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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39화 (38/229)

39화. 12th. 예상대로, 예상 밖으로 (5)

“지금은 깡촌이지만 도시 하나 세우기엔 넉넉하겠군. 뙤놈들이 점점 크고 있으니 평택항도 키우고 공단 세우기도 좋겠어.”

할아버지가 낮은 톤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이명진도 입을 열었다.

“도농통합 외에도 9월쯤에 아산만권 개발 계획이 발표되면 장기적으로 바라봤을 때 투자가치가 높습니다, 아버지. 일단 토지를 매입해서 영농법인을 만들고 중공업에서 만드는 농기계를 투입해서···.”

이명진의 막힘없는 브리핑에 적잖이 놀랐다. 평택 땅의 가치를 알아봤으니 저런 말을 술술 내뱉는 게 아닌가?

어쩌고 보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해동건설과 다른 계열사들이 작년에 매입한 차명 토지만 해도 죄다 신도시가 들어설 땅들이 아니었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명진의 세부계획 제안이 끝나자 할아버지는 책상 위에 있는 연필꽂이에서 마커 하나를 챙겨 오더니 ‘율포리’와 ‘여염리’에 큼지막한 동그라미를 쳤다.

“우린 이 땅 먼저 사들인다. 황가 놈들이 살 땅은 나중에 거둬와.”

할아버지의 결정을 듣고 온몸이 짜릿했다.

황 씨 집안이 사들일 당현리와 달리 율포리와 여염리는 고덕신도시에서 가장 먼저 개발될 곳이다. 그 노른자 땅을 콕 집어낼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할아버지는 몸을 움찔한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너라면 어느 땅을 사겠느냐?”

“네?”

“네 숙부도 땅 보는 눈이 좋아서 회사에 돈을 많이 벌어다줬다. 이젠 네 녀석 안목을 보자꾸나. 고덕면은 할애비가 찍었으니 다른 곳을 찍어 보거라.”

남은 땅 중에 그나마 돈이 될 땅이 있긴 했지만 단박에 찍어버리면 다들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 할아버지에게 부탁했다.

“말미를 주십시오, 할아버지. 신중히 고르겠습니다.”

“알았다. 첫 투자이니 해가 지날 때까지 잘 생각해 보거라.”

크게 급한 일이 아닌지 할아버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국일보에서 곡소리 터질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그거부터 보려는 건가?

***

다음 날 저녁.

전번에 왔던 요정의 한 방에서 고형만은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도자기 잔을 비웠다.

탁!

“오늘 점심에 신성그룹이 계약서 공개한 거 알고 봤소? 해동그룹에서 퍽이나 광고 내주겠소!”

“······.”

고형만이 언성을 높이는 데 반해 황현성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저놈을 충동질해 실행한 계획이 쓰레기가 됐으니 입 안에 모래를 머금은 것 같았다.

고형만은 아무 말도 못 하는 황현성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됐고! 150억 전부 내가 가져가겠소. 그게 싫으면 죄다 장 회장님한테 넘기고 사실대로 다 말할 거요!”

“고, 고 사장!”

황현성이 다급히 그를 불렀지만 고형만은 자리를 박차고 방을 나갔다.

“이, 이···!”

황현성은 문을 쳐다보며 이를 갈다가 도자기 잔을 집어던졌다.

쨍그랑!

벽에 맞은 도자기 잔이 산산조각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에아아-!”

황현성은 앉은 채로 바닥을 주먹으로 두들기며 소리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나중에 해동그룹에서 광고를 준다고 해도 덜미를 잡혔으니 150억은 영원히 바이바이였다.

힘들여 모은 피 같은 150억이 꼼짝없이 날아가게 생겼으니 그 손실을 메울 방법은 단 하나.

핸드폰을 켠 그는 신호가 잡히자 수신부에 외쳤다.

“평당 얼마라고 했나? 십오? 알았어. 흥정해보고 안 될 것 같으면 다시 연락해.”

전화를 끊은 황현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공장 주변 땅만 사들였지만 이번에는 앞뒤를 가릴 수 없었다. 빵꾸 난 비자금 150억을 메우면서 플러스로 바꾸려면 처남이 사려고 한다고 동생이 일러준 공장 건설 예정지를 손에 쥐어야 했다.

걸릴 수도 있지만 괜찮을 거라 여겼다. 걸렸다면 지난 몇 년 간의 재테크는 꿈도 못 꿨을 테니 이번에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

얼마 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난 장호건은 아침공기를 쐴 겸 밖으로 나가서 문 앞에 떨어진 오늘자 동양일보 신문을 가져왔다.

[국민 여러분들과 해동그룹, 신성그룹에 사과드립니다.]

“슬슬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겠군.”

오늘자 신문을 보며 미소를 띠던 장호건은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미소를 지우고 샤워실에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는 평소처럼 옷을 입고 나와 식사를 했다. 다들 거실에 놓인 신문을 봤는지 자신의 눈치만 보며 조용히 수저만 움직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선 그는 성의원 집무실에 도착해서 이수한을 부른 뒤, 결재판의 서류를 살펴보며 서명을 했다.

네 번째 서류를 살펴보던 그의 귀에 인터폰 소리가 들렸다.

“뭔가?”

[이수한 실장님 들어왔습니다, 회장님.]

“들어오라고 해.”

장호건은 인터폰 버튼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수한을 맞았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회장님?”

“조금. 어서 앉게.”

자리에 앉은 장호건과 이수한은 직원이 들여온 커피를 마시며 숨을 가다듬었다.

“작업은 잘하고 있나?”

“예. 고덕면 부동산 건부터 보고 드리겠습니다. 우리 쪽에서 내세운 놈들한테 연락이 왔는데 황현성 회장 쪽 입질이 들어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구매 의사는?”

“평당 15만 원을 제안했는데 어떡하시겠습니까?”

이수한은 조심스럽게 물으며 이만하면 충분히 타격을 줄 거란 뜻을 비쳤지만 장호건의 생각은 달랐다.

“연말까지 20만 원으로 올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수한이 다시 한 번 걱정해줬지만 장호건은 생각을 바꿀 뜻이 없었다.

“처가 쪽 욕심은 내가 잘 아네. 작년까지 해동그룹 사채자금 쫓아다니겠다고 그 난리가 아니었나. 결국엔 포기했다지만 보는 나도 진절머리가 나더군.”

이수한은 장호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 씨 가문의 탐욕은 자신도 알고 있지 않나. 장호건의 가정사와 겹쳐서 의사를 물었는데 본인의 의사가 확실하니 밀어붙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 건은 그렇게 하고··· 감사는 잘하고 있나?”

“예. 비서실부터 정리한 뒤, 그룹 감사팀을 꾸려서 진행 중입니다. 현재 진행 상황을 정리해왔습니다.”

“흐음···.”

장호건은 이수한에게서 받은 서류를 보며 어금니를 씹었다. 처가 쪽에 오염된 쥐새끼들은 예상보다 그룹 내에 촘촘하게 퍼져있었다.

탁.

덮은 서류를 탁자에 던지듯 내려놓은 그가 입을 열었다.

“전부 정리해.”

“예. 법인카드 식대 영수증까지 털리고 있으니 사표를 안 내고는 견디질 못할 겁니다. 그래도 버티는 놈들은 말단 영업점이나 서비스센터로 보내서 평생 썩게 하겠습니다.”

보고를 계속하던 이수한도 장호건과 이심전심이었다. 감사 첫 날에 비서실부터 모조리 갈아엎은 그였기에 그룹 전체에 걸쳐 숙청의 칼춤을 신명나게 추고 있었다.

“다시 스며들 수도 있겠지만 복구하긴 어려울 겁니다. 반대로 우리 쪽에서 심은 사람들은 계속 늘어날 겁니다.”

“알겠네. 수고하게.”

“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넘으려던 이수한은 발걸음을 멈췄다.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회장님.”

“말하게.”

“신성코닝에서 쓸 만한 친구를 발견했습니다.”

“쓸 만한 친구?”

장호건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이수한은 표정을 다잡았다. 그의 표정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회장님. 박태곤이라고 감사를 진행할 때 내부 비리를 알려준 친구인데 능력도 좋고 뒷돈 한 푼 안 챙겼습니다. 내부 평판도 좋고요.”

그 뒤로도 이수한의 이야기를 들은 장호건은 입꼬리를 올렸다.

“재미있군. 경리 쪽에 앉은 놈치고 떡고물 안 챙길 놈이 없는데.”

“예. 상고 출신인데 지방대 재학 중에 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ROTC 임관 후 경리장교로 복무했습니다. 당시 상급 지휘관들과 만나봤는데 일처리가 꼼꼼했다고 합니다.”

인재욕심은 아버지보다 더한 장호건이었기에 호기심이 동했다. 이수한이 지난번 일에도 불구하고 추천한 이유를 경력사항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 일가 친인척들도 체크해봐.”

“예. 회장님 수락을 받으면 추진할 예정이었습니다.”

긴장 속에서도 확신이 굳은 이수한의 대답을 듣고 장호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검증되는 대로 비서실에 앉혀. 그 친구, 직급이 뭐지?”

장호건의 지시가 자신에 대한 재신임으로 들렸는지 이수한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부장 1호봉입니다.”

“이사로 올려. 감사 끝나면 그룹 인사이동 때 데려다 써.”

“예, 회장님.”

이수한이 나가기 전에 장호건이 물었다. 그의 얼굴에도 묻고 싶은 게 있어보였다.

“백화점 컨설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고승주 실장에게 들었는데 오늘 내로 최종결과가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수한의 대답을 듣고 장호건이 턱을 매만졌다. 그의 얼굴은 걱정과 기대가 뒤섞여있었다.

“좋은 결과가 나와야 할 텐데···.”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하연이 실력, 아시잖습니까?”

장호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객실 인테리어를 고친 것만으로 고려호텔 매출의 5퍼센트를 끌어올린 장하연이 아닌가. 이수한 말대로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 실장 만나서 말해. 하연이 컨설팅 반영해주면 연말까지 해동백화점 상품권 200억 사주겠다고. 백화점 실적이 좋아지면 더 사들이겠다고 해.”

“예, 회장님.”

장호건도 사업가이기 전에 부모라는 건 속일 수 없었다.

***

고승주에게서 연락을 받은 나는 장하연과 함께 삼청동 저택으로 들어갔다. 곧 있으면 6월이라는 걸 알리려는지 정원에 서 있는 나무마다 푸른 녹음이 짙게 드리워져있었다.

“서울 안에 이런 집이 있었다니···.”

차에서 내린 장하연이 감탄하는 걸 보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누나 보니까 걱정된다. 앞으로는 익숙해져야 할 텐데.”

“무슨 뜻이야?”

“나하고 자주 보면 여기 올 일 많아질 거 아냐. 안 그래?”

한쪽 눈을 찡긋하자 장하연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그건···.”

“그러고 있을 시간 없어. 이 집에 계시는 분도 익숙해져야지. 그렇죠?”

뒤를 돌아보며 묻자 우리 뒤에 있던 박태진이 빙긋 웃었다.

“그렇습니다. 이 저택을 쓰시는 분께 익숙해지는 게 더 중요하죠, 후후.”

“선배님···.”

“어서 가시죠, 후배님들. 우리 선배님들께서 두 분이나 기다리고 계십니다.”

박태진이 건넨 말에 장하연이 놀랐다.

“두 분이라뇨? 회장님께서 우리 과가 상학과였던 시절에 졸업하신 건 아는데··· 설마?”

장하연은 내심 바라지 않는 눈치였지만 박태진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녀의 기대를 저버렸다.

“예. 오늘 이 자리는 고승주 실장님께서도 동석하실 겁니다.”

“고승주 실장님까지요?”

장하연이 적잖이 놀랐는지 높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우리 과 출신 경제인들 중에서 손에 꼽히고 신성그룹 이수한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아닌가?

“예. 실장님께서는 회장님과 함께 그룹 계열사에 두루 밝으신 분입니다. 태재호 대표님께서는 내부 담당자들과 평가를 끝내셨으니 두 분 평가만 받으시면 되십니다.”

박태진의 대답을 듣고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장하연.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옆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누나. 우리가 준비한 건 또 어떻고?”

“잘··· 되겠지?”

장하연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난 자신 있었다.

전생의 일이지만 매년 10억도 안 되는 그림을 사고 팔아서 100억 단위의 돈을 벌어들인 그녀가 아닌가. 미적 감각이든 유행을 내다보는 안목이든 그녀가 꾸민 백화점이라면 사람들을 끌어들일 거라 확신했다.

“가자. 두 분 기다리시겠다.”

“응···.”

손을 잡고 본관에 들어가자 집사장이 눈에 딱 보였다.

“흠흠···.”

집사장이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을 하자 장하연은 얼른 내 손에서 자신의 손을 풀었다.

“죄송합니다, 집사장님.”

“회장님과 고 실장님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련님. 박 차장님은 차 한 잔 드시면서 기다리시지요.”

우리 둘은 박태진을 1층에 남겨놓고 집사장의 뒤를 따라 2층 서재로 올라갔다.

“주인어른, 도련님과 장하연 씨 두 분 도착했습니다.”

[들어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리자 집사장이 문을 열어줬고, 우리 둘은 서재에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오느라 수고했다. 어여 앉어. 집사장, 다과 좀 내오게.”

“예.”

문을 닫은 집사장이 아래층에 내려가서 다과를 내왔고 할아버지는 책상 앞에 앉은 채 홍차를 마셨다.

“사업 이야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장 부장 나이가 어찌 되는고?”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깜빡거리던 장하연은 얼른 표정을 다듬고 입을 열었다.

“스물여섯입니다, 회장님.”

“한창 좋을 때구먼. 시간 날 때 따로 하는 건 있고?”

“개인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소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소조면 점토 같은 걸 붙여서 만드는 건가?”

“네. 점토를 붙여서 만들기도 하고 거푸집에 석고 반죽을 부어서 만들기도 합니다.”

그밖에도 할아버지는 장하연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차, 술 같은 걸 물어보며 대화를 나눴다.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던 할아버지가 찻잔을 비웠다.

“잘 들었네, 장 부장. 앞으로 우리 장손하고 잘 지내면 좋겠구먼.”

할아버지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말하자 장하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허허, 예의도 바르지. 사담(私談)은 이쯤 하고··· 두 사람이 제출한 기획서는 잘 봤다. 해동백화점을 근본부터 바꾸려고 한 것 같더구나.”

“네, 회장님. 앞으로 해동백화점이 대한민국의 소비문화를 이끌길 바라며 만들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장하연이 차분하게 대답하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았다. 헌데··· 기획서대로 안 풀리면 어찌 할 테냐?”

할아버지의 질문에 눈이 번쩍 뜨였다. 현재의 경쟁업체들을 생각하면 백화점업계를 뒤집을 방법들로만 채웠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인가?

나뿐만 아니라 장하연까지 충격을 숨기지 못할 때 할아버지가 새로운 제안을 던졌다.

“이렇게 하자. 영등포 본점 신관 개장하고 그 한 달 동안 매출이 전년 그맘때보다 20퍼센트 이상 안 나오면 안 나오는 만큼 성민이 네가 채워라. 어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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