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10th. 애프터 임팩트(After Impact) (1)
“놔둬.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괜히 건드릴 필요까지야. 가 봐.”
“예.”
장호건은 이수한이 나가는 걸 보고 전화기를 들었다.
“날세. 자네 정보, 확실하지?”
[물론입니다, 회장님. 그 친구, 최근 1년간 불어난 재산이 상당하더군요.]
장호건도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정보부에 이어 안기부 출신인 이들이 돌리는 찌라시는 신뢰도가 높아서 장병호 때부터 받아보고 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알겠네.”
장호건은 통화를 마친 뒤 다른 곳에 전화를 걸었다.
“두 애들 만나는 곳에 도청기, 카메라 설치해. 이 실장 모르게.”
이수한이 자신의 최측근이라도 비서실에 있을지 모를 처가 사람들 문제도 있지만 장호건은 장하연의 버팀목이 이성민인지 자신만 알아두고 싶었다.
아직은 미지수였지만 이성민이 대한이동통신 투자로 싹수를 보여줬기에 장호건은 그 싹을 잘 키워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자신을 대신해서 아무 조건도 없이 장하연을 건사해줄 유일한 녀석이 아닌가? 이성민이란 아이는.
생각을 정리한 장호건은 장하연 덕분에 좋아진 기분을 품고 책상 한 쪽에 쌓여있는 결재판을 하나씩 처리했다. 모처럼만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서류를 검토하던 장호건은 전화벨 소리에 펜을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신성그룹 장호···.”
[야, 장호건! 너, 몰랐어, 알았어?]
귓전을 때리는 고함소리에 장호건은 인상을 구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잡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점잖게 말하시오, 누님. 우리가 무슨 한두 살 먹은 어린애요? 이젠 어엿한 그룹 회장들이오.”
장호건도 목소리를 높였지만 수화기에서는 여전히 장호경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찌를 듯이 터져 나왔다.
[말 돌리지 마! 우리 백화점 임대 계약 엎은 거, 너야, 아니야? 어!]
장호건은 한숨만 나왔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고 아버지가 오냐오냐 키운 탓에 모든 게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소리부터 지르는 개차반 같은 성격을 어찌하랴?
장남이라도 삼남매 중 누나와 동생 사이에서 치이고 밀리던 둘째였기에 장호건은 그간 갈고 닦은 인격을 발휘해서 화를 억눌렀다.
“말은 똑바로 합시다. 건물주가 세입자 바꾸지, 무슨 힘으로 내가 바꿉니까?”
[삼청동 짠돌이 영감이 다 꾸몄다?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네가 아니면 은행 놈들도 모자라서 명동 놈들까지 왜···!]
더 이상의 쌍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장호건은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나, 이번 정부하고 안 친합니다, 누님. 내가 은행하고 명동 움직였으면 정부가 가만 놔뒀겠소? 이번 정부하고 친했으면 강남터미널, 나 혼자 잡아먹었을 거요!”
[···야!]
찢어지는 고함소리가 귀를 때려도 장호건은 할 말이 끝나지 않았다.
“내가 왜 대구 상용차공장 팔고 부산에 승용차공장 올리는지 모르시오? 이번 정부하고 안 친해서 그런 거 아뇨! 같은 돈이면 군산, 창원에 같은 공장 서너 개를 짓는데!”
그때서야 수화기가 조용해졌다.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은가?
“생각 좀 하고 말하쇼!”
쾅!
장호건은 수화기를 부술 듯 내려놓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거칠게 내뱉은 그 욕에는 장호경에 대한 증오와 지금의 장호경을 만들고 흙으로 돌아간 아버지 장병호에 대한 원망까지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현금 짱짱한 계열사들을 훌러덩 넘겨준 바람에 장호경이 날뛰는 게 아닌가?
“하아···.”
찬물을 단숨에 비운 그는 또다시 울리는 전화기를 보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또 한 사람이 남아있으니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신성그룹···.”
[호민입니다, 형님. 고려호텔 재입점, 어떻게 하셨수?]
자신의 말을 끊어먹은 장호민 덕분에 장호건의 이마에 고랑이 패였다.
“신사협정 읊어주랴? 협력 외엔 피차불간섭인 거?”
장호건이 상속분쟁 끝에 체결했던 신사협정을 들먹이자 장호민의 대충대충 내뱉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실례. 여하튼 우리 형님, 재주도 좋수. 신호진하고 이대수 영감 어떻게 꼬신 거요? 은행 대출 알선해주고 우수리 받으셨수? 흐흐.]
간신히 화를 삭였건만 장호건의 인상이 또 구겨졌다. 어릴 적부터 사람 속 긁는 재주가 탁월했던 동생 새끼가 나이를 처먹을수록 살가죽을 벗기는 경지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너, 지금 나 비꼬는 거냐?”
[아뇨. 대단해서요. 공사는 날려도 호텔은 넣다니··· 하여간 우리 형님 큰딸 사랑은 지극정성입니다, 흐흐.]
장호건이 쥔 수화기에서 뽀각 하는 소리가 났다. 수화기를 쥔 주먹에 핏줄이 툭툭 불거지고 있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장호건도 장호민의 가장 아픈 곳을 사정없이 푹푹 찌르며 비웃어줬다.
“내가 너 같은 박애주의자냐? 너 새끼가 가수, 배우 안 가리고 뿌리고 다닌 씨 파내고 긁어내는 데 처바른 돈이면 신성중공업 도크 하나는 더 만들었을 거다, 흐흐.”
[뭐, 뭐요? 지금 우리 조선소 작다고 놀리는 거요?]
발끈하는 장호민의 말을 들으며 장호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장호경과 달리 지분이 얽혀서 신성그룹에 남은 장호민이 거느린 계열사들 중 하나인 신성중공업의 조선부문은 국내 조선업체 3등. 사생활과 달리 사업은 잘 꾸리려 애써왔기에 장호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거 지나간 일 가지고 말이 심한 거 아뇨!]
“지랄한다. 지나간 일? 지금도 여자 가랑이마다 대가리 처박고 다니면서 어디 그 주둥아리에 하연이를 올려!”
[형님이나 나나 피장파장 아니오! 그 여자 만나기 전까진 나나 다를 것도 없었으면서!]
장호건의 눈이 뒤집혔다. 그 더러운 입에 장하연의 생모를 올리다니!
“하연이 엄마가 내 마지막 여자였다! 아버지, 어머니 반대만 없었으면 네 형수 될 여자였어!”
장호건이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소리치자 수화기에서는 장호민의 씩씩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자신과 달리 형은 장하연의 친모를 만나고부터 그 여자만 바라보며 살지 않았나? 그녀가 장하연을 낳다 죽은 뒤로는 장하연만 바라보고 살아왔기에 장호민은 할 말이 없었다.
장호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넌 지금도 여기저기 씨 뿌리고 다니지? 우리 조카님들도 골고루 뿌리고 다닌다던데··· 조심해라, 아우야. 부자지간에 일혈동서 되는 꼴은 피해야지? 흐흐.”
[형 지금 말 다 했···!]
쾅!
장호건은 장호민이 악을 쓰며 반말까지 하려들자 전화기를 거칠게 내려놨다. 그것도 모자라 직통전화기 뒤에 달린 전화선까지 뽑아버렸다.
장호건은 한숨을 내쉰 뒤, 다른 전화기의 번호를 눌렀다.
“아, 이 실장? 누님하고 호민이랑 거래 끊을 준비해.”
갑작스러운 지시에 이수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회, 회장님, 그건···.]
이수한의 머뭇거리자 장호건이 수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내부거래는 신사협정 밖이잖나? 금융계열 자금이야 지분만큼 나눠쓴다 쳐도 우리가 쥔 양쪽 채권 합이 1조가 훨씬 넘어! 뭐가 두렵나, 이 실장?”
오래 전부터 곱씹었던 일이었기에 장호건은 더 이상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강남터미널 사업마저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내서 파토 낸 누이와 동생이 아닌가?
[죄송합니다, 회장님. 지시하신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장호건은 이수한의 대답을 끝으로 전화기를 내려놨다.
삼남매의 신사협정은 1996년까지.
협정이 끝나면 피를 나눈 형제자매는 완전한 적이 되고, 돈이든 사람이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한 사람의 명패만 남을 때까지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내전이 시작된다.
장호건은 때가 오길 기다리며 이를 악물었다.
신성그룹의 모태와 최대계열사를 물려받은 자신이 질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
고려호텔 위탁경영과 그 뒤에 숨겨진 빅딜이 끝난 뒤, 스탠더드에 3억 불이 입금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덕분에 선해철은 전화 통화로 투자 계획에 대한 내 결정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있었다.
[3억 불, 정말 그렇게 해도 돼?]
“네. 말씀드린 대로 해주세요. 야후에 5천만 불 추가 투자하고 5천만 불은 아메리카 온라인 매수, 그리고··· 스탠퍼드 쪽에서 제안 받은 데가 어디였죠?”
[엔비디아. 작년에 세워진 회사인데 창업자가··· 젠슨 황. 스탠퍼드 전기공학 석사에 AMD에서 일하다 나왔어.]
야후 투자가 대박이 나면서 스탠퍼드 쪽에 우리 소문이 좋게 났는데 그쪽 인맥을 통해 젠슨 황의 투자 제안이 들어왔다고 들었다. 여러모로 도움이 될 테니 꼭 투자해야했다.
“아, 거기죠? 3천만 불 넣고 35퍼센트 받죠. 추가 증자로 지분 유지할 권리에 상장 후 위탁생산 물량 50퍼센트 배정권, 회계감사권 확보하세요. 그 외에는 전부 위임하고요.”
[야! 너 미쳤어?]
지금 기준으로는 미친 소리가 맞다. 온갖 권리를 붙여놔도 35평짜리 압구정 태현아파트 수십 채 살 돈을 미래가 불투명한, 창립 1년차 벤처기업에 처박자는 말이 아닌가? 새천년 뒤에 펼쳐질 미래는 나만 알고 있어야 해서 말을 돌렸다.
“회사 식구들도 그쪽하고 협상해서 조건 맞으면 투자하자고 했잖아요. 식구 못 믿어서 어떻게 회사를 굴려요, 삼촌?”
스탠더드 캐피털 내부 검토 결과, 우리 측 조건과 엔비디아의 조건이 맞으면 투자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오너로서 회사 식구들이 협상하기 쉬운 조건을 제시한 것은 엔비디아를 짚어낸 회사 식구들의 안목을 믿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알았다. 엔비디아 투자는 생색 팍팍 내면서 해주마. 다른 투자도 네 말대로 해주고. 2천만 불은 외환선물 돌리고 나머지는 전부 포트폴리오대로 돌린다?]
“네, 삼촌. 고마워요.”
전화를 끊고 지하차고로 내려간 나는 차를 몰고 미사리 카페로 갔다. 한 시간쯤 걸려 도착한 나는 카페 건물로 들어가서 창가에 앉은 장하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많이 기다렸지, 누나?”
“아니. 나도 금방 왔어. 오늘은 점심부터 먹을까?”
메뉴를 주문한 우리는 각자 주문한 음식을 받고 식사를 했다. 레스토랑도 같이 해서 한 번쯤은 풍광을 즐기며 점심을 먹고 싶었는데 오늘이 그날인가?
맛도 맛이지만 쫓기듯이 식사에 집중하던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이렇게 뻘쭘한 적도 없을 것이다. 젠장.
“미안··· 일하다보니까 습관 들었어.”
“괜찮아. 직장인인데 당연하잖아?”
나도 저런 일을 일상처럼 겪으며 살았었다. 재벌 사위라도 실력으로 승부하겠다는 욕심에 밥을 마신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빠르게 먹고는 다시 일을 손에 잡은 게 한두 번인가?
장하연 또한 재벌가 딸이라도 황미연의 친딸이 아니니 부장 직함을 달았어도 늘 압박감에 일에 매달려 살고 있을 터.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냅킨을 뾰족하게 접었다.
“뭐해?”
“잠깐만 있어 봐.”
상체를 앞으로 내민 나는 손에 쥔 냅킨 끝으로 장하연의 깨끗한 입꼬리를 일부러 찍어줬다.
“야?”
“해주고 싶었어.”
내 말을 듣고 얼굴이 달아오른 장하연은 컵 안 가득 채워진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너무 급발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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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세팅된 테이블과 함께 마음을 가라앉힌 우리는 냉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신세기그룹하고 거래 끊을 거라고?”
“응. 우리 호텔도 고모님 쪽에 주던 일감 전부 끊을 거야. 신성건설에 맡겼던 유지보수도 신성물산으로 돌릴 거고.”
내가 나선 탓인지 나비효과가 세게 불었다. 장 씨 삼남매, 신사협정이 끝나는 3년 뒤부터나 박 터지게 싸울 줄 알았는데 지금부터 개판이라니.
그들의 불화는 내게는 기회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나. 신세기그룹이 받던 거래, 우리 집이 받아도 돼?”
“응?”
“거래처 새로 알아봐야 하잖아. 우리 집도 물류하고 유통 하고 있고 내년 가을부터 할인점 하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터파기 공사를 시작 중인 해동마트 1호점을 은평구에 열면 신세기는 물론이고 향후 들어올 로엘, 금강과의 출점 경쟁은 피할 수 없다. 신성그룹과 거래를 트면 땅따먹기에 필요할 돈도 비축하고 신성과 신세기를 찢어놓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음···.”
“못 들은 걸로 해, 누나. 괜한 소리한 것 같아. 미안해.”
침음성을 흘리는 장하연을 보니 너무 내 욕심만 생각한 것 같다. 엎질러진 물이라도 진심으로 사과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때문이 아냐. 사치품은 어떡할 거야?”
“사치품?”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깜빡거리자 장하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모님하고 확실히 끊으려면 다 끊어야 하는데··· 너희 백화점, 계열사 VIP 고객들이나 거래처 사람들, 임원들이 쓸 만한 게 없잖아?”
사치품은 또 다른 로비 수단 중 하나다. 베갯머리송사에 당해낼 남자 없다고 어지간한 쇠심줄 공무원 나리들도 와이프들의 호소에 마음을 돌리지 않던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멍청한 꼴을 보여서 입맛을 다셨지만 장하연은 내가 화가 난 줄 알았는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해동백화점 경영방식이 회장님 뜻인 건 잘 알아, 성민아. 그래도 내년에 마트 열면 저렴한 건 그쪽으로 넘기고 고급품 팔아도 되잖아? 상품권은 또 어떻고?”
나도 생각했었지만 그거까지 말하기엔 너무 노골적일 것 같았는데 먼저 얘기를 꺼내주다니··· 장하연의 배려에 스파크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이 찌릿해졌다.
해동백화점은 좋게 말해도 로우엔드 백화점, 나쁘게 말하면 조금 고급스러운 도심형 아울렛이다.
누구든 부담 없이 백화점에 오길 바라는 할아버지 뜻은 이해해도 기업의 최우선 목표는 생존이니 장하연의 말이 맞았다.
할아버지도 할인점 출점을 결정한 이상 유통부문의 구조조정을 생각하고 있을 터.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누나 말이 맞아. 기업은 돈을 벌어야 하고 백화점은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줘야 돈을 벌잖아.”
“아버지도 그렇게 말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장하연이 크게 뜬 눈으로 바라봤지만 전생에 20년 가까이 아침식사 때마다 장호건에게서 들은 얘기 중 하나였다. 제목을 붙인다면 ‘업의 철학과 본질’쯤 되려나?
“나 서울대 문과 수석 입학자야. 그 정도는 껌이지, 뭐.”
뻔뻔하게 대꾸하자 장하연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혀를 살짝 내밀었다.
“난 졸업도 수석이거든? 이거 되면 강남터미널에 우리 호텔 넣어준 거 갚은 거다?”
저 빚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었다. 늘 떳떳하고자 노력하는 장하연의 마음에 흐뭇한 미소만 지어졌다.
“알았어. 본점 리뉴얼하면 누나 원하는 거 다 사줄게. 아니지, 10월에 영등포 본점 신관 오픈하는데 거기부터 새로 꾸미면 되겠다.”
밝게 웃으며 말하자 장하연은 서서히 볼이 발그레해지더니 날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희 백화점 컨설팅, 너하고 해도 돼?”
컨설팅이라.
그녀의 능력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 이번 일로 할아버지에게 눈도장을 찍으면 좋을 것 같다. 우리 둘이 정당하게 평일 데이트를 할 수도 있으니 거절하면 멍청이다.
***
미사리 카페에서 두 남녀가 나누는 대화는 실시간으로 장호건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확실한가?”
[예, 회장님. 테이블 밑 도청기로 확인했습니다.]
“흐음···.”
장호건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지만 그 음색은 은은하게 밝았다. 장하연과 이성민이 좋은 기류를 만들어가고 있으니 부모로서 흡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례비는 넉넉히 주지. 설치한 도청기와 카메라는 전부 철수해.”
[예?]
“더 이상 관찰할 필요가 없네. 다른 곳에 새어나가면 안 될 것이야.”
[알겠습니다, 회장님.]
전화를 마친 장호건은 일전에 꺼내봤던 봉투와 빛바랜 사진 하나를 꺼냈다. 젊었을 적에 멜빵바지를 입은 이명우와 자신이 스패너를 쥐고 어깨동무를 한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고맙다, 명우야.”
장호건은 자신의 딸을 친딸처럼 아껴주고 며느릿감으로 찍어줬던 옛 친구에게 감사의 인사를 끝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그 친구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