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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37화 (36/229)

37화. 12th. 예상대로, 예상 밖으로 (3)

전화를 끊은 장호건 회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거 참. 살다보니 별 일을 다 보겠군.”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

소파에 앉아있던 이수한의 질문에 장호건이 빙긋 웃었다.

“성민이 그놈이 제 할아버지 앞에서 하연이를 감싸줬다더군. 아침에 삼청동에 들어갔다는데···.”

이수한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이성민이 보여준 예상 밖의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덕분에 장호건이 모처럼 들뜬 모습에 놀란 걸 가린 건 덤이었다.

“성민 군이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일전에 말씀하시던 것과 다른 것 같군요. 장손이라지만 이 회장님께 들이받은 게 아닙니까?”

“자네도 그리 생각하는데 나라고 오죽하겠나. 그 녀석, 이 나라에서 그 양반한테 들이받을 수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어릴 걸세.”

이수한에게 말하던 장호건이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어른들 싸움에 끌어들여서 미안하지만 제 여자 지켜주겠다고 나선 걸 보면 제법 남자답기도 하단 말이지. 내 친구 아들 아니랄까봐, 하하.”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하연이를 건사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럼, 그럼. 나한테서 내 딸 데려가려면 그 정도 깡은 있어야지, 으하하.”

이수한과 마주보며 호탕하게 웃던 장호건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몇 번 정도 기사가 더 나갈 거라고 하던가?”

“동양일보 편집국장과 만나서 들었습니다. 적어도 서너 곳에서 우라까이(베껴 쓰기) 할 때까지는 써야 하지 않겠냐고 묻더군요. 제 생각에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표정을 가다듬은 이수한의 대답에 장호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론사의 힘은 다른 언론사들이 확성기 노릇을 해줘야 발휘된다. 혼자만 떠들면 공허한 메아리지만 다른 언론사들이 받아써주면 더 멀리, 더 크게 퍼지니 일리가 있었다.

“알겠네. 우리한테 넘겨주기로 한 50억, 다른 신문사 끌어들이는 데 다 써도 좋다고 해. 스크린이 커야 관람객도 늘어나지 않겠나?”

“예, 회장님. 사과기사 올리고 나서 물타기에 쓸 연예계 뽕쟁이들 명단까지 고 사장 쪽에 넘겨주겠습니다. 검찰 쪽에 있는 우리 장학생들도 준비해두고요, 흐흐.”

“좋았어. 엔딩까지 맘에 드는군, 흐흐.”

대학에서 언론과 영화를 공부한 장호건.

그는 이수한이 짠 각본이 맘에 들었는지 그와 마주보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

[일부 상식 없는 기업인들의 구시대적 행태, 신한국 창조를 위해 근절되어야]

[호텔을 제집처럼 쓰는 S그룹 여식. 기업의 사유화, 어디까지 진행되는가?]

[공장 노동자들의 급여는 아끼면서도 오너 가문의 호텔 숙박비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S그룹.]

시간이 흐를수록 동양일보의 기사는 식칼에서 회칼, 회칼에서 메스처럼 날이 섰고 눈치만 보던 나머지 신문사들도 하나둘씩 똑같은 논조로 기사를 썼다. 당연히 우리 그룹과 장하연에 대한 여론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누나, 괜찮아?”

“기다려봐야지 어떡하겠어. 아버지도, 실장님도 애쓴다는데.”

잠실 로엘백화점 답사를 마치고 옆에 있는 로엘랜드로 넘어온 우리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쓴 채 서로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장호건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기 딸내미가 상처받고 있는데 언제까지 질질 끌려는 건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그녀에게 말했다.

“누나, 그만하자.”

“응?”

“누나가 갖고 있는 테이프, 아저씨한테 넘기자. 그거 한 방이면 다 될 거 아냐?”

“그래도···.”

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나한테 끌려왔다고 해. 형, 고려호텔 들러서 물건 챙기고 성의원 가죠.”

“도, 도련님?”

굳은 얼굴로 바라보며 말하자 박태진이 말을 더듬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들이받아야겠다.

“어서요. 가자, 누나.”

“···.”

“알겠습니다, 도련님.”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내뱉고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서자 박태진도 굳은 표정으로 우리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로엘랜드를 나온 우리는 고려호텔에 들러서 그간 장하연이 모아둔 테이프를 챙긴 뒤, 다시 차를 타고 성의원 입구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에 나는 할아버지에게, 장하연은 장호건에게 전화를 걸어 면담 허락을 받은 건 물론이었다.

“누구십니··· 부장님?”

우리 차를 가로막고 얼굴을 확인하려던 수위는 뒷좌석에 앉은 장하연이 유리창을 내리면서 얼굴을 드러내자 눈이 커졌다.

“빨리 들어가야 해요. 급한 일이에요.”

“알겠습니다, 부장님.”

차 옆에 있던 수위에 검문소 같은 건물 안에 앉아있던 양반까지 나와서 안쪽으로 두 문을 활짝 밀어젖혔다.

차를 대고 밖으로 나온 나는 장하연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도, 손도 떨리고 있었다.

“겁먹지 마. 누나. 내가 있잖아.”

“성민아···.”

손을 잡아주며 말하자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가죠, 형.”

“네.”

그녀와 함께 돌판을 밟으며 본관으로 들어가니 기분이 묘했다. 부속실을 맡았을 때 장병호 신성그룹 초대 회장의 제삿날마다 아침부터 돌판 양쪽 잔디밭에 국화가 심어진 화분 수백 개와 화환을 오와 열을 맞춰 까는 게 일이었는데···.

“도련님.”

“네.”

“혹시 이곳에 와보셨습니까?”

박태진의 질문에 움찔했다. 지금의 난 이곳을 와본 적이 없는 놈인데!

“아뇨? 누나가 별 말 안 해서 발 가는 대로 가는 거예요.”

“그러셨군요. 발걸음에 거침이 없으셔서 놀랐습니다.”

“내 여자 지키는 일인데 발걸음부터 쫄리면 어떡해요? 가요.”

내가 잡은 장하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팔푼이처럼 헬렐레하는 건 불가. 그녀와 눈도 안 마주치고 손만 잡은 채 본관으로 들어갔다.

“여기 맞지?”

“응···.”

코너를 돌아서 마룻바닥으로 된 복도를 걸어가니 책상 하나가 문 앞에 놓여있었다.

“누구십니··· 부장님? 같이 계신 분들은···?”

먼발치에서 장하연을 알아본 남직원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락을 넣었어도 내가 장하연의 손을 잡고 있고 우리 뒤에 1.9미터에 가까운 박태진이 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해동그룹 이성민 씨, 박태진 씨예요. 회장님 계시죠?”

“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허리를 약간 숙인 직원은 인터폰 버튼을 누르고 우리가 왔다는 걸 장호건에게 알렸다.

[들어오라고 해.]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제가···.”

인터폰 버튼에서 손을 뗀 직원이 문을 열어주려고 했지만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오늘은 제 손으로 열고 들어가겠습니다. 다음에 올 때 열어주시죠.”

머쓱해진 직원이 자리에 앉았고, 나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들어가는 방이라 그런지 가슴이 뛰었다.

***

“오랜만이구나, 성민아. 기다리고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 장호건이 소파에서 일어나 내게 걸어오며 정겹게 반겨줬다.

‘뭐지?’

전생에는 날 그리도 미워했던 장호건이었는데 지금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날 반겨주고 있었다. 대체 왜?

멍하니 있던 중 장하연이 맞잡은 내 손을 살짝 세게 쥐어서 정신을 차렸다. 그때서야 장호건이 내민 오른손이 눈에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첫 인사가 ‘죄송합니다.’라니··· 평생 죄송할 것 같은 재수 없는 느낌이 들었지만 장하연 앞이기에 두 손으로 장호건의 손을 공손히 감싸 잡으며 최대한 예의를 지켰다.

“허허, 죄송할 게 뭐가 있느냐. 사업 때문에 왔는데. 허리 쭉 펴고 이리 오너라.”

껄껄 웃으며 내 등을 쓰다듬어주던 장호건은 등을 쓰다듬어주던 왼손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그 소파의 맞은편에는 차분한 표정의 이수한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실장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성민 군. 요즘 기자들이 떠드는 소리에 상심이 컸을 테니 이해합니다.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회장님.”

눈치 백단 아니랄까봐 이수한은 자리를 비켜주려 했지만 장호건은 손을 내저었다.

“자네도 앉아있게. 우리 장 부장 파트너가 무슨 생각으로 왔는지 들어봐야지?”

벌써부터 면접인가? 장하연 사위, 아니 신성그룹 오너 경영진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박 차장도 자리에 앉아요. 우리 애들 꼬맹이였을 때 가끔씩 봤는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군, 하하.”

“감사합니다, 회장님.”

장호건은 상석에 엉덩이를 놓으며 양 팔을 팔걸이에 걸쳤고 나와 박태진은 왼쪽 소파에, 장하연은 이수한이 앉은 오른쪽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로 왔는지 알고 있다. 동양일보 때문이겠지?”

“네, 회장님. 백화점에서까지 사람들이 저희 흉을 볼 만큼 언론사들도 받아쓰기를 충분히 했습니다. 더 이상 확산되면 백화점 컨설팅 이후 재개장을 해도 효과가 미미할 겁니다.”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자기 딸내미와 우리 그룹 이미지에 흠집이 날 거란 뜻을 전하자 장호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너희들이 오기 전에 이 실장과 그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오늘 밤에 두 그룹 간 숙박비 내역을 방송에 내보낼 건데··· 그거 주게, 이 실장.”

“예, 회장님.”

이수한은 소파에 기대어 둔 가방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서 내게 넘겨줬다. 이제야 이걸 쓰려고 했다니!

“받아요, 성민 군.”

“네··· 실장님.”

뻘쭘해진 나는 서류철을 받아서 펼치고 계약서를 한 장씩 넘겨봤다.

우리 측 계획대로였다. 백화점 컨설팅 계약서와 양측이 추가한 조항들로 꾸민 이면계약서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 장을 보고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놀랐겠구나. 네가 우리 딸 데려가면 이 아저씨는 유통을 너희가 키웠으면 하는구나, 하하.”

이럴 수가.

장호건과 이수한 앞이라서 일부러 놀란 척하던 나는 소탈하게 웃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말이 안 나왔다.

재벌이 왜 재벌인가? 끝없이 사업을 넓히려 해서 재벌이 아닌가? 그런데 나와 장하연에게 유통을 맡기겠다니?

속 보이는 거짓말 같지만 고개를 끄덕인 나와 달리 장하연은 크게 뜬 눈으로 장호건을 바라봤다.

“아버지?”

“대신에 키우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너희들이 해야 할 거다. 난 손만 안 댈 생각이니까. 알았지?”

장호건이 푸근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장하연은 대답도 못하고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다. 장호건은 그런 딸을 보며 껄껄 웃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장이 알맹이다. 마저 확인해봐.”

“네.”

마지막 장으로 넘어간 나는 원본 계약서와 똑같은 내용을 쭉 훑어 내려가며 내가 원하던 내용이 있는지 확인했다.

[···해동그룹은 장하연 고려호텔 부장의 호텔 객실료를 ‘해동그룹’에서 지급한다.]

여기서 부터가 중요하기에 두 사람이 보란 듯이 마른침을 삼키고 다음 내용을 읽었다.

[본 조항에서 ‘해동그룹’이라 함은 해동그룹의 동일인인 이대수 해동그룹 회장을 지칭한다. 따라서 이대수 회장 개인 계좌에서 고려호텔 계좌에 장하연 고려호텔 부장의 객실료를 일 단위로 이체한다. 단, 장하연 본인이 본인의 객실료를 결제할 경우 이대수 회장이 지급한 객실료는 고려호텔의 수익으로 전액 귀속된다.]

됐다!

진짜 이면계약서에는 내가 꾸민 내용이 전부 적혀 있었고, 언론에 뿌릴 계약서에는 이 내용만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할아버지와 장호건의 직인이 찍혔으니 이 계약서만 공개하면 황현성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그런데 계좌 내역만 공개하겠다고?

의아함을 품고 바라보자 장호건이 가볍게 숨을 내쉬며 나를 마주봤다. 그는 날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은 그리 할 생각이다. 이 회장님께도 말씀드렸으니 뵙고 확인해 보려무나.”

“네, 회장님.”

두 분 사이에 내가 모르는 거래가 있나보다. 그래도 우리가 준비한 걸 썩힐 수는 없어서 장하연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저희, 아니 장하연 부장이 준비한 게 있습니다.”

“오, 그래? 어디 한 번 보자꾸나.”

장하연은 버킨백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장호건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장 부장?”

장호건이 상자를 열어 그 안에 있는 수십 개의 테이프 중 하나를 들어 보이며 묻자 장하연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컨설팅 첫 날부터 녹화한 테이프입니다, 회장님.”

“녹화 테이프?”

“혹시나 해서 제가 일하는 걸 실시간으로 녹화했습니다. 새벽 출근 때부터 취침 전까지 전부 담겨있습니다.”

장호건과 이수한의 눈꺼풀이 잠시나마 들썩였다. 둘 다 한 방 먹은 것 같군, 흐흐.

“흐음··· 알았다. 이건 돌려줄 테니 나중에 달라고 할 때 주거라.”

“네.”

“그리고 내가 집에서 어떤 말을 하던 날 믿어, 장 부장. 알았지?”

“네, 회장님. 믿겠습니다.”

회장과 부장으로 부르면서도 서로를 감싸주는 두 부녀를 보니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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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을 내보낸 뒤.

“두 아이가 하는 짓이 귀엽구만, 수한이.”

“그러게 말입니다, 회장님.”

두 중년의 남자는 젊은 예비 재벌 지망생들이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면서 대견하기도 했다. 벌써부터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는 신중함은 온갖 기발한 사고를 치고 다니는 그 또래의 다른 재벌 후계자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우리가 좀 질질 끌긴 했지. 오늘밤 9시 뉴스로 나간다고?”

“예. 고 실장과 동석해서 방송 3사 보도국장들한테 5억씩 챙겨주고 자료를 넘겨줬으니 전국이 떠들썩해질 겁니다. 기사가 나가는 대로 그룹 감사를 개시하겠습니다.”

이수한은 성의원에 들어오기 전에 이대수의 연락을 받은 장호건의 지시로 고승주와 함께 방송 3사 보도국장들에게 계좌이체 사본을 넘겨줬다.

여기에 죽을 때까지 함구할 것까지 주문한 건 물론이었다.

“됐네. 오늘 밤에 거실서 TV 볼 때 계약서 보여주면 볼 만하겠어, 으하하.”

장호건은 오늘 밤 거실에서 TV를 볼 황나연, 아니 그 뒤에 있는 처가 놈들의 구겨질 면상을 생각하며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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