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9th. 뚫어야 한다 (2)
“진짜입니까, 수녀님?”
[어제 돌아오셔서 여독을 푸시느라 오늘에야 말씀을 드렸는데 지금 바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됐다!
“알겠습니다, 수녀님.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 당장 그 성당으로 가요.”
“임 신부님, 오셨습니까?”
박태진도 그 사이에 임수웅 신부에 대해 알아봤기에 기대를 거는 것 같았다.
“네. 빨리요!”
“알겠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서 지하차고로 내려간 우리는 차를 타고 성당에 도착했다.
“자네가 요한인가?”
우리 집안을 도와주실 귀한 분이기에 눈썹까지 하얗게 센 백발의 임수웅 신부에게 얼른 인사부터 올렸다.
“예, 신부님. 이성민 요한입니다.”
임수웅이 날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내 손을 잡았다.
“마르코님 자제 분들이 부탁한 줄 알았으면 빨리 끝내고 왔을 걸세. 어여 길 잡으시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가톨릭 사회 내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이기에 이 분까지 할아버지 이름을 입에 올리며 선선히 나서는 걸까?
“예, 신부님. 형, 지금 바로 공사장으로.”
의문은 나중에 풀어도 된다. 지금은 공사장에 가는 게 먼저다.
***
그 길로 우리는 임수웅 신부를 뒷좌석에 태우고 강남터미널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숙부님!”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무실로 들어온 나는 이명진을 찾았지만 날 맞은 건 현장을 책임지는 임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도련님?”
“숙부님 어디 계세요?”
“삼풍백화점 철거 건 때문에 현장에···.”
일복이 터져도 문제였다. 가장 중요한 이때에!
“수맥 찾을 분 모셔 왔으니까 빨리 연락드리세요. 어서요.”
“수맥 찾을 분이라뇨?”
현장 임원이 황당해하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던 사이에 박태진이 임수웅 신부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시오이까. 임수웅 사도요한이라고 하외다.”
“임수웅 사도요···.”
이름을 되뇌던 임원의 눈이 커지더니 내 귀에 손을 대고 나지막이 물었다.
‘수맥 신부님입니까?’
수맥 신부.
임수웅 사도요한 신부의 별명으로 소록도에서 20여 개의 수맥을 발견해 나병환자들의 생활 기반을 만들어줬고, 수맥과 풍수에 관한 서적도 발간한 이 방면의 권위자였다.
앞으로 선종할 때까지 그가 발견할 수맥과 온천은 헤아릴 수도 없고 그 중 한 곳이 센트럴스퀘어로 불릴 이 강남터미널이기에 원래 역사보다 더 빨리 모셔온 것이었다.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임원이 황급히 내 귀에서 손을 떼고는 임수웅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몰라 뵀습니다, 신부님! 사장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구세주를 본 것처럼 잔뜩 흥분한 임원은 부리나케 전화기를 꺼내서 이명진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10여 분만에 이명진의 차가 도착했다.
“신부님!”
차에서 내리자마자 뛰어서 계단을 올라왔는지 이명진은 헉헉거리면서도 임수웅에게 인사부터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명진 안드레아라고 합니다.”
“형제님이 마르코님 차남이시구먼. 수맥 때문에 고생이라고 들었소이다.”
임수웅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이명진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를 어떻게?”
“요한 형제가 형제님 부탁이라며 날 찾아왔소이다. 내 그때는 다른 곳에서 수맥을 찾아주느라 출타 중이었는데···.”
임수웅 신부의 이야기에 이명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지만 나는 그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때서야 이명진은 내가 준비한 깜짝 선물이라는 걸 알아채고 표정을 고쳤다.
“벌써 여러 차례 시추했는데 수맥이 안 잡혀서 다음 공사를 못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최근 들어 일이 많아진 통에 조카에게 부탁한 점 용서해주십시오, 신부님.”
이번 강남터미널 사업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명진이어야 한다. 그래야 이명진이 날 더 믿고 지지하지 않겠나?
임수웅은 고개를 숙인 이명진의 어깨를 쓰다듬어주며 껄껄 웃었다.
“허허, 이 늙은이한테 말해줬으면 진즉에 찾아왔을 것을. 나가보십시다. 요한 형제가 교구청에 특별헌금 낸 것도 있으니 찾을 때까지 찾아보겠소.”
“예? ···예! 신부님 집중하셔야 하니까 전부 스톱시켜. 어서!”
엉겁결에 대답한 이명진이 크게 외치자 날 맞았던 임원은 재빨리 마이크를 켰다.
[공사 중지! 전 작업자 공사 중지!]
밖으로 나온 우리는 수차례의 공사 중지를 알리는 방송을 들었다. 요란하게 울리던 기계소리가 멈추고 공사장이 조용해지자 임수웅은 줄이 달린 동전을 늘어뜨렸다.
“어디에 물이 흐르나 찾아보십시다.”
“예, 신부님.”
임수웅은 공사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나와 이명진을 비롯한 공사장 사람들 몇몇이 그 뒤를 어린양마냥 졸졸 따라다녔다.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임수웅이 한 곳에서 멈췄다.
“여기에 한 줄기가 흐르는 것 같소.”
이명진이 고갯짓으로 가리키자 직원 한 명이 잽싸게 깃발을 꽂았다.
그 뒤로 계속해서 돌아다니던 임수웅은 또다시 멈춰 섰다.
“여기도 흐르는 것 같구려. 이곳에서 잡히는 건 전부 찾은 것 같소이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좋은 곳으로 모시도록 해.”
“예, 대표님. 신부님, 이쪽으로···.”
임수웅은 담당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공사장 바깥으로 향했고 그 모습을 보던 이명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조카한테 번번이 빚만 지는데?”
“혹시나 해서 찾아뵀는데 다행이에요. 숙부님, 굴착만 하면 되겠죠?”
코 밑을 문지르고 씩 웃자 이명진도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도 수맥 신부님께서 찍어주셨으니 잘 될 거다. 시작해!”
이명진의 지시가 떨어지자 옆에 있던 담당자가 무전기로 지시를 내렸고 시추기를 부착한 굴착기가 우르릉 소리를 내며 가장 가까운 깃발이 꽂힌 곳을 향해 움직였다.
포인트에 도착한 굴착기가 깃발이 꽂혀있던 자리에 맞춰서 쇼벨 대신 앞에 달린 시추기를 수직으로 세웠고 인부들이 시추기 밑 부분에 지지대를 설치했다.
“시작합니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시추기가 작동됐고, 긴 파이프가 하염없이 땅 속으로 들어갔다. 어느 새 근처에서는 각종 장비들을 설치한 사람들이 뚫어져라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길다란 파이프가 수도 없이 들어갔을 무렵.
“됐습니다! 찾았습니다!”
모니터를 보던 담당자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함성은 주변으로 퍼져서 다른 사람들까지 덩달아 함성을 내지르거나 주먹을 치켜들었다.
장비를 모두 철수시킨 사람들은 다음 포인트로 가서 똑같이 작업을 시작했고, 그곳에서도 똑같은 함성의 파도가 펼쳐졌다.
“다들 고생했어! 수질 분석해야 하니까 샘플 채취하고 다음 공사 진행해.”
“예, 사장님.”
두 번째 시추까지 성공한 걸 보고서야 이명진은 지시를 내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후우-, 진짜로 수맥이 터지다니.”
이명진은 임수웅 신부가 짚어준 두 곳에서 모두 수맥이 터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사무실로 돌아와서 세상 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모셔오느라 고생했어. 뭐 마실래?”
“주시는 대로 마실게요.”
“저도 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 사장님.”
이명진은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서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치익-!
이명진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뚜껑을 딴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물 찾느라 시간 버리고 돈 버린 거 생각하면 속이 다 후련하네. 이제야 맘 편하게 공사하겠다, 하하!”
“다행이에요. 공기 늦어지면 돈 엄청 깨졌을 텐데.”
“처음 맡는 턴키 공사라서 내심 걱정했는데 우리 조카 덕분에 살았다. 고맙다.”
부담이 컸을 것이다. 성수대교를 박살내기 전의 해동건설 시가총액보다 훨씬 큰 공사가 아닌가? 강남터미널 공사는.
“헌금은 얼마나 냈냐, 성민아?”
“5억 냈습니다, 숙부님.”
“난 10억은 내야겠구나. 그래야 아버지도 20억은 내시겠지, 하하.”
걱정거리가 사라져서인지 이명진은 남은 콜라를 시원하게 비웠다.
“삼풍백화점 철거야 태현에서 거들고 있으니 우린 여기만 집중하면 되겠다. 고려호텔만 넣으면 될 텐데··· 잘 되겠지?”
“걱정마세요, 숙부님. 신 회장님도 생각이 있으시니 현명하게 결정하실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겁니다, 숙부님. 기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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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온천?”
공사현장 사무실 건물에서 일을 보던 이명진은 자신이 보고 있는 서류를 믿을 수가 없었다. 금싸라기 같은 이 땅에서 터진 수맥이 온천수라니?
이명진은 다시 한 번 눈을 비비고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에서 보내준 성분 분석 결과표를 봤고, 서류를 가지고 온 직원은 연구원에서 들은 핵심 내용을 알렸다.
“미네랄 함량이 도고 온천의 세 배라고 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직원의 말을 들으며 서류를 다시 보던 이명진이 두 주먹을 높이 들었다.
“와아아!”
사무실이 떠나가라 함성이 울려 퍼졌다.
쿵!
이명진이 책상을 내리고 소리쳤다.
“오늘 공사, 하던 거만 끝내고 푹 쉬라고 해! 전 작업자 금일봉 돌리고 소고기 구워!”
오늘 같은 경사를 그냥 넘길 수 없었기에 이명진은 지시를 내리고 전화를 들었다.
“명진입니다, 아버지. 우리 공사현장에서 온천이 나온답니다, 하하!”
삼청동에서 그 전화를 받은 이대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강남 한복판에서 온천이라니?
“참말이냐? 애비한테 농담하는 거 아니지?”
[제가 일로 농담하는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아버지? 방금 성분 분석표 받아봤는데 미네랄 함량이 도고 온천의 세 배나 됩니다, 하하!]
아들이 일로 농담하는 사람이 아님은 본인이 잘 알고 있었기에 이대수는 껄껄 웃었다.
“으허허허! 알았다. 오늘 같은 날은 모두가 축하할 일이니 금일봉 돌리고 소고기도 든든히 먹여. 공사도 접고.”
[알겠습니다, 아버지!]
이심전심인지 부전자전인지 사람을 귀히 여기는 건 이대수나 이명진이나 마찬가지였다.
“으하하하! 이거 운수대통이구먼!”
전화를 끊은 이대수는 책상까지 두들기며 호탕하게 웃고는 새 전화를 걸었다. 가장 먼저 알려줄 사람이 있지 않은가?
“신 회장아, 강남터미널에서 온천이 터졌단다! 으하하하!”
[예? 온천이요?]
“명진이가 알려줬는데 미네랄이 도고 온천의 세 배나 된다더구먼! 축하하네, 으허허허!”
남들이 보면 재벌씩이나 돼서 온천 하나에 호들갑 떤다고 할 수도 있다. 허나 10여 년 만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손 댄 첫 사업에 경사가 겹쳤으니 이대수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성민이하고 내기했는데 보기 좋게 졌네요, 하하!]
신호진에게 소식을 전하고 호탕하게 웃던 이대수는 귀에 들리는 말에 웃음을 멈췄다.
“내기라니? 내 손주하고 무슨 내기를 한 겐가?”
[별 거 아닙니다, 회장님. 고려호텔 위탁경영을 두고···.]
신호진에게서 얘기를 들은 이대수는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허허허! 그놈한테 무슨 복이 붙었는지 모르겠구먼. 우리 장손 귀엽게 봐줘서 고마우이, 신 회장.”
[아닙니다, 회장님. 삼청동에서 입은 은혜가 있었는데 제가 옹졸했습니다.]
눈앞에 없었지만 신호진의 표정이 보였는지 이대수는 고개까지 저었다.
“아닐세. 나였으면 그놈들 쫓아가서 뺨을 후려쳤을 게야. 자네가 화를 참았으니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주신 게 아니겠나, 으허허.”
껄껄 웃던 이대수는 장식장에 놓인 흑단으로 만든 피에타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선친 때부터 속죄하는 마음으로 믿고 있지만 임수웅이 수맥을 찾아준 것도, 그 수맥 중 하나가 온천인 것도 이대수에게는 전부 그들의 가호 덕분에 가능했다고 여겨질 뿐이었다.
[백화점과 호텔 임대 계약은 고 실장 만나서 처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자네도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시게나.”
이대수는 신호진과의 통화를 마치고 새 번호를 눌렀다. 교구청에 낼 특별헌금이야 일요일에 내면 되겠지만 빨리 처리할 게 있었다.
“할애비다. 3억 불 시원하게 꽂아주마, 으허허.”
***
“온천?”
“예, 회장님. 온천수는 호텔에 독점 공급하기로 했는데 신호진 회장이 고려호텔 위탁경영까지 승낙했다고 합니다.”
강남터미널에서 온천이 터진 사실에 장호건과 이수한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알짜배기 땅에 고려호텔이 들어가서 기뻤지만 그 땅을 자신들이 먹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제로섬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만 바보가 됐군. 공사는 공사대로 날리고 호텔은 임대도 아니고 위탁경영이라니.”
“모두가 제 실수입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이수한이 고개를 숙이자 장호건은 손을 내저었다.
“그게 왜 자네 잘못이야? 멍청한 내 누이하고 동생 놈 때문이지.”
장호건은 이가 갈렸다. 피붙이라고 있는 것들이 욕심만 덜 부렸어도 강남터미널에 신성그룹 깃발이 휘날리지 않았겠는가?
“누님은 어떻게 됐나?”
“신호진 회장에게서 임대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소송을 걸려고 했지만 명동 쪽에서 신세기그룹이 무리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와서 위약금을 돌려받고 손 뗐다고 하는데···.”
이수한이 머뭇거리는 이유를 장호건은 잘 알고 있었다.
“해동에서 움직였나?”
“예. 이 회장님 휘하였던 쩐주들 모두 금융실명제 때 일을 덮는 대신에 장호경 회장님을 압박했다고 합니다. 백화점 임대 계약은 신 회장이 물어줘야 할 위약금까지 부담했고요.”
“이 영감 돈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군. 사채자금도 박살났으면서 신성전자에 3천억을 꽂아주질 않나, 구리광산을 가져가질 않나, 거기에 강남터미널까지···.”
이수한에게서 내막을 들었어도 장호건은 입술을 씹었다. 돈만 밝히는 줄 알았던 노인네가 그 돈을 날려먹고 웅크릴 줄 알았는데 외려 돈을 펑펑 써재끼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장호건은 나지막이 곱씹던 중 자신의 눈치를 보는 이수한을 바라봤다.
“더 말할 거 있나?”
“예. 장 부장이 대한이동통신 주식을 매수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정부에서 대한이동통신 주식 잔량을 전부 매각할 거라는 정보를 확보한 듯합니다.”
“흐음···.”
침음성을 흘리면서도 장호건의 표정은 점점 풀어지고 있었다. 집안 식구들 중 유일하게 큰딸만이 돈 벌 기회를 스스로 찾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