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3rd. 행동 개시 (4)
“어, 민재야. 지금? 저녁이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콜. 이따가 봐.”
오전 강의를 받고 건물 밖으로 나온 나는 바깥에서 장민재와의 통화를 끊고 벽돌 사이즈의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점심은 형, 저녁은 동생이라···.”
혼자서 중얼거린 나는 벤치에 앉아서 손에 쥐고 있던 캔 커피를 마셨다.
내일 점심에 보기로 한 장용재라면 몰라도 이 시절에 나와는 데면데면했던 장민재까지 전화를 걸어서 만나자고 한 걸 보면 짚이는 게 딱 하나 있었다.
금융실명제.
고승주가 다른 그룹 비서실장들과의 모임에서 처신을 잘했다고 해도 구렁이 수백 마리를 품고 있는 장호건과 여우같은 이수한이라면 절대로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잘 됐다 싶었다. 어른은 어른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붙어야 제 맛 아닌가? 캔 커피를 모두 비운 나는 다시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네, 백부님. 성민입니다. 용재 형하고 장민재가 보자고 했어요. 네. 뻔하죠. 호건이 아저씨 성격에 지나칠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랬군요. 그럼 저는 두 녀석 마크하겠습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수한이 고승주와 보자고 했다니··· 신성그룹, 벌써부터 견제하는 건가?
이수한이야 고승주가 잘 맡아서 붙을 테니 난 두 놈이나 만나봐야겠다. 기회가 생긴다면 지금부터 두 놈 사이를 삐걱거리게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차를 몰고 약속장소에 도착한 나는 손목시계를 봤다. 당연하게도, 장용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 이때부터 습관이었나···.”
빌어먹을 새끼, 먼저 보자고 했으면 지가 을인데 그룹 순위에서 갑이라고 착각하나?
전생에도 장용재는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사람과의 약속에 꼭 늦게 오곤 했는데 이 시절에도 날 물로 보는 것 같았다.
오후 강의가 없는 날이길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출결 점수가 까일 뻔했다.
빵빵!
땅바닥을 뒷굽으로 차며 투덜거리던 중 경적 소리가 들렸다. 경적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장용재가 멀리서 차창을 내리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성민아, 거기서 뭐하냐!”
장용재의 목소리를 들으니 죽기 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나이에도 관리 잘해서 먹어줄 만한데··· 카리브 해 섬에서 실종처리하고 팔아버리면 되겠지. ···고승주, 이명진이야 쥐뿔도 없으니 트럭으로 밀어버리면 될 걸?]
빌어먹을 새끼··· 덤프트럭으로 콱 밀어서 피떡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지만 일을 그르칠 수 없어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로 스며드는 공기 덕분인지 화기(火氣)를 식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20대 이성민’을 연기했다.
“형!”
로버트 드니로가 봐도 박수칠 메소드 연기.
욕지기가 밀려 올라오려는 걸 참고 반가운 체하며 운전석에서 내리는 장용재에게 달려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본관에서 오다보니까 늦어버렸다.”
“아··· 그랬지?”
깜빡하고 있었다. 이 자식, 작년부터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에서 일했을 텐데 직급이··· 과장이려나? 부산에 공장 짓는다고 바쁠 텐데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장호건이든, 저놈이든 애가 탄 것 같았다.
“배 많이 고팠지? 이 집, 잘하는 집이니까 많이 먹어, 하하.”
“고마워, 형.”
나와 장용재는 접대용 미소를 띤 채 식당으로 들어가 미리 준비된 방에 들어갔다.
“모둠으로 먹자. 여기, 매일 소 잡는 데라 고기가 꽤 신선해.”
“콜. 일단, 2인분씩 먹자.”
주문을 넣은 우리는 숯불 위에 있는 석쇠에 회처럼 쟁반에 세팅된 소고기를 부위별로 두 점씩 올렸다.
“퇴원기념으로 쏘는 거니까 많이 먹어, 하하.”
퇴원기념은 개뿔.
장하연은 내가 연락하지 않았어도 병원에 있을 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와서 한 시간씩 말동무를 해줬다. 퍽이나 일찍 축하해준다, 새끼야.
“일찍 좀 쏘지 그랬어? 한우 키워서 쏘려고 그런 거야?”
그런 속마음을 숨기고 은근히 돌려 까자 잠시 눈이 커졌던 장용재가 탄성을 흘렸다.
“하, 짜식? 인마, 형이 요즘 얼마나 바쁜데?”
“뭐 하는데?”
“이 형이 말이다, 요즘 자동차 사업 때문에 바빠서 정신이 없어요.”
장용재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은 철부지 재벌가 도련님이 따로 없지만 세월을 겪으면 겪을수록 지 애비보다 더 지독한 놈으로 변하는 게 저놈이다.
그러니 장수연과 짜고 날 지들 남매의 노예로 만들고, 죽이기까지 하지 않았나?
그 생각을 하니 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지만 지금의 자리는 서로를 떠보는 자리다. 나는 불길을 잡아낸 뒤, 처음 듣는 것처럼 눈을 깜빡거리고 물었다.
“자동차?”
“그래. 일단 고기부터 올리자. 배고프다, 흐흐.”
우리는 불판에 올린 고기를 구워먹었고 불판이 비워지기가 무섭게 고기를 또다시 석쇠에 올려서 구워먹길 거듭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고기만 처묵처묵한 건 아니었다. 꼬꼬마라도 재벌가 사람들이 아닌가?
“요즘 아버지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어. 자동차 쪽 때문에 스트레스가 큰 모양이야.”
“그러겠지. 태현그룹도 반도체 하고 있는데 신성도 자동차 해야 균형이 맞잖아. 신성물산도 키워야 하고.”
예전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의 나는 기업 경영에 이골이 난 인간이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핵심을 푹 찌르자 장용재의 동공이 흔들렸다.
신성그룹이 방계를 포함해서 태현그룹보다 뒤처지는 자동차 사업. 그 사업은 장호건이 젊었을 적에도 일본의 기술을 도입해서 신성자동차를 세웠지만 아직도 만년 꼴등신세다.
장용재야 아버지의 애착이 담긴 자동차사업을 1위로 올려서 후계 구도를 굳히고 싶겠지. 현실은 자동차 1등인 태현을 재끼는 건 고사하고 2등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한다.
당연히 나는 놀라는 장용재를 보고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 그런데 자력갱생만 전부가 아니잖아? 인수합병도 가능할 텐데.”
“응? 그, 그렇지?”
지나가듯이 묻는 나와 달리 장용재의 동공이 커졌다.
그럴 법도 한 게 지금의 장호건은 비밀리에 아도자동차 인수를 준비하는 중이다.
차명자금을 움직여서 주식도 제법 사뒀겠지만 금융실명제 날벼락에 쉽사리 돈을 움직이기 어려우니 얼마나 짜증스러울까?
그건 그렇고 눈은 절대 못 속인다는 도박 영화 대사가 사실이라니··· 장용재나 좀 더 놀려볼까?
“신성 쪽 자금력이면 충분하잖아? 방어자 쪽이 세게 나오는 거야?”
“무, 무슨 소리야, 인마! 이 나라에서 우리 집안보다 돈 많은 곳이 얼마나 된다고! 태현이라면 모를까.”
슬쩍 찔러봤더니 발끈하는 꼴이라니. 전생이라는 투시안경을 쓰고 보니 장용재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인간인지 훤히 보였다.
“그랬구나. 금융실명제 때문에 형네 집안 돈 날려먹은 줄 알았지.”
더 캐묻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서 대충 그런갑다 하고 넘기자 장용재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무게를 잡았다.
“금융실명제 얘기 나와서 물어보는 건데 너네 집은 괜찮냐?”
“괜찮다니?”
“너희 집도 돈 많잖아. 꼬리표 없는 돈.”
에두르지도 않고 직구를 날리다니··· 아직 덜 여물었구나, 장용재.
속으로 장용재를 잔뜩 비웃어주면서도 얼굴로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형, 나 소주 한 병만 시켜주라.”
“소주? 니가?”
장용재는 눈까지 껌뻑이며 되물었다. 이 시절의 내 취향이 미식가 취향이라는 것도, 그 인공적인 알코올 맛과 향이 진동하는 소주를 싫어하는 것도 잘 알았으니 놀랐겠지.
“뭐 때문에 소주를 찾아, 니가?”
“그냥 시키면 안 돼?”
눈에 살기를 드러내고 쳐다보자 장용재가 순간 얼어붙었다.
“응? ···응! 여기, 소주 한 병 추가!”
장용재가 황급히 밖을 향해 외치자 직원 한 명이 쟁반에 소주 한 병을 들고 왔다. 나는 상에 놓인 소주를 낚아채서 뚜껑을 딴 뒤, 병나발을 불었다.
“어, 어···.”
장용재는 크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격식을 따지던 이 시절의 내가 병나발을 부는 모습에 놀란 것 같았다.
소주 반 병을 비우고서야 나는 병을 입에서 떼고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25도라서 속이 훗훗해졌다.
“야, 괜찮냐?”
“괜찮긴? 우리 집 소식 못 들었어?”
“무슨 소식?”
“우리 할아버지, 명동에 묻어둔 돈 다 날렸다고!”
“뭐?”
열심히 속으라고 소리치자 장용재의 얼굴에 미소가 알게 모르게 스쳐지나갔다.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연기라는 게 훤히 보였다. 아까와 달리 눈빛도 또렷하고 입꼬리가 아래로 처지지 않았으니 원하는 답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반쯤 푼 눈으로 그의 표정을 살펴보고는 나머지 반 병을 병나발로 비웠다.
쿵-.
“하아, 디게 쓰네.”
“그럼 술이 쓰지, 다냐? 형은 이제 회사 가야 해서 같이 마셔주지는 못하겠다. 다음에 마셔줄게, 흐흐.”
소주에 길들여지지 않은 이 몸으로 처음 소주를 마셔서 연기가 더 잘 나오나보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거친 숨을 내쉬는 나를 보며 장용재가 웃는 게 야바위가 먹힌 것 같았다.
볼 장 다 봤으니 여기서 땡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다음 스파링 파트너를 만나야 하니 말이다.
***
비싼 한우를 대접받으며 장용재를 잘 속여먹은 나는 장민재와 약속한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에 1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시간관념이 철저한 장민재이니 적당히 화를 돋워놔야 내가 가지고 놀기 편해서였다.
“어서 오십시오. 일행 분이 있으십니까?”
“장민재 씨 일행입니다. 이성민이라고 하면 알 겁니다.”
카운터에 있던 직원이 명부를 확인하고는 접대용 미소를 띠었다.
“아, 네.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을 따라 안쪽에 숨겨진 VIP실의 문을 열자, 마른 체형의 장민재가 나를 맞이했다.
“오랜만이에요, 형. 몸은 괜찮죠?”
장민재의 입은 웃되 눈은 웃지 않는 걸 보니 골이 단단히 난 듯했지만 내 알 바인가? 나는 철판을 깔고 손을 들며 인사했다.
“어, 그래. 잘 지냈고?”
“덕분에요. 시장하실 텐데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요, 하하.”
정중한 태도, 사람 좋은 미소를 연기하는 모습··· 이 녀석도 참 한결 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장민재는 늘 뭔가에 주눅 들어있는 녀석이었다.
천성이 그런지 늘 후계경쟁에서 수세적으로 나서다가 형과 누나에게 밀려 신성박물관 이사장과 신성스포츠 대표라는 허울 좋은 감투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매형, 누나가 손 대봐야 번번이 죽 쑤는 사업, 나하고 합시다. 난 무조건 매형 가이드대로 할 겁니다. 그렇게 키워서 나하고 반띵합시다! 그걸로, 나하고 신성그룹 먹어봅시다!]
날 위로해준답시고 이놈이 사주는 술을 마시며 주고받던 이야기를 떠올리면 이놈도 호랑이 새끼이고 욕심이 많았다.
결국, 도찐개찐인 놈이다. 내가 다 차린 밥상인데 반띵이라니! 딴에는 선심 쓴다 생각했겠지만 그룹 내 서열도, 위세도 밀렸고, 장용재처럼 장수연이 넘겨준, 내가 차린 밥상을 가로채던 놈이 아닌가?
그뿐이면 다행인가? 뒷맛이 안 좋다 싶으면 자기 대신 희생양을 삼아 팽하기 일쑤였으니 하등의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었다.
그런 감정을 숨긴 채 방에 들어간 나는 장민재와 함께 따끈하게 데워진 식전 빵과 잼, 토마토소스 베이스의 양송이 야채수프부터 해치웠다.
“이 집, 잘 하네? 토마토소스, 직접 만드나봐?”
“형 입맛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여기 오길 잘했네요.”
그래도.
좋게 말해 마이페이스, 나쁘게 말하면 지 좆대로인 장용재와 달리 장민재는 이번 일만큼은 자신과 내 위치가 다르다는 걸 정확히 인식하는 듯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전채요리를 다 먹은 우리는 이어서 나온 안심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팬프라잉 특유의 바삭한 겉 식감과 미디엄 웰던의 촉촉한 안 식감, 사막에 내리는 소나기처럼 입 안에 퍼지는 육즙의 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찾게 만들 정도였다.
“예술이다, 예술. 이게 고기지. 점심 때 먹은 거하곤 비교가 안 된다야.”
엄지를 추켜세우며 감탄한 나는 잔에 채워진 샤토 라피트 한 모금을 마시며 씩 웃었지만 장민재의 눈빛은 매섭게 빛났다.
“점심 때 뭐 먹었는데요?”
“아, 한우 먹었어. 용재 형이 사줬는데 덕분에 돈 굳었지, 하하.”
웃음을 흘리는 나와 달리 장민재는 모래를 입 안 가득 머금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형보다 한 발 늦었으니 얼마나 속이 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와인 한 모금을 마시며 장민재의 질문을 받았다.
“형하고 만나서 무슨 얘기 했어요?”
“회사 얘기했어. 형 지금 신성물산에서 자동차 사업 맡고 있잖아? 지나가듯이 물어봤는데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더라. 뭘 하긴 하는 것 같던데···.”
말끝을 흐린 나는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고 질겅거렸다.
이제 겨우 대학 3학년이니 회사 일도 모르고 얼마나 답답할까. 답답함을 참아내느라 용쓰는 걸 보니 귀엽기만 했다.
“요즘 많이 힘들 거예요. 청와대에서 한 건 터뜨렸잖아요.”
“그렇잖아도 우리 집도 죽을 맛이야. 우리 집도 피바람 불었거든.”
침울한 표정을 짓고 말한 뒤, 한숨을 내쉬자 장민재가 당황했다.
“피바람이라뇨?”
“아, 그게···.”
말끝을 흐리며 와인 잔만 만지작거리자 애가 달은 장민재가 눈치껏 웨이터를 불러 술을 더 시켰다.
“고맙다.”
“고맙기는요, 우리사이에. 근데 무슨 일 있어요? 말해 봐요, 형.”
나는 장민재 쪽으로는 시선도 안 주고 술을 따르는 웨이터에게 시선을 주었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더요.”
“더, 더요?”
와인은 보통 잔의 반 이상을 담지 않는다. 그 와인이 호가 천만 원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면 더 그렇다. 하지만 나는 장민재의 눈이 커지는 걸 보고도 웨이터를 재촉했다.
“그냥 끝까지 다 채워요. 다 채우면 와인 병 놓고 가요.”
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웨이터와 장민재를 재촉했고, 장민재는 웨이터를 향해 눈짓을 했다. 그 눈짓을 본 웨이터가 얼른 와인을 아슬아슬하게 가득 채우고는 병을 놓고 나갔다.
나는 커다란 와인글라스 끝까지 찰랑거리는 술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잔에 수백만 원 어치는 담겼을 거다.
귀한 술이긴 하지만, 어쩌리. 지금은 완벽한 연극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
꿀꺽, 꿀꺽, 꿀꺽!
“형?”
그 귀한 술을 맛도 안 보고 목구멍으로 넘기자 장민재가 질겁했다. 나는 끝까지 다 마신 와인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 실실 웃었다.
“형··· 괜찮아요?”
장민재의 시선을 느낀 나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거칠게 말했다.
“너라면 괜찮겠냐? 우리 집안 돈, 나한테도 떨어질 돈이 다 날아갔는데?”
눈가에서 힘을 빼고 살짝 혀 꼬부라진 소리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우리 집안도 금융실명제로 꿍쳐둔 돈을 다 날려먹었다는 시그널을 줘야 하지 않겠나? 구라빵이지만.
사실과는 반대지만 장민재는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 같은 놈.
“그러겠네요. 속 쓰릴 텐데 마저 들어요, 형.”
“잠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썰려던 장민재가 내가 든 손을 보고 동작을 멈췄다.
“나만 마실 순 없지. 위로주 사준 사람한테 한 잔은 채워줘야 예의겠지?”
“형?”
장민재의 동공이 흔들렸다. 잘 마셔야 와인 한 병 반인 자신에게 술을 주겠다니 얼마나 쫄리겠나?
“사주는 건 니가 사줘도 형이 따라주는 거야. 받고 쭉 들이켜.”
“네···.”
나는 와인 병을 들고 장민재에게 가서 그가 든 잔에 와인을 부었다. 3부를 넘고 반절을 지나서 9부까지 채우자 장민재의 눈이 커졌다.
“형?”
“남자라면 이 정도는 마셔야지. 앞으로 아저씨 후계자 되면 술 마실 일 많아질 텐데. 용재 형만큼은 아니더라도 뚠뚠하게 챙겨야 할 거 아냐?”
능글능글한 미소를 띠우며 말하자 장민재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형과 저울질 당해서일까, 장민재가 눈을 질끈 감고 와인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