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8th. 주고받는 레이스(Raise) (3)
신성그룹 비서실 각 팀 에이스들을 추려 계약서를 만든 뒤, 이수한은 곧바로 고려호텔의 일식집에 자리를 잡고 고승주와 만났다.
“우리 쪽에서 맞춘 저울입니다. 확인해 보시죠.”
“알겠네.”
계약서를 넘겨받은 고승주는 내용을 확인하면서 침음성을 흘렸다.
“조건이 꽤 까다롭군. 3년간 연 이율 3퍼센트에 3천억을 빌리고 원금은 만기에 갚겠다···.”
고승주가 고민하는 걸 보자 이수한이 얼른 입을 열었다.
“형님, 우리 신성이 그 돈 못 갚을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건 아니지. 신성그룹 신용등급이야 국내 최고 아닌가?”
“우리도 그거 먹어보겠다고 공사 치느라 쓴 돈이 많습니다. 그 돈이 어떤 돈일지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턱 밑을 문지르던 고승주는 이수한의 토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라든 외국이든 로비는 필수. 로비에 쓸 돈은 꼬리표가 없어야 하니 보통 돈과 액면이 같아도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돈이다. 경쟁자라도 같은 바닥에서 구르니 고승주도 이수한의 입장을 모른 척하기 어려웠다.
“알겠네. 그럼 우리 쪽에서도 다시 한 번 논의해보고 연락하지.”
“그러시죠. 다음 미팅 때는 취할 때까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자! 술 한 잔 받으시죠.”
지금은 은행이자보다 사업수익률이 높은 시대. 수익률이 낮아도 장밋빛 전망에 취해 대출을 마다하지 않는다.
당연히 채무자도 채권자에게 배짱을 부린다. 여기에 신성전자가 해동종금에 원하는 대출은 해동그룹이 원하는 사업을 신성그룹이 내주는 조건에서 성립된다.
이수한은 여유 있게 웃으며 고승주의 잔을 듬뿍 채워줬다.
***
이수한과의 미팅을 마친 고승주는 삼청동으로 들어갔고 이 회장은 고승주가 넘겨준 신성그룹 측 제안서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쿵-.
“이놈들이 우릴 벗겨먹으려고 작정했군. 3천억을 빌리겠다면서 연이율 3퍼센트에 원금은 만기에 갚겠다고?”
할아버지는 손바닥으로 신성그룹 측 제안서를 책상에 패대기치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할아버지. 기준금리만 해도 8퍼센트, 시중금리는 그 이상이니 골이 난 모습을 봐도 할 말이 없었다.
“예. 그간 본인들도 현지 정관계에 뿌린 돈이 있으니 그 점을 고려해달라고 했습니다.”
“성민이 네 생각은 어떠냐? 이러고도 우리가 이 장사를 해야 한다고 보느냐?”
소파에 앉아있던 나는 마시던 홍차를 내려놨다.
“구리광산 위탁경영 뒤에 지분인수권이 숨겨져 있는지 확인하고 결정하면 좋겠습니다. 3천억, 아예 주는 게 아니라 돌려받을 돈이 아닙니까?”
신성그룹에게서 원하는 판돈을 끌어낸 이상 더 이상 조건을 얹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이야 손해로 보이더라도 무조건 카자흐스탄 구리광산을 신성그룹에서 빼앗아야 한다.
10년만 더 지나면 폭등할 구리광산이지만 그대로 신성의 손아귀에 두면 조 단위의 꼬리표 없는 돈으로 변해서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니 반드시 우리 손에 넣어야 한다.
“성민이 의견이 맞습니다, 회장님. 더 이상 조건을 얹는 건 어렵습니다. 러시아 지사 인맥을 통해 카자흐스탄 현지 유력자들과 접촉할 수 있으니 내막을 알아보고 최종협상을 준비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고승주까지 내 의견에 힘을 실어주자 할아버지는 턱을 괸 채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우리 영감님, 아무리 곳간 풀겠다고 했어도 웬수처럼 여기는 신성에 굽히고 들어가는 모양새 같아서 받아들이기 힘든 가보다. 그렇다면···.
“실장님, 정부에서 대한이동통신에 남은 주식 언제 처분할까요?”
“응?”
“정부에서 손 떼고 백퍼센트 민영화되면 주가가 더 오를 것 같거든요. 종금에서 돈 빌려서 10만 주 더 채우고 나중에 팔고 싶은데.”
할아버지가 눈을 다시 뜨고는 고승주에게 물었다.
“고 실장, 들어온 정보 없나?”
“얼마 전 정보회의에서 올 상반기 내에 나머지 지분을 모두 매각할 거라고 대한이동통신 담당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사두면 향후 꽤 큰 이익이 날 겁니다.”
다행이었다. 내가 알던 것보다 주가가 더 올라서 나비효과가 생길까 걱정했는데 정부의 민영화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너, 주식 팔아서 종금 빵꾸 날 거 메워주겠다는 게냐?”
“네, 할아버지. 이번에 벌 돈으로 가득 메워놓겠습니다.”
할아버지는 피식 웃더니 날 보며 크게 소리쳤다.
“예끼, 이놈아! 할애비가 그깟 푼돈에 벌벌 떠는 줄 아는 게야? 이 할애비, 6.25 난리 때도, 총알 날아다니는 월남에서도 돈 벌어왔다. 주식으로 벌 돈은 네 주머니에 넣어둬.”
“그럼···?”
눈까지 깜빡거리며 말끝을 흐리자 할아버지는 고승주를 불렀다.
“고 실장, 그놈들한테 3천억 던져주고 은행에서 내 돈 찾아다 종금에 꽂아놔. 나간 만큼 채워주면 조 대표도 별 말 안 하겠지. 이놈 주식 담보로 잡고 주식 살 돈도 내주라고 해.”
할아버지의 지시를 듣고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게 아니다. 고려호텔을 다시 넣으려면 신 회장을 설득해야 하는데··· 그건 네 몫이 될 게야. 게까지 해내야 스탠더드에 3억 불 꽂아주마.”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내가 한 가지를 간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집안의 강남터미널 공사라면 모를까 강남터미널 사업을 자빠뜨리려 했던 신성그룹의 고려호텔 입점을 신호진이 받아줄 리는 없을 터.
“건축주면··· 신호진 회장님이죠? 4공 때 무너졌던···.”
신호진.
10여 년 전, 20대의 젊은 나이에 유신상사를 세웠고, 그 유신상사를 3년 만에 재계 13위의 유신그룹으로 키운 남자였다.
“그래. 신 회장 그 친구, 너무 빼어나서 신성그룹 병호 형님이나 태현그룹 진호 형님, 다른 사업가 나부랭이들이 정치꾼들과 작당해서 꺾어버렸다. 신 회장이 명진이 손을 들어준 건 사업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그 친구가 망했을 때 나나 내 부친이 그 친구에게 빌려준 돈 안 받은 게 컸을 게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신호진이 망한 이유는 둘째쳐도 그가 우리 집안의 채무자였다는 사실을 숨겼다니? 쉽게 풀 일을 왜 어렵게 만들었단 말인가?
“할아버지?”
“빚 대신에 강남터미널 땅 넘긴다고 했을 때 네 증조부님과 내가 덮은 일이다. 동향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 친구가 그렇게 무너지는 게 아까워서 덮었어. 돈놀이도 선은 지켜야지 않겠느냐?”
할아버지의 책망 어린 시선에 얼굴이 뜨거워져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돈에 대해 철저한 분이 이런 면이 있었다니.
그렇다면 이번 일은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해동그룹의 후계자이자 할아버지의 장손으로서 그룹과 할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할 수는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최선을 다해 해내겠습니다.”
“쉽진 않을 게야. 그 친구 자존심도 보통이 아니니 말이다. 네 숙부한테 물어보고 잘 준비해봐.”
우리 할아버지, 역시 쉽게 주는 분이 아닌 것 같다. 이 또한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한 과정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
고승주는 카자흐스탄에 파견한 해동물산 러시아 주재원들에게서 정보를 입수하고 나서야 계약서를 꾸몄다.
“아, 이 실장? 고승주일세. 늦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형님. 검토는 충분히 하셨습니까?]
“이게 최종조정안이 될 것 같군. ‘팔괘’에서 봤으면 하네.”
[그러시죠.]
서류를 챙긴 고승주는 독일 세단을 타고 고려호텔 본점에 도착해 중식당 ‘팔괘’의 VIP룸에 들어가서 이수한과 식사를 들었다.
이수한은 테이블을 돌리며 음식을 덜어먹던 젓가락을 내려놨다.
“이명진 대표, 요즘 많이 바빠 보이더군요. 몸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산삼이라도 달여 마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하.”
해동건설은 이번 상반기에 대규모 승진을 단행했고 신입과 경력직을 포함한 공채 규모도 대폭 늘렸다. 기존 공사뿐만 아니라 정부 측에서 맡긴 안전진단 용역에 강남터미널 공사 등 각종 신사업들 때문이었다.
“태현건설 끼고 삼풍백화점까지 허물기로 했으니 오죽하겠나. 철거가 끝나면 우리 그룹에서 그 땅을 매입하고 아파트라도 올려보라고 서울시에서 권하더군. 대법원에 대검까지 맞은편으로 옮겨올 테니 장사가 잘 될 거라나? 하하하!”
마오타이를 비우고 껄껄 웃는 고승주는 요즘처럼 유쾌한 때도 없었다.
재계 1위인 태현그룹의 모기업이자 국내 최고의 건설사인 태현건설이 해동건설 하청으로 삼풍백화점 철거 작업을 함께 하기로 하지 않았나? 내년부터 조성될 법조단지 맞은편에 세울 주상복합아파트 건설 하청까지 노리고.
이수한은 고승주를 향해 섭섭한 눈빛을 날렸다.
“다음에는 우리 신성도 끼워주시죠, 형님. 오늘 일만 잘 되면 두 그룹이 손잡을 일이 많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아, 우리가 신성한테 부탁할 일이 많지 신성이 우리한테 부탁할 게 뭐 있겠나?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흐흐.”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이번 정부 들어서 워낙 팍팍하다보니 아쉬운 소리가 나왔습니다, 흐흐.”
이수한과 함께 술을 비운 고승주는 보이차로 입을 헹궜다.
“적당히 먹고 마셨으니 시작해도 되겠지?”
“얼마든지요, 형님.”
고승주는 옆에 둔 가방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 이수한에게 넘겼다.
“형님?”
이수한은 서류철에서 눈을 떼고 고승주를 쳐다봤다. 그의 눈에는 놀람과 경악이 뒤섞인 채 비치고 있었다.
“고작 위탁경영 때문에 신성그룹에서 카자흐스탄 정관계에 기름칠 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네. 혹시나 해서 알아봤는데 현지사정이 안 좋더군.”
“······.”
이수한은 말없이 보이차를 마시며 어느 새 차분해진 고승주를 빤히 쳐다봤다.
“경영정상화에 투입할 돈이 넉넉잡고 2억 5천만 불. 그 돈을 지분 45퍼센트로 바꾸겠다고 밀약이 됐다던데··· 아닌가?”
현지에서 입수한 정보를 줄줄 읊는 고승주의 얼굴에는 승자의 여유가 넘쳤지만 이수한의 얼굴은 패배자 그 자체였다. 나중을 기약하고 안 밝혔는데 완벽하게 드러났다니.
“거기 적힌 대로 해주면 신성전자에 3천억 바로 들어갈 걸세. 신성은 반도체가 핵심 사업 아닌가? 땅 파서 장사하는 건 우리한테 넘겨주게나.”
좋게 말할 때 카자흐스탄 광산 지분 인수권까지 넘겨달라는 고승주의 제안 아닌 제안에 이수한의 얼굴이 굳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자리에서 일어난 이수한은 밖으로 나갔고 고승주는 보이차를 홀짝이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들어온 이수한의 얼굴은 영 좋지가 않았다.
“뭐라 하시던가?”
“계약, 체결하겠습니다. 대신에 고려호텔 입점이 무산되면 이 계약에서 해동그룹 측 요구사항은 전부 무효입니다. 어떠십니까?”
순순히 물러설 수 없어서 이수한이 마지막 태클을 걸었지만 고승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게. 깔끔히 처리해주지.”
고승주는 지금까지 이성민이 보여준 것들을 생각하면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설령 안 된다고 해도 이대수가 나서면 해결되는 일. 신성그룹이 물고 늘어져도 해동그룹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아직까지 공사현장에서 수맥을 못 찾았다고 들었는데 이왕 거래하는 거, 잘 되었으면 좋겠군요.”
이수한의 말에 고승주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유동인구만 수십만 명이 될 초대형 상업시설인 만큼 물을 끌어오는 것이 중요한데, 아직까지 대안이 없어 걱정 중이긴 했다.
하지만 이성민의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든, 이대수의 돈이든, 이명진의 기술적 안목이든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별 걸 다 걱정하는군. 종금에서 3천억 넣어주면 반도체 공장이나 잘 지으시게, 하하.”
고승주는 이수한의 똥 씹은 표정을 보며 웃으면서도 수맥 문제가 해결되길 간절히 빌었다.
***
신성그룹과 해동그룹의 거래가 끝난 뒤.
나는 장하연과 미사리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슬슬 봄기운이 감도는 4월 첫째 주여서 우리 둘 다 한 꺼풀씩 가벼워진 옷차림을 한 채 마주 앉아있었다.
“호텔 하나 다시 넣자고 시작한 일인데 다들 무리하시는 거 같아. 회장님도, 아버지도.”
장하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 모든 걸 뒤에서나마 내가 꾸몄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어른들이 그렇지, 뭐. 그래도 고려호텔 강남점 입점은 사실상 된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것만 있게? 회장님 덕분에 목돈 안 들이고 따박따박 돈 벌게 됐잖아. 고마워, 성민아.”
재벌 유전자 어디 안 간다고 장하연은 내가 만든 거래가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번 거래만 놓고 보면 가장 이익을 본 당사자가 아닌가? 미래의 고려호텔 주인이 될 몸인데.
병원 신세 이후로 장수연도 안 들러붙고 있겠다, 그녀와 좋은 기분을 더 좋게 만들 얘기를 꺼냈다.
“누나, 대한이동통신 주식 더 살 거야?”
“왜?”
“2차 가속 준비하려고.”
“2차 가속?”
“저번에 말했잖아. 정부에서 나머지 주식 매각하면···.”
“아···!”
주식 이야기를 꺼내자 장하연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개인재산 불리는 일이니 오죽하겠냐마는 호텔 일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기억하는 걸 보면 주식에 재미가 들렸나보다.
“좀 더 모으고 다 털어내자는 거지?”
“맞아. 난 다 채웠으니까 누나 물량만 채우면 돼.”
이번 거래만 마치면 장하연은 세금과 수수료를 떼도 따끈따끈한 현찰로 최소 3백억을, 나는 1천 2백억 이상을 손에 넣는다.
정산만 하고 나면 더 이상 국내 증시는 안 들어갈 것이다. 백화점 입점까지 성사되면 할아버지가 스탠더드 캐피털에 3억 달러를 꽂아주겠지만 그와 별개로 내 돈에서 5천만 달러를 미국에 보내고 나머지는 국내에 둘 생각이었다.
장하연은 얼굴에 미소가 번진 얼굴로 물었다.
“이번에도 네가 핸들링 할 거지?”
“그래야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하연이 핸드백에서 통장을 꺼내 내밀었다.
“비밀번호 알지?”
“여기 안에 있어.”
손가락으로 머리를 치며 미소를 띠자 장하연이 피식 웃었다.
“잘났어, 정말. 학교 다닐 때 너하고 강의 겹치면 1등 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지?”
“1학년 때만 고생했으면서. 2,3학년 때 나 그 꼴 나서 땅 짚고 헤엄친 거 알 거든? 흐흐.”
잠시 학교 다니던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투닥거리던 우리는 커피를 다 비웠다.
“오늘은 여기까지. 고생해.”
“누나도 힘 내.”
카페를 나와서 각자의 차로 향하던 중 장하연이 나를 불렀다.
“성민아, 강남터미널 공사, 수맥 찾느라 고생한다는데 방법은 있어?”
“글쎄. 그쪽은 내 전공이 아니라서···.”
말끝은 흐렸을지언정 실은 생각해둔 게 있다. 나는 장하연을 먼저 보낸 뒤, 나만의 히든카드를 떠올리며 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