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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34화 (229/229)

34화. 11th. 처음이니 소소하게 (2)

며칠 뒤.

“여기 맞죠?”

“네, 도련님. 약속시간까지 30분 남았습니다.”

차에서 내린 나는 고즈넉한 정원을 둘러보고 박태진과 함께 돌판을 밟으며 한옥 건물로 향했다.

“무궁화실이 어디죠? 고승주 님 일행입니다만.”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박태진 님은 무궁화실 옆 매화실에 상을 마련해드렸으니 그쪽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정장 차림을 한 남직원의 안내를 듣고 박태진이 내게 말했다.

“잘 하십시오, 도련님.”

“고마워요.”

직원을 따라가던 나는 매화실 앞에서 박태진과 헤어진 뒤, 옆에 있는 무궁화실 앞에서 신발을 벗었다.

꿀꺽.

알맹이는 중늙은이인데 왜 이리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정식 상견례도 아닌데 뭐 대단하다고 마른침까지 삼켜지는지···.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서 와라, 성민아. 안 늦었구나?”

“···실장님?”

이럴 수가.

약속시간보다 일찍 와서 긴장을 풀려고 했건만 고승주가 먼저 와있었다.

눈을 깜빡거리던 나는 고승주의 맞은편에 있던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건넨 인사도 받았다.

“일찍 왔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성민 군.”

이수한 실장이었다.

신성그룹 재결합의 수훈갑.

나조차도 따라가기 힘들었고 장 씨 집안 사위였던 내게까지 상사 노릇을 톡톡히 했을 만큼 짤 없고 일중독인 양반이었다.

하지만.

장호건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장용재, 장수연을 내세운 황 씨 가문과의 힘 싸움 끝에 사표를 냈다.

황 씨 일가가 이수한이 관리하던 차명주식에 '혼자만 알고 있는 중요한 비밀'을 빼내려 협박하다가 동반자폭을 우려해 놔줬는데 그 비밀은 나도 알지 못했다.

여하튼, 전생의 미운정도 정이라고 묘한 반가움과 토사구팽 당한 동질감에 미소를 띠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이수한 실장님이시죠?”

바로 자신을 알아봐서일까 이수한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오··· 준비가 철저한 것 같아요, 하하.”

이수한이 호탕하게 웃어도 접대용 웃음이니 절대 속아서는 안 된다. 속에 구렁이를 천 마리는 품은 냉혈한이 아닌가?

“감사합니다, 실장님.”

나 또한 접대용으로 인사를 올리고는 고승주 옆에 앉아서 이수한 옆에 앉은 장하연과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곧 이어 직원들이 내 온 한정식이 상 위에 깔렸고, 조용히 식사를 하던 나와 장하연은 고승주와 이수한이 젓가락을 내려놓은 걸 보고 손에 쥔 젓가락을 내려놨다.

“이번에 우리 신성그룹과 해동그룹이 작은 사업을 제휴하게 됐습니다. 조건은 두 사람이 해동백화점 컨설팅을 수행하는 겁니다.”

갑의 입장이라는 건가, 이수한이 하는 말에서 신성그룹의 이름값이 묻어났다. 계열분리를 했다고 해도 재계 1위를 놓고 태현과 다투는 신성이다 이건가?

저 밉상스러운 말투를 듣고 나니 한 마디 쏴붙이고 싶었지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난 이수한을 보며 미소를 띠었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아직 사회경험이 일천한데 수업료까지 넉넉히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하하··· 부담 갖지 말이요, 성민 군. 장 부장도 호텔 면세점 쪽 사업을 하려면 유통 쪽 감각을 다듬어야 하니 서로 잘 해봐요, 하하.”

은근히 돌려 깐 나를 어색하게 웃으며 받아쳐도 이수한은 내 손바닥 위에 있다. 자신이 진행할 계약서가 전부 다 내 머리에서 나온 걸 알면 얼마나 기겁할까?

장하연은 이수한 옆에서 날 바라보며 알 듯 말 듯 눈웃음을 쳤다. 공과 사가 너무나도 칼 같아서 딱딱한 이수한의 속을 긁어놓은 게 장하연도 내심 맘에 든 것처럼 보였다.

나와 이수한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긴장감은 고승주가 말을 꺼내면서 사라졌다.

“내일부터 두 사람 모두 업무를 수행하면 됩니다. 듣기로는 장 부장이 고려호텔 객실에서 숙식을 해결할 거라는데 그 비용은 우리 측에서 전액 부담하지요.”

“혀··· 아니, 실장님?”

통 크게 돈 쏘겠다는 말에 이수한이 놀라서 말실수를 할 뻔했다. 이걸로 고승주도 전번에 진 빚을 복수하는 건가, 흐흐.

고승주는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이수한에게 말했다.

“자세한 얘기는 우리끼리 해야 할 것 같네. 두 사람 모두 내일부터 고생길 열릴 테니 이만 보내도록 하지.”

“예··· 장 부장, 성민 군하고 가 봐요.”

천하의 이수한이 남에게 휘둘리는 꼴을 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무슨 소리야, 성민아? 너희 집에서 왜 내 숙박비를 내?”

식당 바깥의 정원으로 나온 나는 장하연의 당황한 목소리를 듣고 태연히 말했다.

“어차피 우리가 줘도 누나 사비 털 거잖아. 아니었어?”

“당연하지. 월급 통장이라도 털려고 했는데. 그 많은 돈 쌓아둬서 뭐하니?”

새초롬한 목소리로 말하는 장하연.

전생의 그녀는 늘 한 올의 흠도 안 잡히려고 자기 관리에 철저했고 공금횡령 같은 짓도 안 했다. 지금 보니 이 시절부터 시작된 것 같아서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중 이어지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번에 호텔에서 일하는 거 캠코더로 셀프 영상 찍어둘 거야. 새벽출근부터 오후 퇴근까지. 어때?”

“누나?”

“놀랄 거 없어. 너도 알잖아. 어머니가 나 싫어하는 거.”

지독하다 싶었지만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전생의 장모인 황나연에겐 연적의 딸이 아닌가?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럴까 싶었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철저히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

두 사람이 나가자 이수한은 고승주를 쏘아붙였다.

“해동그룹에서 왜 장 부장 숙박비를 지급합니까? 이게 드러나면 모든 게 어그러집니다!”

“우리 회장님 뜻이 그런 걸 어쩌나? 까라면 까야지.”

쫙!

이수한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고승주를 쏘아보고는 컵에 있는 물을 방구석에 찌끄르고 도자기 주전자에 담긴 안동소주를 콸콸 부었다.

“어, 어···.”

당황한 고승주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이수한은 술을 쭉쭉 비웠다.

탁!

“대체 무슨 꿍꿍이십니까? 이번 일 잘 못 되면 황 가 놈들, 우리 신성을 지들 젖소로 만들 겁니다!”

“거 참, 나하고 우리 회장님이 자네하고 장 회장님 입에 엿이라도 물리려는 것 같나?”

“형님!”

“귀 떨어지겠네, 이 친구야. 이거부터 봐.”

고승주가 느물거리며 내민 서류철을 이수한이 홱 낚아채서 봤다.

“뒤에 있는 이면계약들부터 쭉 보고 말하게.”

이수한은 고승주의 말을 듣고 맨 뒷장에 있는 이면계약서들을 살펴봤다. 이미 합의된 내용들이라 쓱쓱 넘기던 그는 눈에 띄는 조항에서 시선을 멈췄다.

“이건···?”

“회장님 집안이 해동그룹이고 해동그룹이 회장님 집안이네. 회장님 사재라도 해동그룹이 지급하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동일인이라고 법으로도 못 박혀있는데.”

고승주가 뭐라 떠들던 이수한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재벌 오너들이 기업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건 특별한 일도 아니다. 짖어대는 놈들이 있으면 법 또한 돈과 권력으로 깔아뭉개면 그만이다. 그런데, 오너가 개인재산을 회사 일에 쓰겠다니?

고승주는 건조한 목소리로 이수한에게 말했다.

“쥐덫도 완성됐으니 자네하고 창호 형님, 장 회장님이 놓게. 이걸로 서로 주고받은 걸세?”

이수한은 허탈한 표정으로 고승주를 바라봤다. 오늘의 지독한 패배감이 맛보기일 것 같은 불안함을 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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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한은 계약서를 체결하고 성의원으로 들어왔다. 도장을 찍기 전에 장호건에게 허락받은 건 물론이었다.

“자네, 고 실장한테 한 방 제대로 먹었군.”

소파에 앉은 장호건은 이수한의 굳은 얼굴을 보고 혀를 찼다. 전화로 들은 자신도 순간 머리가 띵했으니 그 자리에 있던 이수한은 오죽했나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수한은 고개를 숙인 뒤, 서류철를 장호건에게 건넸다.

“이건 내가 보관해두겠네. 쥐덫으로 제격이겠어, 흐흐.”

장호건은 자신이 확인한 계약서들 중 맨 뒤에 있는 ‘쥐덫’들을 자신의 금고에 넣고 이수한에게 물었다.

“자네, 가장 의심되는 게 누구인가?”

“제 직속 직원이 걸립니다. 몇 년 전 고교 동문 특강 때 눈에 띄어서 입사를 권했는데 요즘 들어 옷차림이 화려해졌습니다. 시계며 구두, 넥타이··· 하나같이 고가 브랜드입니다.”

장호건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 눈이 돌아갈 만한 물건들이 아닌가?

그 밖에도 이수한은 가장 치명적인 정보를 털어놨다.

“언제부턴가 우리 쪽에서 매입한 땅 근처에 회장님 처가 분들이나 그 측근들의 토지나 건물이 끼어있습니다.”

“뭐야?”

“처음에는 규모가 작아서 넘어갔지만 갈수록 규모가 커져서 우리 쪽 임원들 불만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회사에서 공장을 짓거나 사옥을 사들일 때마다 내부자들이 인근 부동산을 사는 건 상수 중의 상수.

장호건과 이수한도 비자금 운용 차원에서 사들였고, 관련 임직원들이 적당히 손대는 것 또한 노후 준비로 여기고 눈감아줬다. 하지만, 이수한이 알려준 규모는 처가 사람들이 작정하고 달려든 것처럼 보였다.

“이, 이것들이···!”

쿵!

장호건은 화를 못 이기고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세 남매 간의 상속분쟁에서 처가와 조국일보가 자신이 가장 큰 몫을 챙기는 걸 도와줬다지만 수위를 넘어섰다. 더 이상 두고 보면 임원들이 자신뿐만 아니라 뒤를 이을 자식들까지 호구 취급할 터.

“전부 쓸어버려. 장 씨 가문이 딴 집안 꼭두각시란 소리는 절대 들을 수 없네.”

“물론입니다, 회장님. 하연이, 성민 군에게 들러붙을 놈들도 마크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해동그룹 때문에 상한 자존심은 더 이상 두 사람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넘겨준 쥐덫으로 신성이라는 거목을 뿌리부터 갉아먹는 쥐새끼들부터 모조리 잡아야 했다.

***

다음 날 오후.

나와 박태진이 탄 아도자동차 세단과 장하연이 탄 내 명의의 BMW 7 시리즈 한 대가 우리 집 지하 차고로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계단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치마를 입은 장하연이 앞장서서 올라간 바람에 내 앞을 손에 들린 서류가방으로 가린 채 올라가야 했다.

“여전하구나. 차고도, 거실도···.”

장하연은 근 3년 만에 이 집에 들어온 게 감회가 새로운 지 거실에 놓인 물건들을 둘러봤다. 그간 못 왔던 만큼 희미해진 기억에 뚜렷하게 덧칠하는 것 같았다.

몰테니 소파를 손으로 만지던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바로 앞에 있는 모래밭을 보고 환하게 미소를 띠었다.

“저기도 여전하네. 어렸을 때 저기서 나하고 너하고 두꺼비집 만들고 놀았는데···.”

“그러게. 누가 저길 쓸지 모르겠어, 하하.”

“무슨··· 소리야?”

“아니, 뭐··· 나도 나중에 아빠 될 거 아냐. 그래서···.”

머뭇거리던 나는 얼굴이 발그레해진 장하연의 눈을 피하던 중 우리 뒤에 있던 박태진의 헛기침 소리를 들었다.

“흠흠, 두 분이 여기 오신 건 일 때문이십니다. 도련님, 올라가시죠.”

“네, 형. 마실 거하고 과자 좀 내줘요. 잠깐만 기다려, 누나.”

2층에 올라간 나는 방에 둔 박스 하나를 가져왔다. 1층으로 내려오니 테이블에는 오렌지주스가 담긴 아티스티나 도자기 잔 세 개와 쿠키를 담은 접시가 놓여 있었다. 일하려고 왔으니 화려한 문양의 로젠탈 식기는 피한 것 같았다.

박태진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비친 나는 소파로 다가와서 상자를 내려놨다.

“이게 뭐야?”

“돌아다니는 것도 좋은데 누나 발 아플까 봐 준비했어.”

말은 장하연 듣기 좋으라고 했지만 스케줄이 빠듯해서 취한 조치였다.

소파에 내려놓은 박스는 스탠더드 캐피털 식구들이 총 천만 달러의 연말보너스를 약속 받고 보낸 자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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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연과 거래 이야기를 주고받은 나는 선해철과 약속을 잡고 그의 사무실에 찾아갔었다.

“사치품?”

“네, 삼촌. 의류, 시계, 보석, 화장품, 가구, 식기··· 백화점에서 제일 잘 나가는 브랜드 정보 좀 부탁할게요.”

이어서 장하연과 주고받은 거래를 알려주자 선해철은 휘파람을 불었다.

“신성이 해마다 국내 정관계에 뿌리는 백화점 상품권만 2백억은 될 거야. 해동백화점이 그 중 반절을 팔아주고 CMA나 MMF에 넣어두면···.”

“현재 금리가 약 8퍼센트. 하루 4천만 원 정도 되겠네요.”

사람들이 백화점에서 상품권을 사면서 준 돈은 상품권이 사용될 때까지 백화점 계좌에 들어있다. 백화점은 그 돈을 일 단위 이자 지급상품에 넣고 돈을 받으니 백화점 상품권은 알게 모르게 쏠쏠한 돈벌이였다.

하지만 선해철은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그래도 공짜는 없다? 클레어나 그 친구들, 몸값 무지 높은 거 알지?”

“당연하죠. 연말 보너스 천만 달러 약속할게요. 다섯 명이니까 두당 2백만 달러씩. 기간은 보름. 어때요?”

“오케이. 잠깐만.”

액수를 듣고 놀랐던 선해철은 기간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오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나야, 클레어. 밥 먹었지? 잘했어.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오너가 개인적으로 부탁할 게 있다는데···.”

선해철은 클레어에게 한국식 인사를 건네고는 내가 부탁한 걸 알려줬다.

“그래? 오케이. 수고.”

“된대요?”

“작년 초에 트라이엄프에서 메이시스 백화점에 투자할 때 조사한 자료가 있다네?”

“정말요?”

운이 좋으면 넘어질 때도 돈을 줍는다더니 일이 쉽게 풀려버렸다.

“그래. 심부름꾼 편으로 보낸다니까 내일 점심에 김포공항 가서 환영카드 들고 있으란다, 흐흐.”

“어려울 것 같았는데··· 클레어한테 빚진 거 같네요. 나중에 갚아야겠어요.”

“진짜냐?”

“당연하죠. 지분이나 투자금만 아니면 다 들어줄게요.”

빈말이 아니었다. 조금은 좀스럽게 보일 수 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빚을 갚고 싶었다.

그럼에도 좀스럽게 보일까 싶었지만 선해철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 약속, 꼭 지켜야 한다?”

“남아일언중천금입니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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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더드에서 보내준 자료가 맘에 들었나, 장하연은 회사별로 정리된 자료들을 보고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언제 이런 거 준비한 거야?”

“나름대로 찾아봤어. 어때?”

내심 칭찬을 듣고 싶었지만 내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장하연의 얼굴이 점점 굳고 있다니··· 내가 뭐 잘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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