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3rd. 행동 개시 (5)
그 뒤로 나와 장민재는 서로의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워주며 ‘와인 원 샷’을 거듭했다.
이 미친 짓거리는 장용재의 가정교사가 될 손제만 신성그룹 부회장이 백인들과의 비즈니스 미팅을 겸한 식사자리에서 기선제압 용으로 썼던 짓이다.
덕분에 신성그룹 사장단에겐 ‘와인 원 샷’ 두세 번이 기본 소양이 됐지만 정작 그 손제만조차도 나와 대작하던 중 다섯 번째 병을 딸 때 입을 틀어먹고 화장실로 뛰쳐나갔었다.
쿵!
그런 나를 상대로 네 번째 와인 병을 비우던 장민재는 빈 잔을 내려놓자마자 탁자 위에 엎어져버렸다.
“새끼···.”
나도 반쯤 풀린 눈으로 그를 보며 씩 웃었다. 평소에는 가볍게 즐겨도 작심하고 마시면 와인 세 병을 마시는 나지만 모처럼 쉬지 않고 와인을 들이켰더니 살짝 알딸딸해지고 있었다.
나는 재킷을 걸친 뒤, 가방을 뒤적거려서 핸드폰을 찾았다. 벽돌 같은 핸드폰의 버튼을 꾹꾹 누른 나는 귀에 대고 통화가 연결되길 기다렸다.
“형? 나, 성민이. 지금 민재하고 있는데···.”
통화를 마치자마자 30분도 안 돼서 장용재가 식당에 들어왔다.
“왔어?”
“하아···.”
장용재는 손을 들어 흔든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한숨부터 내쉬었다.
나는 얼굴이 벌게져 있지, 장민재는 코 골고 이 갈면서 자고 있지, 테이블에는 와인 병이 네 개나 있는 총체적 난국이니 얼마나 폭폭할까?
“무슨 술을 이렇게···.”
“민재 이 자식, 우리 집 이야기가 그렇게 듣고 싶었나봐. 나한테 와인 대작을 하자고 했네?”
말을 잇지 못하던 장용재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뭐?”
“걱정하지 마. 보다시피 내가 이겼으니까. 형 도와주느라 숨도 못 쉬고 와인 퍼마셨어, 흐꾹!”
나도 모르게 딸꾹질이 나왔지만 오히려 내 몸에 고마웠다. 내 연기를 더 맛깔나게 해주는 조미료가 되지 않겠나? 장용재도 나를 보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새끼, 고맙다. 흐흐.”
“고맙긴. 얼른 민재 데리고 가. 나도 집에 들어가야겠다.”
“됐어. 형이 너네 집까지 태워다 줄게.”
“그럼 고맙고, 흐흐.”
니들이 뛰어봤자다.
지금부터 서로 싸워라. 장용재, 장민재.
***
신성그룹의 두 형제에게 불화의 씨앗을 던진 나는 장용재의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이간질을 했는데도 나를 바래다주다니 이 시절의 장용재도 내 앞에서는 꼬래비였다.
대문까지 나온 박태진은 나를 부축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은 나는 박태진이 가져다 준 물을 마셨다.
“좋은 일이 있으신 것 같군요.”
“음··· 나쁘지는 않아요, 흐흐.”
박태진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그려졌다. 오랜만에 기분 좋아 보이는 내 모습 때문인가? 나는 술김에 박태진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질렀다.
“형, 내가 형도 부자로 만들어줄게. 아주 많-이!”
“하하, 네.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박태진은 내가 술주정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금융실명제를 미리 예견해 돈을 미리 빼내 해동그룹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룹을 살려냈으니 이제 그 신뢰를 더해 기가 막히는 투자를 할 생각이다.
‘지금부터 모으면 충분하겠네. 대한이동통신.’
일반 대중들은 모를 대한이동통신의 민영화가 발표되면 주식이 폭등할 테니 하루빨리 시작해야 한다. 내 돈도 불리고 할아버지에게 약속한 것도 지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챙길 기회가 될 것이다.
***
며칠 뒤.
“휴우, 아닌 밤중에 금융실명제라니.”
“그러게. 춘삼월부터 군인들 옷 벗길 때부터 느낌이 쌔했는데. 이번 대통령, 무시무시한데?”
미사리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장하연은 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고, 그녀와 마주보고 있던 나도 장단에 맞춰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누나는 이번에 피해 본 거 없지?”
“피해 볼 돈이나 있으면 좋겠어. 그러는 넌?”
“나도 없어. 아버지,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것만 있잖아.”
들뜨지도 침울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두 분이 돌아가시면서 내게 남겨준 깨끗한 재산만 있어도 충분했다. 부족한 건 앞으로 계속 불려나가면 되니까.
대답을 마치자 장하연의 얼굴에 후회가 밀려들었다.
“미안해. 괜히 쓸데없이···.”
“돈 얘기는 내가 먼저 꺼냈잖아. 신경 쓰지 마.”
언제까지 두 분에게 묶여 살 수는 없었다. 죽다 살아온 이상 앞을 보고 달리기에도, 돈보다 나를 걱정해주는 장하연을 위해서라도 시간이 부족했다.
말없이 커피를 마시던 나는 장하연에게 말했다.
“누나, 현금 있어?”
“왜?”
“이번에 투자할 게 있는데 돈 맡겨주면 불려줄게.”
그 순간 장하연의 눈이 토끼처럼 변했다.
“투자?”
“확실한 투자처가 있거든. 꼬리표 없는 돈이 날아갔으니 꼬리표 달린 돈이라도 불려야지, 어떡하겠어?”
장하연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집안에서의 입지가 좁을 테니 현금이 아쉽겠지. 아주 많이.
“어딘데?”
“비밀. 그래도 50억 맡겨주면 확실히 불려줄게. 반 년 안에 3배 보장. 어때?”
“50억? 3배?”
장하연의 목소리가 대번에 높아졌다.
이 시기에 50억이면 압구정 태현아파트 35평형 열다섯 채 값이다. 150억이면 마흔 채가 넘으니 안 놀랄 리가 있나.
우릴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한 나는 그녀의 입술에 검지를 댔다.
‘쉿!’
소리 대신 표정으로 말하자 장하연이 붉게 물든 얼굴을 끄덕였다.
“사이즈가 커. 난 이백억 투자할 거야. 물량 모으면 주식담보대출로 물량을 더 불릴 거고.”
태연하게 말하는 나와 달리 장하연은 또다시 벌어지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탄성을 자기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빙긋 웃던 나는 옆에 둔 가방을 열었다.
“이거 보고 결정해.”
서류봉투를 꺼내서 내밀자 장하연이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뭐야?”
“이번 투자 관련 계약서하고 명동에 있는 내 건물 등본이야. 시가로 80억인데 손실 보증으로 충분하겠지?”
내가 물려받은 부동산 중 가장 값어치가 비싼 물건이고,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해동종금 초창기 사옥이지만 아깝지가 않다.
내 여자로 만들고 싶은 사람을 사로잡는 데 쓸 보증이 아닌가? 잃을 일도 없는데.
장하연은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만한 담보를 제시하는 것을 보고는 내가 정말 진심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정말 자신 있다는 것도 알아챘다.
장하연이 말아넣고 있던 입술을 도로 풀었다.
“아버지한테 말해서 빌려볼게. 조금만 기다려줘.”
“좋아. 계좌를 여러 개로 쪼개서 넘겨줘. 핸들링 하려면 그 편이 좋겠지?”
장하연은 내가 어떤 것에 투자를 하려는지는 몰라도 꽤나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장하연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비밀번호도 넘겨줄 테니까 잘만 불려줘. 그런데···.”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안 알려줄 거야?”
“물량 모으고 나면 알려줄게.”
내가 장하연을 좋아해도 지금부터 빤스까지 벗어줄 수는 없다. 같은 방에서 같은 침대를 쓰기 전까진.
***
이성민과 헤어진 장하연은 성의원으로 들어갔다. 본관 집무실보다도 장병호가 집무실 대신 썼던 이곳을 더 많이 쓰는 장호건을 보기 위해서였다.
“무슨 일이냐, 하연아?”
“50억만 빌려주세요, 아버지.”
인사말도 없이 50억을 달라고 하자 장호건의 눈이 커졌다. 액수도 액수지만 지금껏 착실하게 살아온 딸이 돈 빌려달라는 소리를 하다니?
“50억?”
“괜찮은 투자처가 있는데 투자해보려고요.”
장하연의 대답에 장호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해?”
“네. 반년 안에 3배 버는 투자예요. 제안한 사람도 믿을 만한 사람이고요. 금융실명제는 되돌릴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만회해야죠.”
장호건은 큰딸이 새롭게 보였다. 분명 해동그룹이 뭔가 한 것 같은데 헛다리짚은 장용재와 장민재와 달리 장하연은 오히려 돈을 벌어오겠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리 내가 널 아낀다고 해도 50억은 큰돈이다. 투자를 제안했다는 사람이 누구냐, 하연아?”
그럼에도 사업은 사업이다.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서 50억은 컸다. 그걸 알면서도 장하연은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그 사람 정체 안 밝히는 게 투자조건이에요.”
장하연은 자기가 억지를 부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50억을 어떤 정보도 오픈하지 않고 달라고 하니 어린애 떼쓰는 것 같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목숨만큼 아끼던 자동차를 팔았던 이성민의 이름을 댈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위해 소중한 걸 포기한 사람의 부탁이 아닌가?
“흐음···.”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부탁드리는 거예요. 손실 보증도 받았고요.”
장하연의 간곡한 부탁에 장호건이 침음성을 멈췄다. 똑 부러지는 딸이 보증까지 받아뒀다면 돈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 보증, 안 밝힐 거지?”
“네. 알려주면 누군지 찾아내실 거잖아요? 잃으면 알려드릴게요.”
장호건은 겸연쩍은 미소를 머금고 딸을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채지 않았는가?
“알았다. 우리 딸내미가 비상금 장만하겠다는데 그 정도는 내줘야지. 계좌는 어디에 만들어줄까?”
“신성증권만 아니면 돼요. 반년 뒤에 돌려드릴게요, 아버지.”
그룹 내에 보는 눈이 많은 걸 알기에 장호건은 딸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해주마. 조용히 주식을 매수하려면 계좌를 여러 개로 쪼개야겠지?”
“창구 하나에서 주문이 쏟아지면 눈에 띌 테니까요.”
장하연이 아버지의 세심한 배려에 고마워하는 사이, 장호건이 전화기를 들었다.
“형님, 접니다. 우리 하연이, 일 잘하고 있죠?”
[회장님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하하.]
정창호의 되물음에 장호건이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제 딸아이가 밥값은 제대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신성증권 말고 다른 증권사 다섯 곳에 하연이 계좌 만들고 제 명의로 된 계좌에서 10억씩 쏘세요.”
[회장님?]
“우리 하연이도 쌈짓돈이 있어야지요. 차용증 쓰고 빌렸다고 국세청 오 청장한테 잘 말해주십시오, 하하.”
[알겠습니다, 회장님.]
“아빠?”
깜짝 놀란 장하연은 어릴 때 버릇이 튀어나왔다. 어려울 거라 생각할 줄 알았는데 컵라면 익는 시간보다 빠르게 처리될 줄이야. 그것도 깨끗한 돈을 빌려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 큰딸 쓸 돈인데 검은 돈은 안 되지. 깨끗한 돈이니 성공해야 한다?”
네 명의 자식들 중 가장 아끼고 가장 안타까운 자식이었기에 장호건은 애틋하고 따뜻한 눈길로 장하연을 바라봤다.
***
며칠 뒤.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나는 박태진에게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뭡니까, 도련님?”
“보세요.”
꺼림칙한 표정으로 통장을 받은 박태진은 표지를 넘기자마자 눈이 커졌다.
“도련님?”
“하연 누나, 내 여자로 만들려고요. 누나, 능력 없는 남자 딱 싫어하잖아요?”
장하연이라는 여자는 외모와 성격도 따졌지만 능력 없는 남자는 더 싫어했다. 나조차도 예외는 아닐 테니 이번 기회에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가씨도 서울대 수석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하하.”
“그러니 더더욱 능력을 보여줘야죠. 안 그래요?”
뻔뻔한 질문에 박태진은 어색한 미소만 띠었다. 날 아껴주는 박태진이라도 공과 사는 철저했으니 그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투자하실 곳은 있으십니까?”
“대한이동통신에 투자할 생각이에요.”
“대한이동통신이면···.”
말끝을 흐리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박태진 대신 말을 이었다.
“작년에 세경그룹에서 제 2이동통신 사업 낙찰 받았다가 떨어진 거 아시죠?”
“그렇습니다. 전임 대통령과 사돈이라서 떨어졌잖습니까?”
재계 내에서 ‘군바리에게 아들 팔아서 장사밑천 마련했다.’라는 비아냥을 듣던 세경그룹.
사돈이었던 전임 대통령의 마지막 해에 있었던 제 2이동통신 사업자 입찰에서도 ‘사돈 덕에 사업자로 선정됐다.’라는 야권과 언론의 공격 끝에 낙찰 받은 사업권을 도로 뱉어내고 말았다.
“그런데 그게 대한이동통신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대통령님 목표가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거잖아요? 신한국 창조라고 했던가? 아무튼요.”
“그렇습니다. 숙군 사업부터 금융실명제까지 해내서 국민들의 지지가 높잖습니까?”
또다시 자다가 남의 뒷다리 긁는듯한 질문에 박태진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면서도 대답해줬고, 대답을 들은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만든 권총 모양으로 그를 가리켰다.
“바로 그거예요. 지지율을 계속 유지하려면 다른 액션을 취해야겠죠?”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는지 박태진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럼···?”
“제 2이동통신 사업자 재선정과 함께 대한이동통신도 민영화될 거예요. 민간업자끼리 경쟁 붙여서 통신 서비스를 높이면 꽤 그럴싸하게 보이겠죠?”
“혹시··· 도련님께서는 세경그룹이 대한이동통신 인수에 배팅할 거라 보시는 겁니까?”
“네. 이번 대통령은 5대 재벌을 싫어하잖아요.”
아들을 비롯한 측근들을 관리하는 건 개판이었지만 본인만큼은 깨끗했던 이번 대통령은 군부와 결탁해왔던 재벌을 달갑게 보지 않았다. 그토록 청렴에 목을 매달 이 정권의 결말을 떠올리니 웃음이 터지려고 했지만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 2이동통신 사업권, 5대 재벌은 배제될 거예요. 그래도 세경그룹이 통신사업을 하려면 대한이동통신 지분을 인수할 수밖에요.”
내가 아는 대로 흘러간다면 제 2이동통신 사업권은 겉으로나마 5대 재벌, 그것도 군인 출신의 전 대통령과 사돈인 세경그룹과 거리를 두려는 대통령 때문에 대한제철에서 딸 것이다.
그 바람에 세경그룹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대한이동통신을 비싸게 인수하지만 현재는 국영기업인 대한제철이 세울 신세대이동통신까지 인수합병하면서 이동통신업계의 절대강자가 되지 않던가?
내 목표는 지금부터 차근차근 대한이동통신 주식을 물 밑에서 모으는 것이었다. 타이밍을 알고 있으니 결정적인 국면이 되면 수단방법 안 가리고 철저하게 벌어들일 것이다.
“많이 놀랐나 보네요?”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박태진은 입에서 탄성을 냈다.
“아··· 네. 솔직히 좀, 아니 많이 놀랐습니다, 도련님. 비서실에서도 철저히 비밀로 부친 내용인데 어찌 아셨는지···.”
어떻게 알긴. 다 겪은 거니까 알지.
라고 말해봐야 나만 미친놈이 될 터라 말을 돌렸다.
“앞으로 많이 놀라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런 박태진에게 조금은 놀리듯이 질문을 던지자 그가 빙긋 웃었다.
“심장마비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하.”
“금융실명제 때도 안 놀라셨으면서 이런 걸로 놀라시는 거예요?”
정작 놀라야 할 곳에서 놀라지 않고 이런 일로 놀라는 모습에 핀잔을 줬지만 박태진의 목소리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그 일은 회장님 이하 그룹 어르신들도 동의하셨잖습니까? 그래서 넘어간 겁니다, 도련님.”
고개를 끄덕인 나는 남은 커피를 모두 비웠다.
“아무튼 11월까지 저하고 하연이 누나 계좌로 대한이동통신 주식 사두세요. 형도 10억 정도 넣어보는 건 어때요?”
이렇게 노나먹는 기회를 나 혼자서만 먹을 수 없어서 권했지만 박태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도련님. 하연 아가씨야 도련님과 연결점이 없으니 상관없지만 저까지 나서면 5퍼센트 룰에 걸릴 겁니다.”
“아···.”
“저 때문에 도련님 인생에 오점을 남길 수는 없습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눙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법이라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거기에 박태진의 굳은 눈빛을 마주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형.”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예. 처음 하시는 주식투자인 만큼 확실한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박태진에게 나를 믿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순 억지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절의 나란 놈은 주식을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그의 눈에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보일 터.
무엇보다.
그가 말하는 전문가가 누군지도 잘 알고 있었다. 주식투자와 별개로 수개월 동안 준비한 일을 위해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니 박태진 말대로 만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