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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9화 (19/229)

19화. 6th. California Dreamin′ (1)

간단한 맥주 파티로 분위기를 푼 나는 며칠 동안 이번 투자에 필요한 자료들을 점검했다.

준비를 마친 나는 박태진, 선해철과 함께 아침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동부랑 서부는 너무 다르네요.”

“이 동네 오면 활기가 돌지. 날씨도 날씨지만 공기도 달라.”

1월 평균 최저 8도, 7월 평균 최고 20도로 서울에 비해 여름에는 훨씬 시원하고 겨울에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한, 환상적인 기후를 자랑하는 도시, 샌프란시스코.

이곳에 왔어도 일에 치였던 전생과 달리 즐기는 마음으로 온 이번 생에는 '마마스 앤 파파스(Mamas And Papas)'가 왜 Californian dreamin을 불렀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실리콘밸리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그렇죠, 형?”

“그럴 겁니다. 화사한 곳에서 아름다운 꽃들이 피는 법이니까요.”

낭만이라고는 1도 없을 것처럼 찬바람만 쌩쌩 부는 박태진에게서 나올 거라 생각지 못한 답이었지만 그의 말대로 토양 또한 아주 좋은 곳이었다.

UC버클리, UCLA, 스탠퍼드 같은 비옥한 꽃밭들이 널찍하게 만들어져 있으니 기술기업이라는 꽃들이 안 자랄 수 없었다.

지금쯤이면 스탠퍼드에서 내가 원하는 꽃 한 송이가 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 투자 여행은 뉴욕에서 얘기했던 픽사 외에도 앞으로 만들어질 회사, 어쩌면 내가 창립 멤버가 될 회사에 투자하기 위함이었다.

“의외네요. 형이 그런 말을 하다니.”

내 농담에 잠시 정색했던 박태진은 어느 새 옅은 웃음을 띤 채 입을 열었다.

“저도 사람입니다, 도련님. 꽃은 누구에게나 좋은 감정을 주잖습니까, 하하.”

잠시 웃던 박태진이 웃음을 멈추고 지도를 살펴봤다. 방금 전과 달리 지도에서 눈을 뗀 그의 얼굴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잡스 그 사람, 왜 에머리빌에서 보자는 겁니까? 샌프란시스코에서 봐도 될 텐데.”

이에 선해철 또한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놈의 자존심 병이 도진 거지, 뭐. 개털 된 마당에 끝까지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보겠단 수작이 아니면 뭐겠냐?”

우리는 잡스에게 미팅을 제안했지만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픽사의 본사가 있는 에머리빌에서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좋은 말이 안 나오는 건 박태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똥개도 제 집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거군요, 형님.”

“그런 셈이지, 흐흐.”

두 사람의 잡스 뒷담화를 들으니 한 정치인이 떠올랐다. 대선까지 나갔으면서 수도권에서 당선된 적도 없고 마지막 선거 때는 까마득한 후배한테 더블스코어로 졌었나?

지금 하는 짓만 보면 잡스나 그 후보나 내 눈에는 도찐개찐이었다.

“아무튼, 픽사는 까봐야 알겠는데 넥스트는 프로그램 개발진 실력이 괜찮다더라. 호텔에 짐 푸는 대로 베이 브리지 타고 넘어가자.”

“네, 형님.”

두 사람 모두 내색은 안 해도 불만이 커 보였다.

지금 우리가 픽사에 투자한다는 건 활활 불타고 있는 집에 물탱크를 만땅으로 채운 소방차를 몰고 가는 것 이상이다. 그런데 정작 집주인이란 작자가 푸대접하니 골이 안 날 리가 있나. 그나마 넥스트를 좋게 평가하는 게 다행이었다.

“지 회사에서 손 털고 나오면서 챙긴 돈도 그렇게 꼬라박은 주제에··· 어이가 없어서, 원.”

한숨을 내쉬는 그들을 보던 나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아도 속으로는 낄낄거리고 있었다. 잡스의 위기는 나에겐 기회 아닌가?

“오히려 잘 됐죠, 뭐. 양쪽에서 호주머니를 털리고 있으니 쉽게 거부 못 할 거예요.”

잡스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난 이 점을 노리고 왔다. 돈줄이 턱턱 막히는 이 판국에 내가 떡하니 손을 내밀면 쉽게, 아니 절대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

호텔에 짐을 푼 우리는 베이 브릿지를 넘어 약속장소인 에머리빌의 한 카페에 도착했다.

“뭐야? 아직 안 왔어?”

안으로 들어와서 이리저리 둘러보던 선해철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역시 잡스답네요.”

무심결에 피식 웃으며 말하자 선해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무슨 소리냐, 성민아?”

“뭐가요?”

“역시 잡스답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런!

깜빡했다.

지금의 난 잡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본 것처럼 말했으니 이상하게 보여도 할 말이 없었다.

“도련님, 혹시 잡스에 대해 알고 계신 겁니까?”

박태진까지 가세하니 이마 가장자리가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젠장.

순식간에 머리를 굴린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삼촌, 잡스가 애플 만든 거 아시죠?”

“알고 있지. 왜?”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선해철이 대답을 해준 이상 주도권은 내게 넘어왔다.

“지금은 몰라도 그렇게 큰 회사를 만든 사람이면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하겠어요?”

지금은 망조가 들었지만 잡스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애플은 그 혼자만으로 어지간한 한국 재벌이 안 부러운 회사였다. 선해철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지. 그럼··· 그걸로 때려 맞춘 거냐?”

“재계 어른들만 봐도 알잖아요. 다들 자존심 센 분들인데 잡스라고 오죽하겠어요?”

상식론으로 물타기를 하자 선해철과 박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러네. 앉아서 커피나 마실까?”

“그 전에 주인장한테 말이라도 해둬야 할 것 같군요. 어떤 걸 드시겠습니까?”

“깔끔하게 아메리카노로 통일하자. 우리가 여기 커피 마시러 온 건 아니니까.”

“그렇게 해요, 형.”

“알겠습니다.”

박태진은 커피 세 잔을 주문하면서 잡스가 와서 사람을 찾으면 우리 쪽으로 알려주라는 부탁을 하고 테이블로 왔다.

몇 분 뒤,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마신 선해철이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성민아, 정말 잡스한테 투자할 거냐?”

이 양반, 뉴욕에 있을 땐 내 편 들어줘 놓고는 갑자기 왜 이러지?

“네. 첫 미팅 때 삼촌도 제 편 들어줬잖아요?”

“그거야 네가 오너인데 나까지 반대하면 애들이 너 우습게 여길 것 같아서 편 든 거였지. 잡스, 지 친구도 벗겨먹은 놈이야. 너까지 벗겨먹으면 어쩌려고?”

선해철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나에겐 기우였다.

이번 건이야 내가 인심 쓰는 거지만 내 머리 위에 앉으려 든다면 스티브 잡스를 고꾸라뜨릴 테니까.

못할 것도 없었기에 나는 여유를 부리며 선해철에게 말했다.

“삼촌, 돈이야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겨요. 앞으로 벌면 되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들떠 있는 나와 달리 선해철은 나를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박태진마저도 얼굴에 실망이 드리워져있었다.

“도련님 종자돈, 회장님부터 형님, 형수님, 그리고 그룹 거쳐 가신 분들 아니었으면 없었을 돈입니다. 여러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신중히 말씀하셨으면 합니다.”

“태진이 말이 맞다, 성민아. 회장님께서는 뭐든 손에 넣기 전까지 방심은 금물이라고 하셨어. 성공하던 실패하던 뭐든 하나는 건져야 한다고도 하셨고. 무슨 뜻인지 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사람이 이리 말하니 화를 낼 수도, 허투루 흘려들을 수도 없었다.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내 것이 아닌데도 내 것인 양 교만을 떨다니··· 교만의 마왕 루시퍼와 면담을 해도 할 말이 없었다.

100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 장 씨 것들을 모두 알거지로 만들어 내 앞에서 싹싹 빌게 만들기 전까지 교만은 금물이다.

“···네, 삼촌. 앞으로는 그런 실수 안 하겠습니다.”

“알았다. 그런데, 잡스를 확실하게 잡을 방법은 있어?”

선해철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알려줄 수는 없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드릴게요.”

이 한마디에 선해철은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확실해?”

“네, 삼촌. 투자가 잘못되어도 하나는 꼭 배우겠습니다.”

“오케이. 이 건 엎어져도 우리 조카 비즈니스 공부는 될 테니 맡겨보마.”

선해철의 얼굴을 보니 차라리 이 협상이 엎어지길 바라는 것 같았다.

현재의 액면만 보면 픽사는 끊어진 스트레이트플러시가 아닌가? 토이스토리라는 히든카드는 나만 아는 일이니.

***

시간이 길어져서 팬케이크를 먹으며 점심까지 해결한 우리는 그때서야 잡스를 만날 수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스터 썬. 스티브 잡스입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잡스.”

무려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했음에도 잡스는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선해철도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손을 맞잡았다.

잡스를 빤히 쳐다보던 나는 선해철을 불렀다.

“삼촌, 얼굴 봤으니까 그만 가죠.”

“응?”

“도련님?”

선해철과 박태진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난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돈 없는 사람 돕겠다고 왔는데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는 건 어느 나라 매너죠? 약속장소도 자기 동네로 잡은 것도 맘에 안 드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에머리빌이면 차를 타고도 한 시간 남짓.

그런데도 잡스는 우리에게 픽사가 있는 에머리빌에서 보자고 했다. 아쉬운 건 자기인 주제에 말이다.

이해는 됐다.

잡스는 고난의 행군과도 같은 이 시기를 겪으면서 한 풀 꺾이겠지만 독불장군 같은 천성은 절대 안 없어질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도권을 쥐려는 사람이 잡스 아닌가?

그런 잡스도 나만큼은 절대 이길 수 없다.

난 그보다 더 앞서나가는 사람이 될 테니까.

돈이든, 사업이든 전부.

“무슨 일입니까, 미스터 썬? 오늘 투자, 트라이엄프 캐피털에서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톡톡 쏘아대는 나를 보고 잡스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선해철은 굳은 얼굴로 그에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오늘 투자는 트라이엄프가 아니라 이 친구가 할 건이었습니다. 참고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짐 풀고 바로 왔습니다, 잡스.”

잡스의 얼굴에 대번에 실망이 드러났지만 선해철은 잡스에게 너는 매너도 없는 놈이라고 점잖게 말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썬. 요즘 들어···.”

천하의 잡스가 난색을 드러내며 변명을 늘어놓으려 하다니···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이 시절이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었다.

“협상에서 주도권 쥐려고 했을 테니 말 안 해도 됩니다, 미스터 잡스. 투자, 받을 겁니까, 안 받을 겁니까?”

시건방지게 쳐다보며 말하자 잡스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만하면 30분 전에 준비한 즉흥연극은 대성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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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를 기다린 지 1시간 반이 넘은 걸 확인한 나는 선해철에게 말했다.

“삼촌, 잡스 오면 쇼 좀 해보죠?”

“쇼라니?”

“돈 없어서 죽겠다는 인간한테 이딴 대접 받아서 억울하네요. 누가 위인지 보여줘야겠어요.”

잡스는 약속 시간을 안 지킨 것만으로도 나에게 큰 약점을 잡혔다. 돈이 급한 걸 뻔히 아는데 배짱을 부리다니.

잠시 고민하던 선해철이 씩 웃었다.

“초장부터 기를 확 죽여 놓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게 다는 아닐 거 아냐?”

“당연히. 숨 막힐 때까지 목줄 꽉 틀어쥐고 조금씩 풀어줘야죠, 흐흐.”

잡스 같은 사람은 절대 굽히고 들어가면 안 된다. 일본 놈들 다루는 것처럼 힘이든, 기세든 그 사람을 압도해야 배신할 생각을 못한다.

음흉한 미소를 띠며 낮게 웃자 박태진이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날 바라봤다.

“도련님께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살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우리 가족 빼고 믿을 놈이 있어야죠. 아, 삼촌하고 승주 백부님, 그룹 대표님들도 우리 가족이에요, 흐흐.”

선해철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누가 보면 세상 다 산 줄 알겠다, 인마.”

세상 다 살아보고 또 살게 돼서 하는 소립니다, 삼촌.

이제는 내가 세상을 속이지 내가 속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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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노려보던 잡스가 표정을 다듬고 말했다.

“이름이 뭡니까?”

“존 데이비슨 리. 조니라고 불러줘요.”

이름을 알려준 나는 잡스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는 걸 봤다.

“그 이름, 석유왕과 똑같군요. 편의상 쓰는 이름이라면 다른 이름을 추천하고 싶은데.”

다분히 비꼬는 투로 말하는 게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고 있다. 비아냥 받고 비웃음까지 얹어서 돌려주마, 잡스.

“그 영감님, 개처럼 벌었어도 정승처럼 쓰다 갔잖아요? 갤런 당 30센트였던 유가도 시장을 독점하는 내내 6센트로 낮췄고요. 누구처럼 돈만 까먹는 것보단 훨씬 낫죠, 후후.”

잡스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상하며 잔뜩 비웃어준 나는 웃음을 줄였다. 그와 동시에 서서히 무표정한 얼굴로 바꾼 채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 이 이름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내 가톨릭 세례명으로 만든 겁니다. 아버지는 데이비드였고, 난 존이거든요.”

잡스는 개소리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지만 선해철이 내 말에 힘을 실어줬다.

“트라이엄프의 이름을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잡스. 이 친구 부친이 내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지금 이 친구가 한 말이 거짓이면 트라이엄프의 이름을 걸고 픽사에 투자하죠.”

“미스터 썬···.”

대한이동통신 투자를 물어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트라이엄프의 이름값이 무시무시한 것 같다. 잡스는 선해철의 말을 듣더니 곧바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조니.”

잡스에게 사과를 받다니 다시 살고 볼 일이었다. 슬슬 1막을 끝내볼까?

“됐고. 2천 5백만 달러, 투자하겠습니다. 콜입니까, 다이입니까?”

잡스가 입을 떡 벌렸지만 이를 어쩌나? 이제 겨우 1막을 끝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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