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6th. California Dreamin′ (3)
“성민아, 너 지금 소풍 가냐? 서부가 동부보다 따뜻해도 아직 1월이야. 이 날씨에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가는 거냐?”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도련님. 지금 날씨에 피크닉 하실 건 아니시겠죠?”
“입 돌아갈 텐데 왜 밖에서 먹어요?”
호텔 뷔페에서 가볍게 아침식사를 마친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스탠퍼드 대학 근처의 한 식당에서 포장한 음식을 싸들고 캠퍼스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럼? 어디서 먹으려고?”
“곧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같이 먹으면서 얘기하면 좋지 않을까요?”
내 말을 들은 선해철이 동그랗게 만든 입으로 탄성을 냈다.
“호오··· 괜찮겠네.”
“좋겠네요. 식사를 하면서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면 부드럽게 풀리는 게 있으니까요. 학생들한테 부담스럽지도 않고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서야 선해철과 박태진도 표정을 고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쵸? 그리고 미국에 왔는데 가장 미국적인 음식을 먹어야죠, 흐흐.”
20여 분 정도 지나서 나온 음식을 차에 실은 우리는 곧바로 스탠퍼드 대학 전자공학과가 있는 건물로 향했다. 때마침 시간도 점심이니 대학생들답게 슬슬 점심거리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실례합니다.”
“네. 무슨 일로 오셨죠?”
“스탠더드 캐피털의 존 데이비슨 리입니다. 유망한 사업아이템을 가진 분들하고 밥 한 끼 같이 하려고 왔습니다.”
명함을 넘겨준 뒤 바닥에 내려놓은 커다란 비닐봉투를 높이 들어서 보여주자 여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찾아오셨네요. 저희 대학만큼 아웃풋이 좋은 곳도 없답니다.”
“그래서 그런데··· 대학원에서 인터넷 연구하는 분들이 있나요?”
대놓고 이름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아직 기업을 차린 것도 아니고 연구단계에 있는 사람들. 콕 찍어서 알려달라고 하면 선해철과 박태진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수 있었다.
“잠시만요.”
서류를 뒤적거리던 여직원이 뭔가 발견한 듯 종이를 넘기는 걸 멈추더니 내게 보여줬다.
“이쪽이 인터넷 연구하는 대학원생 리스트예요.”
“감사합니다. 형, 잠깐만 들어줘요.”
봉투를 박태진에게 넘겨준 뒤 손가락으로 천천히 종이를 쓸어내렸다. 쭉 내려가던 손가락을 ‘J’로 시작되는 이름에서 멈추고 그가 있는 연구실 위치를 확인했다.
“감사합니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한국 특유의 인사에 여직원이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
꼬르륵.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데이비드, 뭐 먹을래?”
컴퓨터 자판에서 손을 떼고 배를 쓰다듬던 그가 등 뒤에 앉아있던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특이하게도 이 남자는 아시아인, 그것도 중국계로 보였다.
“시간도 없는데 피자나 먹을까, 제리? 홈페이지 다듬으려면 시간 아껴야지.”
“오케이. 콤비네이션 한 판 시키면 되지?”
똑똑.
제리가 수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누르려던 찰나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가 문을 열었다.
“누구시···?”
누군지 확인하려던 그가 말을 멈췄다. 문을 열자마자 눈높이에 맞춰 커다란 비닐봉투가 보이고 그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었다.
봉투를 높게 든 남자가 손을 내리더니 씩 웃고 있었다.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를 만나러 왔습니다. 계십니까?”
“제가 제리 양입니다만···.”
얼떨떨한 제리와 달리 그와 마주보고 있는 남자는 징긋 웃으며 마주보고 있었다.
“피자 어때요? 점심 안 드셨으면 같이 먹을까 하는데.”
***
연구실에 들어간 우리는 제리 양, 그리고 그의 친구인 데이비드 필로와 함께 가져온 음식들을 먹었다. 체격 좋은 남자 다섯이 달려든 바람에 피자 두 판과 사이드 메뉴가 모두 사라지는 데까지는 불과 20분도 안 걸렸다.
“후우, 잘 먹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피자를 먹으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좋았네요.”
“미국에 왔는데 미국 피자를 안 먹고 가면 너무 서운할 것 같더군요. 그리고 입가심은 역시 코카콜라 아니겠어요?”
“둘 다 가장 미국적인 음식이니까요, 하하.”
내 기억으로는 두 사람을 찾아왔던 남자도 투자협상을 할 때 피자와 콜라를 마시며 분위기를 풀었다. 대번에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대접하면 자기들 몸값이 높은 줄 알고 협상이 까다로워질 수 있으니 현명한 판단이었다.
“사실, 당신들을 만나러 온 건 피자만 먹자고 온 게 아니에요.”
“아! ···무슨 일로 오셨죠?”
입가심으로 코카콜라를 마시던 나는 내 말을 듣고서야 내가 온 이유를 묻는 제리 양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둔탱이들!
“인터넷에 대해 얘기하러 왔어요. 사무실에 가서 물어보니 여러분을 알려주더군요. 가장 비전이 있다면서요.”
거짓말이긴 해도 아무렴 어떤가. 결과만 좋으면 에브리바디 해핀데.
그러는 사이에 과에서 추천을 받아서 왔다는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의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인터넷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네요?”
“당연하죠. 정보의 바다를 누비는 것만큼 멋진 일이 또 있을까요?”
“맞아요. 지금은 인프라가 열악해서 검색속도가 느리지만 나중에는 인터넷이 없으면 안 되는 세상이 올 겁니다.”
“제리 말이 맞아요.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찾아주는 인터넷은 세상을 빠르게 바꿀 겁니다.”
두 사람이 사뭇 비장한 얼굴로 말하는 것 때문에 내색은 안 해도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길거리에서도 인터넷을 하지 않을까요?”
무심결에 툭 던지듯 말하자 두 사람이 놀랐다.
“길거리에서 인터넷이요?”
“···유비쿼터스?”
“뭘 그렇게 놀라죠? 지금보다 기술이 발전하면 핸드폰으로도 인터넷 쓸 거 같은데.”
태연한 나와 달리 제리 양은 고개를 저었다.
“농담 말아요, 조니. 그러려면 기술이 얼마나 더 발전해야 하는데요?”
“제리 말이 맞아요. 시간도 시간이지만 돈도 엄청 깨질 텐데 가능하겠어요?”
두 사람은 모르겠지만 뉴 밀레니엄을 앞두고 IT기업들이 빨아들일 막대한 돈, 투기꾼들이 대줄 돈이 기술혁신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월드컴처럼 회계장부를 조작하다 망할 회사들도 있지만 세계를 약탈해 주머니가 터질 월가와 경제를 키워야하는 미국 정부가 푸짐한 잔칫상을 차려줄 테니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그럴 거예요. 우리가 백발이 될 즈음에나 가능하겠지만요, 하하.”
백발은 얼어 죽을. 흰머리가 듬성듬성 날 때면 스마트폰이 완성될 것이다.
겉과 속이 달라도 어쩌겠는가? 내게 유리한 만큼만 미래를 바꿔야 하니 이 정도만 흘려야지.
***
그밖에도 사물 인터넷 같은 미래의 정보화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뜬구름 잡듯 그들과 가볍게 주고받은 나는 박태진과 선해철에게 거의 미친놈 보는듯한 시선을 받았다.
상관없다. 앞으로 두 바퀴만 기다리면 실현될 일이고 지금 이 자리는 IT 유망주들과 통해야 투자가 성사될 자리다.
IT 꿈나무인 이들과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투자가 성사될 테니 그 정도 시선은 감수해야 했다.
이만하면 충분하니 그들에게 이 두 사람이 단순한 대학원생이 아니라 싹수가 파릇파릇한 떡잎이라는 걸 보여줘야겠다.
“혹시, 직접 만든 홈페이지도 있어요?”
내가 기억하는 야후는 이즈음에 시작된 걸로 알고 있다. 대충 전화번호부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과연···.
“저희가 만든 홈페이지가 있긴 합니다만··· 한 번 보겠습니까?”
“Jerry and David's Guide to the World Wide Web···.”
제리가 보여준 화면을 보고 홈페이지 이름을 읽던 나는 터져 나오려는 함성을 참으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1994년 1월에 만들어졌다는 것만 알았지 자세한 날짜는 몰랐는데 운이 아주 좋았다.
“지금은 등록된 사이트나 자료가 적은데 여기에 원하는 정보를 키보드로 입력하고 엔터 버튼을 누르면 가장 근접한 정보를 찾을 수 있어요. 이렇게요.”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검색 키워드를 입력한 제리 양이 엔터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바뀌면서 검색결과가 나왔다.
“오오! 대단한데?”
그걸 본 선해철은 박수까지 치면서 환호했고···.
“놀랍군요. 국내 PC통신보다 훨씬 빠르고 깔끔합니다.”
박태진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호평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죽은 2020년에 비하면 조악한 수준이고, 만들어진지 1개월 남짓한 프로토타입이지만 국내에서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각종 PC통신에 비하면 매우 혁신적이었다.
“삼촌, 형.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당연히 투자해야지! 어떠냐, 태진아?”
잔뜩 들뜬 선해철과 달리 박태진은 뭔가 마뜩찮다는 표정이었다.
“투자, 해야죠. 그런데··· 이걸로 어떻게 수익을 낼지 모르겠습니다.”
“태진아, 이럴 땐 눈 딱 감고 투자하는 거야. 픽사는 몰라도 인터넷은 무조건 뜬다. 정보 검색이 활발해지면 수익은 자연히 나오게 돼 있어. 땅따먹기랑 똑같다고. 안 그럽니까?”
선해철이 제리와 데이비드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하자 두 사람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요! 일단은 규모를 키우는 게 우선입니다. 그렇지, 데이비드?”
“말이라고? 자료만 쌓이고 접속자 늘어나면 대박 날걸?”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니 제법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잠시 팔짱을 끼고 머릴 숙였던 박태진이 일으켜 세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형님. 투자는 얼마나 할까요?”
“조니한테 물어보자. 얼마 투자하고 싶어?”
“남은 돈이 천만 달러니까··· 올인. 어때요?”
제리와 데이비드가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조, 조니!”
“그, 그건 너무···.”
당황한 그들과 달리 난 두 사람의 이름을 차분하게 불렀다.
“제리, 데이비드.”
““네, 조니.””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두 사람이 날 바라봤다.
“무서워요?”
“솔직히 걱정됩니다. 우리 홈페이지를 뺏길지도 모르니까요.”
“맞아요. 투자는 고마운데 제리 말대로 두렵네요.”
그들의 고백을 들은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당신들이 있어야 야후가 클 텐데 왜 당신들을 쫓아내겠수?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나는 차분하게 한 마디 던졌다.
“당신들 꿈, 오백만 달러뿐이에요?”
“조니?”
“날 이용해서 몸값을 높여요. 당신들 꿈의 가치를 키우라고요. 실리콘밸리면 세콰이어 캐피털도 있을 거 아녜요?”
미래를 알기에 더 다그치듯 말하자 그들의 눈이 커졌다.
“세콰이어 캐피털이요?”
“거긴······.”
놀랐을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역사와 함께 하며 성장한 세콰이어 캐피털.
지금의 스탠더드 캐피털에 비하면 이름값이든 규모든 앞서면 앞섰지 절대 뒤처지지 않는 곳이 아닌가?
“거기 펀딩은 생각 안 했어요? 그렇다면 좀 실망인데?”
그에 비하면 스탠더드 캐피털은 이제야 간판을 단 신생 투자회사. 우리 말고도 그들의 투자를 받아야 입소문을 타서 몸값도 오르고 추가 펀딩에 여유가 생기고 몸값이 오를 것이다.
그들의 투지에 불을 붙여야 한다. 이들이 겨우 오백만 불에 안주하면 야후 코인은 안 터질 테니까.
***
“1차에 4백만 달러, 2차와 3차에 3백만 달러씩 들어갈 겁니다. 스탠더드 캐피털의 지분 36퍼센트 의결권은 두 분께 반씩 위임하고, 향후 추가 투자로 현재 지분을 유지할 권리를 부여받습니다. 대신에 주기적으로 회계감사를 할 거고요. 이의 없죠?”
“네.”
그 자리에서 깨끗한 A4용지를 받은 선해철은 곧바로 약식 계약서를 작성한 뒤, 두 사람의 사인을 받았다.
주식의 최고 가치는 의결권이다. 이 계약의 핵심은 기업 규모가 커질 때까지 내 의결권을 두 사람에게 나눠주면서 경영권 방어를 돕는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새로 꾸며서 다시 방문할 테니까 학교 법률상담소나 다른 로펌에 확인 해봐요.”
어떤 곳에 가서 물어봐도 이렇게 후한 계약은 없을 것이다. 지분율이 흠이 될 수 있지만 걸음마 단계인 홈페이지 하나에 1천만 달러를 배팅하고 의결권까지 나눠주겠다는 미친놈은 지금 이 지구상에 나와 스탠더드 캐피털뿐이니까.
사인을 마친 두 사람은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인터넷 전화번호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홈페이지 하나로 1천만 달러를 투자받은 게 묘했는지 입꼬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리, 데이비드. 회사 이름, 생각해봤어요?”
“아··· 그게······.”
“이걸로 회사를 세울 생각은 아직 안 해봐서···.”
내 질문에 두 사람이 머뭇거리는 걸 보니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야후!’ 어때요?”
“‘야후!’요?”
두 사람이 어리둥절한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본인들이 지은 이름이라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았기에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걸리버 여행기’에 ‘야후’라는 동물 나오잖아요?”
“말처럼 생겼는데 사람처럼 말하는 동물이요?”
제리 양의 대답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은 그 동물처럼 특별한 홈페이지를 만들었어요. 그러니 이름도 특별해야죠?”
“야후, 야후···. 좋은 이름이네요.”
“나도 오케이. 경쾌한 게 괜찮은데?”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도 찬성했으니 모든 게 준비됐다.
‘야후!’, 얼마나 화려한 꽃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