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7th. 3억 불짜리 과제 (1)
“삼촌.”
“왜?”
볼 일을 모두 마치고 뉴욕 행 밤비행기를 타고 가던 나는 선해철에게 궁금한 게 있었다.
“거기서 인터넷 사업이 땅따먹기라고 한 거, 무슨 뜻이에요?”
“어렴풋이는 알겠는데 뭔가 흐릿하더군요, 형님.”
기내 바에 줄지어 앉아있는 우리 둘의 질문에 그가 피식 웃었다.
“봐봐, 인터넷에 사람들이 몰려들면 그 자체가 광고판이 되겠지? 사람이 많이 오갈수록 광고판 값이 올라갈 거 아냐?”
역시!
선해철이 모를 리가 없었다. 트라이엄프 캐피털에서 인정받는 펀드매니저답게 인터넷 포털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었다.
“아!”
“그러겠네요, 하하.”
우리 둘의 반응에 그가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스트레이트 잔에 담긴 위스키를 단숨에 비웠다.
“회사 키우는 건 두 친구한테 맡기고 딱 36퍼센트만 지키자. 농사는 농사꾼이 지어야지?”
삼촌 말대로 농사는 두 사람이 알아서 잘 지을 것이다. 우린 그저 야후가 넓고 비옥한 평야가 되어 황금빛으로 물들 때까지 살림만 챙겨주며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5년만 기다리자. 5년만.
***
뉴욕에 돌아온 우리는 클레어에게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인터넷 포털이요?”
“잡스하고 미팅 끝내고 이 녀석이 가고 싶다고 해서 스탠퍼드에 갔는데 재수 좋게 얻어걸렸어.”
선해철이 내민 계약서를 보고 클레어가 휘파람을 불었다.
“싸게 먹혔네요. 픽사에 올인할 줄 알았는데.”
“픽사에 너무 많이 묶여서 아쉽긴 한데 샌프란시스코 안 갔으면 야후 투자도 못했으니 세트로 묶어서 생각하자고. 그렇지?”
내 어깨에 손을 얹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닭 잡다가 꿩도 잡았으니 만족해야죠.”
기간 대비 수익률만 따지면 야후가 압도적이겠지만 내 인생을 생각하면 픽사 투자도 필요했다. 돈과 빅 픽처 모두를 성공시킨 샌프란시스코 출장은 계획된 일타쌍피였다.
여독을 푼 다음 날부터는 그룹 관련 사업 공부와 투자 공부에 몰두했다. 스탠더드 캐피털도 추가 자금이 들어오기 전까지 개점휴업이라서 클레어를 비롯한 직원들은 내가 부탁한 자료들을 모아주고 있었다.
“조니, 광산, 유전, 가스전에 왜 그렇게 매달리는 거야?”
“우리 집안 숙원사업이거든요.”
“숙원사업?”
“자원보국(資源報國). 증조부님이 회사 세울 때 세운 미션이에요.”
“···자원을 개발해서 나라에 보답한다는 거야?”
클레어라는 여자, 한국어 실력이 원어민보다 더했다. 한자어까지 척척 해석하다니.
“네. 우리나라는 천연자원이 빈곤하거든요. 어디서든, 뭐든 쓸 만한 자원으로 개발해야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요.”
“사람이나 기술은 해결이 되겠고 문제는 원자재겠네?”
“그렇죠. 해외 원자재에 투자하면 벌이도 좋지만 원자재 수입에 쓸 달러를 회수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 원자재를 채취할 시설 공사도 우리나라 기업이 하면 더 좋고요.”
죽음의 강을 거슬러 올라온 나에게는 아주 당연한 사업모델이었지만 클레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건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이 짜야하는 건데··· 왜 그러는 거야?”
“대한민국,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거든요. 점차 나아지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안 나서니 2류라도 우리 집안이 나서야죠. 뜻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나를 바라보는 클레어의 눈빛에서 측은함과 대견함이 느껴졌다. 부자라도 작은 나라 출신인 내가 생각하는 게 남달라 보이는 건가? 그래도 동정은 사절이었기에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게 안 봐도 돼요. 결국엔 우리가족, 우리그룹 잘 되자고 하는 거니까요. 유통이나 부동산도 그래서 공부하는 거고요.”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빙긋 웃는 나와 달리 클레어의 눈에서 쓸쓸함이 느껴졌다.
“무슨 일 있어요?”
“부러워서. 난 아버지하고 어머니 사이에서 붕 떠 있거든.”
씁쓸해하던 그녀는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우리 어머니는 서부에서 대학생들 가르치고 계셔. 아버지는 뉴욕에서 사업을 하고 계시고. 두 분 중 한 분하고도 같이 못 사니 붕 떠 있는 거지.”
부모가 없는 나나 부모가 살아있어도 함께 살지 못하는 클레어나 끼리끼리 만난 것 같았다.
“힘내요, 클레어.”
“그런데··· 넌 안 궁금해?”
“뭐가요?”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말이야.”
“그런 건 상관없어요.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함께 일하고 있잖아요.”
선해철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기에 지금은 그냥 묻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리 사이에 믿음이 다져질 때면 언젠간 들을 수 있겠지. 내가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
매일처럼 사무실에 나와 공부를 하다 보니 귀국 날이 되었다.
“또 봐요, 클레어.”
“언제든 환영할게.”
JFK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은 나는 클레어와 가볍게 포옹을 한 채 볼을 대고 가벼운 키스를 한걸 끝으로 박태진, 선해철과 함께 비행기에 탑승했다.
“너나 회장님이나 참 독해. 설 앞두고 전화한 너나, 배울 만큼 배우고 오라신 회장님이나 참···.”
선해철은 뉴욕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하는 법이다, 이놈아! 할애비가 했던 말, 콧구멍으로 들었느냐? 밥값은 하고 와야지!]
혹시나 해서 설을 앞두고 할아버지께 전화를 넣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였다. 그 따끔한 꾸짖음 덕분에 할아버지가 내게 뭘 바라는지 새삼 되새길 수 있었다.
“할아버지도 산전수전 다 겪으셨잖아요.”
“그러긴 하지.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애들이 네 칭찬 많이 하더라. 지켜볼 만하겠다고.”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같이 가야 하는데.”
올해까지 합하면 아시아 금융위기까지 앞으로 4년.
계절이 돌아오는 것처럼 터질 대환란 속에서 이기려면 날 백업해야 할 외인부대인 그들의 절대 신뢰를 얻어야 한다. 아직은 멀었지만 미국 증권사 리포트나 별도로 수집한 정보들을 공부한 것 덕분에 내 평가가 높아졌다니 다행스러웠다.
“처음에 싸웠던 건 신경 쓰지 마. 5천만 불 들어오면 괜찮을 거다.”
“네, 삼촌.”
그들은 내가 두 회사에 3천만 달러를 배팅한 걸 아쉬워하면서도 향후 들어올 5천만 달러를 어떻게 굴려야 잘 불릴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내년 말만 되면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질 터. 올해부터는 한국과 미국에서 새로운 사업들을 추진할 생각이었다.
“도련님, 들어가시는 대로 회장님 봬야 하는 건 기억하고 계시죠?”
“설 때 미국에 남은 게 그 조건이니까요. 그래서 이것저것 샀잖아요, 흐흐.”
박태진의 말대로 돌아가는 대로 하루 정도 숨을 돌리고 나면 바로 삼청동에 들어가야 했다. 설 때 전화로 문안 인사를 올렸을 때 받은 숙제 때문이었다.
“회장님께서 관심을 보여주시니 다행입니다, 하하.”
“그러게요.”
할아버지는 겨울방학 내내 내가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일하면서 얼마나 배우고, 얼마나 느꼈는지 궁금하신 것 같았다. 가서 보따리 풀어놓으면 만족하실까나?
***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돌아온 우리는 하루 동안 여독을 푼 뒤, 아침부터 삼청동 서재에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회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할아버지.”
“너희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허허.”
설 때 못한 새해 인사를 주고받은 우리는 소파에 앉았다.
“어디··· 미국에서 공부한 것부터 줘 보거라.”
박태진은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있던 007 가방에서 서류 봉투 두 개를 꺼내 나에게 넘겨줬다.
난 그대로 할아버지와 고승주에게 한 개씩 공손히 건넸고, 두 사람 모두 날카로운 눈매로 서류를 살펴봤다.
“호오··· 기본은 갖췄구먼.”
“그런 것 같습니다, 회장님.”
“성민이 이 녀석, 매일 같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증권시장과 기업 분석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오기 전에 미리 입을 맞춘 선해철의 설명에 서류를 보던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위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것 같으이. 이놈이 미국서 헛짓거리는 안 한 것 같구먼.”
한동안 미국에서 공부한 내용들을 물어보고 답을 들은 할아버지는 서류를 덮었다.
“이 정도면 미국서 머문 보람이 있구나. 스탠더드 캐피털이라고 했나?”
“네, 회장님. 트라이엄프 캐피털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독립해서 세웠는데 투기가 아니라 투자를 하는 녀석들이라 인턴 자리를 소개시켜줬습니다.”
할아버지는 선해철의 설명을 듣고 턱을 쓰다듬었다.
“이름 하나는 거창하구먼. 전 세계 금융가에 파이프 꽂고 기름 대신 돈을 빨아들일 셈인가? 으허허.”
할아버지의 질문에 뜨끔했지만 이미 각오했던 일이기에 웃음으로 놀람을 가렸다.
“그런 것 같아요, 할아버지. 실력 좋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손님들이 많더라고요, 하하.”
“내 대신 널 가르치느라 고생이 컸겠구나. 수업료라도 두둑이 챙겨줘야겠어, 허허.”
할아버지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더미를 손바닥으로 턱턱 두들기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선해철도 할아버지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고생이랄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회장님.”
“그러고 보니 선 대표, 성민이가 자네 회사에 맡긴 돈은 어찌됐나?”
“트라이엄프 캐피털에 맡겼습니다.”
“전에 했던 말과 다르구먼.”
“요즘 수익률이 좋은 펀드가 있어서 성민이 승낙을 받고 처리했습니다, 회장님. 더 이상은 성민이와의 약속 때문에 공개할 수 없습니다, 하하.”
거짓말이 천직인지 선해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와 미리 맞춘 거짓말을 늘어놨다.
“알겠네. 자네 하는 일은 신용이 생명이니 조카 같은 놈이라도 그리해야겠지. 내가 자네 가르칠 때도 신용을 목숨처럼 여기라 했으니 어쩌겠나, 으허허.”
껄껄 웃던 할아버지는 책상 위에 놓은 파일들 중 가장 위에 놓인 걸 집어 들었다. 그 파일은 내가 구성한 투자종목 파일이었다.
“이 펀드, 스탠더드 캐피털이라는 데서 만든 거라고?”
“예, 회장님.”
“정보통신 쪽에 집중된 게 신선하군. 다른 종목들도 제법 있긴 한데··· 젊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보는 눈이 다르구먼.”
선해철을 보며 소감을 말하는 할아버지, 그 포트폴리오를 만든 게 나라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3,4년만 있으면 서너 배는 가볍게 넘을 주식들인데.
“클린턴 행정부가 밀어주고 있어서 그럴 겁니다. 이미 자리 잡은 곳도 포함됐으니 기본 구성은 좋습니다, 회장님.”
“해철이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유통이나 소비재 등의 경기방어주들도 적절히 들어있으니 큰일이 없는 한 경기변동에 상관없이 꾸준한 수익이 보장될 것 같습니다.”
고승주 또한 할아버지가 받은 파일의 사본을 받아서 살펴보고는 금세 견적을 뽑아냈다.
“자네까지 그런다면야··· 고 실장.”
“네, 회장님.”
할아버지는 자신의 부름에 답한 고승주에게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다.
“우리 비자금 중 3억 달러를 그 회사에 투자하는 건 어떻겠나?”
그 말을 들은 우리 모두 눈이 커졌다.
“회, 회장님?”
고승주가 깜짝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으며 소리쳤다. 그룹 비자금과 사채조직의 자금까지 관리하고 있으니 수천억을 투자하겠다는 오너의 제안에 놀라지 않을 수가 있나.
“이 이대수 장손이 처음으로 일을 배운 곳이네. 그 정도는 투자해야 우리 장손도 그 회사와 연이 이어질 것 같고, 내 면도 설 것 같구먼.”
별 거 아니라는 듯 웃는 할아버지와 달리 나는 입 밖으로 흐르려는 침을 목구멍으로 삼키느라 정신이 없었고 박태진과 선해철은 상기된 얼굴을 식히려 애쓰고 있었다.
달콤한 고민이었다.
할아버지 돈을 받으면 펀드 운영 내역을 공개해야 할 수도 있고 투자자 내역, 다시 말해 내 돈이 들어있다는 것까지 공개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너무 탐났다. 대한이동통신으로 수익을 남겼어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 31만 주나 되는 주식으로 묶어놨으니 내 개인 유동자산은 사실상 빵 원이 아닌가?
지금은 똥구멍으로 삐져나오고 목구멍이 넘치더라도 먹고, 또 먹어서 소화시켜야 한다. 결승점까지 폼이 안 떨어지려면 1칼로리라도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여전히 고승주가 3억 달러나 되는 돈을 신생투자회사에 맡기려는지 의아해하는 가운데 할아버지가 그를 보며 말했다.
“앞으로 우리 해동이 해외에서 판 돌리려면 꼬리표 없는 돈이 많이 필요할 게 아닌가?”
“회장님?”
고승주가 반색하자 할아버지가 그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하는 놈들 치고 돈 필요 없는 놈들은 없어. 외국이라고 다를 거 없으니 준비해둬야지, 흐흐.”
정치와 돈은 불가분의 것들. 할아버지는 날 위한 수업료를 주면서도 해동그룹의 해외사업에 필요한 로비자금 마련하는 일까지 해결하려는 것 같았다.
다른 사업도 마찬가지지만 해외 자원개발은 정치꾼들이 뻑하면 국유화네 뭐네 하며 흔들어대기 쉬운 사업 아닌가? 지역을 떠나 로비가 필수이니 현명한 판단이었다.
선해철은 할아버지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투자 제안은 전해두겠습니다, 회장님. 그렇지만 미국에 있는 회사라서 직접 투자하시는 건 어려운데 어찌···.”
“어쩌긴? 자네 회사 거쳐서 투자할 수밖에. 언제든 찾아 쓸 수 있게만 해주면 수익은 매년 원금의 5퍼센트만 받겠다고 전해주게. 마이너스가 나면 당연히 안 받을 거고.”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툭 던진 할아버지의 제안에 선해철이 흠칫했다.
“예?”
“예전에도 몇 번 해봤잖나? 이리 쪼개고 저리 합쳐서 돌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예전에도 몇 번 해봤다고?
우리 그룹 비자금을 해외로 빼돌려 준 게 아닌가 의문을 품은 채 할아버지와 선해철을 번갈아보던 내게 고승주가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될 거다, 성민아. 지금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겨둬, 하하.”
넘어가야겠다. 지나친 호기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니까.
지금은 3억 달러로 뭘 할지 생각해보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대신, 조건이 있다.”
어쩐지 너무 쉽다 싶었다. 삼청동 짠돌이 영감님께서 그런 거액을 아무 조건도 없이 맡길 리가.
“네, 할아버지. 말씀하세요.”
“네가 지난여름에 말했던 건이다.”
지난여름에 말했던 거면··· 설마?
표정을 바꾸자 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3억 불, 이 할애비한테 강남 터미널 공사 물어다주면 시원하게 쏴주마.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