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6th. California Dreamin′ (2)
“조, 조니?”
“도, 도련님?”
선해철과 박태진은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2천 5백만 달러면 스탠더드 캐피털에 들어있는 내 돈의 3분의 2가 넘는 돈이 아닌가?
차분하게 눈매를 가다듬은 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저한테 맡겨주세요. 둘이서만 얘기했으면 하는데··· 어때요, 잡스?”
“···그럽시다. 미스터 썬, 미안하지만 잠시 비켜주시죠.”
선해철은 잡스의 청을 받은 뒤 박태진에게 고갯짓을 하고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미안합니다, 조니. 당신이 이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 내가 당신 집 앞까지 갔을 겁니다, 하하.”
“지금이라도 고치면 됩니다, 잡스. 사람은 학습의 동물 아닙니까? 오늘 당신과 만나길 청한 건 당신이 꿈꾸는 미래를 함께 하고 싶어서입니다.”
지금부터는 분위기를 풀어나갈 차례다. 소낙비가 내린 뒤에 해가 뜨고 땅이 굳는 것처럼.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잡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입니까, 조니?”
“당신은 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해왔습니다. 최초의 PC를 만들고 마우스의 가치도 알아봤죠. 그런 당신이 꿈꾸는 미래라면 내 미래도 걸어볼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말끝을 흐리던 나는 마이클 콜레오네처럼 두 손을 맞붙이고 말했다.
“복수하고 싶지 않나요? 제프리 카젠버그 때문에 당신 계획이 망가졌잖아요. 픽사 매각을 고민하게 만들었고요.”
“그, 그걸 어떻게?”
잡스가 화들짝 놀랐지만 아직 일렀다.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래리나 폴, 조지한테 팔려고 했을 거 아니에요, 스티브.”
세 사람의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오자 잡스의 눈이 커지면서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픽사는 원 소유주였던 조지 루카스가 이혼 위자료 때문에 잡스에게 판 회사.
지금의 잡스는 픽사를 돈 먹는 하마 취급하며 오라클의 오너인 래리 앨리슨,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자인 폴 앨런, 심지어 전 주인인 조지 루카스에게 되파는 것까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끙끙거리던 자신의 고민을 술술 내뱉어서인지 잡스는 마른침을 삼키고 날 노려봤다.
“동양의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가?”
“나나 스탠더드,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승자의 미소를 띤 채 대답하자 잡스가 표정을 고치고 날 뚫어지게 바라봤다.
“당신 말이 맞아, 조니. 아··· 기왕 이렇게 된 거 편하게 하자고. 괜찮지?”
“바라던 바예요, 스티브.”
고개를 끄덕인 잡스가 검지와 중지만 펼친 손을 번쩍 들어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주스 두 잔. 늘 마시는 걸로.”
누가 애플 안 세웠다고 할까봐 잡스의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가져온 건 사과주스 두 잔이었다.
“여기 사과주스 맛이 괜찮아. 마셔봐.”
“그러죠.”
잡스는 사과주스를 반이나 비우고 침음성을 흘렸다.
“크으··· 어떻게 훤히 꿰뚫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정도면 픽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알겠군.”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입만 아플 것 같은데.”
어깨를 으쓱하며 되묻고 미소까지 더하자 잡스가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제프리 때문에 헛짓거릴 했어. 예산이 오버됐는데도 계약서 때문에 추가비용을 못 받아, 제길.”
역시.
일그러진 잡스의 얼굴이 이해됐다. 시키는 대로 고쳤는데 맘에 안 든다고 캔슬 내고는 제작비도 못 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이가 갈렸을까.
“그렇다고 외부 투자도 마땅치 않아. 인수비용에 운영자금까지 5천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앞이 안 보이네. 부끄럽지만 네 말대로 재매각도 고민했어.”
인상을 쓴 채 이마를 문지르며 속내를 털어놓는 게 내가 아는 잡스가 맞나 싶었다. 얼마나 막장까지 몰렸으면 이 지경이 됐을까?
조금은 안쓰러워서 위로를 건넸다.
“지나간 일에 마음 쓰지 말아요, 스티브. 지금부터 잘 하면 되잖아요?”
“지금이라도 잘 해봐야지. 사람들은 모를 거야. 토이스토리의 가치를.”
쓴웃음을 지은 잡스가 주스를 들이켰고, 토이스토리 얘기가 나와서 준비했던 자료를 토대로 맞장구쳤다.
“멋진 일이죠. 붓질이 아니라 컴퓨터로 만화영화를 만들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바로 그거야! 보다 입체감 있는, 살아있는 세계! 얼마나 매력적인지 아무도 몰라. 스크린에 걸리기만 하면 다들 깜짝 놀랄 걸? 하하하하!”
“아하하하···.”
잡스가 얼굴에 화색이 돈 채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니 영혼 없는 웃음만 나왔다. 자기 관심사라지만 살짝 추켜 세워줬다고 들뜨다니···.
한참동안 들떠서 토이스토리 제작 과정과 내용을 알려주던 잡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우린 지금 투자 때문에 만났는데 민망하군.”
잡스를 보니 장호건이 떠올랐다. 뭐 하나에 꽂히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경주마 같지 않은가?
반도체에 모든 걸 걸었던 장호건도 드림웍스 투자를 위해 만난 스필버그에게 반도체만 수십 번을 말하다가 협상을 말아먹었다. 내가 아는 내에서 두 남자는 지독한 경주마였다.
“괜찮아요, 스티브. 난 그런 당신의 열정이 좋습니다.”
손을 내저으며 미소를 띠자 잡스가 빙긋 웃었다.
“서론은 이쯤에서 접고··· 2천 5백만 달러, 사실이야?”
“네. 전 투자 가지고 헛소리 안 해요. 맘에 안 들어요?”
맘에 안 들 수 없을 것이다. 디즈니에서 건네준 제작비보다 8백만 달러나 많고 잡스가 지금껏 픽사에 투자한 돈의 절반이 아닌가?
“지, 지금··· 제정신이지, 조니?”
“아주 말짱해요, 스티브.”
“하, 하, 이거 참···.”
말까지 더듬던 잡스는 믿기지 않았는지 헛웃음소리만 흘렸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는 만세삼창을 수백 번이나 하고 있었다.
내년 말까지만 눈 딱 감고 기다리면 잡스는 할리우드의 유명인사가 되고 픽사의 성공과 넥스트스텝을 바탕으로 자신의 우주인 애플에 복귀, 아이맥 G3로 애플을 부활시킨다.
그 타이밍에 맞춰 애플에 발을 담그려면 지금부터라도 잡스의 친구가 되어야한다.
“스티브, 미친놈과 선구자는 종이 한 장 차이랬어요.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난 당신을 선구자로 만드는 한 장의 종이가 되고 싶어요.”
말하는 나조차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소리였지만 내 존재를 새겨놓기 위해 꾹 참고 말했다.
“종이 한 장 치고는 꽤 큰데? 자네 나이엔 말이야.”
“나이는 숫자일 뿐이에요, 스티브. 기회가 되고 능력이 받쳐주는 한 얼마든지 당신의 종이가 되어주죠. 친구가 되면 더 좋고요. 어때요?”
“친구?”
“친구가 되면 난 당신과 늘 필요한 것 이상으로 주고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야 더 오래 가지 않을까요?”
한쪽은 주고 한쪽은 받기만 하는 관계는 오래 갈 수 없다.
주기만 하는 쪽도 언젠가는 한계를 못 견뎌 터지는 게 다반사고 주는 쪽이 불만을 안 품어도 받는 쪽이 철면피가 아닌 이상 부채의식은 자격지심으로 곪아터진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 이상으로 주는 관계가 되어야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다.
잡스와 나 사이에서 먼저 주는 건 항상 나일 것이다.
괴팍한 고집쟁이 통제광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물건을 기획한 시대의 아이콘 잡스에게서 주는 것 이상으로 뜯어낼 테니까. 그가 떠난 뒤에도 쭉.
“좋아. 그런 친구라면 앞으로 잘해보자고. 그런데···.”
잠시 고민하던 잡스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끝을 흐리면서 내 눈치를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2천 5백만이면 내 지분을 사겠다는 거야? 아니면···?”
“유상증자.”
대답을 들은 잡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지? 내 지분 절반을 살 돈인데 더 적은 지분을 가져가겠다니?”
“난 당신 미래를 도둑질하려는 게 아닙니다, 스티브. 당신과 친구가 되려고 왔으니 신주를 당연히 인수해야죠. 토이스토리가 스크린에 걸리는 것도 보고 싶고요.”
욕심 같아서는 반절을 뚝 잘라 갖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자존심도 고집도 센 통제광 스티브 잡스를 친구로 만들려면 난 항상 네 편이라는 제스처를 보여야 하니까.
“얼마나 받고 싶은지 말해봐.”
“아뇨. 당신이 말하세요. 당신의 친구로서 내가 얼마나 갖고 있으면 좋을지.”
아무리 자기만 먼저 생각하는 잡스라도 방금 전 했던 말을 무색하게 만들 수는 없을 터. 벌써부터 잡스의 얼굴이 굳은 게 그가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잡스가 남아 있던 사과주스를 모두 비웠다.
“35퍼센트. 경영은 노터치. 콜?”
“Not.”
단박에 고개를 젓자 잡스의 얼굴이 굳었다.
“이 이상은 안 돼, 조니. 그게 맥시멈이야. 친구라도 양보 못해, 절대로.”
하지만 내가 고개를 저은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상장 직전까지 지분 30퍼센트 보장. 경영 불간섭은 회계감사 빼고 그대로. 원하면 내 주식을 먼저 살 권리도 드리죠. 자금은 앞으로 6개월간 세 번 나눠서 들어갈 거예요.”
내 제안에 잡스는 순식간에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뭔 소리인 줄 알고 말하는 거야? 그건···.”
“바보 같은 제안이죠. 지분 줄이고 경영권 맡기고 우선매수청구권까지 주잖아요. 딴 사람들이 알면 미쳤다고 하겠죠?”
말을 끊고 차분하게 대꾸하니 잡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왜 이러는 거지?”
“말했잖아요.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당신이 성공해서 당신의 우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 스티브.”
잡스는 지금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자신은 최대한 잇속을 챙긴 조건을 던졌을 텐데 나란 놈은 자신에게 더 양보하고 애플에 복귀하길 응원하기까지 하니 얼마나 무안할까?
물론, 마냥 호구처럼 보일 수는 없기에 조건을 붙였다.
“워즈니악처럼 취급 하지는 말아요. 회계장부는 깔끔하게, 오케이?”
말은 이렇게 해도 재무상태가 엉망인 픽사인지라 잡스가 앞장서서 지출을 통제할 것이다. 내가 아는 스티브 잡스는 영화 한 편 만들고 땡 치는 걸로 만족할 위인이 아니니까.
“이거 하나 만들고 끝낼 생각은 없어. 최대한 절약해서 2탄도 준비 해야지, 안 그래?”
그다운 대답을 들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걸로 7부 능선을 넘었으니 나머지 3부를 찍으려면 두 사람의 동의를 구할 차례가 됐다.
“그나저나 이 미친 거래를 저기 앉은 두 사람이 받아들일지가 문젠데··· 어떡할래?”
날 보며 말하던 잡스는 멀리 떨어져있는 선해철과 박태진을 쭉 뻗은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마뜩찮은 표정의 두 사람을 보며 빙긋 미소를 띤 뒤, 잡스에게 말했다.
“두 사람이 토이스토리 첫 번째 관객이 되면 마음이 바뀔 것도 같은데··· 어때요?”
잠시 입꼬리를 뒤틀었던 잡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투자설명회하는 셈치고 누추한 우리 회사로 모셔야겠군. 두 사람 티타임도 끝난 것 같은데, 갈까?”
“그러죠.”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두 사람에게 걸어갔다.
***
그 길로 우리는 잡스와 함께 픽사 사무실에 가서 토이스토리를 봤다.
“어때?”
“괜찮은데요?”
잡스에 질문에 심드렁하게 대답했지만 괜찮긴 개뿔. 투자가 없었으면 영 좋지 않았을 것 같았다.
조금은 뚱한 나를 선해철이 크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괜찮다니? 이 정도면 대단하고만?”
“그렇습니다, 도련님. 이런 작품인 줄 알았으면 진즉에 투자를 권했을 겁니다.”
내 반응에 조금은 서운해 하던 잡스가 선해철과 박태진의 호평에 미소를 띠었다.
“맘에 들어서 기쁩니다. 미스터 썬, 미스터 박. 그럼··· 우리 측 제안대로 투자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잡스. 뉴욕에 돌아가는 대로 계약서를 만들고 다시 찾아뵙죠. 다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봤으면 합니다, 하하.”
“네, 썬. 다음엔 제가 직접 샌프란시스코에 가겠습니다, 하하.”
손을 내밀어 잡스와 악수를 한 선해철은 내 어깨에 손을 걸쳤다.
“조니, 잡스한테 더 말하고 싶은 거 없어?”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잡스의 눈치를 보는 척하고 입을 열었다.
“나중에 디즈니하고 재협상하면 다음 작품부터 한국 배급권 줄 수 있어요?”
“한국? 일본이 아니고?”
묘하게 불쾌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일본 문화에 심취했던 잡스가 아닌가?
“네. 공짜는 아니고 스탠더드에서 제작비 절반 투자할게요. 배급을 제외한 수익분배는 픽사 6, 스탠더드 4. 어때요?”
잡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한국 시장이야 작으니까 상관없어. 재계약이 성사돼야 효력 생기는 건 감안한 거지?”
“물론이죠. 디즈니와 재계약하길 바랄게요, 하하.”
밝게 웃는 나와 달리 잡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 내가 더 이익인 것 같은데··· 원하는 거 있으면 더 말해봐, 조니.”
“그럼··· 넥스트도 투자가 필요하면 연락해줘요, 스티브.”
잡스는 빤히 날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날 바라보는 그의 눈은 흥미로 가득했다.
“계속 나한테 주겠다더니··· 오케이. 조니 네가 투자하고 싶을 때 연락해. 넥스트는 돈이 많이 필요하거든, 흐흐.”
잡스를 보며 입이 찢어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황금알을 낳을 픽사 영화도, 애플에 합병될 넥스트까지 손쉽게 사정권에 넣다니!
잡스와 인사를 마친 뒤, 차에 올라탄 나는 선해철을 불렀다.
“삼촌, 여기까지 왔는데 스탠퍼드 대학 좀 구경해도 돼요?”
“스탠포드? 거긴 왜?”
“실리콘밸리의 종묘장이잖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서운하죠.”
4만 개의 기업.
540만 개의 일자리.
연 2조 7천억 달러의 매출.
이 세 가지를 일군 기업들의 로고까지.
자신들과의 자매결연을 원하던 한국의 Y대학이 입학성적과 고시 합격자, 정치인과 고위관료 배출 숫자를 프레젠테이션으로 보여줄 때 스탠퍼드에서 답례로 보여준 아웃풋이었다.
그런 스탠퍼드는 내게 필수 방문코스였다. 실리콘밸리, 아니 미국 주식시장을 화려한 꽃밭으로 만들어 줄 종묘장이 아닌가?
선해철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어럽쇼? 꽃장사라도 하겠다는 거야?”
“좋은 꽃이 있으면 사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스탠퍼드 대학에는 아주 맘에 드는 꽃이 있다.
지금은 싹도 안 텄지만 아름답게 필 꽃.
5년 뒤에는 부르는 게 값이 될 꽃.
새천년이 되면 절정을 보여줄 꽃.
그 꽃, 아무도 모를 때 내 화분에 옮겨 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