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10th. 애프터 임팩트(After Impact) (2)
수화기를 든 장호건은 통화가 걸리자 곧바로 입을 열었다.
“하연이 일 때문에 봤으면 합니다. 제 방에서 커피 한 잔 하시죠.”
30여 분 뒤, 노크소리가 들리며 정창호가 들어왔다. 장하연의 후견인인지라 호출을 받고 집무실에 들어온 정창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
“하연이 펀드매니저, 누구지 알아냈습니다.”
정창호가 눈을 껌뻑거려도 의문이 풀린 장호건의 얼굴은 상쾌해 보였다. 정창호는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장호건에게 먼저 물었다.
“누가 하연이 펀드매니저입니까, 회장님?”
“성민이입니다, 하하.”
“성민 군이요?”
이성민이 장하연에게 돈을 벌어다 준 사람이었다니··· 정창호는 신선한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예, 형님. 우리 하연이 주식 투자를 그 녀석이 도와줬다고 합니다, 하하.”
장호건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자신과 이대수는 소 닭 보듯 하는 사이일지언정 장하연과 이성민은 서로 잘 되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개운해 보이는 장호건과 달리 정창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찌 그걸 아셨는지···?”
“두 애들을 관찰했습니다.”
정창호가 흠칫했다. 말이 좋아 관찰이지 도청을 했다는 게 아닌가?
“회장님?”
“애비가 돼서 다 큰 딸 쫓아다니는 게 내키진 않지만 그 사람도 없으니 나라도 챙길 수밖에요.”
장호건의 씁쓸한 미소를 보고 정창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호건에게 장하연은 오래 전에 죽은 그녀의 생모 같은 사람이 아닌가. 도청을 해서라도 장호건이 장하연을 돌봐주고 싶은 것을 정창호가 모를 수 없었다.
“저도 하연이 옆에 누가 있는지 궁금했는데 성민 군이 옆에 있으니 다행입니다, 회장님.”
“다행이지요. 서로 오랫동안 봐왔던 데다 오고 가는 기류도 좋으니 후련합니다, 하하.”
껄껄 웃던 장호건은 기분 좋게 커피를 마셨다.
“단지 그것만으로는 저를 호출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신지요?”
“성민이가 하연이한테 부탁했더군요. 누님하고 끊은 거래, 해동그룹이 가져갈 수 있겠냐고요.”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정창호. 장호건은 그런 정창호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 영감 사채자금이 거의 다 박살 난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그 아이가 직접 나섰겠습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콧대 높은 집안의 장손이 앵벌이를 하러 다니다니··· 듣고도 믿지 못했지만 장호건은 죽은 친구 내외가 유일하게 남긴 이성민이 안타까웠다.
“흐음···.”
침음성을 흘리던 정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실장 의견도 들어봐야겠지만 해동과의 거래는 우리에게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반도체 공장 증설에 호텔 입점, 영등포 쇼핑몰 건설과 지분 약정까지 여러모로 수확이 있었으니까요. 다만···.”
정창호는 말을 끊고 홍차를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해동백화점이 문제입니다. 신세기그룹과 거래를 끊으려면 백화점 쪽 거래까지 끊어야 하는데 저가품만 취급하는 해동백화점으로는 신세기백화점을 대신할 수 없잖습니까.”
장호건의 첫 비서실장이었던 사람답게 정창호는 신성그룹과 해동그룹의 현재 상황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장호건 또한 정창호가 공과 사를 지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기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하연이가 성민이한테 해동백화점 컨설팅을 해주고 싶다더군요.”
“예?”
정창호가 깜짝 놀랐다. 신성그룹 소속이면서 다른 그룹 사업을 돕겠다니?
장호건은 정창호의 벙찐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연이, 똘똘하기도 하지만 자존심도 강합니다. 저번 거래로 얻은 게 많으니 빚을 갚고 싶은 것 같더군요. 순서가 있으니 그 아이가 말해야 이 실장에게도 말하겠지요.”
“이 실장이 자기 모르게 추진된 일인 줄 알면 많이 서운해 할 것 같습니다, 하하.”
껄껄 웃던 정창호는 이어지는 장호건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요. 수한이가 제 대신 제 처가 쪽 끄나풀들과 싸우고 있잖습니까. 조국일보도 그렇고···.”
“죄송합니다, 회장님.”
정창호는 급히 웃음기를 지우고 장호건에게 고개를 숙였다.
신성그룹의 위장계열사에서 시작된 조국일보.
장병호 전 회장 사후, 신성그룹 안팎에서 장호건을 밀어준 대가로 황 씨 일가는 조국일보의 모든 지분을 삼켰다.
거기서 멈췄으면 모르겠지만 주제넘게 상전 노릇을 하려 드는 황 씨 일가를 비서실의 이수한이 견제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정창호는 장호건이 딱하기만 했다. 형제들과 처가 양쪽에서 치이고 있지 않은가?
장호건은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정창호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아닙니다, 형님. 형님께서는 하연이를 돌봐주고 있잖습니까?”
장호건은 정창호를 보며 손을 내젓고 굳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다른 건 몰라도 고려호텔만큼은 하연이 몫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번에 두 아이가 꾸민 일을 성사시켜야 합니다.”
정창호 또한 장호건의 마음을 이해했다.
욕심 많은 황 씨 일가에게 해동백화점 컨설팅은 장하연 뒤에 해동그룹이 있다는 경고장으로 보일 수 있었다.
재계에 인맥이 넓은 이대수를 상대로 벌이는 짓인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성민까지 뛰어다닐 만큼 돈이 급해 보이는 해동그룹이니 빚을 지울 기회를 마다할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일이 진행되면 말씀해주십시오.”
대답을 마친 정창호는 형제 같은 장호건에게 다시 한 번 충성을 맹세하듯 고개를 숙인 뒤, 집무실을 나갔다.
***
그날 저녁.
장호건은 서재에서 장하연과 독대하고 있었다.
“어떠세요, 아버지?”
“흐음···.”
장호건은 침음성을 흘리고 있지만 이미 전해들은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해동백화점 컨설팅에 이은 신세기그룹과의 결별을 제안한 딸이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나.
허나 쉽게 수락해줄 수는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고, 앞에 있는 딸을 위해 마음먹은 일이지만 대를 이어야 할 회사를 마음대로 다뤄도 된다고 여기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침음성을 멈춘 장호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실장과 얘기해서 좋은 쪽으로 풀어보마.”
“아버지?”
딸이 반색하는 모습에 장호건의 마음도 뿌듯했지만 쉽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회사 일이 아닌가?
“그 친구도 지난번 일로 고 실장한테 빚 진 게 있어. 갚아주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도와줘야지. 처리해주마, 허허.”
“고마워요, 아버지.”
“고맙긴. 가 봐.”
장호건은 손을 내저어 딸을 물린 뒤, 이수한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계획을 알려줬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자네한테 신경 쓰게 하기 싫어서 조용히 알아봤네. 섭섭하게 생각지 말게.”
[아닙니다, 회장님. 배려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이수한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자신이 계속 솎아내도 비서실 내부에 자신도 모르는 황 씨 일가의 수족들이 있을지 모르니 형처럼 모시는 장호건의 결정을 존중하고 있었다.
“이해해줘서 고맙네. 고 실장하고 만나서 잘 처리해봐.”
[예, 회장님.]
***
얼마 뒤.
이수한은 장호건의 지시를 받고 준비한 계약서와 제안서를 들고 서울의 한 요정에서 고승주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요즘 들어 자네하고 자주 보는군. 다른 그룹 녀석들이 보면 우리가 서로 사귀는 줄 알겠네, 허허.”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형님. 전 제 와이프만 사랑합니다. 오죽하면 아들딸만 합이 다섯이겠습니까, 하하.”
이수한은 고승주와 상에 차려진 음식에 농담을 양념 삼아 이강주 한 병을 순식간에 비웠다.
“신성그룹 비서실장께서 단순히 농이나 치자고 날 보자고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할 말 있으면 편히 말하게.”
담양에서 올라왔다는 대통주를 시킨 뒤, 고승주가 본론을 말하라고 하자 이수한은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뭔가?”
“우리 신성에서 신세기그룹에 넘겨주던 내부거래입니다.”
“이건···.”
이수한은 서류를 본 고승주가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자와 물산 계열에 필요한 선물세트, 백화점상품권, 소모성자재구매대행 일체를 해동물산에서 맡아줬으면 합니다. 리베이트는 일절 안 받겠습니다.”
고승주는 이수한이 말한 게 맞는지 서류를 펼쳐 확인하고는 입이 벌어졌다.
“이러는 이유가 뭔가, 수한이?”
“지난 거래에 대한 보답입니다, 형님. 내년 가을이면 해동물산에서 할인점 사업도 시작하실 텐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실 겁니다, 하하.”
껄껄 웃는 이수한과 달리 고승주는 웃을 수가 없었다. 연간 매출 수백억의 거래를 리베이트도 안 받고 넘겨주겠다니?
“속 시원히 말해보게. 다른 이유가 뭔지 말일세.”
고승주가 얼굴을 굳히고 말하자 이수한이 조금은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 군이 장 부장한테 부탁했습니다. 장 부장도 성민 군한테 받은 게 있으니 서로 공평하게 주고받은 셈이지요, 하하.”
이수한의 목소리가 거슬렸지만 고승주는 그 와중에도 이성민의 그릇을 평가하는 데 신경을 집중했다.
그가 이성민에 대해 평가한 결과는 맹수였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맹수.
20대 중반에 겨우 접어든 아이, 병상에서 눈을 뜨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철없는 20대로 보이던 아이가 1년여 만에 황야를 누비는 맹수가 되었다.
‘허허, 이 녀석 이거 얼마나 먹어야 배가 부르다고 할지 모르겠군.’
조카 같은 아이의 성장에 기분이 좋아진 고승주는 이수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돌아가는 대로 회장님과 태 대표님께 말씀드리지.”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이수한은 눈을 가늘게 뜬 고승주를 보며 빙긋 웃고는 또 다른 서류철을 꺼내 내밀었다.
“저번 거래 때 받은 원수는 이걸로 갚아드린 것 같군요, 하하.”
“들었다 놨다하기는. 한꺼번에 하게, 이 사람아.”
고승주는 핀잔을 주면서 피식 웃고는 넘겨받은 서류철을 열었다. 이수한은 서류를 보는 고승주에게 말했다.
“장 부장이 성민 군과 함께 해동백화점 컨설팅을 진행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컨설팅을 수용해주시면 거래를 진행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수한은 고승주의 굳은 얼굴을 보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남의 집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 같지만 생각해보십시오, 형님. 지금은 몰라도 할인점이 전국을 도배하면 해동백화점은 미래가 안 보일 겁니다. 이 회장님 뜻이라도 회사가 돈을 못 벌면 임직원들 사기는 또 어떻겠습니까?”
이수한은 이대수의 괴벽을 들어가며 고승주를 설득했다. 조국일보 황 씨 일가를 견제하려면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일이 아닌가? 컨설팅이 어찌됐든 장하연과 이성민이 붙어있는 것만 보여주면 되는 일이니.
“컨설팅 결과를 보고 반영하겠다고 하시면 해동백화점 본점 신관 개장 이후에 바로 넘겨드리겠습니다. 서로 잘해보자고 하는 일이 아닙니까?”
서로 잘해보자?
어감이 이상했지만 고승주는 잘됐다 싶었다.
신성그룹에서 가장 약삭빠른 놈이 저리 말할 정도면 사채자금을 쫓는 놈은 대한민국에서 거의 없어졌다고 봐도 된다.
여기에 비공식적이지만 해동물산 물류유통부문의 태재호뿐만 아니라 이대수까지 할인점 개점에 맞춰 백화점 사업 재편을 고심하고 있으니 체제 전환의 충격을 흡수할 기회였다.
“···알겠네. 회장님 승인 나오는 대로 연락하겠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하하.”
협상을 마친 두 사람은 술를 입에 털어넣고 대나무향을 음미하면서 동상이몽을 시작했다.
***
오늘 초저녁 때 이수한과 고승주가 만났다는 소식은 10시쯤에 장하연에게서 걸려온 전화로 알게 됐다.
“정말이야?”
[응. 방금 전에 아버지한테 들었어.]
의외였다. 말단 수위까지 자회사를 만들어 쓸 만큼 10원 한 장까지 내부에 잡아두려는 신성그룹에서 그런 대규모 거래를 순순히 넘겨줄 줄이야.
자세한 내막은 알 턱이 없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 여겼다. 지난 거래로 자존심이 상했을 장호건과 이수한이 체면치레하겠다고 넘겨준다 손쳐도 거래만 되면 애니웨이 땡큐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누나, 할아버지가 거래 받으면 회사 일은 어떡할 거야?”
[새벽에 출근해서 회사 일 끝내고 오후에 둘러보려고.]
“진짜?”
[왜? 싫어?]
“아, 아니··· 그래도 아저씨 딸인데 그렇게까지 하는 건 좀···.”
기가 질려 말을 잇지 못하는 나는 장하연의 핀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큰일 날 소리? 8시간 노동은 법에도 나와 있어. 회사도, 노동자도 지켜야 하는 거, 몰라?]
누가 그걸 모르나. 혼외자식이라도 신성그룹 3세인데 새벽 출근에 8시간 노동이라니?
“그, 그렇지? 그럼··· 오후 서너 시부터나 보겠네?”
[아니? 오후 두 시에 보자고 할 거였는데?]
“누, 누나···?”
갈수록 태산이었다. 지금 한 말 대로면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오후 1시까지 쉬지도 않고 일하겠다는 게 아닌가? 이동시간은 빼야 할 테니.
장하연이야 개인 사무실이 있으니 거기서 샌드위치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우면 되겠지만 여자들의 출근 준비를 생각하면 늦어도 네 시, 빠르면 세 시에 일어나야 한다. 아이고야.
고생할 게 눈에 선해서 한숨을 내쉬자 장하연의 토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너, 나 보기 싫어서 그래?]
“아, 아니! 누나 몸 상할까봐 그러지. 그렇게 출근하려면 엄청 일찍 일어나야 할 거 아냐?”
의욕에 넘칠 장하연이 새벽부터 일하느라 몸이 축날 걸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한숨을 내쉬던 내게 장하연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야? 호텔 객실에서 먹고 자면서 출퇴근 할 건데?]
“응?”
[정 대표님께서 숙직하지 말고 호텔 객실에서 지내라고 사정 봐주셨어. 후훗, 그니까 걱정 말고 두시에 와.]
어째 내가 말려들어가는 느낌이다. 장하연, 은근히 여우같은 면이 있단 말이지? 곰 같은 여자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밤이 늦어서 전화를 끊으려던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기 전에 쪽 소리를 내고 통화를 마쳤다.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있던 박태진은 그런 날 보며 껄껄 웃었다.
“어째 점점 돌아가신 사장님을 닮으시는 것 같습니다. 사장님도 사모님과 연애하실 때 사모님께 많이 당하셨다는데··· 하하.”
“피는 못 속이니까요. 곧 있으면 우리도 또 바빠지겠네요. 캔 맥주 하나씩 마시고 들어가요, 형.”
“그러시죠.”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하던 나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수화기를 들었다.
“네, 이성민입···.”
[할애비다. 내일 아침에 밥 먹고 응접실에서 차나 한 잔 할까?]
이상하다. 금융실명제 때 빼고는 응접실에서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일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