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8화 (18/229)

18화. 5th. '표준'의 시작

JFK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택시를 타고 들어온 월스트리트의 길가를 따라 쭉 들어선 마천루들을 둘러봤다.

“언제 와도 화려하네요, 뉴욕은.”

“그게 이 동네 매력이지. 그런데···.”

날 보며 빙긋 웃던 선해철이 잠시 내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한이동통신, 어떡할 거냐?”

“정부 쪽 지분 20퍼센트 남은 거 아시죠?”

“알지. 그거 나올 때 팔려고?”

“네.”

세경그룹에서 정부 측 지분 23퍼센트를 인수한다고 해도 한국통신공사가 20퍼센트를 제외한 지분을 매각하기 전까지는 민영화가 됐다고 볼 수 없다.

오는 6월부터 정부 측 나머지 지분이 시장에 풀려야 민간통신사가 되고 현금인출기로 인증 받으면서 대한이동통신 주가의 2차 가속이 시작될 것이다.

두 번의 문답이 끝나자 선해철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이야아, 거기까지 생각했어?”

“물론이죠. 그때 전부 던지고 5천만 불은 여기로 보낼 겁니다, 흐흐.”

가볍게 웃어보였지만 그 돈에 안주해서 사치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복수의 끝을 화려하게 장식하려면 부와 명예, 권력까지 쥐어야 하니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차부터 타시죠.”

박태진의 권유에 우리는 가장 앞에 있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차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어느 새 공항을 빠져나와 뉴욕 시내로 들어가고 있었다.

‘언제 와도 대단하네.’

세계경제와 금융의 수도 뉴욕.

예전에는 출장 때문에 오기만 했던 이곳에 내 깃발을 꽂았다는 사실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턴 내가 가는 길이 표준이 될 것이다.

내 말 한 마디에 뉴욕이 흔들리고, 세상이 뒤집힐 것이다.

창문에 입김을 불어넣은 나는 그 위에 ‘Standard Capital’이라고 손끝으로 썼다가 손바닥으로 쓱쓱 지웠다.

나만의 히스파니아가 될 ‘스탠더드 캐피털’.

내 깃발이 올라간 이곳 뉴욕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 파이프를 박고 돈을 빨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스탠더드 캐피털은 내 승리를 뒷받침할 히스파니아가 될 것이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가 멈춰 섰고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잘 지냈지?”

“네, 썬.”

“썬, 이제야 시작하는 겁니까?”

“누가 우리 보스예요? 프리티 보이? 아니면··· 샤프 가이?”

사무실에 도착하자 대여섯 정도 되는 사람들이 선해철과 우릴 반겨줬다.

“프리티 보이가 우리 보스야, 클레어.”

“오, 갓! 누구길래 돈이 그렇게 많은 거예요?”

클레어가 호들갑을 떨었고 다른 멤버들 또한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에 말했잖아. 우리 쩐주. 우리 캐시는 다 이 녀석 거야.”

“와우!”

“지저스!”

또 다시 놀라는 그들의 모습이 꽤나 웃겼다.

“I’m Clare Lawrence. Welcome to Wall Street, boy.”

클레어 로렌스···. 선해철과 친한 걸 보니 신임이 꽤 두터운 여자 같았다. 그 신임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쁘지는 않아보였다.

“Hi, Clare. I’m Seong-Min Lee. but, I’ll use John Davison Lee as my english name. Just call me, Johnny.”

자연스러운 미국식 악센트로 나를 소개하자 클레어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John Davison··· Lee?”

“Yeah, my english name.”

가볍게 양팔을 살짝 들며 웃자 모두들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회사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거였어요?”

“제 집안이 가톨릭을 믿어요. 제 세례명과 아버지 세례명을 섞어서 만들었는데 그 사람 이름과 겹치더군요, 하하.”

앞으로 한국 밖에서 쓸 내 이름은 ‘존 데이비슨 리’.

내 세례명인 ‘요한’과 아버지의 세례명이었던 ‘다윗’을 바탕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만들고 보니 석유왕이었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와 이름이 겹쳐버렸다.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조니’라는 친숙한 애칭 덕분에 포악한 야수가 될 내 모습을 숨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이름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지은 거였어?”

“좋은 게 좋은 거죠, 삼촌. 존 데이비슨 리와 스탠더드 캐피털, 얼마나 좋은 투 샷이에요?”

선해철을 보며 어깨를 으쓱하자 모두들 낄낄거렸다.

“간판 무게가 너무 무거운 거 아니에요, 조니?”

“그 양반 따라잡으려면 많이 힘들 텐데?”

지금이야 다들 이렇게 웃고 있지만, 앞으로 딱 두 바퀴 정도만 지나면 이 이름을 등에 업고 있다는 것만으로 온몸에 힘이 들어갈 것이다.

스탠더드 캐피털, 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이름인가? 무패 행진을 거듭하며 전 세계 금융계의 표준이 될 테니 말이다.

한참을 웃고 난 클레어가 손을 내밀었다.

“편하게 불러도 되지, 조니?”

“물론이죠, 클레어.”

우리는 악수를 하면서 서로의 미소를 주고받았다.

“자자, 이쪽은 박태진이야. 내 친한 동생이자 조니의 보호자를 맡고 있지. 우리 회사 주주이기도 하고.”

박태진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들고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박태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군대 다녀오셨습니까? 나도 학군장교였는데 미스터 팍처럼 날렵해 보이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체격이 우람한 히스패닉계 남성의 질문에 박태진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 전이지만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에서 중위로 전역했습니다.”

박태진이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자신을 소개하자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Special Warfare Command?”

“어쩐지 핏이 좋더라니!”

또 한 차례의 호들갑으로 통성명을 마친 우리는 회의실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

“···그러니까 조니는 재벌 4세라는 거야?”

“포드, 힐튼, 발렌베리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대부호 가문들의 이름이 나왔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나비효과를 고려해서 조심해야겠지만 결국 그들 위에 설 내가 아닌가?

“네. 하지만 썬이 말했다시피 우리가 굴릴 돈은 제가 마련한 거예요. 그쵸?”

싱긋 웃는 나와 마주하던 선해철이 씩 웃더니 다른 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물론이지. 주식에 부동산만 해도 얼마냐? 흐흐.”

“그룹 주식은 못 파니까 1억 5천만 불 정도겠네요? 하하.”

사실대로 말했어도 내 스스로 자랑하는 게 민망해서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자 그들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Holy fuck! ···ah, sorry.”

또다시 놀라는 걸 보니 능력은 어느 정도 입증한 것 같고··· 투자 건을 이야기하기에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다.

“보내드린 계획서는 다들 보셨죠?”

지난 반 년 동안 주식만 붙들고 매달렸다면 나를 빙다리 핫바지로 본 거다.

박태진의 트레이닝을 받고 학교공부를 병행하면서도 투자 종목들을 짜느라 주말에도 집에 틀어박혀 계획서를 만들기 일쑤였는데 모두의 표정을 보니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봤어요. 괜찮던데요?”

“IT나 반도체, 장비, 소재, 미디어에 집중돼서 특이하긴 한데··· 나이키나 코스트코, 월마트, 웰스파고, 씨티뱅크, AIG 같은 종목들도 있어서 나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맘에 안 들 리가 있나.’

그 중에서 포마드를 먹인 단발머리를 말끔히 뒤로 넘긴 히스패닉 남성이 안경을 고쳐 쓰며 날 바라봤다.

“지금 들어온 조니 자금이 3,500만 달러에 클레어와 우리가 출자한 자금이 천만 달러. 천천히 사들이면 수익이 괜찮을 겁니다. 어떡할까요?”

커피를 마시던 나는 잔을 내려놓고 그와 다른 멤버들을 향해 검지만 세운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제 자금은 지금 바로 투자하지 않을 거예요.”

“““What?”””

황당할 것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안정적인 투자를 하는 줄 알고 이 회사의 창립 멤버로 지분까지 넣고 합류했을 텐데, 투자를 않겠다니 그럴 수밖에.

“그러면···?”

“해당 종목들은 연내에 한국 쪽 주식 처분하고 보낼 돈으로 매수하죠. 당장 급한 건 아니잖아요?”

“““Uhmm···.”””

모든 이들이 침음성을 흘렸지만 난 자신만만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때까지 편하게들 쉬면서 월급 받고 있어. 연내에 이 녀석 주식 다 처분하면 5천만 불이 또 들어올 거니까.”

차를 마시고 있던 선해철의 지원사격에 클레어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알겠습니다, 썬. 조니, 어디에 투자할 거죠?”

“제안서에 나온 마지막 회사요. 그 회사 먼저 투자할 거라고 적어놨는데?”

다른 멤버의 질문에 대답하자 클레어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니, 픽사(Pixar)에 배팅해야겠어? 차라리 다른 종목에 투자하는 게 어때?”

“합당한 이유를 알려주면 고려해보죠.”

조금은 건방진 말투로 대답하자 클레어는 굳은 얼굴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무더기나 되는 자료를 들고 왔다.

쿵!

언짢은 감정이 잔뜩 실린 서류더미를 본 나는 클레어의 굳은 얼굴을 올려보며 물었다.

“이게··· 그 이유?”

“오너가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는 게 CEO의 의무잖아?”

이제는 한국어로 반말까지 하고 있다. 클레어, 깡도 세고 머리도 좋고 지독하게 부지런한 사람 같다.

흡족한 감정을 숨긴 채 시선을 외면하고 서류를 집어 들려고 하자 클레어가 서류를 손으로 눌렀다.

“굳이 볼 거 없어. 내가 요약해줄게.”

손을 뗀 나는 자리에 가서 앉은 클레어의 날카로운 눈매를 그대로 마주했다.

“첫째, 오너 리스크. 오너인 잡스의 상황이 그렇게 좋지가 않아. 픽사를 알면 넥스트(NeXT)도 알겠지?”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날 때 애플 엿 먹이겠다고 세우고는 픽사까지 인수했잖아요. 모를 수가 없죠.”

거칠게 대꾸하자 클레어가 피식 웃었다.

“잘 아네? 넥스트는 최근 구조조정을 했어. 컴퓨터 공장을 매각하고 소프트웨어 회사로 바꿨지. 대당 5천 달러가 넘는 컴퓨터를 누가 미쳤다고 쓰겠어? 델컴퓨터 두세 대 값인데.”

“개인용 컴퓨터라기엔 더럽게 비싸죠, 하하.”

오고 가는 대화가 점점 거칠어졌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앞으로 이들과는 계속 부대끼면서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감정실린 욕이 아닌 이상 추임새로 F-word 정도는 편하게 쓸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게 좋았다.

“그래. 돈만 퍼먹는 두 회사만 봐도 잡스의 자금 사정은 최악이야. 더 이상 돈 끌어올 곳도 없어. 성질머리는 또 어떻고. 휴우-.”

왜 모르겠는가?

클레어가 한숨을 내쉴 만큼 잡스의 괴팍하고 야비한 성질머리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무엇보다···.

‘잡스 그 망할 인간 때문에 내가 얼마나 개고생 했는데!’

신성전자와 애플이 온갖 특허 소송이 붙었었는데 그걸 내가 모를 리가 있나. 그 시절의 기억에 쓴웃음을 머금고 클레어에게 말했다.

“친구를 자기 입맛대로 써먹었잖아요. 임직원들도 쥐어짜댔고.”

그 중에서도 최악의 희생양은 잡스의 친구이자 창업동지였던 스티브 워즈니악일 것이다. 애플 창립에 공이 컸던 그보다 잡스가 더 많은 주식을 가져갔으니 내가 다 안타까웠다.

대답을 들은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는 놈이 그러냐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미치겠군. 나중에 픽사와 디즈니의 합병이 74억 달러짜리라는 걸 알려줄 수도 없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던 와중에도 클레어는 또다시 반박을 이어갔다.

“둘째, 사업전망. 재무구조까지 포함해서야. 재작년에 디즈니하고 토이스토리 제작을 계약한 것까진 좋아. 문제는···.”

그 부분은 들을 게 없어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중간에 제프리 카젠버그가 갈아엎었다는 거죠? 잡스는 시키는 대로 해서 제작비가 오버됐는데 제프리는 배 째라고 했을 테고··· 회사 살림이 엉망이겠네요.”

애플과의 소송전을 계기로 잡스의 전기문을 읽은 내겐 너무나도 익숙한 이야기여서 서류도 안 보고 청산유수처럼 읊어댔다. 그런 나를 보고 클레어가 흠칫했다.

“그렇게 잘 아는 데도 픽사에 투자하겠다고?”

“네. 혹시 모르죠? 고난과 역경 속에서 명작이 나오는 법이잖아요.”

잡스에게 접근하기에 지금보다 더 좋은 타이밍도 없었다. 내가 그리려는 ‘복수’라는 명작은 잡스처럼 인생 최악의 막장골목에 몰린 사람들과 연을 맺으면서 완성되니까.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하자 클레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흘겨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지. 보스가 하자고 하니 따를 수밖에.”

“고마워요, 클레어.”

조금은 토라진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년 연말에 토이스토리가 개봉될 때까지는 참을 수밖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하나만 약속해줘. 투자금은 나눠서 넣겠다고 해. 돈이 급하니까 잡스도 받아들일 거야.”

“콜. 지금 바로 잡스한테 연락 넣으세요.”

잡스··· 전생의 원수가 이번 생의 동지가 되겠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