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3rd. 행동 개시 (3)
순식간에 국그릇을 비운 우리는 서재로 올라가서 모닝티를 마셨다.
“고 실장, 알려줘.”
“예, 회장님. 명진아, 우리 그룹 자금 전부 회수한 거 알지?”
“알죠. 그거 때문에 지금껏 모아둔 땅, 전부 회사 이름으로 바꿨잖습니까? 하하.”
소탈하게 웃었지만 이번에 처리한 우리 집안 땅은 전생의 이명진에게 마지막 재산이었다. 비자금으로 사 둔 땅이라 떳떳하게 드러내지도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매도 먼저 맞는다고 회사 명의로 매입한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고승주가 빙긋 미소를 띠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앞으로는 은행 돈도 쓰겠다고 하셨어. 땅 처리한 건 시작이라고 생각해.”
껄껄 웃던 이명진이 웃음을 멈췄다. 크게 뜬 그의 눈은 할아버지를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
“현찰은 원 없이 쥐고 있으니 앞으로는 볕 드는 땅의 가업을 키울 거다. 나도 힘쓰겠지만 고 실장하고 너, 그리고 성민이도 도와야 할 게야.”
할아버지의 당부에도 이명진은 의문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성민이라뇨, 아버지?”
“중동에서 일만 하느라 못 들은 게냐? 에잉.”
“아이고, 아버지. 낮에는 공사현장 둘러보고 밤에는 바레인에 현지 고객들 데려가서 술 먹이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하하.”
바레인은 페르시아 만 일대에서 유일하게 음주와 돼지고기가 허용되는 국가다. 때문에 사우디와 카타르 상류층들은 은밀하게 음주와 돼지고기를 즐기러 관광을 하러 가기도 한다.
이를 이용해서 접대를 했다는 이명진의 넉살 좋은 웃음에 할아버지도 피식 웃었다.
“무슬림 놈들도 사람이구먼. 여하튼, 우리 집안 돈 지킨 게 다 니 장조카 머리에서 나온 거다.”
“예?”
“네 조카가 퇴원하자마자 서재에 와서는···.”
할아버지가 그날 있던 일을 알려주자 벙찐 표정을 짓던 이명진이 날 보며 껄껄 웃었다.
“와하하하! 이거 우리 조카한테 빚이 생겼네?”
“아니에요, 숙부님. 다 우리 집 잘되자고 한 일인데요.”
“겸손 떨 거 없어. 형님 살아계셨으면 몇 번이고 칭찬하셨을 거다.”
내 손을 잡아주는 이명진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앞으로 더 잘해드릴게요, 숙부님. 우린 가족이니까요.’
마음속으로 더 잘하겠다고 다짐하는 사이, 이명진은 내 손을 놓고 할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전 뭘 하면 되겠습니까?”
“건설 애들 시켜서 신성에서 강남터미널 공사 손 뗄 것 같으면 나설 준비해. 기존 설계도 구해서 공간도 더 빼 보고.”
할아버지는 이번 일로 신성그룹도 날려먹은 돈이 한두 푼이 아닐 테니 제정신이 아닐 거라 여기고 그 틈을 노리자는 것 같았다.
내가 노리는 틈과는 다른 틈이지만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지 않겠나? 잠자코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이명진에게 지시를 내린 뒤 날 보며 물었다.
“우리 장손은 앞으로 뭘 할 생각이냐?”
어제 있었던 일의 주역인데도 우쭐거리지 않고 그룹의 다음 수를 내다본 내가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생각한 것도 있기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금융을 배울 생각입니다, 할아버지.”
고개를 끄덕인 박태진과 달리 할아버지는 침음성을 흘렸다.
“금융이라··· 외국서 배우는 게 좋긴 하다만 가기 전에 그럴싸한 이력 하나는 만들었으면 좋겠구나. 이 할애비 장손이 허드렛일만 하고 돌아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할아버지의 미소 띤 얼굴에는 내가 또 다른 성과를 내길 바라는 기대가 스쳐 지나갔다. 물론, 내게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방법이 있었다.
“반년 안에 3배를 벌어보겠습니다. 믿고 지켜봐주세요, 할아버지.”
“도련님?”
“성민아?”
자신 있게 말하자 박태진과 고승주, 이명진이 깜짝 놀랐다. 헛소리가 용납되지 않는 이 방에서 기간까지 제시하며 큰소리를 쳤으니 놀랐겠지.
세 사람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와중에도 할아버지는 책상을 쿵쿵 치며 껄껄 웃었다.
“으허허허, 이러니 호건이 그놈이 널 탐냈겠지. 알았다. 기대하고 있으마.”
껄껄 웃는 할아버지를 보니 원수 같은 장인어른 장호건이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성의원(成義園)도 뒤집어졌을 텐데··· 장인어른은 괜찮으려나?
***
성의원 집무실에 들어온 주요 계열사 사장단들은 숨만 죽인 채 장호건이 앉은 책상 앞 양쪽에 서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백억이나 먹인 보답이 이거라니.”
평소와 달리 잔뜩 굳은 장호건의 얼굴에는 보이지는 않아도 ‘불’과 ‘쾌’가 한 글자씩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연 초에 참석했던 대통령 취임식 연설을 보고 자금 회수를 시작했지만 이토록 빠르게 터질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어제 당한 기습은 아직도 뼈아프기만 했다.
“뭣들 하고 있어? 입에 꿀 발랐나? 뭐라도 좋으니 말해 봐.”
자신의 채근에도 모두들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들지 못하자 장호건은 그런 그들을 보고 혀를 찼다. 대 신성그룹에서 방귀 좀 뀐다는 인간들이 겨우 이 정도라니!
쾅!
“지금껏 여의도, 청와대, 정부청사에 처바른 돈이면 알아내도 백 번은 알아냈어! 다들 그놈들하고 골프만 치고 다녔나? 어!”
장호건은 자신의 호통에도 고개만 조아리고 있는 사장단의 모습을 보며 애꿎은 책상만 내리쳤다.
아무리 은밀히 추진된 금융실명제라지만 국내 정보력만큼은 안기부보다 앞서는 신성그룹이다.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을 당하다니!
한숨을 내쉰 장호건은 가장 왼쪽 앞에 선 이수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와대와 정부는?”
“국무총리와 청와대 경제수석이 사표를 제출했다고 합니다.”
국무총리와 청와대 참모는 대통령에게 쏟아질 비난을 대신 받아낼 방탄조끼 같은 존재. 장호건이 이를 모를 리 없기에 비서실장인 이수한은 필요한 만큼만 말했다.
“···그랬군. 후우우···.”
고개를 끄덕인 장호건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들쑤셔도 두 사람이 모른다고 한 게 이제야 이해된 듯했다.
“국내 은행에 물린 게 얼마지?”
“총 8천억 원이고 절반은 오늘 아침에 바로 찾았습니다.”
차명계좌야 현직 임직원이나 전직 임원들이 세운 신성그룹 협력업체 임직원 명의가 대부분. 은행 지점장들을 을러대서 금방 찾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외의 돈이었다.
“나머지는?”
“그게··· 가명이나 익명계좌에 들어있어서 쉽게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답한 이수한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를 보던 장호건의 표정도 그다지 밝지는 않았다.
“얼마나 묻혀 있나?”
“4천억입니다.”
“···빌어먹을.”
그만한 돈에서 꼬리표를 떼려면 수조 원의 돈을 내부 건설공사나 해외법인 환치기 등으로 쉼 없이 세탁해야 한다. 수십 년에 걸쳐온 노력이 하룻밤 사이에 헛짓거리가 됐으니 아무도 장호건이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을 불평할 수 없었다.
“은행 놈들 배만 불려줬군.”
천하의 신성그룹조차 찾을 엄두를 못 내는 돈이니 은행 담당자들은 콧노래를 부를 것이다. 벌써부터 그놈들이 자신을 호구 취급할 거라 생각했는지 장호건은 이를 악 물었다.
허나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자신의 이름과 ‘신성그룹 회장 장호건’이라는 명패가 부끄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는 재빨리 차선책을 짜냈다.
“내년 사업 예산 짤 때 이번에 물린 돈만큼 대출받아서 편성해. 이자는 최대한 싸게 잡고 뻗대는 놈들 나오면 예금 회수한다고 해.”
“알겠습니다.”
이 이상 이번에 입은 데미지를 복구할 방법은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못 찾을 돈.
우격다짐으로 찾으려 들자니 개망신은 둘째 치고 한창 물이 오른 문민정부의 몽둥이질에 피곤죽이 될 판국이었다.
“다들 나가 봐.”
손을 휘휘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리자 사장단은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방에는 장호건과 그의 눈짓을 보고 남은 한 사람만 남아있었다.
“수한이.”
“예, 회장님.”
“다른 그룹들은 어떤가?”
“어젯밤에 다른 그룹 비서실장들과 만났는데 다들 죽을상이었습니다.”
“고 실장은?”
장호건은 해동그룹의 브레인인 고승주가 어땠는지 알고 싶었다. 덩치는 작아도 숨겨둔 돈은 자신들도 가늠할 수 없는 해동그룹은 화를 피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가장 늦게 왔는데 조용히 술만 비웠습니다. 무표정했던 걸 생각하면 명동에서 도는 소문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이수한이나 장호건은 가볍게 넘기지 않고 있었다. 다른 재벌도 마찬가지지만 신성그룹과 오랜 세월 돈거래를 해왔던 해동그룹이기에 더더욱.
“어떻게 움직였는지 파악하도록 해. 분명히 뭔가 있어.”
이미 피해를 입은 것은 어쩔 수 없다. 묻어둔 돈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 경쟁자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알아둬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 실장 반응이 수상해서 지시해뒀습니다. 다른 그룹 놈들 피해상황도 알아보라고 해뒀고요.”
“잘 했네.”
장호건은 이수한을 신뢰를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봤다.
부회장 시절부터 자신을 무시했던 그룹 내 뭇 임원들과 달리 이수한 만큼은 초임 이사 시절부터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고 한 발 먼저 실천해왔다.
그런 이수한보다 앞서는 이는 전임 비서실장이자 장하연의 후견인을 맡고 있는 정창호뿐이었다. 당연히 장호건은 그런 정창호와 이수한을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믿고 있었다.
“그런데··· 수집한 정보가 엇갈립니다.”
이수한이 개운찮은 기색을 드러내자 장호건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소린가?”
“당했다는 쪽과 누군가가 나서서 파도를 피해갔다는 쪽이 동시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해동에 그럴 인재가 있나? 고승주?”
“그건 아닐 겁니다. 고 실장이 이 회장님께 장남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 정도 사안까지 설득할 사람은 아닙니다.”
장호건 또한 이수한과 동감이었기에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짜냈다.
“그렇다면···.”
“비서실 내에서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새로 발탁된 사람이 냈을 수도 있고요.”
잠시 말이 없던 장호건이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 결과가 어떻든 뒤에서 꾸민 놈이 따로 있으면 누군지 알아내. 얼마가 들어도 좋아. 돈다발을 그놈 입에 쑤셔 박아서라도 비서실 책상 앞에 앉혀놔.”
인재에 대한 장호건의 욕심은 고인이 된 선친 장병호 신성그룹 초대 회장보다 더했다. 이대수나 고승주가 아니라면 얼마를 주고서라도 해동그룹을 고요하게 만든 자를 손에 넣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반드시 우리 그룹 사람으로 만들어놓겠습니다. 성과가 없으면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반드시 해내겠다는 이수한의 결연한 대답에 장호건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저녁 쯤 되어서야 장호건은 집에 돌아와서 식사를 했다. 늘 9시면 잠에 드는 습관을 고수하는 까닭에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식탁 상석에 앉은 그는 밥을 반쯤 먹고 젓가락을 내려놨다. 아랫자리에 앉은 장용재와 장민재, 장하연과 장수연도 그 모습을 보고는 얼른 수저를 내려놨다.
“어제 뉴스, 다들 봤지?”
“네, 아버지. 이번 대통령,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형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아버지. 하나회 날릴 때도 놀랐었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를 마치자마자 바로 기습할 줄은 몰랐어요.”
가장 옆에 앉아있던 샤프한 인상의 장남 장용재가 대답하자 옆에 있던 장민재, 그 맞은편에 앉아있던 장수연도 질 수 없다는 듯 각자의 소감을 얘기하며 아버지의 점수를 따려고 애썼다.
그 와중에도 가장 뛰어난 장하연만이 조용히 입을 닫고 있었지만 그녀의 행동은 매우 현명했다. 세 사람의 말을 들을수록 장호건의 얼굴이 굳었기 때문이었다.
“사설, 평론 같은 건 너희 외가가 부리는 기자들이나 하는 일이다. 신성그룹 후계자들이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장호건은 세 남매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기업가는, 오너는 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누누이 말했건만!
순식간에 시베리아 벌판보다 싸늘한 기운이 식당에 휘몰아쳤다. 자신이 지나치다 싶었는지 장호건은 헛기침을 하고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지금 재계 모두가 이 일로 폭탄을 맞았다. 그런데 딱 한 곳만 속을 알 수가 없어.”
삼남매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장호건을 바라봤다. 장하연도 다시 뜬 눈으로 장호건을 바라봤지만 신성그룹은 그 한 곳이 아닌 것 같았다.
“그 한 곳이 어디입니까, 아버지?”
“해동그룹 같다. 명동이나 은행권에서는 그 집안 돈이 증발했다고 하는데··· 왠지 마뜩치가 않더구나.”
장용재의 눈이 번뜩였다. 방금 전 실언으로 깎아먹은 점수를 만회할 기회가 생길 것 같았다.
그 기회는 장호건의 입을 통해 나왔다.
“너희들이 성민이를 만나봐야겠다. 상속에 영향은 없으니 강요는 안 하겠지만 원한다면 한 번 만나서 알아봐.”
장하연은 이런 일로 이성민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침묵했고, 장수연은 당분간 이성민에게 섣불리 접근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 대신.
장용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고, 옆에 앉아있던 대학 3학년의 장민재 또한 식탁 밑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