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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9화 (9/229)

9화. 3rd. 행동 개시 (2)

6개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3월에는 청와대와 집권여당 관계자들의 재산이 공개됐고, 6월에는 공직자윤리법이 전면적으로 개편되면서 정부 고위관료들의 재산까지 국민들에게 공개됐다.

그리고 오늘, 고위공직자 재산공개가 끝난 다음 날인 8월 13일 저녁에는 가장 큰 사건이 터졌다.

[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헌법 제76조 1항의 규정에 의거하여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표합니다. 아울러 헌법 제70··· 아! 제47조 3항의 규정에 따라 대통령의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대통령의 기습담화를 보고도 이대수 회장의 얼굴이 하회탈처럼 변했다.

“으하하! 역시 우리 장손이구먼!”

이대수 회장은 간만에 기분 좋게 웃으며 만족스러운 듯이 책상을 연신 내려쳤다. 조 단위의 돈을 한 푼도 빠짐없이 안전하게 빼돌리지 않았나? 장손 덕분에!

장손의 외가이자 친딸처럼 아끼던 맏며느리의 친정인 금강그룹의 튼튼한 TV를 끄고서야 이대수는 수화기를 들었다. 이 기분을 함께 만끽할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나다, 승주야. 우리 장손 말이 딱 들어맞더구나, 으하하.”

[저도 방금 기자회견 보고 놀랐습니다. 어제가 마지막 날이었는데 이렇게 맞아떨어지다니···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축하는 무슨. 내 새끼인데 그럴 머리는 돼야 우리 집안과 해동을 키울 게 아니냐, 으허허.”

껄껄 웃던 이대수는 웃음을 줄이며 입모양을 바꿨다.

“오늘 밤, 꽤 시끌벅적하겠지?”

[예. 다른 그룹 비서실장들과 각자 소속된 그룹 회의가 끝나고 모이기로 했는데 그놈들 얼굴만 봐도 안주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

“으하하하! 그만한 술안주도 없을 게야. 지금 바로 핵심 계열사 사장단 전부 삼청동에서 보자고 해. 명진이, 성민이는 내일 아침에 보자고 하고.”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이대수는 인터폰으로 집사장에게 사람 맞을 준비를 하라고 한 뒤, 책상 앞에서 탁자에 다과가 놓이는 걸 보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회장님, 모두들 도착했습니다.]

“들어와.”

이대수가 문을 향해 소리치자 배재훈과 강인주를 비롯한 여덟 명의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다들 앉아.”

소파에 앉은 이들 모두 흥분을 억누르려 애쓰고 있었다.

“꿍쳐둔 쌈짓돈은 잘들 챙겼나?”

이대수가 툭 던진 질문에 남자들의 입꼬리가 씰룩거리거나 반달눈을 만들고 있었다. 이대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낄낄 웃었다.

“흐흐, 다들 건진 것 같구먼.”

“감사합니다, 회장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일곱 사장들과 고승주가 시원하게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지만 이대수는 별 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이번 일로 죄다 팔다리 한두 짝씩 날아갔을 게야. 안 그러나들? 으하하하!”

이대수의 호탕하게 웃는 걸 보고 나머지 남자들도 껄껄 웃었다. 남들이 자빠지는 와중에도 모든 그룹 비자금에 사채자금까지 지켰으니 몇 발은 더 앞서나간 게 아닌가?

회의실 내에서 웃음이 잦아들자 이대수가 입을 열었다.

“고 실장, 우리 자금은 어찌됐나?”

“대부분은 트라이엄프를 통해 해외로 빼냈고 나머지는 현찰로 찾아두거나 신규 차명으로 옮겼습니다. 땅도 전부 회사 앞으로 정리했고요. 회장님 흔적도 명동에서 깨끗이 지웠으니 다들 방심할 겁니다.”

“알았다.”

고승주가 입을 닫았고, 이대수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앞으로 우리 해동은 명동에서 물러난다.”

사장들 전부 눈만 껌뻑거리며 이대수를 바라봤다.

해동그룹의 반세기 넘는 숨겨진 사업이자 화수분인 사채자금. 선대 회장과 그 뒤를 이은 외아들 이대수의 개인재산이고 그룹 비자금과 별개로 운용된다지만 그 사채자금이야말로 그룹의 자금흐름을 매끄럽게 해주는 윤활유가 아닌가?

조용히 있는 고승주와 달리 일곱 사장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이대수가 책상을 내리쳤다.

“아아, 진정들 해. 아예 물러나겠다는 게 아니야. 우린 뒤로 물러서서 큰 흐름만 잡을 거다. 몸통은 숨겨야지? 흐흐.”

이대수가 낮게 웃자 사장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거나 미소를 띠었다. 이대수 말대로 뒤로 물러서는 대신 리스크를 줄이는 게 장기적으로 큰 이익이 될 거란 판단 때문이었다.

목소리가 잦아들자 이대수는 이어지는 선언으로 그들을 또다시 충격에 빠뜨렸다.

“앞으로는 그룹을 키울 것이야. 사업가치가 충분하면 사채 쪽 돈도, 은행 놈들 돈도 양껏 쓸 테니 그리 알아둬.”

사장들은 이대수가 노망이 났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껏 그룹 내 여윳돈으로만 사업을 해서 ‘삼청동 짠돌이 영감’이라 불리는 인간이 사채자금에 은행 빚까지 쓰겠다니?

사장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하던 이대수가 말했다.

“당장은 아니니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게들. 가 봐.”

이대수의 축객령에 사장들이 서재를 빠져나갔다. 모두가 남은 방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너도 많이 놀랐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고승주는 이대수의 굳은 얼굴을 보고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아니다. 내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많이 고민했다.”

“고민이라시면···?”

“이대로 돈만 움켜쥔 졸부로 추락할지, 해동을 일으켜 세울지 말이다.”

담담히 말하는 이대수의 표정은 전에 없이 무거웠다.

“군바리들 핍박에 웅크리고 지낸 지 수십 년째다. 이 나라 제일의 기업이었던 해동이 이 지경이 된 건 모두 내 잘못이야.”

“아닙니다, 회장님. 어찌 그게 회장님 잘못입니까?”

당황한 고승주가 손까지 내저었지만 이대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내가 더 욕심을 부렸어야 했는데 그 천것들한테 고개 숙이기 싫어서 고집 부리고 돈놀이에 빠진 게 잘못이었어. 그까짓 돈, 쌓아봐야 휴지조각인 것을···.”

“회장님···.”

이대수의 통렬한 자책에 고승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다. 정치군인들에게 고개를 숙이기도 싫었고, 그들과의 밀착이 사채시장에 영향을 줄까 봐 그들이 원하는 만큼 뒷돈을 던져주고, 시키는 만큼만 그룹을 키워온 이대수가 아닌가.

이대수는 고승주의 침통한 표정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 썩을 군바리들, 청와대 주인장이 밀어냈으니 인자는 달라지련다. 언제 갈지는 몰라도 살림을 키울 것이야. 그래야 너나 명진이, 성민이한테 골고루 떼어주겠지, 허허.”

“아, 아닙니다, 회장님!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것도 헤아릴 수가 없는데 어찌···.”

고승주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지만 이대수는 그를 보며 껄껄 웃었다.

***

박태진과 함께 삼청동으로 들어가니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숙부님!”

중동에 있어야 할 이명진이다. 어제 일도 확인할 겸 한국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할아버지고 고승주고 눈에 안 들어왔다.

“오냐, 우리 장조카. 이 숙부 안 죽고 돌아왔다, 하하.”

이명진은 중동의 따가운 햇살에 건강하게 탄 구릿빗 피부를 자랑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솔직히 오늘은 금융실명제에 대한 공치사를 듣기 위해 들렀는데 이명진을 만날 줄은 몰랐다. 인생 1회차 때 마지막까지 그룹을 살리겠다고 쉴 새 없이 뛰어다녔던 모습이 떠올라 울컥할 뻔했다.

“얘가 왜 이런데? 이 숙부 얼굴 봐서 그렇게 좋아? 하하.”

이명진은 털털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지만 그저 그를 부둥켜안기만 했다.

이명진이 그룹을 지키려 동분서주한 것과 반대로 나는 해동그룹의 주식을 팔았다.

그렇게 주식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신성전자 주식을 끌어 모았다. 신성그룹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도 절대 밀리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내가 원수처럼 보였을 텐데도 이명진은 내가 장수연과 결혼할 때 기죽지 말라며 그룹과 집안에 얼마 남지 않은 깨끗한 돈까지 뚝 떼서 지참금으로 줬었다.

그만큼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나를 돌봐줬던 그를 이렇게 다시 보니 내가 지었던 죄에 짓눌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없이 그를 끌어안던 나는 감정을 추스르고 밝은 표정으로 이명진을 바라봤다.

“숙부님, 혹시 빈손으로 오신 건 아니시죠? 숙부님이 아끼는 장조카, 병원에서 퇴원했는데.”

당돌한 내 말에 이명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 이 녀석 봐라? 병원에서 쉬면서 많이 뻔뻔해졌네?”

인생 2라운드를 시작하자마자 처음으로 터트린 ‘금융실명제’ 예고가 시원하게 터졌으니 전생에 진 빚은 갚고도 남았을 것이다.

“자자. 그렇게 서 있지들 말고 앉아서 식사부터 들자꾸나.”

“네, 회장님.”

나와 박태진, 할아버지와 고승주, 그리고 이명진 이렇게 다섯 사람은 사이좋게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좋은 일로 모이니 대화가 저절로 훈훈했다.

“그렇게까지 하셨습니까?”

“그래. 그래서 조 대표님하고 나하고 애들 시켜서 명동 사채시장을 다 휘젓고 다녔어. 덕분에 애들한테 새 구두 사라고 상여금까지 뿌렸다, 하하.”

이명진은 고승주에게서 금융실명제를 피하겠다고 그룹 비서실과 해동종금 기획실 담당자들이 구두가 망가지도록 명동을 돌아다니며 새 차명계좌를 확보한 이야기, 기존 계좌에서 현금을 빼내다가 새 계좌에 집어넣거나 현금다발 아니면 백화점 상품권을 상자째로 보관한 이야기 등을 듣고 혀를 내둘렀다.

“영화가 따로 없었네요. 중동에 있을 때 형님 얘기 듣고 땅 처분한 거 외에도 건설 대표님이나 다른 대표님들한테도 듣기는 했는데···.”

“그 분들도 바쁘셨지. 땅 팔아서 들어온 돈, 전부 새 계좌에 갈아 태우고 소매 쪽에서 재고 물량 확보하셨으니까.”

고승주와 함께 껄껄 웃던 이명진이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안살림이 든든해졌으니 중동 쪽 공사 수주에 집중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오냐. 적자만 안 나면 되니 우리 입지 다질 때까진 수주잔고 늘리는 데 힘쓰도록 해.”

“예, 아버지. 조만간에 더 큰 공사도 따오겠습니다, 하하.”

조용히 밥을 먹으며 숙부와 할아버지의 대화를 듣던 나는 잠시 대화가 끊긴 틈을 타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지금 당장은 못 하더라도 강남터미널 개발계획에 이명진 숙부의 도움이 꼭 필요했으니 상황이 어떤지 꼭 물어봐야 했다.

“숙부님, 국내 건축은 어떠세요?”

“글쎄다···. 일감도 부족하지만 신성물산이나 태현건설 같은 상위업체들 때문에 돈이 안 돼. 저가 입찰이 심하거든.”

이명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지만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연말이면 해동그룹의 사업을 키우면서 신성그룹에 엿다발을 먹일 기회가 열린다. 어제 일도 있으니 내가 할 말의 약발이 잘 먹힐 터.

나는 해외와 달리 국내 건설사업 확대에 목이 마를 할아버지와 이명진에게 슬쩍 떡밥을 흘렸다.

“숙부님, 강남터미널 공사는 어떠세요?”

“강남터미널? 신성그룹이 맡았는데?”

“삽 뜨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잖아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묻는 나와 달리 이명진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장 씨 가문이 손을 뗀다고 해도 공사대금이 문제야. 절대 일,이천 억으로 끝날 공사가 아니다, 성민아.”

그가 왜 난색을 드러내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강남터미널의 최종 공사비용은 약 4천억 원.

중간 중간 바뀐 설계에 엿가락처럼 늘어난 공기와 이자비용, 인플레이션 등을 감안해도 해동건설의 자체 현금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다시 말해 지금껏 남의 돈으로 사업하지 않았던 우리 그룹의 문화, 그리고 범 신성그룹이 건설부터 입주까지 싹 쓸어간 현재를 고려하면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그럼에도 이 사업만큼은 꼭 해동그룹이 가져가야 해서 설득을 계속했다.

“우리가 터미널을 지어주고 백화점도 넣으면 어떨까요? 건축주 쪽 공사대금 대출도 우리가 보증해주고요. 필요하면 은행 돈도 끌어 쓰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할아버지?”

이명진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이제까지 해동이 해왔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 아닌가?

“우린 지금까지 빚 한 번 안 쓰고 사업을 꾸려왔어, 성민아.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목소리를 높여도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는 걸 보니 이명진도 사업가라는 걸 속이지 못했다.

강남터미널 공사만 떡하니 해내면 복합터미널 시공경험까지 쌓지 않겠나. 50년 넘게 내려온 보수적인 경영방식이 바뀐다면 말이다.

“얼른 밥부터 비우자. 위로 올라가서 얘기하자꾸나.”

할아버지가 국그릇에 밥을 말아서 훌훌 뜨기 시작했고 우리도 재빨리 국그릇에 밥을 붓고 부지런히 숟가락질을 했다. 목소리도, 말씀도 여지를 남긴 게 서재에서 한 번 더 밀어붙이면 최소한 검토해보라는 지시는 받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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