장.
***
“아아악!”
집에 돌아온 장수연은 문을 걸어 잠근 채 악을 썼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소리에서는 분노와 상실감이 모두 묻어나고 있었다.
허나 그녀의 분노와 상실감은 소리만으로 달래질 게 아니었다.
부우욱 소리 한 번에 옷이 찢어지고 촤르륵 소리와 함께 목걸이에 달린 보석이 방바닥과 부딪쳐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참 동안 정신병자처럼 수천만 원 어치의 물건을 쓰레기로 만들고 나서야 장수연은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궜다.
툭, 툭.
그녀의 머리 아래에 진 그늘로 물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장수연은 손톱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까드득 소리와 함께 방바닥을 긁으며 주먹을 쥐었다.
“이성민, 장하연··· 이 찢어죽일 새끼들···.”
부들부들 떠는 주먹, 주먹 안의 손톱 틈에서 흘러나오는 피만큼 장수연은 오늘의 수모를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