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8th. 주고받는 레이스(Raise) (1)
그날 저녁.
우리는 할아버지와 함께 삼청동에서 보쌈에 삶은 돼지고기를 놓고 막걸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으하하하! 다들 그간 욕 봤다!”
호탕하게 웃던 할아버지는 놋그릇에 담긴 막걸리를 단숨에 비웠다.
“크으, 오늘 따라 술이 달구먼! 월남서 공사 따고 마신 막걸리도 이렇게 달지는 않았어, 으허허!”
할아버지가 깡 소리를 내며 찌그러진 놋그릇을 내려놓는 모습은 묘하게 재밌었다. 전통주는 도자기잔, 와인과 양주는 유리잔에 마셔도 막걸리는 찌그러진 놋그릇에 마셔야 제 맛이라니.
성수대교를 박살낸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TV에서는 하루 종일 성수대교를 무너뜨려 미연에 사고를 막은 해동건설을 찬양하는 뉴스로 도배됐고, 덤으로 해동건설이 지금까지 지어온 건물이나 시설물에 대한 호평까지 뉴스로 나왔다.
덕분에 해동건설부터 전 그룹 이미지까지 개선된 게 얼마짜리 효과인지 계산할 수도 없었다.
“회장님, 오늘 주식시장 보셨습니까? 해동건설 매수주문이 장 시작 때부터 마감 때까지 끊이질 않았습니다, 하하하!”
선해철이 목청이 터지게 웃고 있었지만 어디 건설뿐인가. 비상장회사인 해동물산과 해동종금은 예외였지만 해동시멘트와 해동제강, 해동중공업도 덩달아 장대양봉을 뽑아냈다.
“점심 때 청와대 민정수석, 경제수석과 만났는데 명진이가 신한국 창조를 지지해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회장님. 금융실명제 건은 미안했다는 대통령 말씀도 전해달라고 했고요.”
이어서 고승주가 낮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의 무식쟁이가 공치사라도 하는 걸 보니 어깨가 오지게 올라갔나보구먼, 으허허.”
할아버지가 껄껄 웃는 와중에도 고승주는 청와대에서 보낸 선물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공치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경제수석이 대통령 지시라며 해동건설에 주요 시설물 안전진단 용역과 철거 및 재건축 공사를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이명진이 마시던 막걸리를 내려놓고 급하게 물었다.
“사실입니까, 형님?”
“내일부로 건설부에 시켜서 해동건설에 공문 보낼 거라고 했어. 고생할 준비나 해, 흐흐.”
“일이 없어서 고생이지 사람이 없어서 고생은 아니잖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하하.”
이명진의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고승주는 아예 그의 입꼬리를 찢으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하나 더 있다. 강남터미널 공사, 우리 쪽에서 입찰해보라고 하던데?”
“예?”
“강남터미널이 호남선 전용이니까 그쪽에 연고가 있는 우리가 지으면 그림이 좋게 나올 것 같다고 하더라. 건축주하고 동향이기도 하고.”
이명진은 내심 좋아하면서도 어딘지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건 더 없습니까, 형님?”
“있지. 이번 공사에 한해서지만 5대 그룹과 같은 조건으로 대출해주라고 은행장들한테 말할 거란다. 능력도 입증했으니 트집도 안 잡힐 테고··· 가격요소도 안 밀릴 거야, 하하.”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테이블을 쿵쿵 두들기며 호탕하게 웃었다. 얻어걸린 부수입이지만 은행권에서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해주면 할아버지가 사재를 쓸 일도, 해동종금의 부담도 없어지고 해동건설의 역량도 인정받은 게 아닌가?
“으하하하! 해동건설에 돈벼락 쏟아지겠구나! 욕 봤다, 명진아!”
“아닙니다, 아버지. 다 우리 집안 잘 되자고 한 일 아닙니까? 성민이 아니었으면 그런 인터뷰는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하하!”
이명진이 인터뷰에서 청와대와 정부의 어깨에 뽕을 넣어주는 말을 한 건 내가 낸 아이디어였다. 최소한 밉보일 일은 안 만들려고 제안했는데 이런 선물이 쏟아질 줄이야.
호탕하게 웃던 이명진은 내 등을 두드렸다.
“고맙다, 성민아. 형님하고 형수님도 기뻐하실 거다.”
“아니에요, 숙부님. 다들 믿어주지 않으셨으면 이번 일은 안 됐을 겁니다.”
겸손을 떨었지만 안 되긴 개뿔.
이 계획이 불발됐다면 내 독단으로라도 사람들을 사다가 성수대교를 작살내고 이명진의 등을 떠밀어서 인터뷰를 시켰을 것이다.
그나마 이명진이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절박함을 느낀 것 같아서 일이 쉽게 풀렸다.
이제 장호경 그 여편네만 걷어치우고 해동백화점만 넣으면 되는 건가? 우리 손으로 지을 강남터미널에.
***
같은 시각.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장호건은 신성그룹 본관 대회의실에 계열사 사장단 이하 핵심 임원들을 불러다 놓고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신성그룹도 모르던 일이야. 그딴 쥐꼬리 같은 회사가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어!”
씩씩거리는 와중에도 장호건은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고만고만한 해동건설이 어떻게 성수대교 붕괴를 알아냈단 말인가?
오늘 그 자리를 해동건설이 아닌 신성그룹 계열사가 대신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까지 미치자 장호건은 또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박 사장!”
“예, 회장님!”
이 자리에 박씨 성을 가진 사장은 여러 명이 있었지만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난 건 박병준이었다.
“성수대교, 안 무너질 거라며?”
“그, 그게···.”
쿵!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자 장호건이 책상을 부술 것처럼 내려쳤다.
“이명진이 뿌린 자료 봤어? 봤냐고! 사진 자료만 봐도 무너질 게 뻔히 보였는데 아니라고? 에라이···!”
“···죄송합니다, 회장님.”
장호건이 거친 욕설을 내뱉자 박병준은 흙빛이 된 얼굴을 몇 번이고 조아렸다. 승계 과정에서 자신이 세운 공을 믿고 뻗대온 데다 전번에 한 말이 있기에 어떤 처분을 받을지 눈앞까지 깜깜해지고 있었다.
“이 실장! 지금 물산 해외공사, 어디 어디서 하고 있나?”
해. 외. 공. 사.
박병준의 심장에 한 글자씩 푹푹 박혔다.
장호건이 회장에 취임하고 해외법인을 비롯한 각종 사업 현장으로 좌천된 임원들을 봐왔지만 사장급에서 자신이 첫 빠따를 맞다니! 살면서 겪어왔던 온갖 수모도 지금 이 순간에 비할 수 없었다.
“이집트에서는 고속도로 공사 중이고 파나마에서는 토목공사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량 공사는?”
“파나마 토목공사에 교량 공사도 포함됐습니다, 회장님. 총 공사 기간은 약 3년 정도 걸릴 겁니다.”
파나마. 토목공사. 교량공사. 3년.
그 네 단어가 박병준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지구 반대편으로 유배를 가라는 게 아닌가?
장호건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박병준을 보며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당장 파나마로 가! 복습하고 돌아와!”
앞으로 3년 간 진행될 공사현장에서 썩고 오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
그나마 ‘복습하고 돌아와!’라는 호통이 한 가닥 동아줄처럼 와 닿았기에 박병준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끌다시피 하며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장호건은 경멸과 한심함이 뒤섞인 눈길로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는 문이 닫히자마자 나머지 사장단을 향해 소리쳤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야. 업무 능력 떨어지면 그날부로 책상 비울 각오해!”
“예!”
아니꼽고 더러워도 사장들은 크게 대답했다. 월급통장과 명함, 회사 생활을 하며 모은 비자금이 걸린 일이 아닌가?
장호건은 사장단을 뒤로 한 채 이수한, 정창호와 함께 회장실로 들어갔다.
“이 실장, 이번 일로 해동건설이 얼마나 득을 볼 것 같나?”
“정권 차원에서 관급 공사를 밀어주거나 은행권을 움직여서 금리 혜택을 줄 겁니다. 그리고···.”
이수한은 잠시 말끝을 흐렸지만 장호건의 매서운 눈길을 보고 말을 이었다.
“청와대에서 해동그룹 측에 강남터미널 공사에 입찰해보라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뭐야!?”
“강남터미널이 호남선 전용이라 연고도 있고 대통령이 해동건설이 지금껏 해왔던 공사실적, 재무구조 등을 듣고나서 지시했다고 청와대 경제수석이 고승주 실장에게 전했답니다.”
“이명진 그 자식, 그 영감 닮아서 입 발린 소리를 할 놈이 아닌데··· 이해할 수가 없군.”
장호건은 어느 새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뇌까렸다.
재계 내에서도 꼿꼿해서 부러지지도 않을 거라던 해동그룹.
신성을 비롯한 여타 재벌들이 신군부에게 앞 다투어 알랑거리며 사세를 넓힐 때도 해동그룹은 군바리들이 원하는 만큼만 돈을 던져줬고 시키는 만큼만 회사를 늘렸다.
장사꾼이라기에는 뻣뻣한 집안의 둘째 아들이 어떻게 그런 낯 간지러운 소리를 했는지··· 장호건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렇게 된 이상 장 회장님이나 장 부회장한테···.”
정창호가 조심스럽게 연합전선의 재구축을 제안했지만 장호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형님. 누님하고 호민이 성격, 알잖습니까?”
“흐음···.”
정창호는 장호건의 되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장병호 신성그룹 초대 회장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자 장호건의 첫 비서실장으로서 두 사람의 욕심이 얼마나 큰지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정창호가 입을 열었다.
“해동그룹과 거래하는 건 어떠십니까?”
“거래요?”
“해동백화점, 아무나 가는 싸구려 백화점이라는 인식이 짙습니다. 건축주를 상대로 해동백화점이 입점하는 걸 우리가 도와주고 그쪽에 고려호텔이 재입점하는 걸 도와달라고 하면 서로 괜찮은 거래가 될 것 같습니다만.”
이에 질세라 이수한도 자신의 의견을 내놨다.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우리 쪽 신세기그룹 채권이 4천억인데 만기 연장을 거부하겠다고 하면 장호경 회장님도 포기할 겁니다. 여기에 호텔 면세점 입점도 빼고, 설계 변경으로 생길 인허가 지연까지 처리해주면 저울이 맞을 겁니다.”
두 사람의 제안은 나름의 근거가 있기에 단박에 기각할 일이 아니었다.
허나 그에 숨겨진 전제조건 또한 알기에 장호건은 오랜 침묵 끝에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연이가 성민이와 만나고 있으니 운이라도 떼보라고 말해주십시오. 직접 보고 부탁하기엔 면목이 없습니다, 형님.”
“고려호텔은 장 부장 몫이 아닙니까? 가끔씩은 험한 일도 해봐야 단단하게 여무는 법입니다, 회장님.”
대 신성그룹 회장이 딸을 위해 딸을 팔아가며 사업을 해야 하다니··· 정창호의 위로에도 장호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
얼마 뒤.
“강남터미널 공사 입찰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가격요소와 비가격요소 모두를 검토한 끝에 강남터미널 일괄 시공 사업자는···.”
모두가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중년의 남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해동건설로 선정됐습니다.”
“와아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명진과 임원들은 함성과 함께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태현건설과 대주물산, 세림산업 등 온갖 날고 기는 건설사들을 제치고 따낸 첫 턴키 공사였기에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내 발로 떠났던 우리 가족이 내 덕분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북받치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명진이 엄지를 치켜세우는 모습을 보고 미소를 띠며 웃던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네, 이성민···.”
[나야, 성민아.]
장하연의 목소리가 맞았지만 평소와 달리 그녀의 목소리 톤이 낮았다.
“무슨 일 있어?”
[그게···.]
늘 또렷한 여자가 말끝까지 흐리다니. 혹시···?
“전화로 하지 말고 직접 만나자. 늘 보던 카페, 괜찮지?”
[···응.]
“지금 출발할게. 거기서 봐.”
전화를 끊은 나는 이명진에게 걸어가서 말했다.
“숙부님, 급하게 만날 사람이 있어요.”
“많이 급하냐?”
“네. 그리고··· 설계 바뀐 거 인허가 다시 받으려면 얼마나 걸릴 거 같아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이명진은 내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급행료 찔러주면 2주 안에 통과될 거다.”
“꽤 써야겠죠?”
“시장부터 부시장, 국장까지 전부 먹여야 하니까 10억은 뿌려야겠지. 아버지께서 곳간 풀기로 하셨으니 괜찮아, 흐흐.”
강남터미널 공사단가가 3천억이 훨씬 넘다보니 약 치고 다녀야 할 곳도 어지간히 많았다. 예전의 할아버지라면 언감생심이었는데 금융실명제를 무사히 넘긴 게 큰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숙부님.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한 나는 차를 타고 미사리 카페로 갔다. 안에 들어가니 장하연만 있는 게 내 생각이 점점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많이 기다렸지?”
“아냐. 금방 왔어.”
자리에 앉은 우리는 종업원이 내준 커피를 마셨다.
“목소리 듣고 걱정했어. 괜찮아?”
“그게···.”
커피 잔만 만지며 꼼지락거리던 장하연이 입을 열었다.
“고려호텔, 강남터미널에 재입점하는 것 좀 도와줘.”
역시.
장호건과 신성그룹이 그 알짜배기 땅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럭셔리 호텔로 운영하면 절대 망할 수 없는 곳이 아닌가?
세트로 넣을 시내면세점이나 아케이드에서 사치품을 팔 것까지 생각하면 강남터미널은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다.
“누나?”
알면서도 놀란 체하자 장하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지금 내가 바라보는 장하연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가득했다. 그룹 서열을 떠나서 이런 일로 나를 마주하는 게 부끄러울 터.
더군다나 무일푼이나 다름없던 자신이 백억 단위의 개인재산을 만든 게 나 때문이니 자존심 강한 그녀의 성격상 스스로도 염치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알아. 무리한 부탁인 거. 우리가 파토 낸 곳에 다시 넣어달라고 하는 거니까. 그래서 말인데···.”
장하연은 말끝을 흐리더니 두 손으로 잡은 커피 잔을 홀짝였다.
“우리 쪽에서 고모님 백화점 임대 계약 해지시킬게. 고려호텔 재입점하면 면세점이나 아케이드는 안 넣고 인허가 문제도 우리가 대신 처리해줄게. 어때?”
신세기백화점을 철수시키는 거야 신성그룹에 묶인 신세기그룹 부채의 만기 연장을 거부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면세점과 아케이드 비입점이야 현재의 국내 면세점 시장 규모가 작으니 생색내기 식으로 얹었을 테고.
인허가 문제를 처리해주겠다고 한 건 우리 집안 비자금과 사채자금이 은행에 잠겼을 거라 생각하고 말했겠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서 말씀드려볼게.”
“응···.”
카페를 나온 나는 장하연이 가고 난 뒤에야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망할 인간···.”
장호건을 욕하던 나는 손등의 핏줄이 불거져라 운전대를 쥐었다. 그 대단한 신성그룹 회장이 그렇게 아끼는 딸내미한테 흥정하라고 쥐여 준 게 고작 이 정도라니!
차라리 잘 됐다. 우리 집안이 얼마나 만만했으면 그따위 조건을 던졌을까?
‘이번 기회에 집안 어른들 테이블로 밀어서 신성그룹과 패 돌리게 해볼까? 하연이가 못 준 거, 장호건한테 몇 배로 뜯어내야지. 지금쯤이면 카자흐스탄에서 물밑 작업을 하고 있을 테니 적당하겠군.’
우리 집안 어른들이면 장호건에게서 내가 원하는 걸, 미래의 신성그룹 비자금을 판돈으로 끌어낼 최고의 플레이어들이라 믿었다. 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며 도로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