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8th. 주고받는 레이스(Raise) (2)
삼청동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식당에 들어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너 오는 거 기다리느라 죄다 목 빠지는 줄 알았어, 이놈아! 얼른 앉거라, 으허허.”
할아버지를 보며 겸연쩍은 미소를 띤 나는 얼른 끝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탁배기 말고 이놈을 따보세.”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있던 샤토 라피트의 코르크 마개를 따고는 테이블을 한 바퀴 돌면서 우리에게 와인을 따라줬다.
어지간한 소믈리에 못지않은 솜씨로 멋지게 와인을 채워준 할아버지는 당신 자리로 돌아와서 자작을 한 잔을 들었다.
“해동그룹을 위하여!”
“위하여!”
할아버지의 쩌렁쩌렁한 선창에 맞춰 건배사를 외친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크으- 좋구나! 네 숙부한테 들었다. 누굴 만나고 왔다고?”
“예, 할아버지. 하연 선배를 만나고 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를 싹 지우고 굳은 얼굴로 날 뚫어지게 바라봤다.
“호건이 큰딸 말이냐? 밖에서 데려왔다는 그 아이?”
“어떻게 그걸···?”
깜짝 놀라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장하연이 장호건의 혼외자식인 건 그 집안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눈만 크게 뜬 채 멀뚱멀뚱 바라봐도 할아버지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이놈아. 이 할애비 안테나를 뭘로 보는 게야? 네 머리 위에 인공위성까지 띄우고 있어, 흐흐.”
“아··· 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해동그룹 비서실과 40년 역사의 해동장학재단, 명동 쩐주들을 통한 정보망이면 온갖 소문과 정보들을 추려낼 수 있으니.
“그 아이가 뭐라고 하더냐?”
“고려호텔 재입점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물음에 대답하자 모두들 한마디씩 하고 싶어 하는 표정을 띠면서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다들 할아버지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맨입으로 도와달라고 하진 않았겠지?”
“예. 신세기그룹에 자금 압박을 넣어서 백화점 입점 계약을 파기시키고 고려호텔 입점 시 면세점과 아케이드는 빼겠다고 했습니다. 인허가 문제도 처리해주겠다고 했고요.”
사실대로 말하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저울이 안 맞아. 장호경 그 여편네 걷어치우는 거야 우리 집안 힘으로도 골백번 넘게 해낼 수 있어.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할아버지의 질문에 고승주가 입을 열었다.
“신세기그룹을 압박하는 건 회장님 휘하의 명동 쩐주들에게 시켜도 충분합니다. 신성그룹 시절이라면 모를까 분가까지 했으니 외려 쉽게 요리할 수 있죠, 흐흐.”
“우리가 거부하면 신성에서 인허가를 막겠지만 막으라고 해보시죠. 땅 정리하면서 회수한 돈도 넘치니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
이명진까지 신성그룹과의 거래를 반대하자 할아버지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장손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구나.”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눈에서 기대가 스쳐지나간 이상 실망시킬 수 없었기에 잠시 뜸을 들인 뒤,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신성그룹 카자흐스탄 구리광산 위탁경영권을 가져왔으면 합니다.”
할아버지가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다른 사람들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바라봤다.
“허어··· 그놈들 배팅에 레이스를 치자는 말이냐?”
“구리는 앞으로 성장할 전기전자 산업과 함께 값이 높아질 전략자원입니다. 위탁경영에서 그칠지 지분 인수까지 확대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광산을 경영하며 얻을 노하우만 해도 자원보국의 밑바탕이 될 겁니다, 할아버지.”
자원보국(資源報國).
그 네 글자를 내놓자 모두가 고민에 빠졌다.
해동그룹의 모기업이자 최대 계열사인 해동물산.
그 회사를 지금껏 증시에 올리지 않고 사실상의 가족회사로 둔 건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사람이든 기술이든 천연자원이든 국가에 보탬이 될 자원을 개발하기 위함이었다.
연 초에 냈던 내 보고서를 할아버지와 고승주가 꼼꼼히 봤다면 보고서 안에 있는 광물별 시장전망까지 확인했을 터. 카자흐스탄 사업이 자원보국의 신호탄임을 알 것이다.
“신성 놈들이 카자흐스탄 사업을 저울에 올리게 하면 우리도 저울을 맞춰야 할 게다. 너라면 어떤 추를 올리겠느냐?”
할아버지가 묻는 걸 보니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시작해볼까?
“강남터미널 호텔 임대보증금을 해동물산에서 납입하고 경영은 고려호텔에 영구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순이익 배분도 고려호텔에 7할을 넘겨주고요. 공식적으로는 안 되니 일감을 넘겨주는 식으로 거래해야겠죠.”
“그것만으로 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될 리가 있나. 신성 놈들도 카자흐스탄 구리광산 가치가 얼마인지 알고 있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신성그룹이 탐낼만한 아이템이 떠올랐다. 그게 있었는데!
“영등포 방직공장 부지 공동개발을 제안하면 좋을 듯합니다.”
할아버지는 대번에 탐탁찮은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 땅은 우리 해동의 뿌리 같은 곳이다. 어찌 그 땅을 장 씨 놈들한테 넘기자는 게냐?”
대한민국에서 할아버지만큼 땅 욕심이 많은 분도 없지만 영등포 방직공장 부지는 의미가 남달랐다. 영등포 방직공장은 증조부님이 해동물산을 세우고 처음 제조업에 진출한 사업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타산이 안 맞아서 문래동 의류공장과 마찬가지로 모든 일감과 인력을 지방 공장으로 보낸 채 놀려두고 있지만 내 제안은 할아버지가 반대할 만했다.
“그건 아니다, 성민아. 그 땅, 상사 쪽 배재훈 대표님도 애지중지하는 곳이야.”
“형님 말씀이 맞다. 문래동 의류공장도 마찬가지지만 영등포 공장에서 나온 원단 절반을 배 대표님께서 파셨어. 우리 백화점 본점도 그 공장 땅에 있잖냐? 게다가 가을이면 신관도 오픈할 건데.”
고승주와 이명진까지 해동물산 상사부문장인 배재훈을 들어가며 만류했지만 내가 할 말은 더 있었다.
“당장 넘기자는 게 아닙니다. 쇼핑몰을 지을 때 지분을 나누고 공사도 지분만큼 가져갈 권리를 주자는 거죠. 옵션처럼요.”
“옵션?”
“네. 올해를 빼고 3년 뒤에 우리 쪽에서 사업을 개시할 때 옵션을 행사하게 해주면 될 겁니다.”
옵션은 특정 권리의 행사 여부를 거래하는 상품.
내 의견대로 거래를 제안하면 장호건은 해외 자원개발의 리스크를 고민할 터. 내 제안이 장호건에게 먹히면 우리는 가까운 이익을, 장호건은 먼 이익을 가져가게 된다.
모두들 내 제안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등포 방직공장 부지 개발이 봉이 김 선달처럼 대동강을 파는 거래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한 가지 조건을 더 붙여야 했다.
“향후 지분 매각은 달러로 하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해외사업에 나서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달러가 필요하니까요. 부탁드립니다, 할아버지.”
마지막 쐐기까지 박은 나는 할아버지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징그럽다, 이놈아. 다 큰 놈이 뭐하는 게야?”
“카자흐스탄 사업이 아까워서 그렇습니다. 이번 일을 성공시켜야 호주 사업도 할 수 있잖습니까?”
그 순간 할아버지와 고승주가 흠칫했다. 두 사람이면 호주 사업의 가치도 알아봤을 거라 생각하고 찔렀는데 역시였다.
“호주 사업이라뇨, 아버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명진이 호기심을 못 참고 묻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놈이 지난겨울에 미국서 인턴 하고 온 거 알지?”
“예···. 투자 공부한다고 다녀왔잖습니까?”
“거기 있을 때 내가 숙제 낸 게 있었다. 거기 보면 말이다···.”
이명진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 아버지?”
“이 애비, 늘그막이나마 다시 불태워보련다. 호주 쪽 철광 인프라 공사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네 손으로 해야 할 게야.”
이명진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할아버지를 보면서 손끝까지 떨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잔뜩 흥분한 그를 보며 피식 웃고는 고승주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호주 사업을 생각하면 카자흐스탄 사업은 교두보가 될 겁니다. 경험, 노하우, 명분 모든 면에서 도움이 될 테니까요.”
“알았다. 내일 출근하면 이수한이한테 만나자고 해라. 제안서 만들고 내 도장 찍어서 보여주면 허투루 못 넘길 게야. 저울 안 맞으면 다시 맞춰보자고 해.”
모처럼 만의 도박판에 앉아서인지 할아버지는 손을 꽉 쥐고 있었다.
***
다음 날 점심.
“오랜만이네, 수한이.”
“지난 송년회 때 이후로 처음 뵙네요, 하하.”
고승주와 이수한은 서울의 한 요정에서 가야금 소리와 함께 한상 가득 차려진 한정식을 사이에 놓고 있었다.
“성민이한테 들었네. 고려호텔 재입점을 도와달라고?”
“예. 우리 잘못이 크지만 포기하기 아까운 곳이잖습니까?”
고승주는 뻔뻔하게 되묻는 이수한을 빤히 쳐다보더니 도자기 잔에 채워진 이강주를 단숨에 비웠다.
“내 자네한테 다른 제안을 하겠네.”
“무슨 제안입니까, 형님?”
이수한이 눈을 깜빡거리는 가운데 고승주는 핸드폰을 꺼냈다.
“가져와.”
딱 한 마디만 하고 끊은 고승주는 이수한을 보며 빙긋 웃었다.
“자네도 일단 비워둬.”
“예···.”
이수한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잔을 들어 술을 비웠다. 재계 비서실장들 가운데서도 자신이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고승주가 아닌가?
이수한이 술을 비우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장님,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고승주가 문을 향해 소리치자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서류 가방이 들려있었다.
“여기 내려놓고 마저 식사해.”
남자를 물린 고승주는 옆에 놓인 가방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 이수한에게 내밀었다.
“이게 그 제안입니까?”
“내용이 꽤 많아서 서류로 정리했네. 보고 얘기하지.”
서류철을 건네받은 이수한은 표지를 펼치고 안에 있는 종이를 천천히 살펴봤다.
“이, 이건···.”
“우리 회장님께서 레이스를 치셨네. 어떤가?”
느긋하게 묻는 고승주와 달리 이수한은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붙고 있었다.
장호건이 밖에서 데려온 큰딸 몫을 챙겨주려고 시작한 일이 자기 선에서 결정하기 힘들 만큼 커져버리다니.
고승주는 그 사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주전자를 든 손을 뻗었다.
“받게.”
“저도 한 잔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술을 받은 이수한은 손이 떨리는 걸 자존심 때문에 필사적으로 참으며 고승주에게 술을 채워준 뒤, 잔을 부딪쳤다. 이강주의 알싸함 때문인지 이수한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잔을 내려놨다.
“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 보고 드리고 다시 뵙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저울이 안 맞으면 다시 맞춰보자고 하셨네. 완공 전까지만 알려주게나.”
고승주는 느긋하게 웃으면서 또다시 술을 채웠지만 이수한은 돌아가서 보고할 생각에 더 이상 웃으며 술을 마실 여념이 없었다.
***
식사를 마친 뒤, 이수한은 곧바로 성의원에 들어가서 고승주가 준 제안서를 장호건에게 건넸다.
“사실인가?”
“예, 회장님. 이 회장님 직인까지 찍혔으니 확실합니다.”
이수한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났지만 장호건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제안서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영등포 쇼핑몰이라···.”
“영등포 쇼핑몰이요?”
“형님도 한 번 보시죠.”
옆에 있던 정창호가 장호건에게서 제안서를 건네받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건물이 깔고 앉을 땅만 4만 평에 가까운 초대형 쇼핑몰. 자신이 생각해도 신세기가 안 부러울 사업이었다. 여기에 건설공사는 얼마짜리가 될지 벌써부터 그의 머리가 돌아가고 있었다.
“판이 너무 커졌군요. 이 실장, 고승주 그 친구한테 다른 말은 없었나?”
“저울이 안 맞으면 다시 맞춰보자고 했는데 완공 전까지만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대표님.”
이수한이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장호건과 정창호도 침음성만 흘렸다.
“어떡하시겠습니까, 회장님? 카자흐스탄 구리광산이면 우리도 공들인 사업이 아닙니까?”
“그러긴 합니다. 위탁경영이 끝나면 우리가 투입한 자금을 주식으로 바꿔주고 배당도 하겠다고는 했는데··· 그놈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
장호건은 쉽게 답을 낼 수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의 자원개발은 수익만큼 리스크도 큰 사업. 현지 여론 관리부터 손익관리에 이르기까지 만만한 게 없다.
그에 반해 해동그룹이 내민 영등포 쇼핑몰 합작은 조금 아쉬워도 확실한 이익이 보장된다.
각자의 지분만큼 공사도 나누는 터라 건설 일감도 챙기고 장호경이 가져간 유통업까지 다시 진출할 수 있으니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수한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해동그룹에 저울을 맞춰달라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해동종금에서 신성전자에 좋은 조건으로 자금을 융통해 달라는 것도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해동종금이라···.”
장호건은 실명과 차명을 합쳐서 신성생명의 지분 50퍼센트를 갖고 있다. 허나 상속 당시에 분쟁을 마무리하고자 체결한 신사협정 때문에 신성생명과 그 밑의 금융계열사 자금은 지분만큼만 써야했다.
그런 금융계열사 자금까지 쿼터를 거의 다 쓸 정도로 반도체에 올인 하고 있는 장호건에게 해동종금에서의 대출은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이수한은 정창호와 눈빛으로 사인을 주고받은 뒤 고민하는 장호건에게 말했다.
“3천억을 끌어오면 우리 자금 6백억으로 반도체 공장 하나를 지을 수 있습니다. 캐파가 늘어나면 시장 점유율도 높이고 카자흐스탄 사업보다 더 큰 이익을 남길 겁니다.”
요즘 들어 반도체 사업 수익률이 폭등하는 걸 생각하면 반도체 공장 증설은 조폐기를 만드는 거나 다름없는 일.
반도체 공장을 늘릴 때마다 공장 건설 공법부터 설비, 건설비용, 반도체 생산원가까지 손수 챙겼기에 장호건은 어떤 게 남는 장사인지 금방 계산할 수 있었다.
“계약서 만들고 고 실장 만나봐.”
신성그룹의 장호건이라도 눈앞에 보이는 확실한 떡은 포기하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